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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퓨리어스 (FURIOUS)
작가 : HANNAH
작품등록일 : 2017.7.31

아무런 연고도 없이 모이게 된 우리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서바이벌 게임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 중 한 명은 이 게임에 대해 뭔갈 알고 있는 듯 하다.

서바이벌 로맨스.

 
퓨리어스(FURIOUS) 4
작성일 : 17-07-31 23:39     조회 : 298     추천 : 0     분량 : 1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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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에리얼의 시점〕

 

  에반이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원래는 아무것도 모르고 들뜬 이들을 꾀어 원하는 대로 다룰 생각이었다. 체스를 두는 것처럼. 폰은 그저 나를 지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애초부터 그런 쓸데없는 의심이 생길 만한 발언을 부주의하게 흘린 내 잘못이지만 에반을 주의 깊게 경계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보르나 마샤였더라면 그럴듯하게 지어낸 이야기로 얼버무릴 수 있었겠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접근하는 거지?

  가벼운 눈웃음과 지나치게 친절한 태도. 나는 아마도 평생이 가도 그를 믿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아직 눈에 두드러지는 손해는 없으니 일단은 그를 내 곁에 두겠지만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놔야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나는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비정한 것이 아니다. 여기는 그런 곳이다.

  나는 그와 헤어진 후 서재로 들어가 훑어보았던 책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낡고 오래된 책장에서 몇 권을 골라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아무도 없고 한적한 사무적인 분위가 내 마음에 꼭 들었다.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책 서너 권을 뽑아 들고는 자리에 앉아 맨 위에 있던 ‘약초의 역학’이란 책의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겼지만 보랏빛 제비꽃 같은 사진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딴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솔직히 내가 왜 이 책을 폈는지 모르겠다.

 ‘식사 후에 잠시 일원들을 데리고 밖을 나가봐야겠다. 기지 표면적 부분이 어떻게 생겼고 근방에는 무엇이 있는지 조사해야겠어.’

  왼손에 턱을 괴며 생각했다.

 ‘밖이라.......’

  나는 더 이상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그 때, 살짝 열려 있는 책상 서랍에 눈길이 갔는데, 나는 동상이라도 걸린 듯 핏기 없는 손으로 손잡이를 앞으로 당겼다. 나는 그 안에 검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무엇을 보았다.

 ‘꽤....... 좋은 게 있는 걸?’

 

  마샤가 차려준 식탁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올리버와 마샤 둘이서 지하 3층에 있는 식량 창고를 번거로이 왔다, 갔다하며 8인분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을 소화해 내었다. 알고 보니 올리버는 겉모습과 다르게 가사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보잘 것 없는 재료 몇 가지만으로 맛있는 음식을 고대하기는 사실 어려웠지만 스프와 빵. 간단한 요기 거리로는 충분했다.

 “올리비아는 정말 굉장해!”

  마샤가 동경 어린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올리버는 쑥스러웠는지 밀크 초콜릿 같은 그의 얼굴이 약간 붉혀졌다.

 “그리고 내 이름은 올리버야. 그건 여자애들 이름이라고.”

 “올리버나 올리비아나! 올리브도 괜찮은데?”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긴장이 풀렸는지 약간 느슨해 져 있었다. 솔직히 나는 식사 내내 에반이 쳐다보는 탓에 불편해서 빵조각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마멀레이드 잼에서 딸기잼 맛이 나는 것 같았고 하마터면 버터를 스프 속에 빠뜨릴 뻔했다. 그는 나의 이 가식적인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역겨워할까, 아니면 비난하고 있을까? 상관없다. 이것이 나의 길이기에. 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걸.

  환이와 도진이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서로 처음 만난 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소풍이라도 온 듯이 화목해보였다. 단순히 위기의식이 없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아직 어려서인지 그 관계가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위니가 그 식사 실로 오지 않자 보르가 그의 몫을 따로 챙겨 방 문 앞에 두러갔다. 나는 내버려 두라고 그를 말렸지만 보르는 친절하게도 아마 내게 짜증을 냈던 것도 배고파서 일지도 모른다며 기어코 밀크로프 몇 조각과 스프 한 그릇을 챙겨 들고 잠깐 나갔다. 보르, 넌 실수 한 거야. 그가 다녀오기도 전에 이미 탁자 위의 모든 바구니와 그릇은 깨끗하게 비워졌다.

  다들 배도 채웠겠다. 비로소 온전한 정신이 든 도진이가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부디 쓸데없는 소리 하지 않도록 간절히 빌면서.

 “게임은 내일부터인 거 맞지?”

 “그렇겠지, 그런데 왜?”

  올리버가 대답하였다.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지 않을래? 언제까지고 여기에만 있을 수는 없잖아. 벌써 12시가 지나도록 지하에만 쳐 박혀 있으니, 먼지에 폐가 썩어버릴 것 같아. 환이도 가자.”

  끝에 그가 환이에게 그의 나라 언어로 번역해 말해주었다. 그러자 환이의 얼굴에서 함박꽃 같은 미소가 번졌다.

 “와! 재밌겠다! 그런데 에리얼이 나가도록 허락해 줄까? 에리얼이 그러니까 우리를 지켜주는 보호자 같은 거라고 했잖아. 그러면 에리얼의 말을 들어야 하잖아.”

  환이가 어린아이 같이 곧게 편 오른손을 이마에 갖다 대어 경례하듯 나에게 살갑게 물어보았다. 나는 묵묵히 물 한잔을 들이켰다.“안되려나?”

  환이가 금세 풀이 죽은 얼굴로 힘없이 식탁 위에 널브러졌다. 나는 조용히 재킷 주머니에서 어떤 것들을 꺼내어 식탁 위로 올려놓았다. 엄지손가락 보다 조금 큰 까만 직 육각형에 집게 같은 것이 붙어 있던 것이었는데 하마터면 마샤는 그것이 벌레인줄 알고 손으로 내리칠 뻔했다. 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전에 말해 둘 것이 있어. 일단 공동체 생활이니까 각자 담당해야 할 것을 정해야 되는데, 식사 당번은 올리버와 마샤가 해 주었으며 좋겠어. 물론 모두가 도와줄 거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요리에 전혀 재능이 없거든.”

 “뭐라고? 이 지긋지긋한 것을 내가 맡아서 하라고?”

  올리버가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반대 하는 사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에리얼. 나는 내가 한 음식은 죽어도 먹기 싫단 말이야.”

 “괜찮아, 올리비아. 나는 괜찮으니까 상관없어.”

 “아, 그러니까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나는 괜찮으니까 그렇게 미안해 할 필요 없어. 나는 맛있게 먹어줄게. 괜찮다니까, 올리버. 그리고 만약 식량이 떨어 질 것을 대비해 밖에서 재료 따위를 구해 올 사람이 필요한데, 그건 도진이가 수고 해 줄 테고. 위니에게는 먼저 일을 맡겼으니까 너머 가자. 아, 그리고 마샤에게 부탁할 것이 또 있는데 우리 모두가 밖으로 나가게 될 사정이 생길 경우에 환이와 기지에 남아서 이 곳을 지켜 주었으면 해. 부탁해도 될까? 그리고 나머지는 상황을 봐서 부탁할게.”

  나는 최대한 얌전해 보이도록 노력했지만 잘 먹혀들었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밝게 웃는 마샤의 얼굴을 보니 내 말투가 그리 기분 상하게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마샤의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부디 입 꼬리가 움직여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지 뭐, 식사는 다 올리비아 시키면 되는 거고. 오히려 귀찮게 나가지 않아도 돼서 좋은 걸? 나야 상관없어.”

 “탁월한 선택이야, 마샤.”

  내가 간신히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재밌는 것을 발견 했어. 이동 통신기야. 서재 책상 서랍에 있었어. 가려거든 이것을 하나씩 가지고 가. 사정거리는 확인 된 것이 없으니까, 서로 사방 100미터 이상 넘지 말고 앞으로 가지고 다니도록 해. 그리고 이어폰은 한쪽 밖에 없는 것 같아.”

  환이가 눈을 번뜩이더니 역시 제일 먼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가 이동 통신기를 들고 불빛에 반짝여 보니 검정색인 것 같기도 하고 짙은 녹색인 것 같기도 했다.

 “인원수에 맞게 있으니까 소란스럽게 굴지 마. 난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니까.”

  환이는 얼른 그의 옷깃에다 단단히 고정시키고 오른쪽 옆면에 부착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마이크처럼 보이는 곳에 입을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들리나? 하나, 둘. 하나. 둘.”

  남자치고 높은 그의 목소리가 여덟 개의 이어폰에서 시끄럽게 울려대었다.

 “보르야, 이것을 위니에게도 전해줘.”

  나는 식탁 위에 혼자 외롭게 나뒹굴고 있는 초소형 이동 통신기를 하나 집어 들어 마침 돌아오는 그에게 살포시 건네주었다.

 “이봐, 에리얼. 나는 식판까지 나르다 왔다고.”

 “만약 내가 간다면 당장이라도 접시를 던져 버릴걸? 부탁할게.”

  부디 이들이 나의 가식을 눈치 못하기를 바라면서. 어느 순간부터 일상이 되어버린 이 여러 페르소나를 감당하기 버거워졌다. 다행히도 보르는 주인에게 충실한 사냥개 같이 위니의 방으로 뛰어갔다. 마샤는 그를 보며 단순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지었다.

 “환이야. 바깥에 잠깐 나갔다 오는 것도 괜찮은 생각인 것 같으니 가보아도 좋아.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야, 너희들도 다녀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도진아, 네가 다녀와서 설거지 하는 거 잊지 말아줘. 아니면 저녁은 없다.”

 “넌 내가 제일 만만하지?”“들켰다.”

  내가 빙긋이 웃으며 그들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그러나 이미 도진이는 환이에게 붙잡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식사 실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에리얼은 나가지 않아?”

  에반이 나에게 물어보았다. 왜 그는 사사건건 내게 간섭하지 못해 안달인지 성가셨다. 게다가 나는 그에게 완벽히 의사를 전달했다. 내게 간섭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렇게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그저 대답 없이 서재에서 가져왔던, 식탁 위에 펴 놓은 책을 읽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하고자 하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밝은 눈동자가 너무 깨끗해서. 만약 피그말리온에게 살아있는 조각상이 또 하나 있다고 한다면 분명이 그일 것이다.

  에반이 갑작스럽게 그 누구에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핏기 없는 나의 팔목을 부드럽게 잡더니 의자에게 일으켜 세웠다. 그가 맞잡은 팔목에서는 오랫동안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체온이 전해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거칠게 팔목을 흔들었다.

 “이게 무슨.......”

 “이런 환기도 되지 않는 곳에 오래 있으면 더 짜증나고 불쾌해질 거야. 어쩌면 네가 읽고 있는 약초가 저 위에 실제로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잖아. 그냥 책으로만 보는 것 보다 직접 보는 것이 더 기억에 오래 남을 거라고.” 에반이 나를 향해 상냥히 웃어보였다.

 “그 책. 만약의 상황을 위해서 보고 있는 거잖아, 여왕님. 혹시 모를 일원들의 부상을 대비하여 약이 없을 때에 대처하려고 읽고 있는 거 아니겠어.”

 “제발 그 여왕 소리 좀 하지 않으면 안 될까?”

 “미안, 재밌거든.”

  그의 사근사근한 억양에 아니, 그의 속 깊은 말에 얼음처럼 굳어 있던 내가 살짝 흔들렸다. 그의 올리브 색깔의 홍채가 전보다 가깝게 보였다. 에반에게서 나와 같은 딱딱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일까? 그는 신기하게도 내가 밀어내면 밀어 낼수록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와 주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애매묘한 부분이 있었다.

  밖으로 향하는 현관문은 정확히 말하자면 천장에 붙어 있었다. 식사 실 바로 나오면 왼쪽 벽에 사다리 같은 것이 신발장 사이에 놓여 있었는데 신발의 수로 보아 이미 환이와 도진이, 마샤, 올리버 그리고 보르는 나가고 없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인가?

 “여기, 신발장에 운동화가 있어.”

  에반이 그의 허리까지 오는 서랍장의 문을 열어 회색 운동화 두 켤레를 꺼내 놓았다. 그제 서야 나는 아직도 맨발이란 것을 깨달았다. 에반이 먼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손잡이가 있는 뚜껑을 위로 힘껏 올렸다. 그리곤 나를 내려 보며 손을 내밀어 주었다.

 “가실까요, 여왕님?”

 “시끄러워.”

  나는 그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고는 혼자의 힘으로 천천히 한 발짝씩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아무렴 사다리 하나 못 탈까봐. 그는 내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길래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일까. 나는 이유 없는 호의는 받지 않는다. 다시 되갚아줄 능력이 되지 않으니. 에반은 그저 아무런 말없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난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내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혹시 무서운 거야?”

 “아니. 무서울 이유가 없잖아?”

  물론,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없으니.

 “그럼 올라와. 성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유능한 여왕님이 될 수 없으니까.”

 “싫다니까!”

  에반이 나의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나를 바깥으로 꺼내었다. 사다리에 발도 제대로 못 디뎠는데 어떻게 나를 끌려 올릴 수 있는지 놀라웠다. 순식간이었던 터라 나는 저항 한 번 못하고 졸지에 밖으로 끌려 나왔다.

  앞을 향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 두 팔로 나의 얼굴을 가렸다. 햇살이 너무 부시어 눈이 시큰거렸다. 에반은 괜찮다고 했지만 역시나 강렬하게 내리 쬐는 이 빛은, 내게는 너무 과분한 빛이었다. 환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서 마샤와 올리버의 목소리도 언뜻 들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은 다 나아가지만 나는 어쩐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야만 옳은 것 같았다. 아직은 가슴 깊숙한 곳의 청산하지 못한 빚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기에. 발아래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흙의 감촉도 기분 나빴고 탁 트인 공기도 나는 싫었다. 아니, 낯설게만 느꼈다. 새로운 공기 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에리얼. 그러고 있지만 말로 애들 있는 곳으로 가보자.”

 “난- 정말- 싫어-.”

  내가 으르렁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그 두 팔을 치우고 앞을 좀 봐. 내가 생각 했던 것 보다 상황이 좋아. 이런 곳이라면 식량이 떨어져도 쉽게 구할 수 있고 지형적으로도 안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여왕님께서 직접 봐야만 할 것 같아.”

  에반이 어르는 듯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나의 두 팔을 천천히 치웠다. 질끈 두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살짝 눈을 떴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신 갈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흩날렸고 한 번도 가 본적은 없지만, 만약 바다라는 것이 정말 있다 해도 그의 눈처럼 푸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를 향해 자상하게 웃고 있다.

  이 세상 위에 다시 올라서면서, 눈을 떴을 때에 가장 가까이 곁에 있어준 사람.

 “저기 애들은 물 만난 물고기 마냥 놀고 있어.”

  간신히 눈을 떠 앞을 바라본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편의 고이 접어둔 죄악은 무심하세도 나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버렸는데. 티끌 하나 섞이지 않은 투명하고 가슴 시리게 파란 하늘, 손에 잡힐 것 같이 커다랗고 하얀 구름. 그 아래에서 태양은 실크 커튼을 내걸은 듯 나의 뺨을 따뜻하게 비춰주었다. 그 상냥함이 너무 고마워서 한번 내리 앉은 따스함을 좀처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서늘한 바람이. 나뭇잎을 살랑거리는 바람이 코끝에서 나무향기와 함께 퍼졌고 그 푸른 향기는 뺨을 따라 머리카락 끝으로 사라졌다. 나의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거칠고 까슬까슬한 내 손등과는 달리 누군가의 기분 좋은 손길처럼.

  주위에는 열대성 나무로 빽빽하였다. 선명한 푸른색에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저마다 얽혀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자그락거리는 마른 잎사귀는 귀엽게도 나의 귀를 간질였고 어쩌다 들리는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도 마르고 푸석푸석한 인위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그랬다. 내 눈동자에 비친 세상은 아름다웠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 보다 더 많이 아름다웠다. 눈물이라도 날 것처럼.

 “오랜만이야. 햇볕을 쬐는 건.”

  나는 좀 더 햇볕을 원하는 본능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곧 떨어질 것처럼 그렁그렁 맺혔지만 뺨을 타고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아직은 안 돼. 나는 그런 역할이니까.

  시멘트처럼 창백하고 화색 없는 나의 얼굴에도 햇빛이 어려 왔다. 내 뺨도 붉게 물들었다.

 “엘레나.......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하늘이야. 네가 보았다던 그 하늘도 이렇게 아름답고 맑았을까?”

  나는 넋을 놓은 듯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영원 같은 지난 세월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작고 캄캄하고 추운 감옥 같은 곳에 나 혼자. 내가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잊을 수 없었다. 그 어린 날의 기억을. 난 그저 늘 그래왔듯이 저녁거리를 거닐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에 있었다. 얼마나 수도 없이, 간절하게 울부짖고 누군가를 불러 보아도 대꾸해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며칠인지, 또 얼마나 세월이 지나 내가 지금 몇 살인지. 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하나 비취지 않는 곳에서 살았다. 그저 매끼마다 ‘죽지 않을 정도’ 기초적인 식량만 제공받았고 그게 전부였다. 내 잃어버린 시간. 내가 무엇을 잘못했었기에? 어째서. 매 시간마다 목을 조르는 듯 한 공허함과 무기력감이란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어도 어째서 그 누구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일까. 내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이렇게 여기에 슬퍼하고 있는데, 왜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걸까? 지금도 은은하게 쬐어 오는 햇볕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얼마 만에 다시 보는 푸른 세상도 숨이 막힐 정도로 그리웠고 반가웠다. 나는 그렇게 넋이 나간 듯 하늘을 쳐다보았다.

 “정말 가만 둘 수 없게 만든다니까!”

  그제 서야 에반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다시 회색빛깔 시멘트 같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내 얼굴은 햇볕으로 녹아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런 정글이라면 야생 동물이 라던가 식용 식물이 많이 자랄 거야. 흙도 약간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근처에 시냇가 혹은 대나무 같이 습기를 함유한 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가능성을 무시 할 수 없어.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최근 이 근방에 비가 내려 어딘가 물이 고여 있을 거야. 식량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야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니가 방향감각이 뛰어났으면 좋으련만. 이런 지리적 파악을 하지도 않은 채 그를 자극시킨 것은 무모한 일이었어. 이제 와서 말을 바꾼다면 그는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을 하겠지. 골치 아프게 되었네.”

  근처 지리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파악한 나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리를 뻗었다.

 “어? 벌써 내려갈 거야?”

  그가 나에게 물었다.

 “서재에서 이런 지형에 관련된 도서를 얼핏 본 것 같아. 말했듯 난 게임 초반부터 불리하게 일곱 명으로 출발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여러 가지 준비라도 해 놓아야지.”

  나는 가볍게 고개 짓을 하고 한 번에 뛰어 내려갔다. 폐 가득히 들어오는 산소는 충분이 들이마셨다. 너무 익숙해지면 안 돼. 다시 절벽 밑으로 떨어질 때에 견디기 힘들 테니까. 무거운 발걸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해. 난 서재에 있을 거야.”

 

  나는 서재로 내려갔다. 종이 냄새가 은은히 퍼지는 그곳이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약초의 역학’이란 책을 책상 위에 펴놓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 서재는 폼으로 둔 것이 아니야. 고맙게도 난 무엇을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하거든. 시간 보내기 정말 좋겠어.”

  나는 중얼거리면서 다시 책상에 앉았다. 내가 들고 있는 것과 ‘약초의 역학’이란 책 말고도 여러 종류의 책들이 다양한 페이지를 펼쳐 놓았다. 나는 앞으로 여기서 지내면서 유용할 만한 부분에 빨간 볼펜으로 줄이 긋거나 형광펜으로 표시하기도, 종이 한 귀퉁이를 접어 두기도 하였다. 나는 아주 흥미로운 체스를 두고 있는 사람처럼 턱에 손을 괴고 여유의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비숍을 움직였으니, 다음에는 어느 것을 골라 볼까나.”

  그 때 갑자기 서재의 문이 벌컥 열렸다. 놀라 정면을 바라보니 빨간색 머리카락이 전등 빛에 반사되어 더욱 붉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나는 다시 책을 읽는 척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위니가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다 죽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기분 나쁜 면상만은 살아있군.”

 “넌 시비 걸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내가 대꾸했다.

  위니가 늑대 같이 눈을 번뜩이더니 문을 닫고 나가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밖은 열대 우림 지역인데 괜찮겠어?”

 “난 생각보다 머리가 좋거든. 네가 아무리 잘난 머리를 굴려 보아도 내가 길을 잃어버리게 하지는 못할 거야.” 위니가 신경질 적으로 쏘아붙였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고 시선은 그를 똑바로 응시하였다. 처음부터 이 책상 위에서 계획을 짜면서 그 어떠한 비난을 받을 각오는 이미 단단히 했었다.

 “날 그렇게 만만하게 보지 않는 것이 네 신상에 이로울 거야. 나도 한 명 적은 인원으로 출발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정말 이 게임을 이겨야만 하거든.”

  위니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거 정말 놀라운 소식이군.”

 “그래서!”

  그는 나의 언행 하나하나가, 아니, 나란 존재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불쾌하게도 네가 살아 있다면, 그 잘난 소리 지껄이지 못하게 머리에 구멍을 내 주겠어. 두고 봐.”

 “가히 기대해 보겠어.”

 이번에는 정말 위니가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아버렸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지하 2층의 빈 복도가 메아리처럼 되울렸다.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시간이 조금 흘렀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했던 시간은 오후 5시. 누군가 또다시 서재의 문을 벌컥 열었다. 나는 책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었는지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에리얼. 환이가 무언가를 데리고 왔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올리버였다. 나는 아직 졸렸으므로 억지로 정신 차리기 위해 눈을 비비자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직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아 한가롭게 하품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올리버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한국에서 온 꼬마가 뭔가를 가지고 왔어.”

 “나도 귀는 있어. 올리비아.”

  내가 하품을 연거푸 하는 바람에 발음이 꼬였다.

 “올리버라니까.”

 “그래, 무엇을 주워 왔기에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

  나는 달갑지 않게 자리에 일어나 올리버에게로 걸어갔다. 올리버는 같은 층 의료실로 안내하였다.

 “누군가.......다쳤어?”

  올리버를 바라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사람이 다친 것이 아니야.”

 “사람이 다친 게 아니라면?”

  나는 그의 말이 채 마치기도 전에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 안에 있던 나머지 다섯 명이 (역시 위니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환자를 안치하기 위한 세 개의 침대 중 가운데에 둘러 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환이가 곧 혼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잘은 모르겠다만 범인은 뻔했다. 넌 한 소리 들을 각오 하고 있어.

 “무슨 소란이야?”

 “에-. 그러니까 그게. 그것이 말이야.”

  도진이가 난감한 듯 얼버무렸다. 어디선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마샤가 누군가를 치료해주고 있었다. 환이는 아니었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니 아주 눈에 익은 무엇인가가 보였다.

 “이것을 어디서 데리고 온 거야!”

  나의 목소리가 카랑 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환이는 속으로 내게 한창 깨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가지고 온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데리고 온 것은 물건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가엾게도 다리에 상처가 나 피를 흘리고 있는 늑대 새끼 한 마리였다. 얼핏 개라고 착각 할 수 있으나 틀림없이 늑대였다. 나는 다그치듯 따졌다. 기가 막혀서. 지금 우리가 애완동물 같은 걸 기르게 생겼어?

 “너, 어디서 데려온 거야? 만약 이 피 냄새를 맡고 맹수가 기지 안으로 들이 닥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나가는데 이런 것을 주어오자면 어쩌자는 거야! 여긴 동물원이 아니라고. 게다가 이 늑대 어미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설마 피가 뚝뚝 흐르는 채로 곧바로 이곳으로 데려왔을 정도로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겠지!”

  내가 불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마샤만은 그 늑대를 치료하느라 나를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나는 귀엽기만 하구만.”

  보르가 혼잣말 하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그를 쏘아보자 보르는 애써 눈길을 회피했다. 그러자 도진이가 환이를 감싸주기라도 하는 듯 나에게 변명했다.

 “그런 것이 문제라면 안심해도 좋아, 에리얼. 환이가 저 것을 데려온 이유는 어미가 이미 죽어있었을 뿐더러 그 거리가 기지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었어. 다행이도 피를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환이의 재킷으로 지혈을 하며 왔으니, 여기는 일단 지하니까 더군다나 현관문이 닫혔을 때는 그저 맨 땅과 같잖아?”

 “뭐? 그렇게 까지 멀리 다녀왔단 말이야? 그러다가 다른 누군가 만나기라도 했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살아서 돌아왔으면 됐지!”

  환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도진이는 그 죽은 어미가 심각한 총상을 입었다는 것도 덧붙여 설명하려고 웅얼거렸으나 내게 한 소리 더 들을 것을 불 보듯 뻔히 알았기 때문에 일부로 크게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귀가 좋았다.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을까?”

 “정말- 나이가 몇 살인데. 하는 짓이 어린 애 같은지.”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이야. 난 수의사가 아니라고.”

  마샤가 흘러내리는 커다랗고 파란 별 핀을 치켜 올리며 한 마디 거들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밝은 금발 주변에 피가 살짝 묻었다. 금발과.......핏자국.

 “난생 처음 누군가를 치료해 주었는데,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늑대라니.”

 “다, 다시 데리고 갈게.”

  환이가 너무 상심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보모 노릇이라도 하는 것 같아.

 “누가 다시 데려가라고 했어? 설마 이 어린 새끼를 정글 한 복판에 다시 두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환이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대신 난 절대 책임지지 않을 거야. 비록 식량은 축내겠지만 그 만큼 사냥개 역할은 톡톡히 할 것이라고 믿을게. 한 도진. 네가 환이와 그 늑대를 맡아라.”

  그리고 에반이 들을 만한 작은 소리로 한 마디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옆을 지나 병동 밖으로 나갔다. 병동을 나가자 문틈 사이로 환이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왜 있잖아, 환이야. AP 마주 편에 방 하나 비었잖아. 재량이라고 꽤 넓었는데. 거기서 키우면 어떨까?”

  에반이 환이에게 제안하였다. 그러자 환이는 크게 고래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여 졌다. 솔직히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니 나도 즐거운 마음을 감출 순 없었다. 일단은 나도 사람이니까. 감정이란 것은 예전에 썩어버렸어도 그 ‘흔적’은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그곳에 멋대로 키워도 될까? 언제까지나 ‘재량’이 아니겠어.”

  올리버가 물었다. 문에 기대고 있던 나는 다시 똑바로 두 다리에 균형을 맞추었다.

 “걱정하지 마. 의외로 관대한 여왕님께서는 허락하셨으니까.”

  의외로?

 

  AP 모니터의 숫자가 여전히 서른두 명을 표시하고 있고 이제 오후 10시 30분이 조금 지났다. 환이는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지, 여전히 마샤, 도진이와 함께 늑대를 보살펴주고 있었고 나는 일찌감치 지하 3층 무기 창고로 내려가 탄환들을 모조리 회수했다. 장난감처럼 보이는 같은 종류의 권총 열여섯 자루. 많지는 않지만 탄창들을 어디에 숨길까 고민하다 내 방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이 다섯 평도 안 될 것 같은 작은 방에 숨겨봤자 누군가는 찾아 낼 것이 분명했으므로 보관하기 적합한 장소로는 내 방이 적격이었다. 하지만 원래는 나 혼자서 처리하기로 하였으나 순간 누군가 떠올랐다. 나는 곧장 위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니, 보르는 에반과 올리버와 함께 트레이닝 실 바로 옆에 붙은 탁자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반, 미안하지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지하에 내려갔더니 잡다한 것이 너무 많아 정리해야 할 것 같아. 혼자서는 안 되겠는데, 괜찮지?”

  나는 활짝 웃어보였다. 네가 원하는 것이 너를 이용해 먹는 거라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너를 잘 사용해 줄게. 그가 자리에 일어나 나에게로 걸어왔다.

 “어, 나도 도와줄까?”

  올리버가 어색하게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하던 얘기 계속 해.”

  나는 그에게 딱 잘라 사양했다. 그러자 보르의 얼굴에서 기분 나쁜 표정이 떠올랐다.

 “무슨 일인데, 에리얼?”

 “옮길 것이 있어.”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에리얼, 환이가 강아지 같은 거 데리고 왔을 때 나는 좀 더 네가 화를 낼 줄 알았어. 모두가 앞에 있으니까 착한 척이라도 하려는 거야?”

  나는 자리에서 멈춰 섰다. 좀 가만히 따라오면 안 돼? 이처럼 계단을 내려가는 데에 오래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카키색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삐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거 알아? 이런 열대 지방에는 환이가 데려온 종류의 늑대가 살지 않아.”

 “그렇다면.......”

 “그들이 보냈겠지. 물론 그냥 보내 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나는 그저 잠시 지켜보려는 것뿐이야. 환이가 ‘그것을’ 주워 온 것에 대해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인걸? 게다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미는 총상으로 죽었다고 했지. 뭔가가 머릿속에서 연결되지 않아?”

  나는 그가 나란 존재에 대해 질려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기적이고도 계산적인 나를. 하지만 에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와, 역시 에리얼은 대단해! 진짜 생각해 보니까 정말 일리가 있어.”

  장난스럽게 활짝 웃는 하얀 얼굴. 제멋대로 바람에 날린 듯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위로 살짝 드리워졌다. 그가 낮고 어감 좋은 목소리로 나를 부를 때에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에반은 항상 활력이 넘친다. 그래서 한 순간이라도 내가 한낱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가 내 옆에서 미소를 지을 때마다 내게 말을 걸 때 마다 추악한 나의 내면이 엇갈려 버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혼란스러움이 나를 덮친다. 안 돼. 나를 교란시키려는 작전일지도 몰라. 나는 공연히 고개를 저었다.

  무기 창고에 다다르자 케케묵은 먼지 냄새가 또다시 코를 근질거렸다. 한 구석에 몰아 쌓아 놓은 탄창을 가리키며 상냥하게 말을 꺼냈다.

 “저것을 내 방으로 옮겨주면 안될까?” 그리고 그가 굳지 묻지 않았어도 이 말을 덧붙였다.

 “탄창이야. 다른 애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났겠지? 까닥하다 다칠 수 있으니까.”

 “아, 미안해. 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아 있는지 몰랐네?” 그가 멋쩍게 뒷머리를 긁으며 내가 쌓아둔 탄창 더미를 주워 들기 시작했다.

 “내가 낮 동안에 네 얘기가 떠올라 내려와 보았는데, 처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혹시 몰라서 대부분을 내 방으로 옮겨 놓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오다가 보르와 마주쳤는데 잘 넘어갔어. 그 때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멈춰버리는 줄 알았다니까?”

 “알고.......있었어?”

 “네가 그랬잖아, 에리얼.”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치명적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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