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선호를 만난 날 이후로 생각에 집중할 만한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새내기가 가진 특별한 분위기가 조금은 사그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개강하기가 무섭게 동아리와 학회에서 1학년들을 불러 대기 시작했다. 개강맞이 술파티는 정말 일주일 내내 빠짐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과에서 하는 행사들은 눈치껏 빠질 수라도 있는데 동아리나 학회 행사들은 정말 빠지기가 어려웠다. 이미 지난 학기 중간고사가 지난 시점에서 흥미와 열의를 모두 잃어버렸음에도 나는 꾸역꾸역 행사에 참여했다. 이 모든 술자리들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은 나머지 모두들 흥건하게 취해 즐기는 와중에도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맨 정신으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어야 했다.
평소대로 라면 내 옆에 두번째 보릿자루인 김건이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주는 내가 피해 다닌 것도 아닌데 건이와 이상할 정도로 동선이 어긋났다. 어쩌다가 내가 술자리에 늦게 도착하면 건이가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고, 내가 자리를 일찍 떠나면 건이가 뒤를 이어 도착했다. 이번 학기는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수업도 겹치지 않았다. 금요일 수업도 지난 번처럼 하루 종일 겹친 것이 아니라 전공 수업 하나를 제외하고는 시간표도 제대로 맞지 않았다. 결국 선호와 우연히 마주친 날 이후로 금요일까지 하루도 건이를 만나지 못했다. 마치 우리 사이를 끈끈하게 잡아 당기던 중력이 한 순간에 힘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건이를 만나지 않으면 마음은 고요했다. 일말의 동요도 없이 침착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건이가 오지 않는, 혹은 이미 떠나가 버린 자리에 앉아 건이를 생각했다. 여름방학에도 느끼지 않던 빈자리가 커다랗게 느껴졌다. 학교에 돌아와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선호와의 관계는 순풍을 단 것처럼 순조롭게 이어져 갔다. 이 사람이 내 생활에 녹아 드는 것이 점차 느껴졌다. 매일 꾸준한 속도와 걸음걸이였다. 주고 받는 메시지들과 전화 통화가 익숙해졌다. 선호는 나에 대한 감정을 아주 느리지만 꾸준하게 내비춰 왔다. 정말 적당하고도 완벽한 속도감이었다. 나는 부담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고도 선호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음식을 천천히 씹어서 그 맛을 음미하고 부드럽게 소화하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선호의 감정을 조금씩 맛보고 있었다.
그리고 햇빛 속에 머물다 갑자기 만난 소나기처럼, 김건을 만났다. 금요일 오후 수업이었다. 하필이면 이 뜨거운 여름에 생리통이 유독 지끈거리며 시작됐다. 빨리 약을 먹었어야 하는데 수업 시간과 맞물려 늦게 진통제를 먹은 탓에 아직 약효가 약했다. 어제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지친 몸을 이끌고 에어컨이 그나마 약한 강의실 뒤편에 팔베개를 하고 책상에 엎드려 수업을 기다렸다. 이따가 선호를 만나기로 했는데. 잠들락 말락 하는 몽롱한 순간에 이마에 차갑고 커다란 손이 얹혀졌다. 눈을 겨우 뜨고 바라보니 오랜만에 보는 건이였다. 내 옆자리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가며 짚어봤다.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은데…?"
건이가 어리둥절해 하며 나와 자신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터졌다.
"바보야, 열나는 거 아니야."
"아, 진짜? 진작 말해주지. 감기인 줄 알았잖아. 어디 아파?"
"응. 배 아파. 집에 가고 싶다."
"내가 대출해줄까? 너 목소리 나도 흉내낼 수 있는데."
"배 아프니까 웃기지 마."
내가 웃음을 짓자 건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배가 아프다고 했지만, 대충 어디가 아픈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별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잠깐 강의실을 나가 내가 좋아하는 차가운 음료수 캔을 사가지고 왔다.
"약은 먹었어?"
"먹었는데, 아직 약효가 안 사네."
"이거 전에 오전부터 수업 있지 않아?"
"있었지. 그 때 진작 약 먹을걸."
"남자친구한테 얼른 사오라고 하지."
건이가 여전히 책상에 엎드려 있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다. 방금까지는 그렇게 다정했는데, 순식간에 무슨 표정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아직 남자친구 아니야."
"…왜?"
"왜긴 왜야.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나 모쏠이란 말이야. 금방 만나고 사귀는 거 어떻게 하는 줄 몰라. 지금도 어려워."
내가 진통제 약 기운에 가물 가물 감기는 눈을 바로 잡으며 횡설수설 말했다. 그 말에 건이가 피식하고 웃더니 다시 내가 알던 그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되겠다, 너 조금만 자. 뒷자리니까 괜찮아."
"뭐? 무슨 소리…"
내가 말하자 건이가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내 눈앞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건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뻗어 치우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나지 않았다. 완전히 잠이 든 것은 아니지만 어물쩍 잠이 들어 버렸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내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손을 치우긴 했지만 건이는 여전히 곁에 있었다. 건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잠투정을 마치고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은 아이처럼 나는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강의실 안은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아직 다섯시도 안된 시간이었다. 다행히 선호에게서 교수님이 끝내 줄 생각을 안 한다고 잠깐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메시지가 3분 전에 도착해 있었다.
"엄청 잘 자더라, 안영아."
옆을 바라보니 아까 잠들기 전 보았던 건이가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전공책 대신 다른 책을 펴 들고 있는 것만 다를 뿐 여태까지 나를 기다려준 모양이었다.
"와, 나 진짜 잤어. 꿈도 꿨어."
"그래, 코도 골면서 잤어."
"아냐. 나 진짜 코는 안 골았다. 맹세해."
내가 정색을 하며 말하자 건이가 그래도 조용히 잠들었음을 인정했다. 수업이 끝나고도 벌써 한참이 지난 모양이었다. 강의실은 물론이고 복도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뭐야, 깨우지 그랬어. 기다리느라 힘들었겠다."
"너무 깊이 주무시길래 깨울 수가 없었어."
"…수현이가 안 찾았어?"
내 물음에 건이는 눈을 피하더니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락이 없었다는 의미인지 가지 않았다는 의미인지. 그러나 잠결이고, 머리가 아직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나는 더 캐묻고 싶지 않았다.
에어컨이 쌩쌩한 곳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9월 늦여름의 무더위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건이와 함께 건물을 나왔다.
"집에 가?"
"아니. 오늘은 예비 남자친구 만납니다. 이제 수업 끝났대."
"좋겠네, 안영이."
건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그 미소를 바라보니 못 했던 말들을 갑자기 다 퍼부어 주고 싶었다. 언제나 생글생글 미소만 가득한 그 얼굴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그러나 이것은 모두 나의 마음 속의 일일 뿐이었다. 여전히 우리 사이는, 사이 좋게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이자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건이와 나 사이에 선을 한 번 긋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선호를 만난 날 이후로 생각에 집중할 만한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새내기가 가진 특별한 분위기가 조금은 사그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개강하기가 무섭게 동아리와 학회에서 1학년들을 불러 대기 시작했다. 개강맞이 술파티는 정말 일주일 내내 빠짐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과에서 하는 행사들은 눈치껏 빠질 수라도 있는데 동아리나 학회 행사들은 정말 빠지기가 어려웠다. 이미 지난 학기 중간고사가 지난 시점에서 흥미와 열의를 모두 잃어버렸음에도 나는 꾸역꾸역 행사에 참여했다. 이 모든 술자리들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은 나머지 모두들 흥건하게 취해 즐기는 와중에도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맨 정신으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어야 했다.
평소대로 라면 내 옆에 두번째 보릿자루인 김건이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주는 내가 피해 다닌 것도 아닌데 건이와 이상할 정도로 동선이 어긋났다. 어쩌다가 내가 술자리에 늦게 도착하면 건이가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고, 내가 자리를 일찍 떠나면 건이가 뒤를 이어 도착했다. 이번 학기는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수업도 겹치지 않았다. 금요일 수업도 지난 번처럼 하루 종일 겹친 것이 아니라 전공 수업 하나를 제외하고는 시간표도 제대로 맞지 않았다. 결국 선호와 우연히 마주친 날 이후로 금요일까지 하루도 건이를 만나지 못했다. 마치 우리 사이를 끈끈하게 잡아 당기던 중력이 한 순간에 힘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건이를 만나지 않으면 마음은 고요했다. 일말의 동요도 없이 침착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건이가 오지 않는, 혹은 이미 떠나가 버린 자리에 앉아 건이를 생각했다. 여름방학에도 느끼지 않던 빈자리가 커다랗게 느껴졌다. 학교에 돌아와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선호와의 관계는 순풍을 단 것처럼 순조롭게 이어져 갔다. 이 사람이 내 생활에 녹아 드는 것이 점차 느껴졌다. 매일 꾸준한 속도와 걸음걸이였다. 주고 받는 메시지들과 전화 통화가 익숙해졌다. 선호는 나에 대한 감정을 아주 느리지만 꾸준하게 내비춰 왔다. 정말 적당하고도 완벽한 속도감이었다. 나는 부담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고도 선호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음식을 천천히 씹어서 그 맛을 음미하고 부드럽게 소화하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선호의 감정을 조금씩 맛보고 있었다.
그리고 햇빛 속에 머물다 갑자기 만난 소나기처럼, 김건을 만났다. 금요일 오후 수업이었다. 하필이면 이 뜨거운 여름에 생리통이 유독 지끈거리며 시작됐다. 빨리 약을 먹었어야 하는데 수업 시간과 맞물려 늦게 진통제를 먹은 탓에 아직 약효가 약했다. 어제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지친 몸을 이끌고 에어컨이 그나마 약한 강의실 뒤편에 팔베개를 하고 책상에 엎드려 수업을 기다렸다. 이따가 선호를 만나기로 했는데. 잠들락 말락 하는 몽롱한 순간에 이마에 차갑고 커다란 손이 얹혀졌다. 눈을 겨우 뜨고 바라보니 오랜만에 보는 건이였다. 내 옆자리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가며 짚어봤다.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은데…?"
건이가 어리둥절해 하며 나와 자신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터졌다.
"바보야, 열나는 거 아니야."
"아, 진짜? 진작 말해주지. 감기인 줄 알았잖아. 어디 아파?"
"응. 배 아파. 집에 가고 싶다."
"내가 대출해줄까? 너 목소리 나도 흉내낼 수 있는데."
"배 아프니까 웃기지 마."
내가 웃음을 짓자 건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배가 아프다고 했지만, 대충 어디가 아픈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별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잠깐 강의실을 나가 내가 좋아하는 차가운 음료수 캔을 사가지고 왔다.
"약은 먹었어?"
"먹었는데, 아직 약효가 안 사네."
"이거 전에 오전부터 수업 있지 않아?"
"있었지. 그 때 진작 약 먹을걸."
"남자친구한테 얼른 사오라고 하지."
건이가 여전히 책상에 엎드려 있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다. 방금까지는 그렇게 다정했는데, 순식간에 무슨 표정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아직 남자친구 아니야."
"…왜?"
"왜긴 왜야.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나 모쏠이란 말이야. 금방 만나고 사귀는 거 어떻게 하는 줄 몰라. 지금도 어려워."
내가 진통제 약 기운에 가물 가물 감기는 눈을 바로 잡으며 횡설수설 말했다. 그 말에 건이가 피식하고 웃더니 다시 내가 알던 그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되겠다, 너 조금만 자. 뒷자리니까 괜찮아."
"뭐? 무슨 소리…"
내가 말하자 건이가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내 눈앞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건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뻗어 치우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나지 않았다. 완전히 잠이 든 것은 아니지만 어물쩍 잠이 들어 버렸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내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손을 치우긴 했지만 건이는 여전히 곁에 있었다. 건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잠투정을 마치고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은 아이처럼 나는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강의실 안은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아직 다섯시도 안된 시간이었다. 다행히 선호에게서 교수님이 끝내 줄 생각을 안 한다고 잠깐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메시지가 3분 전에 도착해 있었다.
"엄청 잘 자더라, 안영아."
옆을 바라보니 아까 잠들기 전 보았던 건이가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전공책 대신 다른 책을 펴 들고 있는 것만 다를 뿐 여태까지 나를 기다려준 모양이었다.
"와, 나 진짜 잤어. 꿈도 꿨어."
"그래, 코도 골면서 잤어."
"아냐. 나 진짜 코는 안 골았다. 맹세해."
내가 정색을 하며 말하자 건이가 그래도 조용히 잠들었음을 인정했다. 수업이 끝나고도 벌써 한참이 지난 모양이었다. 강의실은 물론이고 복도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뭐야, 깨우지 그랬어. 기다리느라 힘들었겠다."
"너무 깊이 주무시길래 깨울 수가 없었어."
"…수현이가 안 찾았어?"
내 물음에 건이는 눈을 피하더니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락이 없었다는 의미인지 가지 않았다는 의미인지. 그러나 잠결이고, 머리가 아직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나는 더 캐묻고 싶지 않았다.
에어컨이 쌩쌩한 곳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9월 늦여름의 무더위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건이와 함께 건물을 나왔다.
"집에 가?"
"아니. 오늘은 예비 남자친구 만납니다. 이제 수업 끝났대."
"좋겠네, 안영이."
건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그 미소를 바라보니 못 했던 말들을 갑자기 다 퍼부어 주고 싶었다. 언제나 생글생글 미소만 가득한 그 얼굴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그러나 이것은 모두 나의 마음 속의 일일 뿐이었다. 여전히 우리 사이는, 사이 좋게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이자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건이와 나 사이에 선을 한 번 긋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선호를 만난 날 이후로 생각에 집중할 만한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새내기가 가진 특별한 분위기가 조금은 사그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개강하기가 무섭게 동아리와 학회에서 1학년들을 불러 대기 시작했다. 개강맞이 술파티는 정말 일주일 내내 빠짐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과에서 하는 행사들은 눈치껏 빠질 수라도 있는데 동아리나 학회 행사들은 정말 빠지기가 어려웠다. 이미 지난 학기 중간고사가 지난 시점에서 흥미와 열의를 모두 잃어버렸음에도 나는 꾸역꾸역 행사에 참여했다. 이 모든 술자리들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은 나머지 모두들 흥건하게 취해 즐기는 와중에도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맨 정신으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어야 했다.
평소대로 라면 내 옆에 두번째 보릿자루인 김건이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주는 내가 피해 다닌 것도 아닌데 건이와 이상할 정도로 동선이 어긋났다. 어쩌다가 내가 술자리에 늦게 도착하면 건이가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고, 내가 자리를 일찍 떠나면 건이가 뒤를 이어 도착했다. 이번 학기는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수업도 겹치지 않았다. 금요일 수업도 지난 번처럼 하루 종일 겹친 것이 아니라 전공 수업 하나를 제외하고는 시간표도 제대로 맞지 않았다. 결국 선호와 우연히 마주친 날 이후로 금요일까지 하루도 건이를 만나지 못했다. 마치 우리 사이를 끈끈하게 잡아 당기던 중력이 한 순간에 힘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건이를 만나지 않으면 마음은 고요했다. 일말의 동요도 없이 침착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건이가 오지 않는, 혹은 이미 떠나가 버린 자리에 앉아 건이를 생각했다. 여름방학에도 느끼지 않던 빈자리가 커다랗게 느껴졌다. 학교에 돌아와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선호와의 관계는 순풍을 단 것처럼 순조롭게 이어져 갔다. 이 사람이 내 생활에 녹아 드는 것이 점차 느껴졌다. 매일 꾸준한 속도와 걸음걸이였다. 주고 받는 메시지들과 전화 통화가 익숙해졌다. 선호는 나에 대한 감정을 아주 느리지만 꾸준하게 내비춰 왔다. 정말 적당하고도 완벽한 속도감이었다. 나는 부담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고도 선호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음식을 천천히 씹어서 그 맛을 음미하고 부드럽게 소화하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선호의 감정을 조금씩 맛보고 있었다.
그리고 햇빛 속에 머물다 갑자기 만난 소나기처럼, 김건을 만났다. 금요일 오후 수업이었다. 하필이면 이 뜨거운 여름에 생리통이 유독 지끈거리며 시작됐다. 빨리 약을 먹었어야 하는데 수업 시간과 맞물려 늦게 진통제를 먹은 탓에 아직 약효가 약했다. 어제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지친 몸을 이끌고 에어컨이 그나마 약한 강의실 뒤편에 팔베개를 하고 책상에 엎드려 수업을 기다렸다. 이따가 선호를 만나기로 했는데. 잠들락 말락 하는 몽롱한 순간에 이마에 차갑고 커다란 손이 얹혀졌다. 눈을 겨우 뜨고 바라보니 오랜만에 보는 건이였다. 내 옆자리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가며 짚어봤다.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은데…?"
건이가 어리둥절해 하며 나와 자신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터졌다.
"바보야, 열나는 거 아니야."
"아, 진짜? 진작 말해주지. 감기인 줄 알았잖아. 어디 아파?"
"응. 배 아파. 집에 가고 싶다."
"내가 대출해줄까? 너 목소리 나도 흉내낼 수 있는데."
"배 아프니까 웃기지 마."
내가 웃음을 짓자 건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배가 아프다고 했지만, 대충 어디가 아픈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별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잠깐 강의실을 나가 내가 좋아하는 차가운 음료수 캔을 사가지고 왔다.
"약은 먹었어?"
"먹었는데, 아직 약효가 안 사네."
"이거 전에 오전부터 수업 있지 않아?"
"있었지. 그 때 진작 약 먹을걸."
"남자친구한테 얼른 사오라고 하지."
건이가 여전히 책상에 엎드려 있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다. 방금까지는 그렇게 다정했는데, 순식간에 무슨 표정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아직 남자친구 아니야."
"…왜?"
"왜긴 왜야.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나 모쏠이란 말이야. 금방 만나고 사귀는 거 어떻게 하는 줄 몰라. 지금도 어려워."
내가 진통제 약 기운에 가물 가물 감기는 눈을 바로 잡으며 횡설수설 말했다. 그 말에 건이가 피식하고 웃더니 다시 내가 알던 그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되겠다, 너 조금만 자. 뒷자리니까 괜찮아."
"뭐? 무슨 소리…"
내가 말하자 건이가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내 눈앞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건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뻗어 치우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나지 않았다. 완전히 잠이 든 것은 아니지만 어물쩍 잠이 들어 버렸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내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손을 치우긴 했지만 건이는 여전히 곁에 있었다. 건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잠투정을 마치고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은 아이처럼 나는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강의실 안은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아직 다섯시도 안된 시간이었다. 다행히 선호에게서 교수님이 끝내 줄 생각을 안 한다고 잠깐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메시지가 3분 전에 도착해 있었다.
"엄청 잘 자더라, 안영아."
옆을 바라보니 아까 잠들기 전 보았던 건이가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전공책 대신 다른 책을 펴 들고 있는 것만 다를 뿐 여태까지 나를 기다려준 모양이었다.
"와, 나 진짜 잤어. 꿈도 꿨어."
"그래, 코도 골면서 잤어."
"아냐. 나 진짜 코는 안 골았다. 맹세해."
내가 정색을 하며 말하자 건이가 그래도 조용히 잠들었음을 인정했다. 수업이 끝나고도 벌써 한참이 지난 모양이었다. 강의실은 물론이고 복도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뭐야, 깨우지 그랬어. 기다리느라 힘들었겠다."
"너무 깊이 주무시길래 깨울 수가 없었어."
"…수현이가 안 찾았어?"
내 물음에 건이는 눈을 피하더니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락이 없었다는 의미인지 가지 않았다는 의미인지. 그러나 잠결이고, 머리가 아직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나는 더 캐묻고 싶지 않았다.
에어컨이 쌩쌩한 곳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9월 늦여름의 무더위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건이와 함께 건물을 나왔다.
"집에 가?"
"아니. 오늘은 예비 남자친구 만납니다. 이제 수업 끝났대."
"좋겠네, 안영이."
건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그 미소를 바라보니 못 했던 말들을 갑자기 다 퍼부어 주고 싶었다. 언제나 생글생글 미소만 가득한 그 얼굴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그러나 이것은 모두 나의 마음 속의 일일 뿐이었다. 여전히 우리 사이는, 사이 좋게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이자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건이와 나 사이에 선을 한 번 긋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