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퓨리어스 (FURIOUS)
작가 : HANNAH
작품등록일 : 2017.7.31

아무런 연고도 없이 모이게 된 우리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서바이벌 게임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 중 한 명은 이 게임에 대해 뭔갈 알고 있는 듯 하다.

서바이벌 로맨스.

 
퓨리어스(FURIOUS) 2
작성일 : 17-07-31 23:37     조회 : 296     추천 : 0     분량 : 14878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2. / 에반의 시점 〕

 

  이곳으로 지원하게 된 계기는 그리 거창하거나 젊은 날의 패기 있는 포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아무렇게나 길바닥에 뿌려져 있는 전단지가 눈에 띄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우연이었든 아니면 나를 끌어들이려는 누군가의 의도적인 일이었든 어쨌든 나는 그 광고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떤 프로젝트를 감행하는데 도와줄 사람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단순하고도 흔한 구인광고였다. 프로젝트의 관한 자세한 사항은 몰랐었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짙게 프린트 된 괜찮은 보수와 숙식 제공이란 단어가 더욱 끌렸다. 마침 대학 입학금을 마련해야만 하는 시점이었던 터라 내게는 그저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조금 수상한 감도 없진 않았지만 이유가 어쨌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떤 개인 회사에서 인원을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듣는 어떤 인류학 학자 단체 주최라고 하기에 믿음이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저 단순히 인간 심리 연구를 한다는 짤막한 내용도 덧붙여 있었다. 더군다나 기간도 방학 동안이라 학업에도 큰 지장은 없었다. 어쩌면 그 인류학 학자들의 단체 주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대학 지원할 때에 경력 사항으로 추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좌우간 그야 말로 내게는 가뭄의 단비처럼 달콤한 제안임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다를 바는 없었다. 일단 밑져야 본전 심정으로 신청해 보았는데 운이 좋아 선택 되어 지금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스스로 지원하지도 않았는데도 온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에리얼이라는 여자 아이가 문밖으로 뛰쳐나가자 얼었던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뭐, 다른 이들은 그녀가 어떤 말을 늘어놓던 그 게임이라는 것에 들떠 신경 쓰는 것 같아 보이진 않지만.

  나는 그녀와 처음 보는 사이이다. (물론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두와 초면이다.) 그녀와 같은 동양인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실제로 본 적도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녀의 낮고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듣기도 좋았고. 게다가 알 수 없는 마성으로-언제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절제되면서도 부드러운 악센트. 그리고 고막을 찌르는 고음이 아니라 파도 조소 같은 잔잔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언성을 높이던 그녀는 결국 영화 속의 한 장면같이 위니를 꺾어 버렸다. 조명으로 더욱 투명하게 반짝이는 칼끝 그리고 까만 머리카락. 이성적으로 다소 도를 넘어선 그녀의 처사에 마땅히 나무라는 것이 평소의 나지만 어딘가, 답답하게도 정확하게 집어 낼 수 없으나 뜻밖이고도 아름다운 몸짓에서 감탄이 튀어 나왔다.

  그 때에 그녀의 표정에서 묻어나왔던 좌절과 혼란스러움이라는 묘한 감정들이 묻어나왔다. 마치 사치스런 감정에 휘둘려 방황하는 줄리엣 보다 햄릿에 가까운 그런 사연 깊은 눈동자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띈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나는 그녀가 느낀 감정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딱히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그저 누군가 나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이 슬퍼 보인다고, 어째선지 그녀가 안쓰러워 보인다고.

  여덟 번째, 맨 마지막으로 들어 온 에리얼은 처음 볼 때부터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지만-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애써 입술을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위로 하며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 문득 들었다. 분명 말로 이룰 수 없는 사연이 있겠지. 저마다의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 그녀의 사연이 알고 싶고 궁금하기 보다는 그저 에리얼이란 흥미로운 캐릭터를 지켜보고 싶었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 마주 대하는 사이라는 사실만으로 나를 말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전체적으로 묘하게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그렇다고 내 이상형에 가깝다고 할 수 는 없지만 뚜렷한 이목구비, 가느다랗고 긴 검은 생머리가 차분하게 내려앉았고 피부는 좀 더 짙은 황갈색을 띄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동양인 피부 색깔보다 희었다. 호리호리하고 겨우 키가 160센티미터 간신히 넘을까 말까 한 작은 체구지만 그녀의 눈물기가 가득한 커피색 눈동자는 단호하고도 강해보였다. 내가 말하는 강해보인다라는 뜻은 억척스러워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절제된, 오랫동안 무언가에 짓눌려 있었으면서도 그 무게감을 이겨낸 야생화 같은 것이었다.

  곧이어,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의 한 도진이라는 남자아이가 심각하게 그의 나라 말로 환이와 몇 마디를 나누었다. 한참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다가 곧 그녀의 뒤를 따라서 나가버렸다.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나 있는 눈치였다. 세게 닫는 문소리가 투박한 도진의 성격을 잘 나타내어 주듯 거칠었다. 무슨 일이 길래 다들 저러는 거지? 뭔가 잘 못 되었나?

  그 둘은 초면부터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인상이 짙어 의아스러웠다. 줄곧 안절부절 못하고 있으며 무언가를 우리에게 전하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일이 생각대로 이뤄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에리얼에게서는 가시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정신을 차려보면 나의 눈길이 어느새 그녀를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난감하다는 것이다.

 “나도 물 좀 마시고 올게.”

  내 근처 아무나에게 말했다. 돌아보니 들떠 있는 마샤가 보르와 올리버를 붙잡고 또 한바탕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었다. 시원스러운 보르는 그녀의 말을 흥미롭게 들으며 적당한 대꾸를 해 주고 있었지만 -그런 체를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관심 있어 듣는 건지 모르겠지만- 올리버는 다소 귀찮은 듯 성의 없이 고개만 까닥이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별자리가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

 “별자리가 돈 벌여 주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알아서 뭐하게? 그리고 나는 올리버라니까.”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였다.

 “그야 재밌잖아? 보르는 사자자리에 O형, 나는 양자리. 올리버는 생일이 1월 4일이라고 했으니까....... 전갈자리, 사수자리, 아! 염소자리이구나!”

  마샤가 일일이 손까지 꼽아가며 귀찮아하는 올리버를 붙잡고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런 걸 어떻게 다 외우는지 신기할 나름이다.

  마샤와 보르, 올리버 말고도, 유난히도 눈에 띄는 빨간색 위니는 팔짱을 끼고 혼자서 칭얼거리고 있었으며 환이는 그저 인형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잠깐 공상에 잠긴 사람처럼 보였다. 한 마디로 누구 하나 나를 신경 쓰는 사람 없었다. 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그 방을 나와 버렸다.

 ‘내가 여기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한숨이 나왔다. 학비를 벌려고 왔는데 시키는 것이 고작 이상한 게임이라니. 그 게임이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활동일까? 더군다나 담당자나 스태프처럼 보이는 사람 하나 나오지 않았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즐기면서 학비를 벌수 있는 일석이조의 제안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한 액수만 계좌에 넣어 준다면야 문제 될 것은 없겠지만 계속해서 에리얼과 도진이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눈앞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들은 뭔가 알고 있거나 아니면 유능한 배우지망생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 전단지에서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를 한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 게임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우리의 행동과 반응을 연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기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겠지. 에리얼과 도진이가 또 다른 자원 봉사자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에리얼과 도진이가 이 게임을 주최하는 스태프들 중 한 명이라면, 보르와 다른 애들은 실험 대상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여기 자원으로 들어 온 나로서는 에리얼과 동등한 역할이라고 하기엔 아무것도 몰랐고, 그렇다고 마샤와 같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너는 나와 같은 입장이라는 결론이네.”

 “안타깝게도 말이지.”

  어디선가 낮고 허스키한 에리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주위를 둘러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나와 환이는 ‘살아 있을’것이라고 추정되는 열다섯 명 가운데 두 명이야. 너도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테지. 마치, 오늘을 위한 연습게임의 희생자랄까?”

  도진이의 목소리도 들려 왔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더듬더듬 살펴보니 바로 마주 편 ‘재량’이라고 표기되어 있던 곳에서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아마 에리얼과 도진이는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는 문 가까이에 바짝 귀를 대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솔직히 자리를 피해가면서 까지 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하였다. 물론 엿듣는 것이 옳은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묘하게도 이 둘의 분위기는 위험했다. 나는 몸을 문에 바짝 기대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 갑작스런 변화에 어떻게 납득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겨우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도대체 왜 나를 가만두지 못해서 안달이냐고!”

  에리얼이 힘없이 소리쳤다. 점점 작아지는 그녀의 음성에 귀를 문가에 좀 더 바짝 대어야만 했었다. 이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종잡을 수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변화라니?

 “일종의 ‘장난감’이 아니겠어?” 도진이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왜 아니겠어? ‘곧 영원히 편하게 해 줄 테니까 조금만 버텨보아라. 잔인하게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원망은 마라. 너희들이 여기에 있는 건 순전히 운이 없었을 뿐이니까. 결코 특별해서 선별된 것은 아니다. 단지 너희는 우리의 아주 유용한 장난감이니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라.’ 이런,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잊었어? 네가 무엇을 또 얼마만큼이나 아는지는 모르겠다만, 이 작자들을 상식 안에서 생각하면 곤란하지. 안 그래? 혹시 또 모르지, 우리를 상대로 인체 실험이라도 하고 있을지. 꽤 구체적이지 않아? 난 이런 종류의 인간들을 잘 알고 있어.”

 “네 이야기부터 먼저 들어 볼게.”

  에리얼이 냉정하게 그의 말을 잘라내며 물었다.

 “아, 뭐....... 일단은 환이와 나는 오랜 친구 사이라는 것부터 말해 두겠어. 네가 어떤 경로로 이곳으로 왔는지는 들어보면 알겠지만 다른 머리 빈 애들과는 다른 것 같군. 사년 전, 분명 날짜도 기억할 수 있어. 8월 3일 이었던가? 난데없이 불법 체류자라는 사유로 이름 모를 기관에 끌려갔어.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 우린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고 입국했으니까. 대사관에 연락하기도 전에 강제 추방을 당해서....... 지금 생각해도 정말 열이 받아! 열이 받는 정도가 아니야! 다 갈기갈기 조각으로 찢어버리고 싶어! 그거야 어떻게든 명분을 붙이려는 수작인 걸 나중에 알았지만 말이야. 어쨌든 마치 유대인 수용소처럼 보이지도 않는 이들의 명령을 따르며 살았어. 이런 천조가리를 걸치고, 배급되는 급식을 받아먹으며!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게 전부야. 아니, 여기까지만 말을 해 두지. 아직 너를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네가 그들과 한편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잖아.”

 “꽤나 잔인하게 구는 군.”

  한참을 펄쩍 펄쩍 뛰던 도진이가 입을 다물자 잠시 조용한 정적이 돌았다. 무엇인가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간단하게 그의 말을 간추려 본다면, 여기에 온 방식은 다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는 나처럼 바로 가까운 근래에 도착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들의 어조나 톤. 분위기로 보아 내가 너무 도를 너머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내 손으로 이런 이상한 곳에 걸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설마. 만약에 마샤가 말했던 것처럼 지금 이곳이 TV 프로그램이라면 저들은 과연 내가 밖에서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사를 읊어주는 걸까? 그리고 그 에리얼이란 아이는 단순히 자신에게 주어진 캐릭터 역할을 잘 소화해 나가는 것뿐일까. 좌우간 그들의 대화를 지켜 들으면서 한 가지 얻은 교훈은, 여기는 전혀 방음처리가 되지 않아 그 아무리 사소한 이야기를 하던 간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럽네. 차라리 나도 거기에 함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에리얼이 하도 개미소리만큼 중얼거려 하마터면 못 알아들을 뻔했다.

 “부럽다고? 너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거기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했어! 그 저택 밖으로 함부로 나가다간! 게다가 내가 바로 여기 오기 직전에......!”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필히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넌 갑작스럽게 눈을 떴을 때에 전혀 낯선 곳에 있었더라면 어떤 기분이 들었겠니? 마치 인체 실험 대상이라도 된 듯 실험용 흰 쥐처럼 쳇바퀴만 돌리고 있어야만 하는 나의 심정을! 자유롭게 나갈 수 없었어. 들어오는 것 또한 내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겨우 그 곳을 나왔을 때, 맞이하는 또 다른 회색 케이스. 열리지도 않은 창문 너머로 해가 뜨고 밤이 오고, 그저 흘러가는 세월만 지켜보면서 그렇게 내 시간을 버리면서 지내왔어. 내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강압적으로 누군가를 위해 대신 살아 온 것처럼!”

 “그것은 내게 위로가 되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차라리 내게도 창문이라도 있었다면. 적어도 시간의 경과를 알 수 있는 시계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매일 밤, 아니 밤일지도 모르는 매 시간 눈을 뜰 때마다 나는 간절하게 기도했었어. 지금까지 모두 단지 꿈이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오로지 문틈에서만 새어 나오는 불빛이 나의 앞길을 비췄을 때에, 아침일지도 모르는 그 시간 때부터 절망으로, 하루를 시작해 나아가지. 그리고 정작 내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나는 또 이렇게......”

  그녀의 낮고 약한 음성이 가슴 속으로 울려 퍼졌다. 에리얼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쩐지 상상이 갔다.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게 아니야. 정확히 이 사태에 대해서 네 의견을 듣고 싶어. 그 종이에 쓰여 있는 단어 하나하나가 귀에 거슬려 미치겠거든. 너는 저들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마치 벌레 몇 마리 잡아와 유리병 속에 가둬놓고 어떤 반응을 보이나 관찰일기라도 쓰는 것처럼? 그래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게 만들어 놓고? 그 A1인지 뭔지 그럴 듯한 명분 하나로 무엇인가 앞장서게 만들려는 것이 진짜 그들이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

 “진심이 아니라면 애초에 이런 기지를 세우지도, 사람들을 잡아넣지도 않았겠지.”

 “또다시 피를 봐야한다?”

 “그렇겠지. 잠시만, ‘또다시’라니?” 도진이의 언성이 높아졌다.

 “혹시, 혹시 말이야. 가장 최근에........”

 “시간이 너무 지체 되었어. 여기서 더 미적거린다면 저 아무 것도 모른 이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어쨌거나 지금 까지 우리가 말했던 내용들, 알고 있는 모든 사실들. 그 누구도 얘기하지 말아줬으면 해. 아직 확실한 것 그 어떤 것도 없으니까.”

 “내가 바라던 바야. 나도 시끄러워지는 건 싫거든.”

  에리얼이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이런! 발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뒤늦게야 알아챘다. 미처 자리를 피하기도 전,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바람에 머리를 세게 박고 말았다. 욱신거리는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던 중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 있는 에리얼이 살짝 놀란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두 가지의 혼란스러움이 덮쳤다. 하나는 내가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 안절부절 못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짙고 깊은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사랑스러움이라는 것이었다.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나는 에리얼의 공격적인 어투에 당황해 뭐라고 변명해야 하는지 즉각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심심해서 엿듣고 있었다고? 그거 뺨 맞기 좋겠는데. 반 쯤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도진이가 있는 힘껏 찌푸리고 있는 얼굴도 보였다. 와우.

 “지금 엿듣고 있던 거야?”

  그녀의 커피색깔 눈동자가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눈썹도 추켜세워져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음, 내 말은. 아! 네 별자리가 뭔지 아니? 마샤가 물어보라고 해서.”

  어째서, 왜 하필!

 “뭐라고?”

 “아니, 내 말은 무, 물 좀 마시려고 나왔는데 어디서 말소리가 들려 와서. 맞아. 그렇지 않아도 노크하려던 참이었어! 어, 어라? 도진이라고 했었지? 함께 있었네?”

  더듬지만 않았어도 잘 넘어 갈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졸지에 남의 대화나 엿듣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었으니, 그야 말로 내 첫인상은 최악이겠지. 하지만 예상 외로 에리얼은 나를 비난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계속 노려보기는 했지만 행여 내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일까 연거푸 소매로 눈가를 닦는 뿐이었다.

 “무슨 일 있어? 괜찮아?”

  내가 예의상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며 말했다. 이런. 가만이나 있으면 절반은 갈 수 있었을 텐데. 에리얼을 어색하게나마 다독여 주려고 손을 뻗자 그녀는 무심하게 손을 쳐 내었다. 매섭게 쳐내는 바람에 손등이 얼얼했다. 에리얼이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신경 쓸 바는 아니잖아? 이만 비켜 줄래?”

  까칠하네. 에리얼은 나를 옆으로 밀쳐 내고 살 껍질이 벗겨지도록 눈가를 비벼대었다.

  나는 결국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그녀를 따라 다시 모두가 모여 있는 장소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도진이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계단 위로 올라가 버렸다. 이런. 편하게 지내기에는 다 틀렸네. 어쩌다 보니 얻게 된 오명. 도진에게는 그렇다 쳐도 에리얼에게만큼은 밉상으로 남기 싫었다. 그냥, 그냥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을 뿐이다. 단지 그 뿐. 마치 한 눈에 반해버렸기라도 한 듯이.

  나답지 않게 그녀를 의식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에리얼은 또다시 나를 놀라게 만든다. 시무룩해져 구석에 혼자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누구보다 밝고 환하게 웃음을 보이며 마샤와 올리버, 보르, 환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한 그 미소가 아름다워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안 돼. 정신을 차리자.

 “그러니까 지금까지 아무도 지상 위로 나가 본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지?”

  에리얼은 나를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럴듯하게 지어낸 미소를 보였다. 그 웃음이 인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웃는 모습이 인상 깊은 아이는 처음이었다. 나는 제일 끄트머리의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괴며 과연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 보았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위니는 인상을 팍 구긴 채 거의 눕다시피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아마 아직까지도 에리얼의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아름다운 웃음을 띠며 다정하게 말을 꺼내었다.

 “마샤의 말대로 일종의 이벤트 같은 것이라면 분명 정말 대단한 후원사가 뒤에 있을 거야. 왜냐하면 시시한 이벤트로 끝내기에는 이런 세트장이 너무 아깝잖아? 어쩌면 마샤의 말대로 카메라가 달려 있을지 몰라.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서른두 명이나 되는 인원에 이렇게 넓고 근사한 아지트가 있는 것만으로도 그냥 단순한 장난이 아닌 것이 분명하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심심한데 확실하게 이겨 주자고!”

 “그래, 거 참 말 한번 시원하게 하네!”

  보르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나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빤히 관찰해 보였다. 분명 도진과 이야기 했던 때와 달라도 너무도 다른 태도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화적인 태도에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 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내 생각에는 일단 밖을 나가봐야 할 것 같아. 그래야 먼저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어? 원래 싸움은 먼저 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게다가 난 여기서 미적거리며 시간 끌 생각은 추호도 없어!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고. 아마 페인트 총으로 하는 서바이벌 같은 것일 거야. 난 이런 거 예전에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정말 재밌을 것 같지 않니?”

 “그러면 지금 당장 다 같이 나가서 지도라도 그리는 거야?”

  환이가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질문에도 에리얼은 도리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과연 그녀는 내게도 그런 상냥함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에리얼의 생글 생글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잠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니, 환이야. 그러게 되면 너무 위험 부담이 커.” 그녀가 비영어권인 환이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단어와 단어 사이를 정확히 발음 해 주며 대답했다.

 “만약 그러다가 적이라도 만난다면 그 수가 얼마든 간에 아무래도 곤란해지겠지? 그래서 함부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행위는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 눈에 띄기도 쉬우니까. 매뉴얼에서도 생존자가 세 명 이하라면 자동적으로 그 팀은 탈락이라고 했으니 무엇보다도 생존자 수를 많이 확보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무작정 덤비기 보다는 신중하게 전략을 짜보려고. 나는 이런 거 꽤 좋아하거든. 마치 전쟁 같잖아!”

 “그렇다면 에리얼은 제일 먼저 무엇을 할 생각이야?”

  보르가 장난스럽게 말을 물어 보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척이겠지.

  그 때 그녀의 시선이 내게 닿는 순간. 온 몸에 섬뜩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혀 다른 의미로의 감정이 날카롭게 고동치고 있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지만 단순한 직감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긴 속눈썹에 펜으로 그린 듯 한 도드라진 눈매, 그저 흘겨보았을 뿐인데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내게는 그 이상으로 의미가 되새겨졌다. 나도 왜 내가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당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게 차갑게 굳은 표정이 나에게서 먼 산을 보고 있던 위니에게로 옮겨졌다.

 “위니가 가는 거 어때? 위니는 뭐랄까 이런 면으로 어울릴 것 같은데.”

  그녀가 씩 웃으며 말하자 그는 벌레라도 씹은 얼굴로 에리얼을 돌아보았다.

 “무슨 수작이야?”

  위니가 거의 노려보다시피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에리얼은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은 이내 풀어지며 다시 친절하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수작이라니? 나는 단지 네게 부탁을 하려는 것뿐이야. ‘여왕님’으로서.” 에리얼이 유난히 한 단어를 강조하다시피 힘을 주며 말했다.

 “게임이 일찍 끝날수록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커질뿐더러 더 빨리 편해 질 수 있어.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우린 한 배를 탄 사람들이잖아. 그러지 말고 나 좀 도와줘. 아까 전의 일로 마음이 상했다면 사과 할게. 나도 갑작스러웠던 탓에 혼란스러웠거든.”

 “빌어먹을,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너 말 참 예쁘게 한다.”

  마샤가 중얼거렸다.

 “잠깐 밖으로 나가서 바깥 전체적인 지형을 살펴와 주고 올래? 역시 기본적으로 지리적인 방면으로 박학다식해야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될 수 있는 거잖아. 한 번 크게 질러 보자고! 그래서 중요한 부분을 네가 맡아 주었으면 해.”

  그녀가 공손하게 차분차분히 말을 이었다. 어째서, 나는 이상한 과대망상에라도 빠져 있는 것 같다. 처음부터 그녀는 위니를 밖으로 나가게 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직선적으로 요구하기 보다는 회의적으로 그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려는 것 같았다. 문득 과연 에리얼이 원하는 것이 이것 전부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단순한 연기를 너머선 것이라면, 이 문 밖에서의 에리얼과 안에서의 에리얼. 이면적인 면모를 보이는 그녀는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 혼자 하라는 거야?”

 “싫어?” 그녀는 살짝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근처 몇 바퀴만 돌다와. 삼 일 이내로만 돌아오면 되니까 말이야.”

  위니는 미간을 찡그리고 자리에서 말없이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그녀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놓치지 않았다. 위니는 생각 이상으로 굽히고 들어오는 그녀의 태도에 딱히 따질 만한 건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그녀를 건들인 그의 잘못이므로 계속해서 트집을 잡고 늘어진다면 그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다. 잠시만, 삼일이라고?

  만약 내가 그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까지의 추론으로 이것만은 확실했다. 첫 번째로는 이건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 이에 관해 에리얼과 도진이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내막을 알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녀가 저런 살벌한 ‘연기’를 할 만큼 무엇이 있다는 것. 두 번째, 그녀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녀의 얇은 얼굴 아래에 수많은 가면이 드리워져 있다는 점.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녀는 결단력이 있었고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 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며 행동력이 빠르다. 그리고 그런 그녀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에리얼, 할 얘기가 있어”

  나는 자리에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어 보았다. 한창 마샤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에리얼이 나를 빤하게 쳐다보았다. 경계심 어린 그녀가 나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 어색한 미소를 유지해야 하나? 나는 마치 작은 야생고양이를 어르듯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대하였다. 에리얼은 필히 나를 멀리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방금 전, 접근하지 말았어야 할 도진과 에리얼의 영역을 허락 없이 건들었을 뿐더러 지금 그녀의 행동으로 보아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마샤나 올리버에게 말할 생각이 없다. 나 또한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순 없지만 그녀가 그런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싶었다면 그를 억지로 보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설사 그가 원한다고 했어고 위니를 붙잡아 얼마나 상황이 위급한지, 또 얼마나 위험한지에 관해 설명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라면 그럴 것 같았다. 아니, 혼자서 이 안전한 기지를 벗어나 지상 위로 나가라고 권유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승리를 원한다면.

  도진과 에리얼의 대화 내용으로 이 게임은 결단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받아 들였다. 하지만 온 피부로 느낄 정도로 실감은 나지 않았다. 단순히 말장난 같은 느낌이 들어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세상은 가끔 상식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니까. 그리고 더욱 말도 안 되는 그녀의 말에 믿음이 가는 것은, 정작 스스로 지원한 나조차도 이 땅 밑으로 어떻게 들어 왔는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게다가 게임도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도 아니잖아?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래. 너도 알잖아. 방금 전 말이야. 물론 네가 자리를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다른 애들까지도 번거롭게 할 이유는 없지.”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까? 마샤, 올리버, 환, 보르야. 각 개인의 방에서 지도 한 장 씩 가지고 왔지?”

  그녀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그런 에리얼에게 섭섭하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런 서운함보다는 예상치 못한 그녀 자체에 더 흥미가 갔다.

 “눈 감고도 훤히 어디든 갈 수 있을 정도로 일종의 탐방을 하다 오는 거야. 한, 지금이 오전 9시 쯤 되니까 한 시간이면 지하 3층 까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겠지? 그럼 난 먼저 나가볼게. 에반이 긴히 할 얘기가 있나봐.”

  에리얼은 할 말만 딱 부러지게 하고서는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먼저 나와 버렸다. 함께 나가자고 제안 한 것은 나인데, 먼저 가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에반이라고 했던가? 한 번 잘해봐!”

  한숨을 쉬고 있었을 무렵 마샤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랐으므로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잘해 보라니, 뭘 말이야?”

 “에이, 너무 빼면 재미없다고. 한 눈에 알아보겠던데? 역시 남의 연애사가 제일 재미있다니까! 우리에게 최고의 재밋거리를 보여 줘. 목표물을 너무 높게 잡은 것 같긴 하지만 높은 나무의 사과일수록 쟁취감이 있지. 그렇지, 환이야?”

  나는 그제 서야 마샤의 의도를 알아 차렸다. 이거야 원, 그렇게 눈의 띄었나.

 “음? 에반은 사과 따러 가는 거야?”

  마샤는 환이의 말을 무시하기로 작정했나 보다.

 “그래도 에리얼이 순순히 응하는 것 보면 너를 싫어하지는 않나봐.”

 “어, 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나는 공연히 시끄러워 지기 싫었으므로 잡아뗐지만 마샤가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리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미 그 어설픈 레이더망에 돌이킬 수 없이 걸려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알았어, 알았어. 하지만 그녀가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렇게 시간 끌어서는 안 되겠지? 매너가 아니잖아, 마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시간을 내어 달라는 이유는 네가 생각하는 거 다음으로 할 얘기가 있어서야. 너무 관심 갖지 말아 달라고.”

 “아, 그래?” 또다시 마샤가 번뜩였다.

 “보르야, 올리버 그리고 환아. 우리 다 같이 에반과 에리얼을 위해서 자리를 비켜 주자. 우리 어디부터 갈까? 아, 배고픈데 위층 식사 실에서 아침이라도 만들어 먹자. 생각해 보니까 지금껏 물 한 모금 대지 않았으니까.”

 “아, 난 그냥 더 자고 싶을 뿐인데.”

  올리버가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마샤가 양 팔에 올리버와 보르의 팔 하나씩 부여잡고 원치 않는 과잉 친절을 보이며 문 앞으로 멈춰 섰다. 어렵사리 손잡이를 돌렸다.

 “어머, 에리얼? 그럼 나중에 보자. 여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을 것 같거든! 우린 식사 실부터 가볼 거야. 아, 한 시간 후에 거기서 만나자. 나는 착하니까 아침 차려 놓을게. 천천히 이야기들 나눠.”

  그녀가 요란하게 무대에서 퇴장했다. 어리둥절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환이는 그만의 특유하게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도진이가 어디에 있는 줄 아니?”

  그가 느릿느릿하게 물어 보았다. 환이에게 미안하지만 단순한 질문이었음에도 그가 영어로 말한 건지 아님 다른 언어로 물어 본건지 혼동 되었다. 나는 말 대신 검지를 위로 추켜세웠다. 그게 더 환이에게 이해하기 빠를 것 같았다.

 “아, 위층?”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안!”

  환이야. 도대체 이안은 누구니?

  이제 고요한 침묵이 도는 지하 2층에는 그녀와 그리고 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반쯤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문을 열어 주위를 살피려던 차였다. 바로 옆에서 에리얼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뭐야?”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3 퓨리어스(FURIOUS) 12 2017 / 7 / 31 263 0 9054   
12 퓨리어스(FURIOUS) 11 2017 / 7 / 31 285 0 4599   
11 퓨리어스(FURIOUS) 10 2017 / 7 / 31 295 0 15158   
10 퓨리어스(FURIOUS) 9 2017 / 7 / 31 274 0 6083   
9 퓨리어스(FURIOUS) 8 2017 / 7 / 31 278 0 7420   
8 퓨리어스(FURIOUS) 7 2017 / 7 / 31 279 0 3194   
7 퓨리어스(FURIOUS) 6 2017 / 7 / 31 281 0 1605   
6 퓨리어스(FURIOUS) 5 2017 / 7 / 31 289 0 5505   
5 퓨리어스(FURIOUS) 4 2017 / 7 / 31 290 0 14725   
4 퓨리어스(FURIOUS) 3 2017 / 7 / 31 303 0 9509   
3 퓨리어스(FURIOUS) 2 2017 / 7 / 31 297 0 14878   
2 퓨리어스(FURIOUS) 1 2017 / 7 / 31 280 0 21186   
1 퓨리어스(FURIOUS) 0 2017 / 7 / 31 457 0 7282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네메시스 (NEMESIS)
HANNAH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