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은 준비를 마치고 자신이 배정된 예배당 쪽 홀로 갔다. 홀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벽에는 브리티아를 상징했던 과거 얼굴들의 눈들이 에밀을 따라갔다.
궁에 들어오자마자 에밀이 예배당 쪽을 지원한 것은 바로 이 초상화들이었다. 소녀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처음에 이곳을 유심히 봤었는데, 에밀이 기억하는 옷을 입은 인물은 없었다.
나중에 에밀이 안 것은 이곳에 걸리는 초상화들은 직계나 왕이나 대공 등의 직위에 있던 굵직한 인물들의 초상화가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 후 에밀은 방계를 찾는 방안으로 찾는 방법의 길을 틀었다.
예배당 홀에 도착하자 그녀가 제일 늦은 것 같았다. 언뜻 보아도 이곳을 담당하는 궁인들이 거의 다 와 있는 것 같았다. 에밀은 또 이름뿐인 그녀의 동료들이 저들끼리 공모하여 자신을 난처하게 하기 위해 이 상황을 꾸몄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고, 역시나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얘, 넌 왜 맨날 늦는 거니. 뒤로 들어왔으면 이렇게 해도 되는 거니.”
익숙한 얼굴이지만 이름을 모르는 한 궁인의 뾰족한 목소리가 에밀의 귀에 닿았다. 에밀은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녀들이 또 무슨 트집을 잡을까 속으로 삼켰다.
뾰족한 목소리를 가진 궁인, 케이라가 에밀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어느 덧 성큼 다가온 그녀는 에밀 앞에 섰다. 케이라는 에밀을 위‧아래로 쭉 훑어보며 말했다.
“기본 예법도 안 되어 있고, 일도 잘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얼굴만 반반하고 할 줄 아는 건 영 없어서 대충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겠는데…”
에밀은 케이라의 말에 어떤 의도인지 알 거 같아 눈살을 찌푸렸다.
“너처럼 뒤로 들어오는 애는 뻔해. 들어왔던 방법으로 이곳에서 살아남으려고 하겠지. 나이 많은 영감님의 손길도 마다하지 않겠지. 중앙홀로 진출할 날만 기다리는 거 아냐?”
에밀은 그녀의 노골적인 말과 케이라 본인도 뒤로 들어왔으면서 누구한테 뭐라 하는 건지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뭐라 한들 바뀌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케이라를 쳐다볼 뿐이었다. 자신은 목표를 이루고 나가면 이곳을 어차피 미련 없이 나갈 테니까 자신의 인생에서 이런 애는 여기 잠시 뿐일 것이라고 속으로 에밀은 되뇌였다.
케이라는 에밀이 별 반응 없이 무표정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지 또 툭 내뱉듯이 말했다.
“아니면 네 어미가 열심히 비비고 다녀서 얻은 자리니? 그래서 너도 네 어미한테 그런 거 배우고 들어와서 한 몫 차지하려고 하는 거 아니니? 그 어미엔 그 자식이 나온다잖니.”
그 때 에밀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에밀은 고아 출신으로 어렸을 때 가족이 없다는 것에 유난히 예민했다. 후에 가족이라는 느낌의 사람들이 그녀 곁에 함께 했지만 에밀은 무언가 완벽하지 않고 어딘가가 공허한 것은 피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가족은 피를 나눠가진 혈족의 의미이니까.
가족에게 영문도 모른 채 버려진 것도 서러운 데 누군지도 모르는 어머니의 욕을 한 것에 에밀은 속이 끓기 시작했다.
게다가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자식을 매정하게 버린 어머니와 같은 인간으로 취급한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어미였다면, 자신의 자식을 그렇게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에밀은 번뜩이는 눈으로 케이라의 팔을 끌어 자신의 앞으로 데려왔다. 케이라는 에밀의 불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을 보고 겁이 났지만 여왕의 체면을 구길 수 없어서 반항하였다.
“왜 이래? 미쳤어? 한 대 칠려고?”
에밀의 일렁이는 눈은 고요해지지 않고 케이라를 계속 쳐다보았다. 케이라는 에밀의 시선도 무서웠지만 그녀에게 잡힌 팔의 악력이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속으로는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자존심에 다시 마음과는 반대로 말했다.
“그래 쳐봐. 쳐 보라고! 나한테 생채기 하나 나는 순간 네가 어떻게 될지 나도 궁금하니까.”
에밀은 케이라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더 들어갔다. 그리고 에밀의 눈에는 케이라의 가는 목이 들어왔다.
저 얇고 가느다란 목. 한 손에 잡혀서 힘을 주면 부서져 버릴 거 같은 목이 말이다. 비틀어버리면 한 번에 틀어질 거 같고 비명도 못 지르고 갈 거 같은데 그렇게 가면 너무 시시할 거 같았다.
잠깐의 고통에 영원한 잠은 케이라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고통과 괴로움으로 얼룩져 제발 생을 마감하게 해달라고 울부짖는 그런 모습이 어울렸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는 않지만 계속 반복되는 과거의 악몽들과 어두운 부분들은 사람을 미치게 할 것이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하나쯤은 지우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고, 피하고 싶은 과거 하나 즈음은 있을 테니까 말이다.
목을 비틀어 생이 끊기게 하기에는 주위에 보는 시선들이 많으니 그 편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에밀은 생각했다. 그리고 케이라의 팔을 놓고 손을 잡았다. 케이라는 자신의 팔이 자유로워지자 에밀의 마음이 바뀔까 얼른 자기 쪽으로 팔을 당겨왔다. 그러나 케이라는 자신의 팔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도 전에 다시 에밀에게 손을 잡혔다. 아까와 같이 엄청난 힘이었다.
“뭐…뭐…뭐야!”
카이라는 덜컥 겁이 나 자신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었다. 카이라와 에밀을 둘러싸고 있던 궁인들은 말려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에밀이 케이라의 안을 보고 헤집기 위해 집중하려고 눈을 감으려 할 때 였다.
“그만.”
여자치고 진중하고 묵직한 목소리에 그 곳의 궁인들이 모두 그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예배당이 있는 탑 쪽의 궁인들을 담당하고 있는 레아 부인이었다. 그녀는 에밀과 대립하고 있는 케이라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궁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궁인들은 그들을 담당하는 윗사람의 말에 놀라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그녀를 맞이했다.
“도대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여기서 뭐하는 짓이냐.”
레아 부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신성한 장소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정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너네도 참 대단하구나.”
레아 부인은 예배당 안에 천장과 벽에 가득 그려진 신과 성인들의 모습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끼리 티격태격 불화를 보인 것에 대해 비꼬았다.
궁인들은 레아 부인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며 열을 맞춰 서 있을 뿐이었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면서 이러는 건 엄연히 너희들의 문제다. 보통 때 같으면 벌을 줄 테지만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이에 대한 벌은 다음으로 일단 미루겠다.”
레아 부인의 등장으로 냉정함을 찾아 열에 맞춰 서 있던 에밀은 레아 부인의 말에 고개를 약간은 갸웃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었다.
도통 그녀 주변의 동료들은 그녀를 구렁텅이에 넣기만을 원할 뿐이라 중요한 날의 정보를 알려주지 않으니 눈치껏 알아야 했다.
오늘 같은 경우에는 시간도 원래 일 하던 시간보다 이른 시간으로 바뀐 듯 한데 그 이유가 레아부인이 말한 ‘어떤 날’ 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곧 왕의 탄신일 겸해서 외부 손님이 온다는 뜻에서 어떤 특별한 날인 것일까.
“여길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아이가 누구냐?”
레아 부인의 갑작스런 질문에 모두 바짝 긴장했다.
레아부인의 성품으로 보아 특정한 인물을 찾는다는 것은 아마 2가지의 경우 일 것이다. 그 일을 잘 처리했기 때문에 보상을 해주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못 했기 때문에 벌을 주는 경우이거나.
서로 눈치를 보며 레아부인이 말한 담당하는 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 때 케이라가 말했다.
“보통 저희가 다 같이 하는데, 여기 에밀 패트릭이 들어온 지 별로 안 돼서 그런지 열의가 넘쳐 한동안 그녀 주도 아래 5명이서 정리하였습니다.”
에밀은 케이라가 아까의 복수를 하려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레아 부인이 벌을 줄지 상을 줄지는 모르지만 일단 에밀을 책임자로 내세우고 보는 것이었다. 만약에 벌을 주는 것이라면 에밀이 책임자임을 강요할 것이며, 반대로 상을 주는 것이라면 에밀의 주도 아래 하였지만 자신들의 역할이 컸다고 강조할 것이다.
케이라의 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에밀은 생각했다. 억울한 면이 없지는 않았으나 에밀 자신은 여기에 계속 있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상과 벌점에 별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말주변으로는 케이라를 이길 자신도 없었다. 에밀은 그저 원하는 바를 알 때까지만 이 궁에 붙어있으면 되었다.
“…”
레아 부인은 그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생각을 마쳤는지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게 분담을 한 것이 어느 정도 되었느냐?”
“약 두 달은 되었습니다.”
“그 5명은 앞으로 나와 보거라.”
레아부인의 말에 그녀가 가리키는 궁인들이 앞으로 나왔다. 에밀도 그들을 따라 레아부인 앞에 섰다. 그러나 그 수는 네 명밖에 되지 않아 레아부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다섯 명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네 명 밖에 되지 않았다.
“5명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한 명은 어디 있는 게냐?”
레아 부인 앞의 네 명 중 앨리스 라는 궁인이 말했다.
“한 명은 지금 며칠 째 병가로 쉬고 있습니다.”
“…”
레아 부인은 또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무엇이 그녀를 생각하게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고민한다는 것은 꽤 높은 분의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에밀은 생각했다. 정확히 어떤 요구였는지는 몰라도.
“그 아이와 제일 가까웠던 아이가 있느냐?”
“병가를 낸 궁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병가를 낸 소피아도 워낙 말이 없고 맡은 일만 묵묵히 하는 편이라 친구라고 할 만한 궁인을 딱 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네 명 모두 고민하던 중, 케이라가 먼저 선수를 쳤다.
“워낙 조용하고 무뚝뚝한 이라 특별히 친한 이는 없고, 최근에 에밀 패트릭과 자주 얘기를 나누는 건 봤습니다.”
에밀은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에밀이 소피아와 나눈 대화라면 일에 관한 사소한 대화뿐이었다. 심지어 너무 적어서 기억을 일일이 다 할 정도였다.
예를 들면, 여기 닦아야 하지 않을까?, 여기 먼지가 있는 거 같은데?, 그 걸레는 빨아서 다시 여기를 닦아야 할 거 같은데…, 거기 눈에 띄는 부분이라 얼룩 남으면 안 될 거 같은데… 등이었다.
최근에는 소피아가 아파 보이는 것 같아서 내가 대신 할게 라던지 쉬고 있어. 아니면 소피아의 손에 쥐어진 먼지 털이나 천조각을 뺏어서 내가 할게. 등의 말 정도뿐이었다.
“에밀 패트릭?”
레아 부인이 말했다.
“예.”
“나를 따라 오거라.”
에밀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