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겹살을 앞에 두고, 나온 이 밤.
지하철역 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는 나.
이 계단을 올라 지하철역의 끝에 다다르면 나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겠지.
내 절친, 황마리.
그녀라는 것을 분간할 수 있는 증표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볼.
지하철역 편의점에서 산 추파춥스 두 개를 양 손의 족손가락 사이에 끼고,
사탕을 입에 문 그녀.
시크한 그녀의 말투.
“그 남자 잘 보내줬어? 너도 하나 먹을래?”
그녀는 잠바 주머니에 마꾸 쑤셔 넣어둔 열 개가량 되는 사탕 중 하나 꺼내 줬다.
바닐라 맛.
그토록 달달하던 게 오늘은 독약처럼 쓰게만 느껴진다.
갑자기 통통한 내 두 볼에도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렇지? 겨우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는데…”
마리는 사탕 두알은 이미 모두 씹어서 소진했고,
두 개의 껍데기를 홀라당 벗겨서 입에 사탕을 넣었다.
“비주얼이 마음에 드는 거겠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 나 배고파, 마리야”
갑자기 마리의 눈빛이 달라졌다.
“잠깐, 너 아까 오겹살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
“응... 다 못먹고 나왔어. 그 남자가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열폭해서 나갔거든!”
갑자기 마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기가 남았는데.. 가게에서 나왔다?!”
그녀는 헛웃음을 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마리는 개거품을 문 것처럼 흥분했다.
사탕을 하나 꺼내서 우기적우기적 씹는 그녀의 범상치 않은 모습.
족펀치를 가다듬는 마리.
“그 새끼... 살날이 얼마 안남은 것 같아서 곱게 보내주라고 한건데,
고기가 불판에서 타고 있는데, 가게에서 나왔다? 헐.. 완전 개사이코네..”
그래, 그게 우리한테 용납되는 상황이 절대 아니지!
마리는 급히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저녁 11시. 신호음이 가지만, 받지 않는 경철 오빠.
그녀는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절친 가게 주인에게 핸드폰을 빌려 나왔다.
“네, 황경철입니다”
마리가 목소리를 바닥에 훅 깔았다.
“나다.. 너 내 전화는 안 받더라…”
“어, 마리야!”
당황한 경철 오빠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달된다.
“니 친구 완전 쓰레기던데?!”
“뭔 소리야? 둘이 오늘 또 무슨 일 있었대?!”
“걔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어!”
마리가 소리를 지르자, 지나가던 한 청년의 발목이 꺽였다.
발목보다 기가 꺽인것이지.
마리의 육중하고도, 우렁찬 소리에!
헉.
다시 떨리는 경철 오빠의 음성.
“뭐가...”
“어떻게 고기가 남았는데, 가게에서 나올 수가 있어?! 그게 인간이야? 지 아픈 것도 참아줬는데!!”
“아파서 급히 나온 거겠지, 걔 원래 바빠”
“그게 할 소리야? 당장 지연이한테 둘이 찾아와서 고기 다시 사줘!”
“뭐?! 이 시간에?”
경철 오빠의 수화기 너머로 얽히고설켜 술집에서 놀고 있는 잡종들의 잡음이 들어왔다.
‘황 과장 얼른 들어와, 자기 차례야!’
마리가 코웃음을 쳤다.
“너 또 술집이냐? 너희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까? 니네 아버님 카톡 쓰시는 것 같더라!”
“아니야, 아니야. 절대 오지 마.
오늘은 내가 정말 중요한 비즈니스라 안 되고, 내일 동철이랑 얘기하고 연락할게!”
마리는 수화기를 끄고, ‘으쓱’ 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눈가에 맺힌 하찮은 눈물 방울들이 눈곱으로 촉촉이 굳어갈 것 같았다.
“내일 넷이 담판 짓자!”
나는 마리를 ‘와락’ 껴안았다.
너밖에 없어, 사랑한다 친구야!
“고마워…!”
“그렇게 마음에 들면 일주일이라도 사귀어 보면 되잖아,
원래 못 먹는 감이 미련이 큰 법이거든! 낼 한번 다시 찔러보자!”
다음날,
어게인 강남역.
삼 일 만에 다시 이곳에 왔군.
경철 오빠는 도저히 우리 집 근처까지 갈 시간이 없다고 했다.
육즙이 죽이는 고깃집이 강남역 근처에 있는데,
강남으로 오면 마리가 원하는 만큼 사주겠다고.
그건 남자의 기본 매너라며 경철에게 이차까지 쏘라고 단도리 한 마리는
결국 강남역에 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웬만한 강북 돼지 고깃집은 다 가 본 마리는 은근 들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겠다는 의지.
강남역 7시.
오늘은 캐쥬얼한 옷으로 입었다.
하늘색 티셔츠에 청바지, 이제 나다운 것 같다.
명품 원피스에 거들이 뭐람.
나 같은 억압을 싫어하는 도외지 신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구.
어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생각을 했다.
그 탓에 회사에서 졸다가 김부장의 눈알 째림을 실컷 당했지만,
이제 완전 아이 돈 케어!!
고기집 사건도 쿨하게 잊었다,
변기 위에서 경악하던 그의 얼굴도 궁둥이의 요염한 자태도 선명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자발적 이기주의자이자 단세포!
고구마 줄기 끄트머리를 잡는 심정으로,
혹시나 그의 나의 반쪽인데, 시한부를 완치하여,
나에게 매일 저녁 고기를 구워줄 수 있는
그런 남성으로 거듭날지도 모른다는
만화적 환상으로 강남역으로 슝슝 향하고 있다.
마리와 나, 경철, 동철 왕자님.
오늘 우리는 넷이 만나기로 했다.
일단 마리와 이십 분 전에 카페에서 만나서 계획을 짜기로 했다.
마리는 모카 프라푸치노를 시켰는데,
생크림이 다른 지점의 반밖에 안 된다고.
‘점장’을 불러내 꿀돼지처럼 화를 내며서 클레임을 했고,
마리의 포스에 멸치 같은 남자 점장은 벌벌 떨었다.
마리는 머그잔에 생크림을 한가득 받아서 뿌듯한 표정으로 ‘훅훅’ 수저로 퍼먹었다.
이 세상에 그녀의 입술에 훌훌 묻힌 생크림을 보고,
크림 키스라도 해 줄 남자가 있다면
사후에 천당 맨 앞자리를 찜할 수 있을 것이야..
“머리털이 빠지거나 눈알이 쾡하지 않아서 같이 다는 일이 자랑스러운 그런 비주얼.
그걸로 약 반년이라도 너랑 사귈 수 있는 건강 상태일 경우에.. 사귀는 거 어때?”
나의 귀한 친구, 마리가 말했다.
“응! 알았어. 그걸 어떻게 확인하지?”
“음... 오늘 다시 소맥을 말아줘 봐. 오늘도 못 견디면 끝내는 거로 하자! 쿨하게”
갑자기 침울해졌다. 그 정도로 사랑을 확인해야 하는 이기적인 세상, 그게 뭔 사랑이란 말인가.
“싫어! 싫어!”
강하게 거부하는 내 주둥이로 마리는 생크림 한 주걱을 넣었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잘생긴 남자와의 사랑도 이토록 달콤하겠지!
경철 오빠는 차가 막혀서 조금 늦는다며, 약도를 보내줬다.
우리는 고깃집에 도착했다.
같은 고깃집, 다른 느낌.
동철씨를 위해 굽던 ‘오겹살’이 메뉴판에 없었다.
예감이 좋다.
어제와는 다른 분위기일 것 같은 예감.
“아저씨, 여기 삼겹살 사인분 주세요!”
나에게 묻지도 않고 마리가 주문한다.
“에피타이저로 조금만 먹고 있자. 점심 먹고 아무것도 안 먹었거든”
마리의 뱃살이 꿈틀거렸다.
주인님, 배고파. 탄수화물 좀 투척해줘!
아직 마리의 입술에 생크림이 촉촉하게 묻어서 굳어져 가고 있었다.
마리는 씹는 음식이 아니면, 먹은 거로 여기지 않는다.
그때, 우리의 레이더망에 잡힌 그 놈.
바깥에서 쭈뼛거리는 한 남자.. 황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