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일찍 귀은은 스타다나와가 있는 강남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5층 사무실에선 기자 몇 명이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상에서 컴퓨터를 두들기며 기사를 쓰고 있던 후배기자들이 우르르 일어나 인사를 했다.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선배 나오셨습니까.”
“선배, 일찍 나오셨네요. 커피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선배, 방송사랑 탑급 연예인 동향은 취재보고 인트라넷에 올렸습니다. 훑어보시고 지시 내려주세요.”
대머리의 아저씨 하나는 “진마리 웰컴”을 외치며 박수를 쫙 쳤다. 다른 기자들의 행동을 눈여겨 본 결과 귀은은 그가 국장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귀은을 통유리로 된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떻게 됐어?”
“...뭐...뭘요?”
“나도 들은게 있다구. 자기, 양욱 특종 잡았다며. 그것도 40대 사모님과 가슴 미어지게 아픈 불륜. 그래, 사진은 찍은 거야?”
불륜? 양욱과 새엄마 희주를 두고 하는 말인가? 도대체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인걸까. 귀은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아직이요.”
“그래. 그래. 천천히 해, 천천해. 확실하게 잡아야 크게 터트리지. 양욱의 불륜이면 이것만큼 엄청난 건수도 없을테니. 진마리 너는 또 악명을 떨치겠구나. 그러고보면 너랑 양욱이는 참 악연도 질기긴 하다”
귀은은 귀가 솔깃했다. 국장의 입에서 또다시 양욱과 진마리의 과거가 나와주길 바랐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내일 알지?”
“네?”
“양욱이 주연하는 ‘안개의 저편’ 제작발표회 날이잖아. 거기 양욱도 오는데 진마리가 가줘야지. 밑에 애들 보내려고 했는데 그래도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게 나올지 모르잖아.”
“저보고 거기 가라구요?”
“그럼, 가서 파이팅 하라구!”
휴직계를 내려고 했지만 국장은 입을 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양욱건에서 지금 손을 뗀다면 국장은 다른 기자를 붙일게 틀림없다. 할 수 없이 귀은은 악마기자 ‘진마리’로 기자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양욱의 집에 돌아와 귀은은 자신이 휴직계를 내는데 실패했음을 실토했다. 양욱은 일이 귀찮게 됐다며 대놓고 짜증을 부렸다.
“정말 당신한테 보디가드를 붙여달란 거야?”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제 몸은 제가 지켜요.”
“그럼, 왜 일을 그만둔다고 안한거야?”
귀은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양욱과 희주의 불륜에 대해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혜나는 그들옆에 앉아 시들어가는 화초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양욱 당신이 연상의 여인이랑 바람이 났다고 추측들을 하고 있어요.”
“뭐?”
“내가 여기서 손을 떼면, 양욱 당신과...혜나 어머니의 관계가 모두 까발려질지도 모른다구요.”
양욱의 눈에 분노의 빛이 일렁거렸다. 그가 주먹으로 탁자를 쿵 내려쳤다. 혜나가 그제야 화초에서 눈을 거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희주 누나는! 희주 누나와 나는, 절대 그런 관계가 아니야. 희주누나는 그런 더러운 추문에 휩쓸려도 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구. 희주누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이야.”
양욱은 희주에 대한 말이 나오자 이성을 잃었다. 귀은은 그의 마음에 새엄마 희주가 깊이 박혀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귀은의 마음에 왠지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럴만도 혀. 새엄마는 내가 봐두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이니께.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니께 울 아버지두 목숨 바쳐 사랑허셨겄지.’
똑똑. 서재문을 두들기는 소리. 강릉댁이 간단한 군것질거리를 들고 들어왔다. 달콤한 케이크와 야채즙, 우유와 커피였다. 양욱은 제일먼저 야채즙을 집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건강에 그는 민감한 남자였다. 이어 그는 따뜻하게 데핀 우유를 집어 혜나에게 건네려했다.
“혜나는 흰 우유 안먹어요. 바나나맛만 좋아한다구요.”
아차, 또 실수다. 양욱이 입가에 녹즙을 묻힌채 차가운 눈으로 귀은을 노려보았다. 강릉댁도 귀은을 놀랍다는 듯 바라봤다.
“진기자님이 그새 혜나랑 많이 친해지셨나보군요.”
“예...여기 말벗할 사람이 혜나뿐이라...”
양욱은 입가에 비웃음을 지우고 귀은의 코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귀은의 눈동자를 잠시 응시했다. 이 남자가 왜 또 이러나.
“혜나는, 말문을 닫은지 5년째요.”
“네...그..그렇다고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애가 바나나우유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소?”
머리를 굴려야해.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자. 귀은은 열심히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그러니까...그러니까....제가 우, 우유를 사줬더니 안먹더라구요. 그리고 바나나 우유를 가리켰어요.”
“언제말이요? 혜나는 여기서 나간적이 없소.”
“...아까요. 답답해서 바람쐬러 같이 요 앞 편의점에 다녀왔어요.”
양욱의 표정이 다시 사납게 바뀌었다.
“정신이 있소? 혜나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다시는 내 허락없이 혜나를 데리고 나가면 안돼!”
그의 서슬에 귀은은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화가 나 관자놀이에 힘줄이 선 양욱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더욱 남성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귀은은 주책없이 뛰는 자신의 심장을 책망했다. 이 심장은 내것이 아니야. 진마리의 것이야.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