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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49일,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7.20

평탄한 성공 가도를 걷다 한 순간에 실패자로 전락한 승완. 삶을 포기한 그녀 앞에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악마라 칭하는 남자. 그런데 이 남자, 망자를 앞에 두고 엉뚱한 말만 한다. "새 인생은 즐겨. 날 유혹하는 건 대환영이고." 49일간 같은 이름의 전혀 다른 인물이 된 그녀. 게다가 전생의 인물들까지 엮여버린 상황에서 승완은 자신과 관련된 무서운 비밀을 발견하는데... (autor_ester@naver.com)

 
021. 그 사람이랑 더는 엮이지 마요
작성일 : 17-07-29 20:45     조회 : 228     추천 : 0     분량 : 7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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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 - 26)

 

 "으음, 뭘 입는다?"

 

  오래간만에 깊은 잠을 자고 개운하게 일어난 승완의 얼굴이 오렌지꽃처럼 말끔하게 피어났다.

  전날 겪은 큰일은 마치 꿈속의 일이었던가 싶을 만큼 상쾌하고 심지어 설레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원피스는 대놓고 데이트 같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번보다 두 배는 더 고민됐다.

  어제 이준에게서 고백에 가까운 달콤한 위로를 들은 터라 발그레 달아오르는 뺨을 가릴 수가 없었다.

 

 "에이, 너무 신경 쓴 티는 내지 않을래."

 

  승완은 손에 들었던 민트색 원피스를 내려놓고 흰 리넨 셔츠와 물이 빠진 연한 청바지로 간단히 차려입었다.

  이준은 어떤 옷을 입고 나올까, 지금쯤 일어나 준비하고 있을까, 머릿속에 떠다니는 질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우주 최강 천하장사 눈꺼풀에 패한 뒤, 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거기서 잠이 들어서는. 어우, 창피해."

 

  가뿐한 기분으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머리맡에 병가처리 했다는 이준의 메모가 없었다면 아마 모든 걸 꿈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좋았을걸."

 

  물론 이준의 능력으로 옮겨졌겠지만, 외간 남자 앞에서 세상모르고 잠든 자신을 생각하니 부끄러워 몸이 사라질 것 같았다.

  펑펑 울다 잔 것에 비해 눈이 많이 붓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눈을 살피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잠시 감상한 승완은 감탄을 내뱉었다. 탄탄한 피부결, 적당히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몸매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역시 젊은 게 좋다. 머리카락을 묶어 올려도 구부러져 떨어지는 모양이 다르니까.

 

 "머리카락은 올릴까, 내릴까?"

 "난 내린 거."

 "그래. 내리는 게 더... 으악!"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순순히 수긍하던 승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로 나가떨어졌다.

 

 "너, 너, 뭐, 뭐야?"

 

  어버버, 자연스럽게 말이 더듬어지는 것이 꼭 세찬이 된 기분이었다.

  승완의 얼굴 앞에서 허리를 구부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쥔 이준이 싱긋, 웃으며 상큼하게 대답했다.

 

 "뭐긴 뭐야. 데이트 코디해주는 중이지."

 

  연두색 리넨 셔츠와 복숭아뼈가 보이는 짙은 청바지로 멋을 낸 이준은 데이트룩의 정석이라 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말끔히 드러낸 이마와 눈이 시원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 했으니, 그의 데이트룩은 이미 일찌감치 완성되어 있었다. 무릎이 튀어나온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해도 빛이 났을 거다.

 

 "난 원피스가 더 좋지만, 오늘은 남자의 로망인 흰 셔츠와 청바지로 만족할게."

 

  나름 커플룩이겠는걸, 하고 중얼거리는 이준의 얼굴이 마치 탄산수처럼 상쾌해 보였다.

  이쯤에서 승완의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주 불안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그 무언가.

 

 "너 설마 옷 갈아입을 때부터 있었던 건 아니지?"

 "뽀뽀도 한 사이에 뭘 새삼스레."

 "뽀, 뽀뽀는 무슨!"

 

  뱃속에 뱀이 똬리를 틀고 앉은 듯 능글맞은 태도에 승완이 발끈해 소리쳤다. 그러자 싱글싱글 웃음이 가시지 않았던 이준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날 덮쳐놓고는 자기는 잊어버렸다?"

 "내가 널 왜 덮쳐!"

 "기억 되찾게 똑같이 재생해줘?"

 

  침대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두 팔로 승완을 가둔 이준이 성큼 다가왔다. 훅, 하고 들어오는 그만의 스킨 향이 아찔하게 코를 찔렀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밀착한 상태에서 승완이 피할 곳은 등 뒤밖에 없었다. 그러나 섣불리 뒤로 물러났다가는 도리어 벽이나 침대에 막혀 잡아먹히기에 좋았다.

 

 "아, 아니. 미안해."

 

  그래서 승완은 급히 꼬리를 내리고 사과했다. 어쩐지 억울했지만 지금 당장 살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이준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는 동그란 이마에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이만하면 그로서도 많이 양보한 셈이어서 승완은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야?"

 "시간이 아까워서."

 

  승완이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을 다듬는 모습을 침대에 앉아 구경하고 있던 이준이 승완의 가방을 챙겨 그녀 옆에 섰다.

  어깨에 겨우 닿는 여자의 동그란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은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집에서부터 같이 나가려고."

 

  그에게 어깨를 붙잡힌 채로 공간이 어그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승완은 생각했다.

 

 '이건 또 무슨 신개념 데이트지?'

 

 

 *

  서늘하다 못해 닭살이 돋을 만큼 추운 영화관 안에서는 차가운 공기보다 더 간담 서늘한 장면이 계속되고 있었다.

  자꾸만 눈살이 찌푸려지는, 피가 낭자한 장면을 보다 못한 이준이 고개를 돌려 승완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달콤한 캐러멜이 입혀진 팝콘을 입에 넣는 중이었다.

 

 "안 무서워?"

 "별로."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번에는 콜라를 쪽 빨아들인 승완이 무심히 답했다.

 

 "에이."

 "왜?"

 

  이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차자, 그제야 스크린에서 눈을 떼서 그에게 향하는 승완이다.

 

 "꺄악, 하고 나한테 달라붙는 걸 기대했건만."

 

  이준이 아랫입술의 속살을 삐죽 드러내 보이며 승완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승완은 피식, 비웃으며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피도 잘 보는데 저런 게 뭐가 무섭겠어."

 

  그 무덤덤한 말에, 그 무감한 표정에 이준의 장난스러운 몸짓이 멈칫, 하고 서버렸다.

 

 "그건 너무 슬프잖아."

 

  어울리지 않게 습기 어린 목소리에 승완이 고개를 돌렸다. 제게 말하는 이준의 눈빛이 너무 아파 보여서 승완은 도리어 당황했다.

 

 "뭐야, 당사자인 나도 괜찮은데 왜 네가 더 슬퍼해?"

 

  영문을 모르는 승완이 어찌 대응해야 할지 난감해 머리를 긁적였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왜 저리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지, 승완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인 척해도 애초에 그는 악마였다.

  누가 보면 천사, 혹은 수호천사라도 되는 줄 알겠다.

 

 "아픔에 무뎌지지 마."

 "나 되게 예민한 여잔데."

 "억지로 참아내려고 하지도 마."

 

  귀가 고장 난 건가, 하고 승완은 생각했다. 조용조용 속삭이는 말이 스피커를 찢고 나온 비명을 덮어버린 탓이다.

  웅웅거리는 소음 사이로 이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그녀의 귀를 파고들어 머릿속에 울렸다.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해."

 

  어쩐지 그 말은 승완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덤덤한, 그러나 눈물에 흠뻑 젖었을 때만 나올 수 있는 습기 어린 목소리가 그랬다.

  승완은 처음으로 이준의 삶이 궁금해졌다. 악마로서 누굴 만나고 어떤 일을 겪기에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니 안 좋은 건 아예 보지 말자."

 

  이준의 커다란 두 손이 승완의 얼굴 잡아 스크린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 보지 말고, 신경도 쓰지 말고, 그냥 나 자신만 바라보자.

 

 "듣지도 말고."

 

  승완의 턱을 받치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녀의 두 귀를 막았다.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잘 아는 척, 수군거리는 소리는 그냥 무시해버리자.

  머리카락을 넘겨 말끔한 선을 그린 이마가 콩, 소리를 내며 동그랗고 하얀 이마에 닿았다.

 

 "내가 어떻게 하라고 했지?"

 

  학생이 이해한 내용을 확인하는 선생님처럼 묻는 이준의 낮게 깔렸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를 발견한 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내렸다. 붉은 꽃잎이 내려앉은 승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안 좋은 건 보지 말고, 듣지 말라고."

 "그리고?"

 

  승완의 말소리에 맞춰 두 눈에 사이좋게 입술 도장을 찍은 이준의 입술이 미끄러져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매끄러운 목소리에 비해 그의 숨은 뜨거웠다. 귓가에 닿은 숨결에 놀란 승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귓불에 닿은 뜨겁고 촉촉한 감촉은 승완의 신경을 마비시켰다. 그녀는 지금 제가 숨을 들이쉬어야 하는지, 내쉬어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 무뎌지지 말고..."

 "또?"

 

  이번에는 반대편 귀를 찾아가 묻는 이준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그르릉, 고양이가 내는 것과도 같은 소리였다.

  도둑처럼 살며시 벌어진 붉은 입술이 승완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그 야릇한 감각에 승완은 꾹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 참지 말라고."

 

  두 주먹을 움켜쥐고 겨우 말을 끝낸 승완의 몸이 무너지듯 이준의 가슴에 기댔다. 더는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기분 좋은 울림이 두 사람 모두에게 퍼져나갔다.

 

 "착하다."

 

  이준의 커다란 손이 승완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그 애정 어린 손길에 승완은 파르르르, 떨리는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고 위로한 것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댄 것도.

  이준의 입술이 다시금 제게 내려오는 것을 느끼며 승완은 눈을 감았다. 입술에 닿는 달콤한 향내는 기억에는 없지만, 언젠가 맡아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

  영화가 끝나자마자 화장실을 핑계로 도망쳐나온 승완은 벌게진 얼굴에 부채질하느라 바빴다.

 

 "미, 미쳤나 봐, 백승완."

 

  아무리 데이트라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입술을 맞대다니, 그녀로서는 몸이 베베 꼬일 만큼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준은 괜히 악마가 아니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결국 그녀를 꼬여서 입술을 바치게 했으니 말이다.

 

 "정신 차리자, 승완아."

 

  앞으로 남은 시간을 계산한 승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그녀 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승완이 다시 도망칠 준비를 했다.

 

 "스, 승완아!"

 "어, 세찬이?"

 

  금방이라도 달릴 자세를 취한 승완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장 차림이 아닌 세찬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몸에 달라붙는 검은 셔츠와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를 세련되게 차려입은 세찬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승완이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모, 몸은 괜찮아?"

 "응. 푹 쉬었더니 말짱해졌어."

 

  승완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자 세찬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 다행이다. 그, 그보다 오늘 무, 무슨 날인가 봐."

 "왜?"

 "조, 조금 전에 수, 수빈 주임님도 봐, 봤거든."

 

  세찬이 입가에 손을 대고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수빈 주임님이 여기 오셨다고?"

 "으, 으, 응. 아, 아무튼 나, 난 먼저 가, 가볼게."

 

  누굴 찾는지 아까부터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세찬이 찾던 사람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세찬에게 손을 흔들어준 승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수빈이 여기 오는 건 제 알 바 아니었지만, 그녀 혼자 온 게 아니라면 말이 달라진다.

 

 "누구랑 얘기했어?"

 "아무것도. 그보다 우리 얼른 나가자."

 "어, 어, 잠깐만."

 

  뒤늦게 사람들과 함께 쏟아져나온 이준이 사라지는 세찬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하지만 승완에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승완의 노력은 시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어머, 이준 대리님!"

 "아, 수빈 주임."

 "영화 보러 오셨어요?"

 

  수빈의 밝은 목소리가 승완의 귀청을 때렸다. 바로 뒤통수 부근에서 이준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수빈은 기분이 상당히 좋은 듯했다.

  어쩔 수 없이 승완은 표정을 가다듬고 몸을 빙글 돌려세웠다.

 

 "안녕하세요, 주임님."

 "어머, 승완 씨도 있었네요."

 

  승완을 발견한 수빈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러나 승완은 그녀의 곁에 선 남자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주었다.

 

 "아, 여기는 제 남자친구예요."

 "안녕하세요, 정유혁입니다."

 "조이준입니다."

 

  이준과 인사를 나눈 유혁은 승완에게는 고개만 끄덕였다. 승완의 고개는 빳빳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수빈의 눈이 두 사람이 나누는 인사 아닌 인사를 포착했다. 그녀는 모른 척, 승완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두 분이 같이 영화 보러 오신 거예요?"

 "아, 그게, 우연히..."

 "데이트하러 왔습니다."

 

  승완의 말허리가 뚝 끊어졌다. 그녀는 자신을 대신해 답한 남자에게 눈알을 부라렸다. 그러나 구렁이 과의 악마는 그저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의 매서운 눈빛을 묵묵히 받아낼 뿐이었다.

  이럴 때는 회피가 최고다. 승완은 일단 화장실로 도망친 다음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

 

 "백승완 씨."

 

  그런데 하필 수빈도 화장실로 따라 들어와 그녀를 불러세울 줄이야. 역시 이준을 끌고 밖으로 나갔어야 했다.

 

 "내 남자친구 알죠?"

 "네."

 "역시 백승완 씨는 그 사람과 달리 솔직해서 좋네요."

 

  수빈이 도톰한 입술을 시원스럽게 끌어올렸다. 그 말인즉슨, 유혁은 승완과의 관계를 숨겼단 이야기. 그리고 수빈은 이미 그 사실조차 알고 있다는 것도 포함된다.

  물론, 제 선임이 26살짜리 신입의 몸에 들어가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충고 하나 할게요."

 

  수빈이 승완의 옆에 서서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그 사람이랑 더는 엮이지 마요."

 

  쏴아, 하는 물소리와 수빈의 단호한 목소리가 동시에 승완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 사람이 보험을 들어달라고 하든, 밥을 먹자고 하든 백승완 씨가 거절해요."

 

  승완은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애인이 있으면서 다른 여자에게 수작을 부리는 건 유혁이었다.

  심지어 수빈도 한 달 전만 해도 그의 세컨드가 아니었던가?

 

 "왜 저한테 그 얘길 하시죠?"

 "왜냐니..."

 "제가 거절해도 계속해서 앞에 나타나는 건 주임님 남자친구 분인데요."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싶지 않아 거울을 보며 따져 묻는 승완의 눈초리와 목소리에 날이 섰다.

 

 "따끔하게 혼이 날 사람은 그쪽 아닌가요?"

 

  거울 너머로 꽤 당돌한 승완의 태도를 놀란 눈으로 쳐다본 수빈이 곧 한숨을 내쉬었다.

 

 "헛똑똑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네."

 "지금 저더러 헛똑똑이라고 하신 건가요?"

 "똑똑하고 야무진 줄 알았더니, 정작 말귀를 못 알아들어 하는 말이에요."

 

  옆 벽면에서 티슈를 뽑은 수빈이 잘 관리받은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그녀의 어투는 전혀 승완을 혼내는 투가 아니었다.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 그것도 저보다 어린 여자에게 접근한다는 사실이 기분 나쁠 법한데도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보험으로는 엮이지 마요. 차라리 내가 아는 사람을 소개해줄 테니."

 

  돌돌 말린 티슈가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으로 쏙 들어갔다.

  빙글, 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려세우기 직전, 수빈이 승완에게 직접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내 말 흘려듣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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