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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49일,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7.20

평탄한 성공 가도를 걷다 한 순간에 실패자로 전락한 승완. 삶을 포기한 그녀 앞에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악마라 칭하는 남자. 그런데 이 남자, 망자를 앞에 두고 엉뚱한 말만 한다. "새 인생은 즐겨. 날 유혹하는 건 대환영이고." 49일간 같은 이름의 전혀 다른 인물이 된 그녀. 게다가 전생의 인물들까지 엮여버린 상황에서 승완은 자신과 관련된 무서운 비밀을 발견하는데... (autor_ester@naver.com)

 
017. 술 취한 여자는 위협적이지
작성일 : 17-07-29 20:34     조회 : 244     추천 : 0     분량 : 6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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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 - 28)

 

  한 주의 절반도 채 지나지 않은 평일 저녁임에도 선술집은 사람들이 내는 기분 좋은 소음으로 가득했다.

  예전에는 집에서 혼술하는 데 만족했던 승완이지만, 요즘은 여럿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어제 동기들과 위에 들이부은 술이 다 해독되기도 전에 이번에는 홀로 선술집을 찾았다.

 

 "와니와니! 여기야."

 

  널찍한 창가 자리를 선점한 여자가 손을 흔들어 승완을 불렀다.

 

 "보나야. 일찍 왔네?"

 "짜증 나서 확 칼퇴하고 옴."

 

  보나는 어린 승완이 중학교 때부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친구다. 말과 행동이 다소 거친 면은 있으나 속정이 깊어 승완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인 그녀는 얼마 전 보험사에 취직했다.

  승완이 자리에 앉자마자 보나가 잔에 맥주를 채워주었다. 살얼음이 목넘김에 청량감을 더했다.

 

 "일은 어때? 할 만해?"

 "그럭저럭. 너는?"

 "말도 마. 그만두지 못해 다닌다."

 

  보험사 텔레마케터인 보나는 가입 상담부터 보험금 청구, 불만 접수, 계약 해지까지 전방위의 문제를 도맡는 해결사였다.

  직접 대면하지 않고 전화선으로만 대응하다 보면 사람들은 상대가 받을 상처는 생각하지 않고 제 불만만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고객이라는 이름의 철방패 뒤에 숨어 갑질에 폭언도 서슴지 않는 몰상식한 이들도 적지 않다.

  할 말은 하는 성격의 보나로서는 일단 덮어놓고 사과부터 해야 하는 제 처지가 충분히 답답할 만도 했다.

 

 "많이 힘들어?"

 "이게 다 SDK 보험사 놈들 때문이야."

 

  대답 대신 한 번에 잔을 비운 보나가 탕,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내리쳤다. 그 정도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입이 얼얼할 만큼 매운 낙지볶음을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SDK 보험사라면 유혁이 근무하는 회사다.

 

 "거기가 왜?"

 "그놈들이 작년에 생명보험의 사망보험금을 올려버리는 바람에 고객들이 줄줄이 해지하잖아."

 

  아, 작년 말에 국내 보험 업계 1위인 SDK에서 임의로 보험보상금 액수를 올리는 바람에 다른 보험사들에서 협의 위반이라며 들고 일어났던 기억이 있다.

  이를 두고 지금껏 보험사들의 불공정 담합을 묵인해온 것이라느니, 독과점과 대기업의 횡포라느니 말이 많았지.

  유혁도 승완에게 정책이 바뀌기 전에 얼른 하나 더 들어두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였다.

 

 "자기들이 왕이라 떠받드는 고객이 싫어서 떠나시겠다는데 어쩌라고?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자기들이 보험금을 높게 책정하든가. 왜 나한테 지랄이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피해는 소비자와 말단 사원이 받게 되어 있다.

  승완의 경우, 병원에는 잘 가지도 않는데 대폭 오른 보험료를 울며 겨자 먹기로 내야 했다. 그리고 보나는 이런 처우에 화가 난 소비자의 불만 접수와 상사의 실적 압박에 이중고를 겪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승완이 할 수 있는 건 하나, 잔을 높이 드는 것뿐.

 

 "에잇, 마시자!"

 "그래. 마셔버리자!"

 

  속상할 땐 역시 언제든 불러내 술 한잔할 수 있는 동네 친구가 최고다.

  조용히 맞장구를 치며 푸념을 들어주든, 걸쭉한 욕을 시원하게 뱉어주든 나에게 공감해주는 상대가 있다는 건 크나큰 위로니까.

  왜 자신은 지금껏 이런 친구 하나 만들지 못했는지, 승완은 제 지난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혼자 남은 건 그녀다.

 

 -다음 소식입니다. 지난달 보도해드린 '피의 손수건 뺑소니'에 쓰인 차량이 약 한 달 만에 인근 야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선술집 안쪽에 놓인 대형 TV에서는 저녁 뉴스가 한창이었다. 화면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아나운서는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입이 매운지 손으로 부채질하며 맥주를 연신 들이켠 보나가 한 보도에 관심을 가졌다.

 

 "아, 나 저 뉴스 봤어."

 "뭔데?"

 "인적 드문 거리에서 난 뺑소니 사고였는데, 피해자가 손에 든 하얀 손수건이 피에 흥건하게 젖어서 '피의 손수건 뺑소니'라고 부르더라."

 "으으, 이상해."

 

  손수건이 흥건하게 젖으려면 도대체 피를 얼마나 흘려야 하는 거야?

  제 손목을 감싸본 경험이 한두 번이 아녔던 승완은 두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으려 했다.

 

 -주민의 신고 때문에 발견된 차량은 사고 당일 도난 차량으로 등록되어 있었으며, 바퀴에서 묻어나온 피해자 남성의 혈흔 덕분에 뺑소니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헐, 도난 차량이래."

 "그럼 작정하고 친 거 아냐?"

 

  잔뜩 찌푸려진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렇다면 일반 뺑소니보다 더 심각하고 끔찍한 사건이었다.

 

 -앞서 저희는 이 사건의 피해자가 의식이 없고, 목격자도 나타나지 않아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해드렸는데요. 차량이 발견됨으로써 해결에 한 발짝 다가섰습니다.

 "다행히 살아있네."

 -그러나 사고 지점과 야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CCTV가 설치된 곳이 많지 않아 범인 색출에는 난항이 예상됩니다.

 

  승완은 화질이 좋지 않은 CCTV에 잡힌 하얀색 SUV 차량을 유심히 쳐다봤다. 차가 움직이는 모양을 보기만 해도 끼이익, 하고 타이어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쩐지 저 차,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야. 언제 봤지?"

 "에이, 우리나라에 차가 몇 대인데."

 "그런가? 하긴 범인도 금방 잡히겠지. 세상에 완전 범죄는 없으니까."

 

  고개를 갸웃하며 기억을 더듬던 승완은 보나의 손사래에 금세 수긍했다. 하지만 보나는 이번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이구, 요즘 대한민국 돌아가는 꼴을 봐라."

 "무엇이 됐든 언젠가 다 밝혀지게 되어 있어."

 

  바로 얼마 전, 유혁이 한 짓이 그랬다.

  수빈의 말과 행동에 따르면 두 사람이 만난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그 긴 시간 동안 승완은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불륜은 다른 사람도 아닌 당사자 승완에게 들키고 말았다.

  비록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어도 어떻게 그들에게 빅엿을 선사해줄까, 하는 건 요즘 승완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다.

 

 "너 안 본 사이 좀 시크해졌다?"

 "내가?"

 "깨발랄하고 여리기만 하던 네가 웬일이야? 너야말로 일이 힘든 거 아냐?"

 

  뜨끔, 가슴께에 횃불이 화악 올라왔다. 차가운 냉수 대신 맥주로 속 불을 끈 승완은 얼른 말을 돌렸다.

 

 "아, 나 주완이 만났어."

 "누구? 백주완?"

 

  중·고등학교를 함께 나온 보나는 승완의 7년 짝사랑사를 아는 유일한 지인이기도 했다. 한때는 주완과 승완 사이를 이어주려 오작교 역할을 자처한 그녀다.

 

 "그러고 보면 너희도 참 징하다."

 "왜?"

 "난 너희 사귈 줄 알았어. 네가 이렇게 7년 짝사랑만 할 줄 어찌 알았겠냐?"

 

  그러게 말이다. 그 말랑말랑하고 심심한 연두부 같은 동생 녀석을 이렇게나 오매불망 사모하는 여자가 있을 거라고는 누나인 승완조차 상상도 못 했다.

 

 "내가 보기엔 걔도 널 좋아했던 것 같은데."

 "주완이가 날?"

 "어라, 내가 얘기 안 했어?"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봐도 보나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아니, 애초에 이 몸의 주인은 제 마음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서 주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여력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걔가 워낙 착해서 오는 여자 막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이지도 않았잖아."

 "그랬지."

 "그런데 너랑은 달랐다니까. 매일 웃고, 먼저 장난 치고."

 "......"

 "확실한 건 싫어하진 않았어."

 

  호오, 백주완. 그랬단 말이지?

  교복을 입은 주완이 환히 웃으며 어린 승완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모습이 눈앞에 영상으로 펼쳐졌다. 동시에 주먹만 한 심장이 가쁜 뜀박질을 시작했다.

  화악, 속 불이 다시 도진 승완은 점원을 불러 생맥주 1,000cc를 주문했다. 술이 필요했다.

 

 "야야, 와니. 괜찮냐?"

 "흐우... 조이쥬니 이 나쁜 노호옴. 푸후우우..."

 "조이쥬니는 또 누구야? 나 잠깐 화장실만 다녀올게."

 

  난감한 표정을 한 보나가 서둘러 화장실로 달렸다. 그러나 승완은 손에 쥔 맥주잔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지금 그녀에게는 아예 생각이란 게 없었다.

 

 "저기요, 나는 와니가 아니라요오. 백승와니예요. 스물아호짤 백스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테이블에 한쪽 볼을 대고 누워 맥주잔에 맺힌 물방울을 쓸어내리고 있자니,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흐규? 조이쥬니? 느아 여이 앤니리야? (네가 여긴 웬일이야?)"

 "네가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흐끅?"

 "밤길은 위험하니까."

 

  보나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이준이었다.

  술에 기분 좋게 취해서 그런가. 회사에서의 와이셔츠 복장 그대로 앉아 넥타이를 풀어헤치는 그의 모습은 살짝 관능적으로 보였다.

 

 "특히 술 취한 여자는 더더욱 위협적이지. 지나가는 사람에게."

 "하쮸, 이게!"

 "아야야."

 

  관능적이란 말 취소. 승완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주먹으로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이준의 머리에 딱콩, 꿀밤을 먹였다.

  이준은 머리를 맞고도 뭐가 좋은지 턱을 괴고 키들키들, 웃음을 질질 흘렸다. 아무래도 술에 취한 건 승완만이 아닌 듯하다.

 

 "누구세요?"

 "아아, 보나햐 인다해. 우리 조이쥬니 대리뉨. 흐뷰."

 "안녕하세요, 조이준입니다. 지나가다 승완 씨가 보여서 들어왔어요."

 "네, 안녕하세요. "

 

  조이준? 그 나쁜 조이쥬니? 의심 많은 보나의 눈이 이준을 향해 가늘게 늘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완은 이준의 손에 잔을 억지로 쥐여주고 제 잔과 짠, 부딪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우리 대리뉨, 와니랑 한 잔!"

 "백승완 씨, 이제 집에 가야죠. 벌써 10시입니다."

 

  이준은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까지 써가며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렀다.

  귀여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깜찍한 여자였을 줄이야. 동영상으로 찍어서 두고두고 놀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의 마음일랑 알 리 없는 보나는 난감한 듯 승완을 흔들었다.

 

 "와니, 나 집에 일 생겼다고 전화 왔거든. 택시 불러줄까?"

 "승완 씨는 제가 집에 데려다주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럼 제가 승완이네 집에 전화해둘 테니, 부탁드릴게요."

 

  이준은 승완의 핸드백을 제 어깨에 메고,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아 안았다. 그러나 그의 자세가 영 어정쩡했다.

  한 팔에 폭 감기는 가녀린 허리는 혹 부러지기라도 할까 걱정스러웠고, 자꾸만 축축 늘어지는 몸은 그에게 엉기듯 감겨왔다.

  그녀의 집까지 가는 15분이 1시간은 족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 몸으로 혼자 집에 갈 생각이었어?"

 

  이준의 가벼운 지청구에 승완의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떴다. 혼난다기보다는 챙김 받는 기분이 좋았다. 주완에게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설렘이랄까.

  그래서일까? 승완은 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이 폴짝폴짝, 이준의 어깨를 향해 뛰어올랐다.

 

 "쥬니야! 우리 데이뜌하까, 데이뜌?"

 "데이트?"

 "일욜날 못 해짜나. 아쉬오."

 

  제게 감겨오는 아담한 몸을 여실히 느끼며 이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오늘따라 승완은 이준을 향한 경계를 풀고 허물없이 안겨 왔다.

  평소라면 두 팔 벌려 환영이었겠지만, 오늘은 그녀의 애교가 그리 달갑지 못했다. 오늘은 그가 악마가 아니라, 승완이 마녀였다.

 

 "정신 안 차리지. 내가 누군지 잊었어?"

 

  벌써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이준은 일부러 무서운 척, 승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목소리를 깔았다.

  누군데 그래? 실눈을 뜨고 한참 동안 이준의 얼굴을 관찰하던 승완의 눈이 토끼처럼 땡그래졌다.

 

 "딸꾹!"

 

  제 눈앞에서 보라색 눈동자를 이글이글 불태우는 남자는 바늘귀만큼의 틈만 보이면 훅, 치고 들어오는 위험한 남자였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입과 귀 아래를 가렸다. 평소 이준이 호시탐탐 노리는 9점짜리 과녁이었다.

  마치 겁먹은 유치원생과 같은 반응에 이준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라. 나도 술 취해서 정신줄 놓은 여자는 사양이다."

 

  그러자 또 금세 흐물흐물 풀어져서 이준의 머리를 토닥이며 배시시 웃는 그녀다.

 

 "흐헤, 그래쪄여? 으구, 차카다. 우리 쥬니."

 "나 참, 미치겠네."

 

  이준은 몸보다 정신이 술에 취한 승완을 놀이터 벤치에 앉혀놓고 편의점에 들어갔다 나왔다.

  벤치 위 나무에 흐드러지게 맺혔던 하얀 꽃잎이 서늘한 저녁 바람에 승완의 치맛자락 위로 쏟아져 내렸다.

  숙취해소 음료를 열어 꽃을 잡느라 바쁜 승완의 손에 꼬옥 쥐여준 이준 자신은 얼음컵에 담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냉수 마시고 속이나 차릴 요량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마녀 씨는 이마저도 도와주지 않았다.

 

 "나도. 와니도 그거 듀세여."

 "넌 그거나 마셔. 이건 내 거야."

 "시로시로!"

 

  검지 손가락을 도톰한 입술 위에 얹고서 별이 가득 담긴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낸 승완은 이번에는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

  이준은 그녀가 뻗는 팔을 피해 컵을 번쩍 들어올려야 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칠 만취승완이 아니었다.

 

 "입이가 덥단 마리야아. 나두 어르음!"

 "야, 너... 읍!"

 

  말캉한 보리 맛 푸딩이 이준의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알콜 향인지 꽃향기인지 모를 향긋한 내음과 함께 할짝할짝, 아이스크림을 녹이듯 보드라운 움직임이 이준을, 정확히는 얼음을 사로잡았다.

  빠르게 녹는 얼음과 반대로 꽁꽁 얼어버린 이준이 승완의 몸을 밀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사이, 그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꽃잎처럼 나풀나풀 떨어져 나갔다.

 

 "흐아, 시워네."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헤실헤실 웃음 짓는 승완의 표정은 이보다 더 개운할 수 없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머리와 이미 예열을 끝내고 본열에 들어간 심장의 온도차가 이준을 어지럽게 했다.

  억울함과 뒤엉킨 욕망으로 한층 깊어진 그의 눈동자가 짙은 보라색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먼저 시작한 건 너야."

 

  이준의 손바닥이 다시금 흐느적거리는 승완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재빠른, 그러나 거칠지 않은 손길이 그녀를 이준에게로 데려갔다.

 

 "흐읍!"

 

  승완의 눈이 보름달만큼 커졌다가 목 언저리를 지분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스르르 감겼다.

  벌처럼 날아 나비처럼 승완의 입술 위에 부드럽게 안착한 붉은 입술은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입안에서 계속 굴리고만 싶은 알사탕처럼 달짝지근한 향내가 그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하얗게 쏟아지는 꽃비 아래, 잠시 혼선이 있었던 악마와 마녀 역할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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