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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49일,
작가 : 에스뗄
작품등록일 : 2017.7.20

평탄한 성공 가도를 걷다 한 순간에 실패자로 전락한 승완. 삶을 포기한 그녀 앞에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악마라 칭하는 남자. 그런데 이 남자, 망자를 앞에 두고 엉뚱한 말만 한다. "새 인생은 즐겨. 날 유혹하는 건 대환영이고." 49일간 같은 이름의 전혀 다른 인물이 된 그녀. 게다가 전생의 인물들까지 엮여버린 상황에서 승완은 자신과 관련된 무서운 비밀을 발견하는데... (autor_ester@naver.com)

 
014. 빨리 와서 날 좀 구해줘
작성일 : 17-07-29 20:22     조회 : 242     추천 : 0     분량 : 5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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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 - 32)

 

 "어때요? 맛집이라고 소문날 만하죠?"

 "아, 네. 뭐..."

 

  좀처럼 썰리지 않는 두툼한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짓이기며 미소 짓는 승완의 입꼬리가 마치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레스토랑은 컨테이너를 연상시키는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특히 주메뉴인 안심 스테이크는 감탄을 자아낼 만했지만 승완은 정작 맛을 느끼지 못했다.

  고무를 씹는 것처럼 입안이 무딘 그녀에 비해 앞에 앉은 남자는 연신 미소를 띠며 승완에게 말을 걸었다.

 

 "승완 씨, 혹시 해산물 좋아해요?"

 "싫어하진 않아요."

 

  어정쩡한 답을 건넨 승완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릎 위에 올려둔 핸드폰은 마치 꺼진 것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조이.'

 

  유리창 너머로 줄을 선 사람들이 보일 만큼 유명한 레스토랑에 앉은 승완의 신경은 저 멀리 콩밭에 가 있었다.

 

 "식사 마치고 커피 한 잔 어때요? 그건 승완 씨가 사는 거로."

 

  게다가 제 앞에서 대놓고 눈을 빛내는 남자는 하필이면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유혁 씨, 안 바쁘세요?"

 "전혀요."

 

  승완은 유혁 몰래 한숨을 집어삼켰다. 3시간 전만 해도 그녀의 기분이 이렇게 착잡하지는 않았다.

 

 "이건 너무 신경 쓴 티 나지?"

 

  간밤에 잠을 설친 승완은 일찌감치 일어나 옷장 문을 열었다.

  한 칸을 점령한 파스텔 톤의 하늘하늘한 원피스의 주인은 영락없는 20대 여성이었다. 칙칙한 정장으로 가득 찼던 예전 옷장을 잠시 떠올린 승완은 바로 앞에 걸린 연분홍색 시폰 드레스를 꺼냈다.

 

 "머리를 올리는 것보단 반 묶음으로 내리는 게 더 청순해 보이겠어."

 

  머리카락을 손안에 잡아 높이 올려 들었다가 떨어뜨리자 숱 많은 머리카락이 탐스러운 선을 그리며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곧 승완의 손길에 따라 어깨와 가슴을 덮으며 풍성한 빛을 내뿜었다.

  예민한 성격 탓에 머리카락마저 푸석푸석했던 그녀는 손안에 감기는 보드라운 초콜릿 색 머리카락의 끝을 돌돌 말며 저도 몰래 입꼬리를 늘였다.

 

 "내가 왜 이러지? 그 녀석이랑 만나는 게 뭐라고."

 

  약속 시각이 한참 남은 시간부터 옷을 고르고, 머리 모양을 고민하고, 무슨 가방을 들까 살피는 제 모습이 침대 위에 늘어놓은 원피스처럼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방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아침 햇살과 선선한 공기가 기꺼이 그녀의 부산스러운 손길에 묻은 설렘을 한층 더해주었다.

 

  똑똑-

 "딸, 과일 먹... 세상에, 방이 이게 뭐니?"

 "어, 엄마. 아하하..."

 "누굴 만나길래 이렇게 신경을 써? 데이트하니? 너도 혹시 썸인가 뭔가, 그거 하는 거야?"

 

  썸이라니. 어머니의 입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단어에 승완의 눈이 500원짜리 동전만큼 땡그래졌다.

 

 "썸은 무슨! 그런 거 아니에요. 금방 나갈게요."

 "어머나.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리 놀라나 모르겠네."

 

  문밖으로 사라지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어머니였다. 혹 어머니에게 들릴까 승완은 불안한 눈을 한 채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그 녀석을 신경 쓰고 있다고? 하! 말도 안 돼."

 

  안타깝게도 촉 좋은 승완의 불안감은 집에서 그치지 않았다.

 

 "응? 여기가 맞을 텐데."

 

  약속 장소는 회사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승완의 옛 자췻집과 가까운 쇼핑센터. 주말도 회사에 헌납했던 그녀는 몇 번 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주말을 맞아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그중에서 이준은 보이지 않았다. 만남의 광장 한복판에 서서 승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5분 전이니 기다려보자."

 

  30분이 지나고, 이준에게 전화하려 핸드폰을 꺼낸 승완은 그제야 그의 연락처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약속 장소를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 광장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서성거려봤지만, 그녀는 이준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이준은 굳이 찾지 않아도 발견되는 남자였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는 회사에서뿐만 아니라 어제 산에서도, 병원에서도 통했으니, 이곳에서는 더더욱 그의 존재감을 발산할 터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이쯤 되니 인간이 아닌 그가 뿅, 하고 눈앞에 나타나지 못할 만큼의 사정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미안, 기다렸겠네. 오늘은 피곤해서 안 되겠어. 들어가.'

 

  별안간 익숙하고도 무미건조한 음성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급격히 차오르는 숨을 억지로 내리누른 승완이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핸드폰에 연결했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그녀는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했다.

  그녀는 기다림에 익숙했다.

 

 "아, 다리 아파."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났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각, 저마다의 짝을 찾던 사람들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쯤이면 약속은 파투난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승완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서 있었다. 5분만, 10분만 더 기다리면 이준이 헐레벌떡 달려와 미안하다며 해사하게 웃을 것만 같았다.

 

 "오기만 해봐, 진짜. 껍데기를 홀랑 벗겨 먹어버릴 테니까."

 

  결국, 승완이 적잖이 화가 났는지 팔짱을 단단히 꼈다. 그때, 약이 올라 봉긋 솟은 어깨 위에 턱, 하고 올려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조금 전만 해도 무섭게 치켜뜬 승완의 눈이 반짝, 다른 빛을 냈다. 한껏 올라가는 입꼬리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녀가 짐짓 투정 어린 목소리를 냈다.

 

 "뭐야, 왜 이제..."

 "승완 씨?"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익숙한 목소리에 승완의 표정이 파사삭, 마른 소리를 내며 굳었다.

 

 "와,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무슨 일로 왔어요? 쇼핑?"

 

  승완의 앞에서 유독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는 이는 다름 아닌 전 남자친구, 유혁이었다.

 

 '내가 어쩌다 이 남자랑 밥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러 온 걸까?'

 

  승완이 유혁과 함께 쇼핑센터에 입점한 레스토랑에 들어간 건 순전히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2시간이나 자신을 광장에 세워둔 이준에 대한 반발심도 콩알만큼 더해지긴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혁과 함께 커피까지 마실 생각은 없었다. 그가 저 몰래 밥값을 계산하지만 않았어도.

  자꾸만 알몸과 겹치는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껄끄러운데,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우적우적 씹어 삼킨 소고기마저 위 속에서 제 존재감을 나타낸다.

 

 "승완 씨는 학교 다닐 때 인기 많았죠?"

 "별로요."

 "왜요? 내 눈에는 이렇게 예쁘기만 한데?"

 

  테이블 위에 팔을 얹어 턱을 괸 유혁이 싱긋, 큰 눈을 접어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에게 오늘 승완과의 우연한 만남은 운명이었다.

  마침 볼일이 있어 옛 여자친구 승완의 자췻집에 들렀다가 기분전환이나 할 겸 찾은 쇼핑센터에서 요즘 눈독 들이고 있는 어린 승완을 만난 것이다.

  반면, 승완은 때아닌 소고기 파티로 뒤집힐 것만 같은 속을 부여잡았다.

  이준이 매끄러운 꽃미남형이라면, 유혁은 호쾌한 호남형이었다. 특히 보험 영업을 하다 보니 그는 제 외모와 말로 사람을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의 본모습을 아는 승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글쎄요. 유혁 씨는 저같이 애매한 여자보단 글래머를 좋아할 것 같은데요."

 "글래머러스한 여자는 모든 남자의 로망이죠."

 "아님, 아예 빼빼 마른 삐삐 스타일이신가?"

 

  자신 몰래 침대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수빈은 남자의 로망이라며 뒤로 숨기는 모습이 같잖았다.

  뱃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고기 녀석이나, 앞에서 빙글빙글 웃어대는 이 남자 때문에 속이 잔뜩 메스꺼워진 승완에게는 사이다가 필요했다.

  그래서였다. 자신조차 좋아하지 않는 옛모습을 언급한 것은.

 

 "아, 뭐... 꼭 나쁘진 않지만..."

 

  승완의 말에 유혁의 머릿속에는 그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전 여자친구가 떠올랐다. 볼품없진 않지만 수빈에 비하면 안을 맛이 나지 않는 빈약한 몸매에 성격마저 답답했던 그녀가.

  갑자기 입안이 텁텁해진 유혁은 얼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 헹궈냈다.

 

 '흥, 고소미.'

 

  속이 뻥 뚫릴 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만족이다.

  어차피 이 땅에서 지낼 수 있는 날은 한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 정도 선에서 이 남자 양심에 난 털이나 하나씩 뽑아주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나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개과천선할 수도 있겠지.'

 

  타도 여수빈에 이어 또 하나의 목표가 생긴 순간이다.

  이래 봬도 승완은 선도부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도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을지언정 바람은 피우지 않았다. 그에게 불륜은 용납할 수 없는 3대 악 중 하나였다.

  그러나 승완의 머릿속에서 3대 악을 저지른 교정 대상자가 된 줄은 꿈에도 모르는 유혁은 그저 그녀를 유혹할 계획만 세울 뿐이었다.

 

 '일단 합의를 구실로 계속 불러내고, 어리니까 꽃이랑 선물 좀 들려주면 되겠지.'

 

  40~50대는 물론이고 조금 과장해 10대까지, 여자를 다루는 데는 도가 튼 유혁이었다.

  하필 전 여자친구와 이름이 같은 게 조금 찝찝하지만, 어차피 그녀는 그의 계획을 성공시킬 열쇠 중 하나였을 뿐, 그리 끌렸던 여자도 아니었다.

 

 "유혁 씨는 참 잘 웃으시네요."

 "아,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웃는 게 매력적이라고."

 

  곧 유혁의 만면에 얼음물처럼 청량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에게는 보여준 적 없던 그 미소가 승완의 가슴에 돌연 아프게 박혔다.

 

 '여수빈 너는 매일, 매 순간 이 미소를 봤겠지.'

 

  한 때나마 진심으로 사랑한, 평생 함께하고자 했던 그의 미소를 독차지한 수빈이 밉기보다는 부러웠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이거요? 남자친구가 해외여행 갔다가 선물해줬어요.'

 

  승완이 진정 바랐던 건 비싼 해외 화장품이 아니었다. 그 작은 물건 안에 담긴 유혁의 마음이었다.

  고개를 숙인 승완이 띄운 희미한 미소가 늦가을 빛에 바랜 마른 낙엽처럼 버석거렸다.

 

 "그보다 연락은 왔어요?"

 "연락이요?"

 "아까부터 계속 연락 기다리는 것 같던데."

 "아..."

 

  승완은 그제야 카페에 들어와서도 무릎에 얹어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나 해 사내 네트워크에 들어가 이준의 연락처를 알아낸 그녀다. 레스토랑에서 그에게 문자를 남겼지만, 전화가 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그는 승완이 보낸 문자조차 읽지 않은 듯하다.

 

 '조이,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광장에서 이준을 기다릴 때만 해도 나타나기만 하면 정강이를 걷어차 주리라, 굳게 다짐했던 승완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보다 더 늦어도 좋으니, 오늘 안에 그녀 앞에 뿅, 하고 등장한다면 용서해주기로.

 

 '그러니까 빨리 와서 날 좀 구해줘.'

 

  그러나 승완의 바람과 달리, 이준은 주말이 다 가도록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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