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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천사의 딸
작가 : 업무용계정
작품등록일 : 2017.6.30

여신 프레이즈의 성스러운 땅 오를레앙 왕국, 평범한 시골마을의 처녀 라벤더와 그 남동생 헨리는 마을을 둘러싼 산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가진 이들을 만나게 된다. 오직 거룩하게 살고 싶었던, 선으로 남고 싶었던 우리들의 소리.
영혼을 먹는 '마녀',마녀를 사냥하는 '수정회', 그리고 '무언가',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가장 잔인한 방식에 대한 이야기.

 
01.Puella et pure
작성일 : 17-07-24 16:02     조회 : 296     추천 : 0     분량 : 9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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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침착성은 여자에게 자랑거리로 충분했다. 고고한 나무와도 같이, 깊은 밤의 달빛과도 같이, 여자는 강했다. 여전히, 영원히, 남자는 그런 여자를 물들일 수 없었다. 아아, 여전히 깨끗한 나의 사람. 남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가녀린 손끝이 남자의 손등에 닿았다. 단순한 자극에도 피부는 소스라쳤다. 그림자들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순식간에 그림자들은 여자의 허리께까지 올라왔다. 여자는 동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자의 특성이었다. 온전히 여자만의 힘이었다. 남자로서는 평생을 바라 가지고 싶어했던 것이었다.

 

  가엾은, 아아,

 

  작은 탄식이 여자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남자는 얼굴을 덮은 손을 심하게 떨었다. 입술이 부들거리며 몇 마디를 내뱉었다.

 

  아니야, 더는 말하지 마.

 

  그러자 여자가 머뭇거렸다. 손가락도 한번 움찔했다. 여자는 선천적으로 침착했고, 기다릴 줄을 알았고, 동요하지 않았다. 남자에게는 숙원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알지 못한다. 선천적으로 침착한, 인내심 있는, 강한, 물들지 않는 여자를, 남자는 동요하게 만든다.

  잠깐 다물린 듯했던 입이 짧게나마 지켰던 침묵을 다시금 깨뜨린다.

 

  가엾은 나의, 나의..

 

  하지만 다음 마디를 말하질 못하고, 여자는 손을 떨어뜨렸다. 남자는 손 사이로 여자를 보았다. 달빛에 피어난 꽃 한 송이,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벚꽃. 아니, 너는 아니야. 여자는 아름다웠으나 연약하지 않았다. 단단하게 등을 곧추세운 나무, 물가의 파수꾼. 그 뿌리가 썩어들어간다 해도 가지를 꺾지 않지. 남자는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마른세수를 해도 수전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남자는 울먹이며 사정했다.

 

  아니야, 이제 말하지 마.

 

  그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는 몰라도, 여자는 기어코 말을 이었다.

 

  가엾은 나의 사람.

  이젠 더는 말하지 않겠지.

 

  남자가 이어받으며 여자의 볼을 잡았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감싸쥐었다.

 

  이젠 더는 말하지 않겠지. 그만 두겠지?

  가엾은 내 사람, 나의,

 

  여자도 남자도 이 다음 말을 감당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시골 마을, 변두리 깡촌에는 의외로 어여쁜 이름이 붙는다. 그런 귀여운 구석이 없어서야 누가 중앙에서 벗어난 공간을 사랑하겠느냐마는.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있든가, 새파란 바다와 맞닿아 있든가, 혹은 봄여름이 되면 오색빛깔 꽃들이 피어난다든지 하는 아껴줄 만한 구석이 없으면 아무도 시골에 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시골의 이름은 그런 매력들을 한껏 담고 있었다. 최대한 자신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이름, 자기의 장점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도시는 천한 이름이라도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시골은 아니었다. 나서서 자신을 꾸미지 않으면 누구도 찾아오게 할 수 없었다.

  동레미 라 퓌셀은 중앙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진 마을은 아니었지만, 도시의 발전과는 영 거리가 먼 농촌이었다. 집집마다 사이가 좋은 것 외에 내세울 만한 매력은 글쎄, 딱히. 마을을 둘러싼 산과 그 숲은 아름다웠지만, 나라에 있는 시골 마을 치고 풍경이 아름답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동레미 라 퓌셀은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동레미란 이름은 어떻게 붙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다만 옛날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로, 산의 명칭이 동레미였다고 추측할 뿐이다.

  라 퓌셀La Pucelle, 실상은 그것이 동레미 라 퓌셀의 명칭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근본이었다.

  소녀라는 뜻. 젊고 싱그러운 처녀. 봄이 오면 초원이 선명한 연둣빛으로 하늘거리고, 수만 가지 꽃이 피는 마을에 딱 걸맞는 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누군가 떠돌이 현자 한 명이 지나다니다가 영감으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신적인 작명을 해냈는지 모를 일이다. 봄 처녀, 순수한 꽃, 빛나는 이름. 동레미 주민들은 모두 그 이름을 사랑했다. 그러나 라 퓌셀이란 이름으로 마을을 부르지는 않았다. 희한하게도 동레미 라 퓌셀이란 이름을 줄여 부르면, 언제나 동레미였지, 라 퓌셀은 아니었다.

 

  라벤더는 그것이 피휘 같다고 생각했다. 액운을 피하기 위한 의식이라고 보았다. 라 퓌셀처럼 신선한 이름을 지어 부르면, 신이 그를 시기하여 마을에 재앙을 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동레미라 부르는 걸 테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렇다고 말해준 적은 없었다. 라벤더 스스로가 하는 추측이었다. 라 퓌셀은 유혹적인 발음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제한을 걸어 두지 않으면 닳아지도록 부를 이름이었다.

  산뜻한 처녀들이 잔뜩인 동네였다. 라벤더도 그 중에 하나였다. 어머니는 라벤더가 태어나자마자, 라벤더의 눈동자가 확 띄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라벤더라고 지었지. 과연 봄에 태어난 아가씨였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라벤더 꽃송이를 눈에 그대로 가지고 온 듯이, 라벤더의 눈동자는 은은한 진보라색이었다.

  보통 자안을 가진 여자애들은 눈꼬리를 위로 세운 고양이과였지만, 라벤더는 달랐다. 확연하게 처진 눈매와 곧게 뻗은 생머리.

  친구들은 라벤더더러 강아지를 닮았다거나, 심하면 토끼처럼 생겼다고 평하곤 했는데, 라벤더로선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나는 좀 세게 생기지 않았니? 표범처럼 말야, 그러면 친구들은 라벤더의 등을 치며 비웃었다. 계집애, 세기는. 키만 컸지, 이걸 봐. 친구들은 라벤더의 금발을 잡아 올렸다. 언제부터 길렀던지, 스물 하나가 된 지금에는 허리 바로 위까지 내려왔다. 옅은 금발을 반만 묶고, 앞머리를 내린 라벤더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천상 여자였다. 표범이라니 퍽이나. 친구들이 재차 깔깔댔다.

 

  "그렇게 내가 순하게 생겼어?"

 

  라벤더는 툴툴거리며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사과나무에 물을 주던 헨리가 라벤더를 돌아보았다. 바라보는 표정이 무덤덤했다. 무언의 동의 같았다. 라벤더는 그런 남동생을 살짝 흘겨보더니 물뿌리개를 확 빼앗아갔다.

 

  "아, 뭐야?"

  "내놔. 내가 할 거야."

 

  어렸을 때도 이렇게 순해 보이진 않았는데. 어려서 본 누나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십 년 전의 라벤더는 조금 더 기가 센 소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헨리는 누나의 변화에 작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라벤더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상냥하고 친절하고 잘 웃는 사람이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욱 처진 듯이 보이는 눈, 한결 사뿐거리는 발걸음. 동네 친구들과 만나면 나오곤 하는 누나에 대한 이야기.

  전에 라벤더 누나 봤는데, 달리기 잘하더라. 달리는데 등 뒤로 머리카락이 막 흩날려. 그러면서 친구는 자기의 짧은 머리 뒤로 손을 흔들거렸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표현하듯이 살랑거리는 손길을 모두가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나 넋을 놓은 것 같은 한 명. 여자애들한텐 관심도 없던 게. 그러나 헨리는 그애가 왜 그러는지 알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라벤더가 리본을 묶은 머리와 치맛자락을 팔랑거리는데, 다른 여자애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야, 너 라벤더 좋아하지?

  어쭈, 친누나라고 라벤더라고 부르는 거 봐. 재수도 좋지.

  최대한 장난스럽게 물어보려던 것이 어정쩡한 돌직구로 나갔다. 다른 녀석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으나, 당사자는 확실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헨리가 자신을 겨냥하고 던진 창살이라는 것을.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라벤더? 암 예쁘지. 뭐 걔보다 예쁜 애는 우리 마을에 많지만, 그 말에 그와 헨리는 번쩍 눈을 들었다. 나무에 기대어 있던 장이 킬킬거렸다. 헨리로서는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었다. 누나가 저 사람하곤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장이 헨리를 쳐다보았다.

  뭘 봐?

  물뿌리개에서 햇빛을 닮은 물방울들이 떨어졌다. 라벤더는 헨리와 티격태격하던 건 잊었는지 지그시 웃으며 나무의 뿌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속눈썹이 처연하게 내리깔리고, 앞머리가 자연스럽게 늘어뜨려지고, 벌어졌던 옅은 분홍색 입술이 움찔 다물어졌다.

  라벤더는 몸을 들어 헨리를 보았다. 라벤더의 보라색 눈은 아버지를 닮았다. 옅은 금발은 어머니를 닮았다. 아버지는 헨리에겐 자기의 짙은 색 금발만을 물려주었다. 어머니 또한 헨리에겐 갈색 눈만을 주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헨리도 라벤더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 색깔만큼은 무슨 짓을 해도 똑같아지지 않을 것이었다. 헨리는 자신의 머리를 문질렀다.

 

  "누나 남자애들이랑 만나?"

  "무슨 말이야?"

 

  못 들을 말을 들었다고, 라벤더가 얼굴을 찡그렸다. 헨리가 싱글싱글 웃었다.

 

  "별로. 우리 라벤더 여신님께 감히 다가갈 용자들이 몇이나 되겠어?"

 

  이번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테다. 화끈 살을 붉히며, 라벤더는 물뿌리개를 꼭 쥔 두 손을 가슴팍으로 올렸다.

 

  "필요 없어! 너 나한테 무슨 말 하려고 하는 거야?"

  "왜 빼고 그래? 정작 걔네한테 그런 말 들으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어머 고마워, 할 거면서."

 

  짐짓 목소리를 높여 자기를 흉내까지 내는 헨리에 라벤더는 사정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헨리를 탁탁 때리다가, 제풀에 지쳤는지 푸스스 웃고 말았다.

 

  "됐고, 내일 숲에 갔다오자. 봐둔 묘목이 있거든. 네가 같이 가면 옮겨오기 쉬울 것 같아."

  "아니, 이렇게 또 짐꾼으로 부리시기입니까, 누님? 제가 어떻게 반항을 하겠습니까? 같이 갑지요."

 

  라벤더는 능청스레 말하는 헨리의 어깨를 툭 쳤다. 아, 물뿌리개로 때리면 다 젖잖아? 헨리가 툴툴댔다.

  남매 둘 다 키가 큰 편이었지만, 헨리는 라벤더보다 데이지꽃 줄기 하나만큼 더 컸다. 언제 이렇게 자랐담? 헨리는 든든하게 성장했지만 라벤더한텐 언제까지나 남동생이었다. 지켜줘야 하는 어린애였지. 이런 자신이 부담스럽진 않을까 라벤더는 늘 고민했다.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미 헨리는 다 커버렸는데, 영영 치마폭에만 감싸고 돌 수는 없다. 아버지도 그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언제까지 헨리 보호자처럼 굴 테냐? 그애도 벌써 열여덟이야. 라벤더는 버릇처럼 입만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요, 아버지.

  알기만 할 뿐이다. 이토록 커버린 동생인데도. 라벤더는 힐끔 헨리를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헨리의 머리칼에 닿아 부서졌다. 동생들은 라벤더에게 계속 동생처럼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헨리와 라벤더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었다. 각각 알아서 서야 할 테지.

  헨리가 요즈음 들어 해대는 질문은 그런 것을 내포하고 있음직 했다. 남자애들을 만나냐, 남자애들이 누나한테 관심 있다. 정말로 라벤더를 선망하는 친구들을 대변해주었다기 보단, 라벤더가 자신의 기억보다 훨씬 커버렸음을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헨리에게 라벤더는 또다른 어머니였다. 그런데 그 넉넉하던 누나가 훌쩍 자라서 친구 녀석들의 눈길을 한몸에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왠지 그애들에게 라벤더를 주기가 씁쓸한 걸 테지. 라벤더의 진실은 하나도 모르는 녀석들일 테니.

  너는 잘 컸어, 라벤더는 그럴 때마다 몇 번씩 말하고 싶었던 것을 참았다, 너도 잘 컸어. 근방의 여자애들은 헨리를 귀여워했다. 키가 커선 허우대 멀쩡하게 생긴 게 장난이나 치고 다니니, 주목을 받는 건 뻔했다. 개구진 웃음으로 지나가듯 던지는 농담이 머릿속에 뱅글뱅글 남아도는 것이다.

  너나 나나 너무 잘 컸구나, 라벤더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둘은 계속 자라나는 중이었다.

 

  평상시에 숲은 그다지 사람이 많은 지역이 아니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행인이라고 해봐야 도끼를 등에 매단 나무꾼들이나 양 한 마리만 데리고 딸랑딸랑 길을 오르는 목자들, 가끔씩 얼굴에 거적데기를 뒤집어쓰고 도망쳐오는 은둔자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니 평범한 사람들의 발길은 더더욱 적었다. 일반인들로서는 마주치면 피곤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숲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치고 편하고 좋은 사람은 없지. 마리우스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특히나 이 성이 위치해 있는 곳은, 전대가 어찌나 은신처를 잘 찾아냈는지, 산을 오르내리는 거친 자들도 잘 찾아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굳이 정원 앞의 숲을 그림자로 뒤덮지 않아도 마리우스의 기척을 차단해 주었다. 을씨년스러운 습기가 성을 막은 숲에 차 있었다. 마리우스는 그것이 고마웠다. 은닉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니 편할 따름이었다.

  단 한 가지 불만인 점이 있다면, 이 아래 마을은 이름 탓인지, 워낙에 착한 사람들 뿐이라, 영양이 부족해지기 시작하면 도시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도시로 옮겨 살기엔 이 성만큼 훌륭한 은신처가 없었다. 안정적으로 숨어 사는 생활을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도시엔 먹을 것은 차고 넘치겠지만, 그만큼 견뎌내야 하는 악취가 지독하겠지.

  기댄 창가 너머로 나뭇가지가 살랑거렸다. 나뭇잎들이 쓸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고요하게 깔렸다. 바람에 부대끼는 나뭇잎 소리면, 더 이상의 음악이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리우스는 눈을 감았다. 이런 자신이 꽤나 궁상맞다고 생각했지만 혼자인 탓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달리 없었다. 궁상맞으면 궁상맞은 걸로 될 일이지.

  가라앉는 바람에 눈을 떴을 때, 마리우스는 마주 앞에 놓인 거울을 발견했다. 내가 언제 나이를 멈췄지? 되짚어봐도 오래 전 일이니 기억날 리가 만무했다. 스물 하나. 마리우스는 노화를 멈춘 자신의 보이는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스물 하나, 대충 그 정도쯤 될 것이다. 밖에 나가면 모두들 그렇게 얘기하니까. 붉은 눈은 멀리 있는 거울에도 선명하게 비쳤다. 볼로타이를 매만지며 마리우스는 창가를 떠났다. 바람이 그쳤고, 숲은 무거운 적막에 휩싸였다.

  비가 올 것 같구나,

  젠장. 마리우스는 고개를 털어냈다. 왜 갑자기 그 목소리가 떠오르는지. 나 자신이 비가 온다고 말해주면 될 것을. 블레어가 물었다, 오빠는 왜 오빠 엄마를 싫어해? 오빤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아? 마리우스가 대답했다. 그냥 그런 거야. 블레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엄마는 보고 싶지 않은 거야? 둘 다 귀여운 애들이었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어가지곤. 제일 어린 블레어는 라라를 잘 따랐다. 블레어는 엄마도 아빠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모르겠구나, 그치만 엄마랑 아빠를 한번 가져 보면 좋아하지 않곤 못 배기는 거야, 속으론 오빠도 보고 싶을걸. 블레어가 배시시 웃었다. 나도 엄마 아빠가 생겨보고 싶다.

  마리우스가 퉁명스레 한 마디 했다. 라라, 그만 좀 해. 나잇살이나 먹고 엄마 타령이 다 뭐야. 오빠라니 웃기지도 않았다-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몇백 년씩 산 애한테 오빠 소리를 듣는 기분이 항상 좋지는 않은 법이다. 라라는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웃었다. 마리우스는 저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이래서 몇백 년씩 나이 먹은 애에게 오빠 소리 듣는 건 싫었다, 라라는 마리우스보다도, 무엇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 나쁘게.

  라라가 말했다, 오빠는 어머니를 싫어하는 게 아닌걸, 평화로운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좋아하는데 볼 수가 없으니까 싫은 척 하는 거야.

  그런 건 마리우스가 잘 아는 사실이었다. 새삼 확인시켜주는 것이 참 악취미였다.

 

  아침에는 비가 올 것 같지 않더니, 라벤더와 헨리가 숲으로 들어오자마자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먹구름이 갑작스레 산 위를 덮었다. 우레소리가 숲을 진동시켰다.

  엄마가 비올 것 같다고 그랬는데 진짜잖아. 헨리가 투덜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목표로 했던 묘목은 채취한 다음이었지만, 라벤더는 확인하고 싶던 것이 있었다. 헨리를 끌어들였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미안했다. 라벤더는 헨리의 등을 툭툭 쳤다.

 

  "그만 내려가."

  "어? 응, 그래. 빨리 가자, 이대로면 진짜 비오겠는데."

  "아니, 너 먼저 내려가. 난 볼 데가 있었거든.."

  "뭐?"

 

  화났구나. 라벤더는 격해진 헨리의 반응에 입을 꾹 다물었다.

 

  "미쳤어? 나 혼자 내려가라고?"

 

  숲으로 이루어진 산이었고, 완연한 흙산이었기에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는 산은 아니었다. 진창길이 미끄럽다 뿐이지. 그러나 헨리로서는 누나가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라벤더는 숲을 잘 알았지만, 숲은 자기를 잘 아는 사람도 상관없이 집어삼켰다. 아무리 원만한 경사라지만, 계곡물이 불어나서 넘친 곳은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었다. 뭣보다 천둥까지 내려치는데 누나를 혼자 두고 산을 내려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라벤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헨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라벤더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알아서 잘 갈 수 있어. 못 믿니? 물 불어나는 데는 다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먼저 내려가."

 

  그러면 나는 왜 내려보내는데?

  목끝까지 차오른 의문을 어쩌지 못하고, 헨리는 묘목만 꼭 쥐었다. 잠깐 찾아온 정적을 천둥이 깨뜨리고, 헨리가 못 이기는 척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대신 빨리 내려와. 뭐가 그렇게 보고 싶다는 거야.."

  "그 묘목 말야. 처음 보는 종류였는데, 분명 이 나무가 모여있는 데가..있었단 말이지. 거기에서 씨가 날아와서 자란 걸 거야...찾아가 보려고."

  "어딘지 기억은 나?"

 

  라벤더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 뭐야? 제정신이야?"

  "얼른 내려가..찾을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그러면서 빨리 가, 하고 라벤더는 헨리의 등을 떠밀었다. 헨리는 떠밀리는 대로 왔던 길로 향하면서도, 계속 라벤더를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라벤더는 헨리가 자기를 돌아볼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한 번 돌아볼 때마다 좀 더 뒤에 서있었던 라벤더가, 완전히 깊은 숲 속으로 사라지자, 때를 기다린 것처럼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톡, 톡, 헨리는 눈을 깜짝하며 하늘을 보았다, 떨어져 내렸다.

  미치겠네.

  헨리는 몸을 돌려 숲 속으로 뛰어갔다. 아마 뒷모습 정도는 찾을 수 있겠지.

 

  마리우스는 정원을 뒤덮은 멀구슬나무들을 사랑했으나, 여름이 되면 그 흥미가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멀구슬나무가 제일 아름다울 때는 봄이다. 멀구슬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성의 정원에 필요한 향기가 모두 충족되었다. 봄은 마리우스에게 빛나는 계절이었다. 정원은 물론이고 성을 가린 숲도 찬란하게 피어나는 시간대였다. 바로 지금.

  아직 멀구슬나무의 꽃이 피기까지는 조금 남았지만, 아직 피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리는 일이 지겹지 않았다. 봄만 기다리고 살기에 나머지 세 계절이 너무도 길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커튼을 걷자 아까부터 들리던 천둥이 슬슬 제 진가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창가를 그은 듯한 흔적이 생겨났다. 어렴풋이 들리던 빗소리가 형체를 갖춰 나갔다.

  라벤더는 길은 몰랐지만 숲은 알았다. 어디에 어느 숲이 있고, 어디에 어느 꽃이 피는지. 라벤더는 숲으로 길을 찾았다. 헨리에게 자신있게 말했던 이유는 그래서였다. 보지 못했던 나무들이 함께 서 있던 숲. 이름 모를 야생화가 피어 있는 들판을 지나서, 떡갈나무들이 서 있는 숲의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면 커다랗게 자란 고목이 맞아주었다. 정확히 어떤 나무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목의 왼쪽 안으로 들어서면, 이걸 봐.

 

 순간. 아까부터 방울방울 떨어지던 비가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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