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다녀올게.”
“뭐?”
“돌아가서 알아봐야 할 게 있어.”
“뭔데?”
“알아보고 나서 나중에 말해줄게.”
그녀의 단호함이 느껴졌다. 신후는 더 이상 말릴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걸릴까?”
“가봐야 알 거 같아.”
“다시 올 거지?”
“그럼. 당연히 다시 오지.”
그녀는 ‘당연히’란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마지막 작업 해볼까?”
“응.”
『구름이 산길 덮어 바람 따라 물결치더니/바람, 하늘에 몰아쳐 눈송이 먼지처럼 자욱하네/강가의 흰 것 모래 아님에도 기러기는 내려앉고/창 밝아 홀연 날이 새니, 시름 많은 사람 겁나게 하네/강남에는 오늘쯤 매화 피었을 텐데......』
신후가 그녀의 시를 낮게 읊조렸다.
“여기까진 이렇게 수정해봤어. 들어 볼래?”
“해 봐.”
『구름이 바람 따라 물결치네요/바람은 눈송이처럼 자욱하네요/창 밝아 문득 날이 샜군요/그댈 향한 내 마음도 눈처럼 피어나네요......』
“어때?”
“눈이 살랑살랑 흩날리는 느낌이야. 정말 좋다.”
“제목은 생각해 봤어?”
“영설(詠雪). 눈을 노래한다는 뜻.”
“눈을 노래한다? 음, 스노우 송!”
옥봉이 떠나야 할 마지막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마지막 구절 생각났어?”
“응.”
“돌아오는 방법 알지?”
“그럼. 가능하면 빨리 올게.”
옥봉의 표정은 담담했다. 신후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마지막이 아님을 안다는 것, 다시 돌아올 기약이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시작해.”
『수평선 아득한 곳에 선 나무 언제쯤 봄을 맞을까』
***
“갔다고?”
“응.”
신후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형, 괜찮아?”
“그럼.”
“하긴 이젠 돌아올 방법을 아니까.”
신후는 나른한 얼굴로 기타줄을 튕겼다. 옥봉과 함께 완성한 ‘스노우 송’이었다.
“좋은데? 둘이 같이 만든 거야?”
“응.”
“형한테 전용 작사가가 생긴 셈이네.”
“그런가?”
“세상에 드러낼 순 없으니 유령 작사가라고 해야 하나?”
신후는 피식 웃음이 났다. 그녀가 없는 지금도 웃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번에 돌아오면 고백할 거야.”
“뭐? 정말이야?”
“응.”
“아이고, 불쌍한 건 우리 민주희 뿐이네.”
재민은 두 사람의 열애설 기사들을 검색해 보았다.
“송기자님 진짜 실망스럽다. 이런 식으로 막 써버리고 말야.”
“야, 요즘은 어떻게 고백하냐?”
“뭐?”
재민이 바닥에 엎드려 웃어대기 시작했다.
“형이 고백하는 거 상상하니까 너무 오글댄다.”
“옥봉인 조선 여자잖아. 조선시대 연애사를 연구해봐야 할까?”
“일리 있는 말이네. 근데 옥봉이 맘은 어떤지 알아?”
“글쎄.”
재민이 모로 누우며 무언가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옥봉씬 여기 오기 전까지 한 사람만 그리며 살았다잖아. 조원인가 뭔가 하는 속 좁은 인간 말야. 옥봉인 죽을 때까지 그 남잘 잊지 못했다잖아.”
“기록상으론 그렇지.”
“과거가 바뀔 수 있을까?”
“음.”
신후도 혼란스러웠다. 떠나간 님을 그리며 죽어간 조선의 그녀가 신후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음을 받아들인다 해도 두 사람의 사랑이 온전히 지켜질 수 있을까.
신후는 다시 기타를 잡았다.
『수평선 아득한 곳, 언제쯤 봄이 올까』
그녀에게 ‘스노우 송’의 마지막 가사를 들려줄 수 있을까. 다시, 그녀가 그리웠다. 그녀는 언제쯤 돌아올까.
***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유리는 자신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 소라의 속내가 궁금했다.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죠?”
“짐작은 하셨겠지만 에단리씨 일이에요.”
“네. 궁금한 게 뭔가요?”
소라의 표정은 무심한 듯 담담했다. 유리는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네요.”
“얼마 전 열애설도 내셨던데요.”
“네, 그랬죠.”
“확인된 사실인가요?”
“어느 정도는요.”
유리도 확실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이런 상황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조급해지는 건지 몰랐다.
“기자님도 아실 텐데요. 민주희랑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거.”
“그런가요? 어떻게 확신하시죠?”
“전 신후를 오래 전부터 알아왔어요. 그 정돈 확인 안 해봐도 알 수 있죠.”
“두 분이 어떤 사이시죠?”
소라는 잠시 주저했다. 옥봉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던 신후의 얼굴이 맴돌았다. 원망과 후회, 갈 곳 모를 질투심이 뒤섞여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유학 시절 만나 오랜 친구가 됐죠. 기자님이 좋아하실 만한 사연은 없네요.”
“그런가요? 오랜 친구라.”
“민주희랑도 아무 사이 아니에요. 계속 헛다리 짚으실까 봐 말씀드리는 거예요.”
확신에 찬 그녀의 모습은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헛다리’라는 단어는 또 다른 희망이기도 했다.
“방향이 다르단 의미군요. 확실히 뭔가가 있는 건 맞나 봐요.”
“......”
어떤 식으로든 응수한다면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았다. 소라 역시 신후의 행보가 궁금했다. 더 정확히는 옥봉에 대한 신후의 마음이 어디까지일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기자님이 한 가지 기억하실 게 있어요.”
“뭔데요?”
“에단은 진지한 친구에요. 무엇을 하든, 누구를 사랑하든, 그게 에단의 진심이란 거죠.”
“명심할게요. 에단을 많이 아끼시는군요.”
***
“아씨, 어디 계셨습니까?”
정순이 마당을 가로질러 옥봉의 방으로 들어섰다.
“응. 왜?”
“초희 아씨 댁에 심부름 보내셨잖아요? 다녀오니 방에 안 계셔서 놀랐습니다.”
“으응, 내가 그랬던가?”
현세에 가 있는 동안에도 조선의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 초희는 어찌 지내더냐? 혹시 아이들 건강에 이상은 없더냐?”
“네. 별 일은 없었습니다. 아, 둘째 아이가 열이 좀 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열이 난다구?”
옥봉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그녀 가족의 안부가 하루하루 염려되었다.
“정순아. 아버님 댁에는 별고 없으시더냐?”
“네? 지난번 다녀왔던 일 말입니까? 전에도 물으셨었는데요.”
“그랬나? 내가 요즘 정신이 없구나. 네가 뭐라고 했었지?”
“아버님은 여전하십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선비님들이 방문하시어 정국을 논하십니다. 아씨 계실 때처럼 시도 많이 지으셨습니다.”
옥봉은 출가 전 집에서 보낸 시간들을 떠올렸다. 재기 넘치는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던 일, 자신의 시에 찬사를 보내던 아버지의 모습. 부족함이 없던 행복의 시간들이었다. 다시 못 올 과거의 시간들.
“명휘도 만나보았느냐?”
“그럼요, 아씨. 저처럼 그림을 많이 그렸더라구요.”
두 사람이 사랑하는 모습이 그림처럼 예뻤다. 누군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은 바라보는 이마저 흐뭇하게 만들었다.
“명휘와 혼인하고 싶으면 언제든 얘기하거라. 내가 추진해 볼 테니.”
“아, 아닙니다요.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어요.”
“무슨 준비?”
“누군가를 내 인생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습니까?”
비록 정순의 신분은 미천하지만 생에 대한 태도는 누구보다 고결했다. 그녀의 모습에서 옥봉은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래. 네가 나의 스승 같구나.”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자신의 비루한 마지막 모습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꿈속에서 거듭되던 공포가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될 터였다.
“정순아. 너는 무엇이 가장 두려우냐?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과 떠난 님을 그리는 것 중에 말이다.”
“저는 지금의 사랑을 지키지 못하는 게 제일 두렵습니다.”
우문현답이었다.
“지금의 사랑?”
“그렇지 않습니까? 비참하게 죽는다 해도 어찌 되었든 죽는 것이잖습니까. 님과의 이별도 어짜피 지난 일이지요. 둘 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불과하단 말씀이지요.”
“그렇겠구나.”
‘돌이킬 수 없는 과거’라는 말이 뼛속을 관통했다. 죽음도 이별도 궁극에는 과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과거가 뭣이 중하단 말입니까? 지금 곁에 있는 사랑을 지키면서 사는 게 행복이지요.”
정순이 발그레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지금의 사랑이라......”
“전 그렇게 살 겁니다. 두렵다 여기면 세상만사 두렵지 않은 게 있겠습니까? 죽음이든 이별이든 마찬가지지요. 두려움에 떨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긴 싫습니다.”
자신은 무엇이 두려워 허겁지겁 돌아왔단 말인가. 정순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아씨 시 중에 ‘봄꽃 떨어진 뜨락 낮잠은 달콤하고 지지배배 제비들은 발 걷으라 지저귀네’란 구절 있지 않습니까?”
“‘자적(自適)’이란 시구나.”
“사랑하는 이랑 몸과 마음이 여유로운 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와의 달콤한 시간들, 제비들이 지저귀는 듯한 설레임...... 옥봉은 더 이상 지체하기 싫었다. 그에게로 달려가고 싶었다.
‘신후야. 곧 돌아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