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신후가 시무룩한 얼굴로 들어섰다.
“술 마셨어?”
“응, 조금.”
신영은 그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답지 않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누나!”
“왜 그래? 부르지만 말고 말을 해, 말을.”
신후가 어울리지 않게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옥봉이 때문에 걱정돼서 그래?”
“걱정되는 게 당연한가?”
“그럼. 나도 마찬가지야. 근데 잘 돌아가지 않았을까?”
신후가 너저분한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영이 얼음물을 가져다주자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들이켰다.
“다시 오긴 힘들겠지?”
“그렇겠지.”
“......”
“이젠 너무 걱정 하지 마. 여기보단 원래 살던 곳이 낫겠지.”
속이 좋지 않은지 가쁜 숨을 몰아쉬던 신후가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안 돌아올까?”
“뭐?”
“다시 안 오면 어떡하지?”
“다시 안 오는 게 정상 아닐까? 옥봉인 어차피 조선 사람이잖아.”
신영이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옥봉에 대한 그의 마음이 생각보다 깊은 듯했다.
“신후야.”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그래. 그럼 됐어.”
“근데 누나. 그 애가 보고 싶어.”
신후가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뉘였다. 금방이라도 잠들 기세였다.
“왜 자꾸 보고 싶냐, 왜......”
신후의 웅얼거림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신영은 그의 모습이 불안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옥봉도 그와 같은 마음일까.
***
“재민씨. 오늘 인터뷰 고마워.”
“네. 기사 잘 부탁드려요. 앨범 얘기 많이 해주시구요.”
송유리 기자와의 인터뷰를 마친 재민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인터뷰에 익숙지 않은 그는 이제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재민씨. 나 뭐 좀 물어봐도 돼?”
“인터뷰 아닌 거죠?”
“응. 사적인 질문이야.”
“물어보세요.”
“며칠 전 에단리랑 사진 찍힌 여자 말야. 둘이 사귀는 사이야?”
재민은 기자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에 감탄할 때가 많았다. 어떠한 순간에도 본분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정보를 캐내려는 이율배반적 프로의식.
“송기자님. 정말 너무하세요. 나한텐 관심 없으세요? 나두 열애 중인데.”
“아닌 거 다 알아. 자기 에단리랑 친하잖아.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 주라.”
“기자님은 형이랑 안 친해요? 웬만하면 두루두루 친하시잖아요.”
“재민씨도 알잖아. 에단리랑은 좀체 친해지기가 어려워. 너무 모범적인 스타일이라 그런지 기자들한텐 곁을 안 주더라구.”
재민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신후도 자신만큼이나 기자들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 가진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두 사람은 아무 관계 아니란 거.”
“야, 너무한다. 내가 그동안 자기랑 에단리 기사를 얼마나 잘 써줬는데.”
“잘 못 쓸 만한 일이 있었어야죠.”
“그래서 영 심심하단 거지. 특히 에단리는 뭔가 있을 것도 같은데 말야. 도대체 어딜 파 봐도 나오는 게 없단 말야.”
“기자님 심심하지 않게 내가 사고 많이 쳐야겠네.”
“됐어. 앞으로 재민씨한텐 안 물어볼게.”
냄새를 맡고 싶으면 제대로 코를 들이댈 것이지. 재민은 신후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랬어? 기자들이란 참 쓸데없는 데 관심이 많아.”
“그러게. 헛다리 짚는 것도 모르구.”
“헛다리?”
“지금 백소라가 문제야? 옥봉씨가 문제지.”
“뭐?”
기자와의 헤프닝을 전하자 신후는 긴 한숨을 지었다.
“하긴 옥봉이가 문제긴 문제다.”
“형한테 온 이유가 이걸까?”
“무슨 이유?”
“형 마음에 화살 꽂기?”
“화살은 무슨.”
재민은 석연찮다는 표정으로 신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작업하던 중에 사라졌으니까 분명히 그게 단서일 거야.”
“그럴까?”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단서도 거기에 있단 뜻이지. 옥봉씨 시랑 형 노래, 작사, 곡 작업 등등.”
재민의 눈은 무언가를 알아낸 듯 유달리 반짝였다.
“그래, 작사였어. 공동 작사!”
“공동 작사?”
“둘이 같이 작사를 한다! 이거야, 이거.”
“공동 작사가 단서라면 다시 돌아올 일은 없겠네. 조선엔 내가 없잖아.”
“그런가?”
신후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기타줄을 튕겼다. 옥봉이 돌아간 후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멜로디이었다.
“형이 필요한 순간이 있을 거야. 그 때가 되면 옥봉씨도 다시 올 거구. 내 느낌이 그래.”
“정말 그럴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꼭 형한테 왔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랬잖아.”
“싱어송라이터여야 했다면 굳이 왜 나야? 많고 많은 게 싱어송라이터잖아. 하다못해 너도 있구.”
“뭐가 더 있지 않겠어? 싱어송라이터면서 형이어야 할 이유.”
“얘기할수록 왜 머리는 더 복잡해지냐?”
신후가 흥얼거리던 멜로디를 노트에 옮겨 적었다. 작업실 책상 한켠에는 옥봉이 두고 간 노트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좋은데? 이 곡 나 주라.”
“안 돼.”
“왜? 전에 나한테 곡 하나 주겠다고 했었잖아.”
“내가 언제?”
재민이 휴대폰 속 사진을 찾아 그의 얼굴에 들이댔다.
“이 사진 기억 안 나?”
사진 속에는 활짝 웃는 소라와 신후, 재민이 있었다. 영국으로 신후를 보러 온 재민과 소라를 데리고 캠 강변을 거니는 모습이었다.
“그 때 형이 그랬잖아. 다른 가수한테 곡을 주게 된다면 그 첫 번째는 내가 될 거라구.”
“그랬던 것도 같네.”
사진 속의 세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발랄하고 생기가 넘쳤다. 셋이 함께여서 행복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기도 했다. 이 여행 후 소라는 말없이 신후를 떠나버렸었다.
“형. 소라 누나한테 더 이상 미련 없으면 여지 같은 거 주지 마.”
“여지?”
“서로한테 도움이 안 되잖아.”
재민이 종종 형같이 느껴지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였다. 시시콜콜 전하지 않아도 신후의 속내를 이미 알고 있는 순간 말이다.
“알았어, 임마.”
“뭘 알았단 거지?”
“조만간 곡 줄게.”
재민이 배시시 웃었다. 옥봉을 그리워하는 신후가 어쩐지 걱정스러웠다. 시간을 거슬러간 그곳에서 옥봉 역시 시간여행의 단서를 찾아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
『끝없이 만나는데 무슨 근심 있을까/이별 겪은 뜬구름 같은 인생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네/하늘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늘 만나는데......』
마지막 구절이 머릿속에 맴돌 뿐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정순아, 밖에 있느냐?”
정순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 참. 아버님 댁에 다니러 오라 했지.’
『제비는 비스듬한 처마에 쌍쌍이 날아들고/떨어지는 꽃잎은 어지러이 비단옷을 스치네/깊은 규방에서 멀리 내다보며 봄뜻을 잃었는데/강남에 풀 푸르러도 임은 돌아오지 않네』
초희가 짓고 간 시를 나지막이 읊조려 보았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옥봉은 재기 넘치던 그녀의 삶이 누구보다 순탄하고 행복하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역사에 남겨진 그녀의 삶은 바람과는 달랐다. 옥봉은 초희의 삶이 서글펐다.
“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초희가 옥봉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 사별한 남편과 조원 나리 때문에 그동안 많이 힘들었잖아. 원이 너만큼은 더 이상 지나간 사랑에 아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옥봉이 ‘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둘이 아무런 걱정 없이 어울려 지내던 시절의 일이었다. 옥봉은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 목울대다 뜨거워졌다.
“꿈에서 본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했지? 네가 차마 말하지 못한 내 불행이 있다 해도 난 괜찮아. 이젠 무슨 일이든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가 됐거든. 네 덕도 컸어. 이런 곳에서 홀로 지내면서도 기운을 잃지 않고 당당히 사는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워.”
그녀에게 불운을 전하려던 옥봉은 오히려 용기와 희망의 기운을 얻은 듯했다. 현세로 돌아간다면 초희의 삶과 시를 연구하는 신영을 좀 더 적극적으로 돕고 싶었다. 그것만이 벗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인 듯했다.
‘누군가를 그리워만 하다 한평생을 보낸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삶인가?’
옥봉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앙다물었다. 몽롱해진 정신 탓에 시구가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방문을 힘껏 열어젖히니 한여름의 더운 기운이 훅 끼쳐왔다. 멀리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들의 고함소리였다.
‘둑제 지내는 시기는 벌써 지났는데 요 며칠 소란스럽네. 왕이 무예 검열을 나오신 건가?’
옥봉은 붓을 들었다. 마지막 구절을 남겨놓은 채 제목을 먼저 지어 보기로 했다.
『칠석(七夕)』
옥봉은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제목을 적었다. 그녀는 완성되지 못한 시를 다시 한번 읊조려 보았다. 멀리서 웅성대던 소리가 좀 더 가까워졌다. 기합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끝없이 만나는데 무슨 근심 있을까』
『이별 겪은 뜬구름 같은 인생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네』
두 행을 읽고 나서 옥봉은 긴 한숨을 쉬었다. 밖에서 들리는 고함소리와 한낮의 더운 기운이 뒤섞여 가슴이 턱 막혔다.
『하늘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늘 만나는데』
『......』
웅웅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귓속을 울리더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온 힘을 다해 눈을 떴을 때 옥봉의 눈앞에는 낯익은 도시의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한강과 빌딩, 무심히 지나는 자동차들.
‘다시 돌아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