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 길수록 애틋함은 강해진다>
“와아··· 생일이란 거··· 역시 별거 없었네요···.“
“미안···. 내일 얘기하자, 먼저 잘게.“
“뭔가요! 제게 뭐가 미안하다는 거죠? 왜 「미안해」하는 거냐고요!“
“나 피곤해···. 제발 내일 얘기하자.“
“이렇게 또 회피하실 건가요? 또 얼버무리고 도망치시냐고요!“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내일은 제대로 할 테니까··· 한 번만 봐주라···!“
“또···! 왜 지금은 미안하다고 하는 건데요···! 한 달 전에는 그런 적 없었잖아요!“
“···들어갈게.“
“잠깐만요! 아직 제 얘기 안 끝났어요!“
나는 김설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만이 남아 있는 이곳은 고독했다.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몸을 맡겼지만, 고독함은 역시 꺼지지 않았다.
“하아··· 난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내가 내뱉은 의문만이 그저 내 고독을 더해줄 뿐.
밤이 깊어질수록 잠이 오지 않았다. 괜찮아진 줄만 알았던 불면증이 거세게 나를 밀어붙이고 채찍질했다.
“···11시 20분···. 김설 생일이 끝나기까지 앞으로 40분 남았네···.“
내일이 밝으면 난 어떻게 김설을 마주해야할까. 이번에야 말로 녀석이 나한테서 영영 정을 떼겠지···.
내 마음속에서 후회라는 감정이 난잡하게 요동치고 있을 때―.
“영이 씨, 주무세요?“
어?
똑똑 노크소리 대신 김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날 찾아오리라곤 꿈에도 몰랐기에, 나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아, 아니, 아직 안자고 있어!“
“그럼··· 잠시 들어갈게요.“
“잠, 잠···!“
내 답변은 무시하며 김설이 방문을 열었다.
부드러움이 떨어진 채 방 안으로 들어온 김설은―.
“너, 너, 그게 무슨 차림이야?!“
평소와 다른 얇은 네글리제 차림이었다.
“어디서 난 거야 그 옷! 그거 평소에 입던 파자마가 아니잖아?!“
나는 애써 눈을 돌리며 소리쳐 말했다.
“나연 언니가 주시고 가셨거든요···. 영이 씨에게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을 때 입으라면서.“
이나연 이 망할 여자···.
“어떤 가요···. 저, 예쁜가요···?“
“아니··· 그 모습은 야한 거라고···!“
물론 예쁘기도 하지만···.
“···그런가요. 하지만··· 오늘은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뭐? 잠, 잠깐만! 왜, 왜 오는 거야?!“
내가 덮고 있는 이불속으로 파고들어오는 김설.
“야, 야! 나 또 뭔가 잘못한 거야?! 내, 내가 내일 제대로 사과할 테니까!“
“아뇨,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이미 제 기분은 모두 풀려있을 테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어, 어딜 만지는 거야?!“
나는 김설을 피해 최대한 몸을 뒤쪽으로 뺐다.
그럴 때마다 김설은 내게 다가왔고,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그 도발적인 걸음걸이가 내 눈에 각인되었다.
“영이 씨···.“
내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또 다시 야한 모습의 김설이 내 몸에 밀착해왔다.
“야아···!”
몇 번이나 김설을 안았지만 한 번도 이런 기분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김설의 얼굴은 흥분감에 젖어있었고, 내 얼굴도 그와 다르지 않게 새빨갛게 물들어있다는 게 느껴졌다.
홍조를 띤 김설은 내 입술을 원하는지 천천히 내 얼굴을 향해 고개를 움직였다.
슬로우모션으로 보이는 그 광경에 순간순간이 자극적이었기에, 감히 타오르는 흥분의 도가니가 아닐 수 없었다.
“영이 씨···.“
나를 부르는 야릇한 숨소리가 내 귀를 자극시킬 때마다 심장박동이 빨라졌으며 입에선 거친 숨결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지금 김설과 키스한다면··· 과연 내가 이성을 똑바로 컨트롤 할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의문만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결국 나는, 마지막이라는 끝에 선 채 그저 눈을 감고 김설의 달콤함을 기다릴 뿐이었다.
···김설.
“사랑···해요··· 저의 영이 씨···.“
그 순간―.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 몸을 역류시켜 의식을 재 각성시켰다.
“김설!“
나는 김설을 그 가녀린 어깨를 붙잡았다.
“영이 씨···?“
흥분 속에서 깨어난 김설이 자신의 큰 눈을 더욱 둥글게 만들었다.
“역시 이건 아니야···. 이건 잘못된 거야.“
“머··· 뭐가 잘못됐다는 건가요? 제가 그렇게 싫으셔서···.“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네 잘못이 아니야···. 이건 내 문제니까···.“
내 자책이 시작되자 김설이 입술을 꽉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 말로 또 회피하시려는 건가요! 제가 싫으시다면 그냥 싫다고 하세요!!“
김설이 언성이 높이며 내 말을 절단한다.
“네가 널 싫어할 일 없잖아!!“
나 또한 말 못할 분함에 김설을 따라 언성을 높였다.
“제가 싫지 않으시다면 왜 절 거부하시는 건가요. 제 각오가 그렇게까지 보잘 것 없어 보이신가요? 제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아니야, 아니라고! 진짜 나한테 문제가 있어서 그래. 내가 정신병자인건 너도 잘 알잖아? 내가 미친 새끼라서, 그냥 병신새끼라서···. 나는 절대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나, 는··· 내가 왜 이러는지 스스로 잘 모를 뿐이야···.“
나는 간절함을 그 말에 담았다. 그저 김설이 아무것도 모르는 날 이해해주길 바랐다.
“웃···기는 소리···!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거면서, 비겁하게 도망치는 거면서! 싫어하지 않는다고요? 아뇨, 당신은 그저 이 상황에 제가 필요하지 않을 뿐이에요! 당신 스스로가 절 필요로 할 때가 아니면 제가 부담스러운 거라고요! 당기면 밀어내고 밀어내면 당기는 거뿐이라고요···!“
하지만 김설에겐 내 말이 닿지 않았다.
이미 한 달 전을 기점으로 나를 향한 김설의 맹목적인 감정은 깨지고 부서졌다는 소리겠지.
그리고 그 원인은··· 역시 나겠지···.
“미안···.“
“사과 따윈 집어치워!! 그런 건 필요 없단 말이야! 필요할 땐 정작 도망치는 주제에··· 진짜 필요하지 않을 때엔··· 왜에···!!“
“미안해···.“
“전 당신이 좋아요! 미칠 듯이 좋다고요! 근데··· 근데 지금은 아니야···. 일주일 전에는 밀어내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이제는 제대로 말하겠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언젠가는 모두 부서지고 깨져서 사리질 테니까.
지금은 그저··· 내게서 김설이 떠나는 순간이 조금 빨리 찾아왔을 뿐이다.
“영이 씨, 저는 이제 당신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습니다.“
모든 건 갑작스레 왔다 갑작스레 떠나는 법이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아저씨가 그랬듯··· 김설도···.
“···미안하다···.“
“당신··· 정말 짜증나···! 미치도록 짜증나고 싫단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녀석의 감정이 그 얼굴을 눈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정말 미안해···.“
닦아주고 싶었다.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격이 없는 나는 「미안하다」는 말만을 되풀이 했다. 그때마다 그 눈물들은 더욱 흘러넘쳐 녀석의 과잉된 감정을 쏟아냈다.
“···갈게요.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대답도 못했는데···.
김설이 내게서 떠났다.
나는 다시 어둠속에 혼자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