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웬일로 한현은 퇴근하지 않고 남아있었다. 여섯 시만 되면 칼퇴근하려고 매일 각을 재던 사람이 오늘따라 무슨 일인가. 이유를 물어보니 “너 기다리고 있었지!” 하고 귀여운 척 하면서 말하는 게 정말 한 대 패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소파에 쓰러지는 것 밖에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체 뭘 하다 온 거야?”
“먼 옛날, 세계가 탄생하기도 전에 착한 살인청부업자와 나쁜 정보상이…….”
“나쁜 정보상은 말 되는 것 같은데, 착한 살인청부업자는 뭔가 말 안 되지 않아?”
“세상의 모든 법칙은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법이죠.”
“그럼 선악대립이 아니라 혼돈과 질서의 대립으로 고치는 게 어때?”
“아, 그거 그럴싸하네요. 근데 말 안해도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는 아시겠죠?”
“뭐, 대충 소담이랑 량차오가 나오는 길고 긴 하루였겠지.”
“정답.”
한현은 찻잔과 주전자를 닦고 있었다. 참으로 애지중지하는 모양이다. 하긴, 한현이 가진 찻잔이나 주전자들은 다 귀티나게 생긴 것들이라서, 차를 따르면 상당히 볼 만하다. 그래봤자 내 눈에는 돈지랄로 보일 뿐이지만.
아무거나 책을 집어 읽다 자기로 했다. 책으로 어질러진 테이블을 더듬거리다 집은 게 하필이면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니. 며칠 전에 다 읽었다구. 도로 집어던졌다.
정적. 조용히 주전자를 닦는 소리만 들린다. 이런 분위기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다른 책. 다른 책이 필요하다. 이번에 집은 건 ‘핏빛 자오선’이다. 젠장, 이것도 다 읽은 거잖아. 나는 화가 나서 책을 집어던졌다. 와르르. 카드로 쌓은 탑처럼 위태롭게 쌓여 있던 책들이 무너져 내렸다. 정리해야겠네. 귀찮아. 그냥 소파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렸다.
“아저씨.”
“왜?”
“아카-카이가 뭐하는 애들이에요?”
한현은 말이 없었다. 어쩌면 알려줄 생각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현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냥 평범한 야쿠자 놈들이야.”
“그 사람들이 소담 언니 동생을 죽였대요.”
“그래?”
완전 성의없는 말투다. 남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남 이야기 맞긴 하지만.
“혹시 그 야쿠자들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요?”
“소담이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그 언니 지금 완전 저기압이라서 물어보면 죽일지도 몰라요.”
“하긴, 소담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기는 하지.”
“그렇죠.”
다시 묵묵부답 모드. 항상 한현과 나 사이에는 미묘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이런 것도 좋은 사이라면 좋은 사이일지도 모른다. 무슨 첫사랑 관계라고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어색함에 핑크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저 도시의 안개같은 회색 어색함일 뿐이다.
“안 가르쳐 줄 거에요?”
결국 입을 여는 건 내 쪽.
“그러고 보니까 너 상처가 어제에 비해서 많이 늘었더라.”
한현은 주제를 바꾸었다. 괜히 말해주기 싫으니까 말을 돌리는 것이다.
“제가 제 몸에 상처를 내는 게 왜요?”
“넌 너 하나 감당 못하잖아. 그러면서 왜 남의 일에 끼어드려는 거야?”
손 떼. 요약하자면 고작 한 마디다.
“쉬는 게 좋아.”
“신경 끄세요.”
“그게 마음대로 됐으면 내가 벌써 퇴근을 했겠지.”
한현이 닦고 있던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탁. 하고 주전자 놓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그만큼 주변이 조용한 탓이다.
“이번 기회에 물어볼게, 널 괴롭히는 건 죄책감이야?”
나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이 뭐라 처 씨부리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만약 죄책감이라면, 신경쓰지 마. 애초에 저번에 그 꼬마애가 죽은 건 네 탓이 아니야. 그러니까 억지로 그 애가 좋아했던 책을 읽고, 자해를 하면서 스스로를 벌줄 필요는 없어. 설령 그게 네 탓이라도, 뭐 어때. 사람들은 모두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 모든 문명은 피 위에 세워지지. 마치 아삼 홍차의 붉은 빛깔에 동인도회사에 착취당한 사람들의 피가 녹아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죄인이야. 종교적인 의미에서든, 역사적인 의미에서든.”
“그래요, 그거 하나면 속이 편하겠죠.”
이번엔 내가 속을 게워낼 차례였다.
“고작 그런 죄책감 하나였으면 좋겠어요. 저를 괴롭히는 게, 고작 그런 한 마디로 요약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죄책감 말고도 커다란 게 있어요. 하나, 뭔가 절 현실에 묶어주던 뿌리가 통째로 뽑혀 나간 기분이에요. 책을 읽는 것도, 손목을 긋는 것도 억지로 그 흔적을 더듬거리는 거라구요. 살아있는 기분을 느낄 수가 없어요. 뭐라도 붙잡아주지 않으면 붕 떠서 이대로 하늘로 날아가버릴 것 같아요. 억지로 대가리에 책 내용을 쑤셔놓고, 몸에 흠집을 내야만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어쩌란 말이에요. 그렇다고 지나가는 새끼 아무나 붙잡고 줘 팰 수는 없잖아요.”
물, 물이 필요해. 말을 토해냈더니 목이 말랐다. 아까 전에 쓸개즙을 쥐어짜낸 것만큼이나 속이 쓰라렸다. 코로 숨 쉬는 것마저 답답해서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뭔가를 쏟아낸 후의 탈진. 어느샌가 다가와 한현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밀쳐내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한현의 손은 따뜻했다.
“쓸데없는 데에서 착하다니까.”
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한현은 퇴근 준비를 마친 듯 바삐 움직였다. 일어나서 배웅해주고 싶었는데 그러기조차 피곤했다.
“나 당분간 여기 못 올거야. 이번에 출장 경호 의뢰 받았거든.”
“당분간은 혼자 밥 먹어야겠네요.”
“맞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미술관이라도 가 보는 건 어때? 교양도 쌓고 스트레스 푸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잖아.”
그 말을 남기고 한현은 퇴근했다. 솔직히 한현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다만 미술관이라는 한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을 뿐이다.
미술관. 그러고 보니까 소담 언니 동생이 화가라고 했었지. 그러면 미술관에 가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미술관에 가보자.
하지만 그 전에, 잠부터 자자.
지금은 피곤하다. 미술관, 소담 언니 동생, 화가. 잠. 여러 가지 단어가 뒤섞여 머릿속을 맴돌았다. 소용돌이. 나는 천천히 그 속으로 가라앉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가 서너시 쯤이었다. 그대로 온 몸을 쥐어뜯고 나니 시계가 다섯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배에 뭐라도 처넣고 몸을 씻었다. 물에 상처가 닿을 때마다 쓰라린 감촉이 전해졌다. 한현은 언제쯤 오는 건가 생각하다가 한현이 출장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책이나 뒤적거리다 하루를 보내기 전에 미술관이나 가보는 게 어떠냐는 한현의 말이 떠올랐다. 시계를 보았다. 여섯 시.
그래, 미술관이고 뭐고 벌써 문 닫았겠지. 나는 읽던 책을 던져버리고 소파에 누웠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자. 아무것도. 세상에 질린 패배자. 뭐라고 부르든 나와는 상관없다.
그저 가만히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새장 안의 새.
그 새마저도 따분함은 어쩔 수가 없다. 마치 오늘 점심 뭐 먹지? 와 같은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