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중학교 때 일일 것이다. 그때는 교복을 입고 다녔으니까. 다만 몇 학년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계절은 기억난다. 온도가 딱 이맘때였던 것 같으니까. 그렇다고 몇 월이었는지 기억나는 건 아니다. 그냥 초여름. 왜냐면 하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딱 그 정도만 기억날 뿐이다.
서면역 지하상가를 걷고 있었다. 아마도 뭐라도 연주하러 가려던 중이거나, 연주하고 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베이스 치고 돈 받고 많이 했으니까. 공연장에 가면 일단 갈아입을 옷이 있을 거고, 최대한 가면이나 모자 같은 걸로 얼굴을 가리고 베이스를 쳐준다. 뒷풀이 자리는 가능한 한 가지 않는다. 기본적인 방침. 돈은 돈이지만 밴드하는 사람들하고 그렇게까지 깊게 사귀고 싶지는 않으니까.
밴드 하는 사람은 대부분 남자고, 나보다 나이가 많고, 키도 크고 힘도 세니까 위험하다. 그게 내가 그 사람들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여자일지라도 나보다 키 크고 힘 센 건 마찬가지다. 게다가 여자 대 여자라고 위험하지 않다는 법은 없다.
아무튼, 그 때가 낮이었는지 저녁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지하상가인데 그게 구분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냥 하얀 형광등 아래였다는 사실만 기억날 뿐이다.
지하상가는 물건 팔려고 만들어놓은 곳이니, 전부 옷가게니 구둣가게니 그런 것만 가득할 뿐이다. 시선을 끌만한 데라고는 가끔 커피나 과자 등을 파는 테이크아웃 카페같은 것들 뿐이다. 평소에는 옆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걷는 길이었다. 그러니 순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우연이라 하겠다.
분명히 상가 거리이지만, 상점이 아니었다. 마음껏 들어오라는 듯이 열려져 있는 문. 안에는 뭔가 그림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발을 내딛은 것은 호기심이었다. 수도 없이 이 길을 걸으면서 이런 걸 본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걸려있는 것은 그림으로 추정되는 것들이었다. 정말로 그림인지는 모르겠다. 그림이라기엔 너무 대충대충이었기 때문이다. 저런 그림들은 나도 도구와 재료만 주면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저런 게 그림이라고 걸려 있으니까 은근히 심기에 거슬린다.
그러다가 한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알 수 없는 흑과 백의 대립. 뭔가 그리려 한 것 같지만, 흩날리듯 그려진 탓에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 형체를 알 수 없다. 이 그림은 다른 그림과 달리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어디가 마음에 걸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나마 뭔가를 알아볼 법하게 그려서? 흑과 백이 대립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마음에 드니?”
히익. 거리며 저절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생각해보니 카운터에 여자가 앉아있었던 걸 까먹고 있었다. 그 여자였다. 긴 갈색 머리의 여자. 거리에서 보기 힘든 원피스 차림이었다. 척 봐도 이상한 사람이야.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
“아, 네, 네?”
“이 그림, 내가 그린 건데 마음에 드니?”
봐.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이런 그림이나 그리고.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그래도 일단 필요한 정도의 예의 정도는 갖추자.
“아니요.”
아, 이런,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솔직함이 튀어나와버렸다. 큰일났다. 큰일났다. 무마할 방법을 찾아봐야한다.
“흐음, 왜?”
왜지. 왜였지. 왜 였더라.
“별로 안 예쁜 거 같은데다 뭘 그린 건지 모르겠어요. 여기 있는 그림 전부 다.”
반쯤 대화를 포기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끝장이다. 누구에게든 마음을 열고 털어놓으면 안되는 법이다. 글러먹었어. 화가는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뭘 그렸는지 모르겠다는 거구나?”
“네.”
“뭘 그렸는지 이야기해줄테니, 다시 질문해도 될겠니?”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 그림은 아무것도 그린 게 아니야. 그림 그 자체일 뿐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는 천천히 풀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물을 그리고자 했어. 어떤 사람은 사물의 모양을 실제와 다르게 그리고자 했고, 어떤 사람은 사물의 색깔을 다르게 그리고 싶어했지. 결국 그림은, 단순히 물건을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 ‘그림 그 자체’가 되었어.”
“‘그림 그 자체’라뇨?”
“아까 전에 뭘 그린 거냐고 했잖아. 이젠 더 이상 ‘뭔가를 그린’ 그림이 아냐. 그저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그림 그 자체’일 뿐이지. 그리고 이걸 ‘오브제’라고 불러.”
대충 무슨 소린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생겨나는 의문.
“그렇다면 전 여기에서 뭘 봐야 하는 거죠? 뭔가를 그린 것도 아닌데?”
“작품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감성이지. 자, 이제 네 감상은 어때?”
화가가 마침내 물었다. 나는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를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말했다.
“쓸데없어요.”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량차오의 말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순간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뭐였더라. 일단 눈앞에 놓인 그림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 내가 량차오에게 의뢰받고 훔쳐온 그림. 훔칠 땐 생각 안 났는데 훔쳐 와서 보니까 중학생 때 서면 길거리에서 봤던 그림이었고, 그때를 회상하다가 딴 생각에 빠진 모양이다.
“뭐라고 했어요?”
“내가 물을 말이다 새꺄, 뭐? 이 그림이 쓸 데가 없어?”
“딴 생각 하고 있었어요.”
“넌 남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딴 생각이나 하고 있냐?”
량차오는 한숨을 쉬었다. 저 한숨은 내 입에서 나와야 하는 게 아닐까? 기껏 훔쳐와 줬더니 돈은 안 내놓고 쓸데없는 설명이나 늘어놓고 있으면 저절로 딴 생각이 안 떠오르겠냐는 말이다. 하여간, 재수 없는 사람이다. 돈만 아니었어도 상종하는 게 아니었는데.
“잘 들어. 이 그림은 액션페인팅이란 말이다.”
“액션페인팅이 뭐죠?”
“그 온몸으로 물감 뿌리면서 그리는 그림 있잖아. 잭슨 폴록 같은 사람들이 하는 거.”
그 잘나신 잭슨 폴록이 누군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돈을 더 늦게 받게 될 것 같으니 조용히 아가리 닥치고 있기로 했다.
“액션페인팅이란 마치 의도와 우연의 대결과도 같지. 작가는 온 몸으로 물감을 휘날리며 의도대로 표현을 하려고 하는데, 물감이 꼭 의도대로 튄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 결과로 탄생한 이 그림은 마치 삶과 운명의 대결 같지 않냐는 말이다. 알겠냐?”
“네. 쓸데없는 거 맞네요. 아가리 닥치고 돈이나 주세요.”
“하이고, 예술도 볼 줄 모르는 꼬맹이 같으니. 가져가라.”
량차오가 돈이 든 가방을 던졌다. 어설프게 받으려다가 머리를 퍽 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개새끼. 좀 똑바로 주면 안 되나. 나는 가방을 열어 천천히 액수를 확인했다. 뭐, 여기서 더 받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지만 이 정도면 적어도 1년 동안 돈 걱정은 없이 살 것이다.
“근데 그놈의 그림은 왜 훔쳐달라고 한 거에요? 그것도 저한테?”
“니 몸값이 싸잖아. 그리고 그림 제대로 볼 줄도 모르는 애가 알아봤자 뭐하게?”
몸값이 싸다고 대놓고 일갈당했다.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좀 더 엄청 높여 불러야겠다. 돈은 받았다. 저 새끼 낮짝 보기 싫으니까 이대로 가 버려야겠다. 한동안은 찾아올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잠깐만, 너 몸이 왜 그러냐? 그림 훔치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냐?”
아차. 초여름이라 좀 시원하게 다니고 싶어서 옷을 좀 살이 드러나는 걸로 입고 나왔는데, 하필이면 반창고나 붕대를 감은 부분이 량차오의 눈에 띄었나보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도로 쏘아붙였다.
“남 싸게 부려먹은 악덕 업주 주제에 걱정해주는 거에요? 댁 알 바 아니에요.”
“하, 누가 걱정 따윌 했다고 그러냐? 꺼져라 꺼져.”
“예에이.”
나는 손을 흔들며 량차오의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