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눈을 뜬 순간은 기분이 나빴다. 아직 살아있다는 감각과 함께 창문에서 햇살이 확 들었기 때문이다. 쾌청한 날씨라니, 쓰레기같은 기분이다. 간호사는 내가 3일간이나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배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고 얼굴 여기저기에도 덕지덕지 반창고가 붙은 상태였다.
간호사가 나가고 난 다음에 먼저 들어온 건 정현석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적대감이 들었다. 연화를 쏜 건 정현석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때 같았으면 참았겠지만, 지쳐버린 나머지 그냥 말해버리고 말았다.
“꺼져버려요.”
“싫은데.”
“여기 금연이에요.”
“좆까.”
“씨발새끼.”
그는 입에는 담배,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다. 환자 병실까지 와서 저래야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불을 꽉 쥐었다. 저 새낄 죽여버릴테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힘도 약하고 몸집도 작다.
“내가 쏴 죽인 그 아이, 친구였나?”
의외로 그 말은 정현석에게서 나왔다.
“그래요. 알면서도 쏴 죽였군요.”
“안 쏘면 네가 죽었을 테니까.”
“그럼 그냥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어요. 당신은.”
그는 연기를 뿜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리볼버였다. 그는 그걸 나에게 내밀었다.
“네가 날 죽이고 싶다면, 쏴라.”
“진심이에요?”
“뒷처리 감당 가능 하면.”
“난 뒷일 같은 건 신경 안 쓰는데.”
나는 리볼버를 정현석의 머리에 겨누었다.
하나, 둘, 셋.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약실을 열어보았다.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장전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보기보다 똑똑하군.”
“전에 비슷한 적이 한번 있었거든요. 씨발새끼같으니.”
나는 텅 빈 리볼버를 그에게로 던졌다.
“그 총 갖고 나가서 당신이 사온 아메리카노에 코 박고 죽어버려요.”
“고려해보도록 하지.”
정현석은 그렇게 퇴장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한현이 들어왔다. 한현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누군 배에 칼빵맞고 누워 있는데 저렇게 싱글벙글한 얼굴이라니, 재수 없어.
“여어, 몸은 어떠냐.”
“좋긴 한데, 미친, 남의 병실까지 홍차를 들고 와요?”
“홍차 마시면 병 낫는 데도 좋다구.”
“이건 병이 아니라 외상인데요.”
한현은 병실까지 다구를 들고 온 모양이었다. 정신 나간 홍차 오타쿠 같으니. 그래도 방금 저 경찰아저씨보다야 한현이 나았다. 참 요즘 티팟과 잔은 들고다니기도 편리한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차에요?”
“요새 독한 것만 마셨잖아. 컬러풀한 것도 마셔봐야지. 마리아쥬의 마르코 폴로. 꽃향기가 매력적이지.”
다행히 병실 안에 포트가 있었다. 포트까지 휴대용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한현은 그 점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뭔가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봤던 연화의 깨끗한 목이 생각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새에 물은 끓고 한현은 티팟에 물을 따랐다.“
“몸은 좀 괜찮아?”
“아니요.”
조금 어색한 시간이 흐른다.
“널 찔렀던 여자애, 이름이 연화더라.”
“네.”
“네 친구였지?”
“네.”
한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물어봐야 복잡해질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내 입으로 대답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니까.
잠깐, 연화를 위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우리가 그 상처를 교환했던 시점에서부터 모든 게 잘못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우리가 친구가 될 일은 없었고, 이렇게나 가슴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면 내가 뭔가 다른 행동을 했다면 연화가 살아있었을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이 소용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계속해서 무언가가 가슴을 찔러댔다. 계속 찔러대서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토하고 싶었다.
그래, 나는 연화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연화만을 쳐다보고, 연화를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연화를 위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연화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 연화라는 이름을 가진 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야 신을 믿는 사람이랑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
“아저씨.”
“왜?”
어색한 분위기 가운데 대화가 이어졌다.
“저 아저씨 호구새끼라고 한 거 취소할게요.”
“무슨 소리야?”
“사람이 신 좀 믿을 수도 있죠.”
“어? 어, 그래.”
다시 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한현이 뭔가 퍼뜩 떠오른 듯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 참, 홍차 까먹었다. 너무 진하게 우려졌겠는데.”
“괜찮아요. 그냥 주세요.”
한현은 홍차를 잔에 따랐다. 홍차에서 연한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천천히 홍차를 입에 흘려넣었다. 이미 차는 반쯤 식어서 만개한 꽃이라기보다는 이미 지는 꽃 같았다. 맛은 또 굉장히 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