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을 잃은 우리들에게 이런 근사한 집과 방을 선물해준걸로 모자라 매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신다.
처음엔 낯설었던 이 곳의 생활이 지금에와선 식구로 녹아들었다.
가족애라는 것을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느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아현누나의 친절은 분명 갚아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도움이 되고 싶고 그녀가 힘들 때면 적게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다.
평범하게 여행을 떠나는거면 이런 걱정은 호들갑일지도 모르겠지만, 표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의 걱정은 진심에서 우러나온다.
얼마 남질 않았다.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걱정이 채 가시지 않는 그때였다.
"앗!"하고 세희가 손뼉을 치더니 나에게 제안을 해왔다.
"그래. 언니가 돌아왔을 때 선물을 준비하자."
"오.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네."
막연히 걱정만 하며 기다리기보단 선물을 준비하는 쪽이 훨씬 낫겠지.
그때, 세희가 또다시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등 뒤로 물건을 숨긴 채 가져왔다.
의아한 기색으로 갸웃거리자 "짜잔~."하며 숨겼던 걸 보여줬다.
부채 모양으로 활짝 펼친 오만 원과 만 원짜리의 지폐들은 얼마전에 우성현에게서 뺏어온 30만원이라는 돈다발이었다.
"오오! 짱인데."
"그치? 우리는 이 돈을 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 우성현이 나에게 했던 짓은 가차없이 벌금을 물리게 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다.
심지어 세희의 소중한 학원비까지 훔쳐가 멋대로 써버리고 오히려 피해자인 세희를 도둑으로 몰아버렸다.
그렇기에 우리가 저 돈을 쓰는 대에 있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저 돈은 부족한 감이 있다는 것이다.
평소처럼 유령이 되어 슬쩍 가져오는 게 아닌 대가를 치룰 수 있다는 것.
그게 가능해져 선물을 '살' 수 있다.
나와 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외출하러 집을 나섰다.
"뭐가 좋을까?"
"너무 거창한 건 피하는게 좋겠네. 언니는 책을 좋아하니까 서점을 들려보는……."
길을 걷던 도중 세희가 말 끝을 흐렸다.
"왜그래?"
"마지막 하루에 돌아온다면 책을 읽을 시간이 있을까 싶어서……."
"……듣고보니 그렇네."
누나는 책을 좋아한다. 평소대로라면 자그마한 선물로썬 더할나위 없겠지만, 마지막 하루라니 함께보내는 시간이 더 좋지 않을까?
실제로 세희도 나도 그걸 바라고 있다. 쪽지에 마지막 하루를 우리와 함께 보낸다는 내용이 적혀져있다면 누나도 마찬가지겠지.
"으음. 적당한 선물이 뭐가 있을까……."
막상 좋은 게 없나 떠올려보려니 떠오르지가 않는다.
세희도 마찬가지인지 "으음."하며 턱을 괴었다.
지금은 막연하게 떠오르는게 없다할지라도 막상 시내에 도착하면 다를지도 모른다.
가까운 거리에 익숙한 시골 정류장이 눈에 들어온 건 마저 시내로 향해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참, 여행이라고 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잖아."
"그렇지. 왜?"
"저번에 신호등을 건널 때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차에 치일뻔한 적이 있거든. 하지만 그러지 않고 통과했어."
유령이 되고나서 첫날 밤에 있었던 일이었다.
파란 불에 건너는 선량한 보행자는 무시한 채 감속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더랬지.
물론 보이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꽤 끔찍한 순간이었다.
"혹시 누나는 도보여행을 떠난거야?"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서 물리적인 접촉은 불가능해. 그래서 교통사고가 일어날 일은 없지만 신기하게도 타는 건 가능하더라고."
세희의 말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어? 타본적이 있는거야?"
내 말에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현 언니랑 만날때 한 번 타봤어. 가끔 이 곳에 지나다니는 마을 버스."
때마침 우리의 뒤에서 버스 특유의 굵은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마을 버스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정류장엔 사람이 없어 멈춰설 생각이 없는 지 감속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세희가 능청스럽게 말하더니 빙글 몸을 돌려 버스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엇. 자, 잠깐!"
나의 외침이 닿기도 전에 버스는 세희를 무시하고 전진해버렸다.
"이렇게 되니 혼자있을 때 이용하는 건 조금 힘들겠지."
아무 일 없다는 듯 멀쩡하게 다시 나타난 세희가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쿡쿡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 팔짱을 껴왔다.
"놀랐잖아."
나는 작게 웃으며 세희의 볼을 살포시 콕콕 찔러댔다.
그러자 세희는 오히려 더욱 밀착하며 내 팔에 얼굴을 부벼댔다.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세희.
그런 변함없는 모습에 내심 안도하며 걸었다.
팔에서 느껴지는 가슴의 감촉을 몰래 의식했지만, 그게 기분이 좋아 일부러 언급하진 않았다.
결국 시내에 도착했어도 이렇다할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화장품이라든가 서점을 들려봤어도 마지막 하루를 장식해줄 커다란 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정처없이 시내 광장을 걸으며 스쳐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지랑이를 목격하는 그때.
차라리 백화점에 들러보는게 어떻냐는 세희의 말이 들려와 그렇게 하자며 역사로 발을 옮겼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사람들을 통과하며 역 안으로 들어가자 어묵집 하나를 발견했다.
"어묵 먹고가자. 나 저거 되게 좋아해."
때마침 세희가 손가락으로 어묵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아. 마침 나도 출출했던 참이었으니."
포장마차 형식으로 된 가게라 서서 먹어야 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보이는 회사원 한 명이 손님의 전부였다.
우리는 종이컵을 가져와 뜨끈한 국물을 뜨고 어묵꼬치를 집었다.
한여름이지만 상점주변엔 에어컨이 틀어져있어 덕분에 쾌적한 기분으로 멋대로 집어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함께 먹다보니까 어린 시절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혹시 기억해? 아직 네가 이사가기 전에 함께 하교하면서 이렇게 포장마차에 들렸던거."
"당연하지. 우리 거기서 엄청 자주 사먹었잖아. 그때 포장마차 할머니가 단골손님 왔냐며 서비스도 많이 주셨고."
생각보다 세희는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조금 기뻐서 기분이 들뜬 나는 혹시 이것까지 기억하고 있을까?싶은 주제를 꺼냈다.
"그럼 붕어빵 사건도 기억하려나~?"
세희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저도모르게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붕어빵 사건. 그건 언제나처럼 장난을 치다가 하교한 뒤, 자주 들렀던 포장마차에서 붕어빵 천원어치를 샀을 때 있었던 일이다.
팥이랑 슈크림 맛을 각각 두 개씩 총 네 개의 붕어빵을 종이봉지에 담아주시는데, 당연히 서로 팥과 슈크림 맛 하나씩 먹는 것이었다.
팥맛을 먹고나서 하나 남아있을 슈크림맛을 먹으려던 찰나 종이봉지가 깨끗하게 비어있는 것이다.
이른바 슈크림맛 붕어빵 실종 사건인 셈이다. 그것이 두 번인가 있었다.
물론 내가 먹은적은 없었고 범인은 세희가 당연하겠지만 배고파서 그랬겠거니 생각해 추궁하진 않았다.
"그때 네 입가에 없던 슈크림이 묻어있었는데 말이야."
"윽……."
세희가 얼굴을 붉히며 움찔했다.
말하고나서 떠올려보니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흡……."
"그, 그렇게 따지면 너도 나중에 내 슈크림맛 하나 훔쳐먹었잖아! 그걸로 쌤쌤이지 뭘."
"응? 무슨 소리야? 난 먹은 적 없어."
"거짓말 하지마."
"아니. 정말로……. 그것도 네가 먹은 거 아니야?"
"응? 난 한 번밖에 안먹었는걸."
두 번의 슈크림 실종 사건. 그 중 한 번만을 더 먹었다고 자백한 세희지만,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물론 나 또한 더 먹은 적이 없고 떨어뜨린 적도 없었다.
하물며 포장마차의 할머니는 더주시면 더 주셨지 덜 주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
나와 세희는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럼 설마……."
어쩌면, 우리가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그 시절의 우리들의 붕어빵을 먹은 건 유령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세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어디사는 누군지는 몰라도 그 어린 녀석들의 붕어빵을 슬쩍 먹고나서 어떤 반응이 나올 지 지켜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할머니가 덜 주신 것일수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길바닥에 흘렸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좀 더 재밌는 쪽이 대답이길 원했다.
그 뒤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선 '그게 그랬던거였구나'라며 이해할 수 있었다.
전혀 무섭지 않은 이유는 어째서일까?
그건 분명, 그 유령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임이 틀림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알콩달콩한 귀여운 초등학생들이 서로 붕어빵을 나눠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몰래 하나를 슬쩍하다니 말이다.
어쩌면 그 유령은 내가 다물고 있었던 것을 보고 껄껄 웃다가 마지막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의 뒷모습을 지켜봤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