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는 첫 번째 살인을 한 후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했다. 자신을 배신한 그들을 죽인 후 자신도 더러운 세상과 작별을 생각했다. 그것이 죄를 지은 천벌이라고 나름대로 인과응보(因果應報)요 결자해지(結者解之)임을 알고 있던 나리였다. 그러나 죽여야 했던 송정수와의 만남이 그녀의 마음을 바꾸게 했다. 따스한 그의 말 한 마디가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 것이다. 한 순간에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이다. 살인이 멈춰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세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된 것을, 나리는 어젯밤 집에 도착한 이후로 많은 생각을 했다. 결국 낭떠러지로 밀어낸 것은 그녀를 배신한 그들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 스스로 악인이 되어서 인명을 앗아간 파렴치한 살인자가 된 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죄, 그 죄 값은 스스로 세상과 작별하는 것뿐이었다.
죽음이 목전에 다다르자 배척했던 하나님을 찾았다. 6년 전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배척한 그녀가 6년 만에 다시 찾았지만 응답이 없었다. 평생을 교회에 다니면서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던 하나님이 살인자의 기도에 답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집 나간 탕자가 집에 돌아오면 환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나, 아흔 아홉 마리의 양떼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는 목동의 마음도 나리에게는 예외였다. 하나님이 만든 성(性)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바꾼 죄, 어쩌면 살인을 한 죄보다 더 크게 바라볼 하나님이었다. 그런 원죄의 크기와 다를 바 없는 죄라고 생각한 나리는 기도에 응답이 없자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느낀 것이다. 강철과의 이별이 그와의 이별이 아니라 세상과의 이별임을 알기에 우는 것이었다. 눈물은 흐느낌으로 변하고 통곡으로 변했다. 강철은 그런 나리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조용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김대식은 송정수와의 대화가 너무 겉돈다는 생각이었다. 나리의 행적을 쫒겠다며 한 달간 휴가를 낸 상사(上司)가 병원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도 그렇지만 나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너무 건성 건성이었다. 술을 마시면 본심이 나올까 해서 술을 같이 마셔 봐도 매 한가지였다. 광역수사대에서도 수사는 공개수사에만 기대를 걸뿐 달리 수사할 방법도 없었다. 철저하게 숨어버린 나리는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김대식은 자주 송정수를 찾아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유일하게 나리를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송정수 뿐이라고 생각하는 김대식이었다. 김대식은 나리를 검거하고 싶었다. 수사관이라면 당연히 범죄자를 검거하는 것이지만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경찰에 뛰어든 김대식은 나이가 마흔이 가깝도록 아직 경장에 불과했다. 일 계급 특진이 있는 이번 사건에 뛰어 든 것도 그런 이유이기도 했다. 더구나 함께 광역수사대에 파견 나간 상사가 범인과 아주 가까웠던 관계이었기에 범인 검거는 식은 죽 먹기라고 나름대로 판단한 김대식이었다. 김대식은 자주 송정수를 찾아와서 그의 동태를 살피기로 했다. 그는 분명히 나리를 만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김대식은 대화 중에서 얻을 것이 없자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내일은 일정이 어떻습니까? 아마 지용운 팀장이 내일은 올 것 같은데...”
“그래? 오후에는 나가봐야 하는데, 되도록 오전에 가라고 자네가 바람 잡아봐.”
“오후에 어디 가시려고요? 저랑 같이 움직일까요?”
“아니야. 내일 이태원 쪽으로 해서 나리 씨 소식을 알 만한 사람을 수소문 해보려고 해.”
“알겠습니다. 소식 있는 대로 꼭 저한테도 말해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우린 한 팀이잖아. 자네도 수사 진행사항 나한테 보고해. 이건 명령이야.”
“넵. 알겠습니다.”
김대식은 웃으면서 차렷 자세로 거수경례를 붙였다. 김대식이 돌아가자 정수는 침대에 누웠다. 환자들이 다 잠드는 한밤중에도 잠들지 못했다. 2년 2개월 전 나리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여리고 여린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무참히 짓밟은 정수였다. 후회스럽지만 돌이킬 수도 없었다. 그것이 나리를 살인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라고 자책했다. 어제 그녀를 만날 때에도 그것이 죽을 만큼의 죄라면 죽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왜 그녀를 버렸는지 자신도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이 부담이었을까? 정수는 그때를 돌이켜보았다. ‘아, 그랬구나. 이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구나.’ 한 쪽에는 이 여자가 보이고, 한 쪽에는 두 딸이 보이고, 사랑이 깊어질수록 꿈속에서 울고 있는 두 딸이 나타났다. 아빠 가지 말라고, 꿈속에서 두 딸을 버리고 나리한테로 가는 것을 두 딸이 울면서 정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맞아. 그랬지. 그래서 깊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도망을 쳤지. 사랑이 깊어지는 것이 두려웠지.’ 그러나 그렇게 도망을 쳤음에도 정수는 달라진 게 없었다. 사랑을 포기했으면 아내와 관계가 호전되었어야 했다. 광주에 있던 두 딸과 아내가 서울로 이사를 왔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단지 두 딸 때문에 한 지붕 두 가족처럼 살고 있었다. 사랑이 무서워서 도망친 남자, 그 남자가 정수였다. 눈을 감으면 온통 그날의 그녀가 눈에 선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그날의 그녀 모습이,
9월 24일, 아침에 병실로 담당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다. 위암 3기라는 진단에도 불구하고 전혀 자신의 병에 무관심한 정수가 못마땅한지 일부러 병실로 찾아온 것이다. 다른 병원에서 재검진을 받아보던가 아니면 치료를 시작해야할 환자이건만, 정수는 병원을 옮기는 것도 아니고 수술 날짜를 잡는 것도 아니었다. 마냥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약만 복용할 뿐 병원 밥만 축내는 정수가 안타까웠다. 겨우 하는 말이 수사 중이니까 수사가 종결되면 수술날짜를 잡겠다는 말뿐이었다. 담당 의사는 정수가 광역수사대에 파견 나온 강동경찰서 형사계장임을 알지만 그렇다고 환자가 일을 핑계로 치료의 적기(適期)를 늦추는 것을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담당 의사는 작심을 한 듯 정수를 독려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겁니까? 언제 수술을 할지 결정을 해야지 계속 미루면 어쩌자는 겁니까?”
“이번 수사 끝내놓고 날 잡겠습니다.”
“나 참! 수사가 이번 주에 끝납니까? 그러다가 시기를 놓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그새 죽기나 하겠습니까? 하하하”
“병은 모르는 겁니다. 하루아침에 급격하게 나빠질 수도 있는 것이 병입니다. 위암 3기면 지금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위통은 어떠십니까?”
“심하긴 해도 아직 견딜 만 합니다.”
“통증의 강도는 어떻습니까?”
“견딜 만 하다니까요. 하하하”
“나 참! 아무튼 빨리 결정을 하십시오. 환자의 건강을 스스로 챙겨야 합니다. 의사는 단지 보조역할만 할뿐이라는 거 잊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정수는 가끔 명치 아래 통증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소화불량 같은 더부룩한 느낌은 벌써 2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통증을 느낀 것은 불과 6개월 정도였다. 입원하기 전에는 통증이 있을 때마다 약국에서 사먹는 겔포스가 전부였다. 그나마 지금은 병원에서 주는 진통제가 통증을 완화시켰다. 그게 위암인지 전혀 몰랐다가 나리를 만나겠다고 병가로 한 달간 휴직 신청을 하고서는 눈속임을 위하여 꾀병으로 입원한 덕분에 없던 병을 얻은 기분이었다. 결국 나리도 만나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휴직 신청을 한 목적은 달성한 것이었다. 담당 의사는 환자 스스로 건강을 돌봐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고 돌아갔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자 다시 복통이 시작되었다. 복통은 주기적으로 일어났지만 그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통증이 심할 때에는 쭈그리고 앉아서 통증이 끝날 때까지 꼼짝을 하지 못하다가도 통증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이었다. 통증이 있을 때는 식은땀과 신음소리까지 낼 정도였다. 길거리에서 복통이 있을 때는 길 한 쪽에 쓰러질 정도여서 마치 중병 환자처럼 보였다. 위를 꼬집고 뒤트는 통증은 숨을 제대로 못 쉬게 했다. 병실에서 복통이 일어나자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가 간호사를 불렀다. 급히 뛰어온 간호사는 침대에 엎어져 고통스러워하는 정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어본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의사 선생님 불러드려요?”
“아. 아... 이러다가 괜찮아져요.”
배가 아파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입으로는 괜찮다는 말만 계속했다.
“안되겠어요.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
“안 돼요. 괜찮아요...”
거짓말처럼 통증은 점점 줄어들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앉는 것을 본 간호사는 의사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정수가 의아했다. 정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자신의 병이 밖으로 크게 알려지기를 거부했다. 지금 자신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리를 안전한 곳으로 도피시키는 일이었다. 아파도 그 뒤에 아파야 했다. 자신의 안위(安危)보다 나리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간호사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정수의 표정이 다소 안정을 보이자 마지못해서 돌아섰다. 그때였다. 열시도 되기 전에 광역수사대 지용운 팀장은 팀원 세 명을 대동하고 병원에 나타난 것이다. 팀원 중에는 김대식도 함께 있었다.
지용운은 병실을 찾기 전에 담당 의사와 먼저 면담을 했다. 한 달간 병가를 낸 수사요원이 연쇄살인범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응당 꾀병인지 확인해볼 일이었다. 일부러 연쇄살인범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사라인에서 빠진 것이라고 의심하던 지용운은 담당 의사를 만난 후 꾀병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위암 3기라는 진단결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인 검거가 끝나야 수술을 하겠다고 환자가 우긴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한편으로는 대견한 생각까지 들었다.
정수는 스무 한 살에 의무경찰로 입대하여 경찰에 말뚝을 박은 케이스였다. 의무경찰 복무기간을 합치면 23년차였다. 그러나 지용운은 경찰대학 출신으로 정수보다 다섯 살이나 젊었어도 상관(上官)이었다. 경찰대학 출신들이 경찰청 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조직 문화였기에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다. 더구나 이번 연쇄살인범을 검거하게 되면 바로 경정에서 총경으로 수직상승 하는 것이었다. 총경은 일선 경찰서의 서장 급이지만 서른아홉의 나이에 경정만 해도 정수보다 두 계급이 높은 서열이었다. 김대식은 지용운과 함께 담당 의사를 만나고 나오면서 적이 놀라는 눈치였다. 병가를 낸 이유도 나리를 찾기 위한 꾀병으로 알았던 김대식은 위암 3기라는 병명(病名) 앞에 할 말을 잃었다. 다급하게 수술을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범인 검거가 끝난 후 수술하겠다는 말의 진위여부가 궁금했다. ‘자신의 병이 위중한데, 나리가 뭐라고 수술마저 미룬다는 말인가? 혹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수술을 미루는 것은 아닐까?’ 담당 의사를 만나고 나오는 지용운과 김대식은 이렇게 생각이 상반(相反)되었다. 병실로 남자 네 명이 들어오자 같은 방에 있던 환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수에게 쏠렸다.
“송 계장! 오랜만입니다.”
지용운은 수사관이란 호칭 대신 계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일선 경찰서의 계장은 본청에 반장에 불과했지만 위암을 앓는 환자가 광역수사대에 더 이상 복귀가 불가하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강동경찰서의 형사계장의 예우를 해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