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스의 등에 업혀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등에 뺨을 대고 근육의 움직임을 만끽하던 일레인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을 느끼며 스르륵 무거워지는 눈을 깜빡였다.
루카스는 산에서 내려와 움직임을 멈추었는데도 뒤에서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이 이상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에 기대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는 일레인의 모습에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산속에서 혼자 살아서 그런가?’
루카스는 그녀 같은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낯선 그를 경계하지 않고 치료해준 것 하며 깨어난 짧은 시간 동안 치료비 요구하지 않은 점도 이상했다.
치료사가 귀한 왕국에서는 감기에 걸린 약초 한 뿌리를 구하는 데도 평민들 일주치 봉급을 아무렇지 않게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독에 중독되어 죽어가던 그를 살려주었으면서도 약초값이나 치료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신분에 대해 언급했을 때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자신도 주술사가 이곳을 언급하기 전까지는 이곳에 오게 될 줄 몰랐었다.
루카스는 일레인이 깨지 않도록 배려하며 조심히 걸음을 옮기며 등에 업혀있는 여인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루카스가 살면서 만나온 사람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그를 아끼는 자와 그를 이용하려는 자. 첫 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이블린, 그리고 가브리엘. 그가 가족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두 번째 부류는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다가오는 자들이었다.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은 그의 외모와 미래의 백작 부인 자리를 노리며 그에게 접근했고, 남자들은 그의 지위와 재산을 보고 다가왔다.
공공연히 루카스를 그가 가장 총애하는 기사라 부르는 왕조차도 그가 스타르 왕국의 최연소 마스터라는 호칭을 가지기 전까지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버지인 글링턴 백작 역시 그가 이블린을 아끼는 것을 알고 그녀를 인질 삼아 그가 원하는 것들은 루카스에게 강요할 뿐 한 번도 그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다.
제 아비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한 그는 사람을 믿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관계란 서로 이용하고 조종하다 쓸모가 다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관계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는 낯선 그를 도와주고 그를 따라 백작 성까지 서슴없이 따라가는 이블린이 순진하면서도 한편으로 바보 같았다.
그가 나쁜 의도를 품고 그녀를 데려가는 것이라면 어쩌려고 그렇게 순순히 따라왔을까 비웃는 마을이 들면서도 그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던 일레인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루카스는 그가 산에 올라가기 전 가방을 숨겨 놓았던 커다란 떡갈나무 앞에 도착하자 아쉬운 얼굴로 일레인을 등에서 내려놓았다.
“누가 데려가도 모를 정도로 잘 자는군.”
루카스가 워낙에 조심히 움직인 탓도 있지만 일레인의 몸은 신력을 채우기 위해 가수면 상태에 있는 상태였다. 가수면 상태란 일반적으로 신이 안전한 장소에서 빠르게 신력을 채우기 위해 신력이 들어오기 쉽도록 수면 상태를 유도하는 것을 말하는데 일레인은 루카스의 곁에 있으면서 바로 그 안정감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가수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그녀의 곁에는 수면욕도 식욕도 없는 요정 니아가 한눈팔지 않고 그녀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것을 알 수 없는 루카스로서는 한 폭의 그림처럼 눈부신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일레인이 그저 철없고 순진한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험악한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줘야 하는 그런 여린 존재.
루카스가 그녀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무에 등을 기댈 수 있게 내려주고는 나무 위에 숨겨 놓은 가방을 찾기 위해 날렵한 몸짓으로 나무를 기어 올라갔다.
일레인은 그녀를 채워주던 열기가 사라지고 갑자기 밀려드는 허전함에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으……. 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루카스의 등에 업혀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얼음산을 벗어났는지 일반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난 작은 공터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일레인님 몸은 좀 어떠세요?”
“좋아졌어.”
니아의 물음에 일레인이 신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일레인은 한 번도 가수면 상태에 도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상태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맑아지고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자세를 바로 하고는 눈을 감고 차분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몸속에 쌓인 신력의 양을 가늠해 보았다.
“신기해, 전에는 사흘을 기절해 있었는데도 신력이 얼마 쌓이지 않았는데!”
가수면 상태에 빠져 있었던 일레인은 텅 비어 있던 신력이 반 정도나 돌아와 있음을 확인하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다행이에요.”
“그런데 루카스님은?”
일레인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루카스의 이름이 마음에 들어 저도 모르게 샐쭉 웃고 말았다.
‘루카스님, 루카스님.’
그를 그렇게 부르던 여자들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이젠 나도 부를 수 있어.’
일레인의 환한 미소에 기분이 좋아진 니아가 그녀의 주변을 뱅그르르 날아다니며 장난을 치자 일레인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환한 미소와 함께 맑은 웃음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지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루카스의 날카로운 입매가 살며시 호를 그리며 부드러워졌다.
‘혼자서도 잘 웃는군.’
루카스가 내려갈 타이밍을 잡기 위해 일레인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혼자서 뱅그르르 돌던 일레인이 갑자기 쪼르르 달려갔다.
“이것 봐. 물망초 꽃이야.”
얼음산 끝자락에 위치한 장소는 식물이 자라나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공터에는 저 커다란 나무를 제외하고는 비실비실해 보이는 나무 몇 그루가 전부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씩씩하게 뿌리를 내렸던 식물은 흙이 지니고 있던 영양분이 다했는지 시들어가고 있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네?”
“이 꽃의 꽃말이야. 책에서 본 적 있어.”
천계에서는 자라지 않는 꽃이었기에 언젠가 책에 그려져 있던 그림으로만 본 적이 있던 꽃이었다. 그림과 함께 적혀져 있던 꽃말과 꽃에 얽힌 슬픈 사연이 가슴에 와 닿아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봤던 꽃이 눈앞에서 시들어 가고 있었다.
일레인은 이야기 속에 나온 연인을 떠올리며 무의식적으로 꽃에 손을 뻗어 신력을 사용했다.
‘저건…….!’
나무 위에 있던 루카스는 갑자기 물빛 빛무리들이 일레인의 몸을 감싸는 모습을 보고는 단숨에 땅으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