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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향기를 입다
작가 : 서은환
작품등록일 : 2017.6.24

" 여솔씨, 사랑에 눈 먼 남자에겐 아무것도 보이는게 없어요. 얼마나 멀리있던, 얼마나 높이있던,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갈께요. 누구도 무시 할 수 없는 최고의 남자가 될께요. "

 
7화
작성일 : 17-06-29 11:08     조회 : 302     추천 : 0     분량 : 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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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파티장에 들어선 여솔은 차분하게 심호흡을 했다.

 

 ' 자기도 오나?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얘기도 좀 하고싶은데 '

 

 전날 새벽 갑자기 걸려온 OPR 잡지 편집장님의 전화만 아니었으면 안 오는걸 고민했을 텐데, 여솔에게 이런 자리는 언제나 불편했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자리. 아무런 빽도 힘도 없는 일개사원이 눈도장만 잘 찍어도 임원 자리까진 보장받을 수 있는, 그래서 아무나 올 수 없는 자리였다.

 

 누군가에겐 꿈의 장소일 테지만, 그게 여솔은 아니었다. 화연은 늘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잔소리 하지만 싫은건 어쩔 수 없었다.

 

 " 저…. 이런 곳에 제가 있어도 되나요…?"

 

 설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설화씨 정 불편하시면…."

 

 " 어 여솔씨 저기 왔네 "

 

 여솔이 말을 끝맺기 전에 들려온 위압적인 목소리 쪽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고급스럽게 웨이브 진 짧은 머리, 감한 화장과 큼직한 악세사리, 위협적일 만큼 세련된 정장의 중년여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국내 최고의 잡지 OPR의 편집장 최유리, 여솔도 여자치고는 제법 큰 편에 속했지만, 이 중년의 여성 앞에선 한없이 작아 보였다.

 

 모델이라도 하셨나. 설화가 그 존재감 앞에서 속으로 중얼거릴 때 여솔이 재빨리 대답했다.

 

 " 아! 편집장님 안녕하세요! "

 

 " 요새 얼굴 보기 힘들어? "

 

 " 그야 편집장님이 워낙 바쁘셔야죠 "

 

 " 내 핑계 대는 거야? "

 

 완숙미가 돋보이는 여성과 풋풋하고 밝은 여성의 모습은 누가 봐도 그림이 참 좋았다. 유리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여솔은 설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 아, 참, 편집장님 이쪽은…."

 

 여솔이 말과 손짓을 끝내기도 전에, 관심 없다는 듯 유리는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다.

 

 " 뭐 안 먹었지? 먹을 것도 많은데 앉아서 얘기하자 "

 

 " 네? 아 저 그게…."

 

 여솔이 곤란한 듯 눈치를 보는 사이, 어느새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채 눈치를 보는 여솔에게 설화는 ' 다녀와요 ' 입모양으로 말하고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차라리 적당히 어디에 숨어있다가 자리가 끝나면….

 

 " 숨어 있다 가라.. "

 

 설화는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 너 같은 건, 여솔이랑 지내면 니가 얼마나 바닥인지 실감밖에 못 할 거야. '

 

 태화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 하…. 강태화…. 이게 목적이었구나. "

 

 애초에 누군지 관심도 없는,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방송국에서와 똑같은 느낌, 똑같은 상황 완전한 투명인간 취급.

 

 " 이거 잔 좀 치워주게 "

 

 뜬금없이 손에 쥐어진 샴페인 잔을 보자 이젠 확신이 들었다.

 

 " 사람이 말하면 대답을 해야지, 옷은 또 왜 그런 걸 입고.. 알바좀 똑바로 쓰지.. 쯧쯧 "

 

 설화는 자신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 남자의 뒷모습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샴페인을 쥔 손이 점점 강하게 떨려왔다.

 

 설화가 느낀 건 무력함이었다.

 

 .

 .

 .

 

 " 인터뷰 기사 다음 주까지 보내줄 거지? "

 

 " 네? 아 네…."

 

 여솔의 눈앞엔 고급스러운 스테이크와 갖가지 요리가 가득했지만,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도, 유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 무슨 생각해? "

 

 " 네? 아뇨 아 그게…."

 

 우아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쥔 유리의 손이 느긋하게 움직였다. 시선은 자신이 썰고 있는 고기를 향하고 있지만, 관심이 오롯이 여솔에게둔 유리가 말했다.

 

 " 무슨 사이? "

 

 " 뭐가…. 요? "

 

 " 지금 자기를 안절부절못하게 한 그 남자 말야 "

 

 작게 썰은 고기를 입에 넣은 채 부드럽게 입을 놀리던 유리는 입가를 냅킨으로 닦는 동안 여솔이 서둘러 이야기했다.

 

 " 아, 제 부탁으로 같이 다녀주고 계신 분인데.. 되게 소심하고 막 그렇거든요 그래서.. "

 

 " 이 파티가 왜 만들어졌는지는 안 궁금하고? "

 

 " 네? "

 

 샴페인을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음미하던 유리는 씨익 웃으며 여솔에게 잔을 건넸다.

 

 

 

 

 

 

 ***

 

 

 

 

 

 

 " 음 좋아 완벽해 자기야 "

 

 민태의 정장 자켓핏을 정리해주며 유진은 다시 한 번 거울을 확인했다. 살면서 이런 최고급 호텔에 최고급 인사들이 모인 파티에 갈 수 있다니.

 

 호텔의 입구에 선 둘은 그 위용에 또 한 번 감탄하고 있었다. 민태는눈을 반짝이는 유진의 허리를 거칠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 내가 사업만 잘되면 매일 오게 해줄께 "

 

 " 그러니까 이번에 눈도장 잘 찍어놔 "

 

 " 내가 누구야? 맡겨만 줘, 너도 니 할 일 잘하고 "

 

 " 그런 건 또 내가 전문이지 "

 

 중요한 날을 위해 아끼고 아껴둔 명품 풀착장에 대학교 졸업사진 찍을 때 이후론 가본적도 없는 고급 샵에서 풀세팅까지 받은 유진이 자신감을 비쳤다.

 

 그런 유진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민태가 별안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근데, 고작 시키는 일이 이런 거야? "

 

 정직원으로 만들어주겠다며 태화가 제안한 내용은 유진에게도 좀처럼 이해가 어려운 내용이었다.

 

 ' 파티를 열 거야, 강설화도 올 거고. 근데, 거기에 니가 갑자기 진짜 남자친구와 나타나면 어떨까 '

 

 마치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자연스럽게 나온, 진짜 남자친구라는 단어에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태화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 긴장할 필요 없어, 넌 충분히 잘했어. 마무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있는 동안 이야기를 계속 진행되었다.

 

 ' 이번엔 잘할 수 있겠지? '

 

 태화답지 않게 따뜻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숨은 서슬 퍼런 칼날이 느껴졌다.

 

 ' 너의 남자친구에게 고위층 사람들도 소개해 줄 거야, 그게 다야 쉽잖아? '

 

 쉽다 뿐인가. 이런 게 조건이라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만번이고 수락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강태화 정도 아니 그 이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소개받을 수 있다면, 기회중에 기회였다.

 

 " 가자 "

 

 입이 귀에 걸릴 듯 치솟는걸 애써 가라앉히며 유진이 비장하게 말했다.

 

 때마침, 호텔에서 거친 배기음을 내뿜으며 노란색 스포츠카가 빠져나왔다.

 

 " 저런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그득하다. 이거지.. "

 

 민태와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경쾌할 걸음으로 서둘러 걸었다.

 

 

 

 

 

 

 ***

 

 

 

 

 

 " 저…. 여솔씨..? "

 

 호텔을 빠져나온 스포츠카 조수석에 앉은 설화가 싸늘하게 굳은 여솔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 혹시….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

 

 여솔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거칠게 악셀을 밟았다.

 

 약 10분 전,

 

 설화를 떨궈내려는 태화의 계획대로 차근차근 철저하게 하나하나 박살 나기 시작한 설화의 정신이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자신은 쏙 빠진 채, 직접적인 공격도 없이 필요한 부분만 찔러 들어온 계획은 설화의 트라우마를 하나하나 들추고 쑤시고 비틀었다.

 

 요동치는 심장박동은 설화가 정신을 가다듬을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 뒤로도 끊이지 않는 공격에 설화는 이미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설화의 떨군 시선은 바닥에 꽂혔다. 태화에게서 도망쳐 겨우 벗어난 손아귀에 다시금 올라갔다는 절망감과 치욕스러운 기분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달큰한 장미향이 설화의 뺨을 어루만졌다.

 

 쉴새 없이 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온몸이 박살 날 듯 위태롭던 설화에게 찾아온,

 

 마치 태풍의 눈으로 들어온 듯한 갑작스러운 평온함,

 

 쉴새 없이 뒤틀리고 꼬여있던 모든 게 그 향으로 떠오르는 한 사람에 곧바로 모두 다 제자리를 되찾았다.

 

 " 여솔씨..? "

 

 천천히 고개를 든 설화의 시선에 여솔이 서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태풍을 몰아낸 여솔은 빛을 내며 다가왔지만, 동정인지 한심한건지 화가난건지 알 수 없는 여솔의 표정에 다시금 자괴감에 빠질 때,

 

 여솔은 설화의 팔을 잡아끌고 태풍 밖으로 나오더니, 말없이 설화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도로에 늘어선 가로등과 그 뒤로 높게 솟아있는 건물들이 제법 멋스럽게 펼쳐졌지만, 분위기는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 죄송해…."

 

 끼익- 들어선 골목길에서 급브레이크를 밟고 고개를 숙인 여솔의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려왔다. 뜬금없이 찾아온 정적에 설화가 다시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역시…. 제가…."

 

 " 설화씨 "

 

 " 네! "

 

 천천히 고개를 들던 여솔이 바람을 훅 불자 흘러내린 앞머리가 공중에 떴다가 가라 앉았다.

 

 " 저 진짜 답답한 거 딱 싫어하니까, 그냥 간 보지 말고 대답해요 "

 

 " 네? 아 네! "

 

 " 강태화랑 무슨 사이에요 "

 

 " 도..동생인데요.. "

 

 " 후우…. 친동생이에요? "

 

 " 네..그건 왜.. "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여솔이 고개를 돌려 설화를 바라봤다. 한적한 골목길에 가로등 불빛을 받아 여솔의 얼굴이 빛났지만, 설화의 눈에는 그보다 더욱 신경 쓰인 건 어쩐지 느껴지는 여솔의 슬픈 눈빛이었다.

 

 " 설화씨는 제 편이에요? "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여솔의 시선과 목소리에 뭍은 쓸쓸함이 대답에 선택권을 부여했다.

 

 " 네 "

 

 " 그 대상이 형이라도? "

 

 조금 유치하게 들린 질문에 설화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여솔의 눈꼬리가 비틀어져 올라갔다.

 

 " 여솔씨, 그 인간은 웬수에요 "

 

 " 좋아요 "

 

 다시금 갑자기 악셀을 밟으며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놀란 설화가 손잡이를 부여잡고 매달렸다. 방금까지 서글프게 느껴졌던 여솔의 눈빛이 이따금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어 화연아 난데 "

 

 「 무슨 일이야? 」

 

 " 남성복 샘플 03번 자켓이랑 04바지, 그리고 17번이랑, 잠시만 설화씨 발 몇이에요 "

 

 " 네…? 아 저 270 신습니다 "

 

 " 47번 265 사이즈로, 그리고 너 누구랑 있어 "

 

 「 동생이랑 있는데…?」

 

 " 잘됐네, 저번에 빌려준 넥타이 지금 당장 반납하라고 해, 그것들 좀 언니네 샵으로 가져다 주라 "

 

 여솔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짜증 묻어난 목소리로 화연이 대답했다.

 

 「 무슨 일이야? 아니 그보다, 야! 나는 생각 안 하냐! 예의.. 」

 

 " 니가 눈독 들이던 구두준다 "

 

 「 싸장님~ 기다리쎄용~ 20분 이내로 갑니당~ 」

 

 통화내용으로 봤을 때 어느정도 짐작한 설화가 뻘쭘하게 손톱만 뜯는 동안 여솔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 내 직업이 뭔지 잊은 모양인데…."

 

 이를 악물고 핸들을 손톱으로 긁으며 말하는 여솔의 목소리에 치미는 울화가 느껴졌다. 설화는 애써 태연한 척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부셔버릴꺼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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