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뒤,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경일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행님?"
"..."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준혁이 경일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행님!"
"..."
"아 이 행님은 사람이 부르는데 왜 대답을 안해요?"
준혁의 말에 경일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뭐 괜찮은 야동이라도 발견하셨나..."
말을 마친 준혁이 경일의 시선을 따라 모니터 화면을 바라봤다.
"...!"
순간 준혁이 눈을 크게 떴다.
< 국립과학수사연구원 DNA감정결과 회신 >
DNA 감정결과 : 일치
"행님. 이거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제가 생각하는 그거 맞죠...?"
"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으힛. 으흐흐흐흐흐. 흐흐힛. 흐흐흐흐흐흐"
자신의 물음에 낮게 웃음을 흘리는 경일을 보며 준혁이 따라 웃기 시작했다.
"준혁아"
"네 행님"
"연장 챙겨라"
경일의 말에 기분 좋게 웃음을 흘린 준혁이 말한다.
"그 전에 팀장한테 보고하고 회의부터 한번 해야 될 것 같은데요?"
"..."
순식간에 표정이 굳는 경일을 보며 준혁이 쓰게 웃었다.
"어차피 오철식이 체포영장 신청하려면 팀장 결재받아야 해요. 알잖아요?"
"하..."
"저희 둘가지고 손도 부족하고요. 슬슬 희연이누나랑 병재 선배도 알아야 할 일이고"
"...부탁한다"
경일의 말에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
소회의실에 형사2팀 전원이 모여 둘러 앉았다.
비번 근무자였던 희연이 지금 막 들어와 준혁의 옆자리에 앉더니 소근거렸다.
"야, 무슨 일인데 비번 근무자까지 동원해? 요즘 안그래도 피부가 부쩍 푸석푸석해져서 스트레스인데..."
말하는 것과 다르게 물광까지 반질거리는 희연의 얼굴을 보며 준혁이 피식 웃었다.
"얼굴 좋은데요. 누가 보면 하루에 콜라겐 한 트럭씩 먹는 줄 알겠네"
"누나한테 돼지껍데기 한 번 안사는 놈이 콜라겐을 운운하네 참나.."
"저보다 계급도 높고, 나이도 많고, 심지어 월급도 더 많이 받는 누나가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난한 동생 벗겨 먹을 생각?"
"어머, 우리 동생 말을 너무 야하게 한다. 벗겨 먹다니... 누나가 아무리 이쁘고 매력적이라도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못써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말하는 희연을 보며 준혁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못쓰겠다..."
빠직
준혁의 중얼거림을 들은 희연이 준혁의 눈 앞에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동생. 누나한테 안맞은지 꽤 되었구나. 암매장 사건 이후로 한 번도 맞은 적 없지?"
아파트 13층에서 아래층 창문을 깨부수고 들어간 다음날, 소식을 전해들은 희연이 준혁을 보자마자 대뜸 귀싸대기를 올려 붙인 기억을 떠올린 준혁이 식은땀을 흘렸다.
짝, 짝.
"잡담은 그 쯤하고"
손바닥을 마주쳐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킨 영우가 말했다.
영우가 적절한 타이밍에 끊어주자 준혁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20% 한 대 맞을 타이밍이었는데'
처음으로 팀장에게 고마운 감정마저 느끼는 준혁이었다.
"조 금 있 다 가 보 자"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중얼거리는 희연의 모습에 준혁이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성격에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자, 이번에 우리 북부서의 히어로 조준혁 순경과 최고의 베테랑 한경일 경사가 아주 멋진 일을 물어온 것 같다"
준혁이 한숨 쉬고 있을 때 영우가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어떤...?"
아직 아무런 내용을 듣지 못한 병재가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십 수년 전에 사람 죽이고 시신에 알파뱃 새겨 넣던 미친새끼 있었지?"
영우의 말에 병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피해자가 7명이나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이었죠. 결국 놈은 잡지 못했지만..."
"그 놈 인적사항을 우리 준혁군과 경일군이 특정한 것 같다"
"...!"
영우의 말에 희연과 병재가 경악한 표정으로 준혁과 경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직 잡은 것 아니니까 흥분은 하지 말고. 내 손으로 수갑 채우기 전까지는 내 것이 아니다. 이런 말 있잖아?"
영우가 짐짓 설레는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그 가식적인 모습에 경일은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회의 끝나면 나는 서장님께 보고드리러 갈거야. 그 전에..."
잠시 말을 중단한 영우가 눈 앞에 서류뭉치를 가리키며 말한다.
"병재네 조는 여기 있는 미제편철 기록이랑 국과수에서 회신받은 자료, 수사보고서 다 정리해서 오늘 중으로 체포영장 신청해"
"예. 알겠습니다"
병재가 대답하자 영우가 이번에는 준혁과 경일을 돌아본다.
"그리고 경일이네. 너희는 지금 바로 올라가서 오철식이 주변 인물들 탐문수사해. 급할 것 없으니까 천천히, 무슨 말인지 알지?"
"...예"
경일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경일의 모습을 쳐다보지도 않고 영우가 기분 좋은 미소로 말한다.
"자, 질문있나!? 없으면 해산! 이런 일은 바로바로 시작해야지. 그렇다고 급하게 일 처리할 생각은 하지 말고! 십 수년이나 경찰 추적 피해서 가정까지 꾸리고 살고 있는 놈이야. 살인죄 공소시효도 폐지된 마당에 급할 것 없이 느긋하게~ 꼼꼼하게~. 급할수록 돌아가라. 오케이?"
거듭 강조하는 영우를 보며 형사2팀 전원이 대답한다.
"예"
"오케이! 해산!"
회의를 마치자마자 옥상으로 향하는 경일을 준혁이 급히 뒤따랐다.
"행님! 어디가요!?"
"한대하러 간다. 너도 할래?"
경일이 상의 안주머니에서 담배갑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뇨. 일단 올라가요"
옥상으로 올라온 경일이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니코틴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스읍~하아..."
"뭐 기분 안 좋은 일 있어요? 물론 팀장이 가식 떠는 모습 보고있자니 저도 속이 뒤틀리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
"그게 아냐"
"예?"
"그게 아니라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준혁을 바라보며 경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준혁아"
"예?"
"수사관들은, 특히 형사들은 수사할 때 형사 나름의 자존심이라는게 있다"
"...?"
"그 자존심이라는게 사람마다 다른 형태로 표출되곤 하지만... 난 말이야"
"..."
"예전부터 내 손으로 추적해서 특정한 새끼, 내 손으로 잡을 새끼는 내가 직접 영장을 쳐야 직성이 풀리더라고"
"..."
"내가 잡을 놈, 내 사건 피의자를 다른 사람이 대신 영장 친다는게 얼마나 기분 상하던지... 이해 못하겠지? 어쩌겠어, 날 때부터 이런놈인데..."
"..아뇨. 이해해요"
준혁의 말에 경일이 피식 웃었다.
"우리 조원 밖에 없네. 뭐 그렇다고 병재 선배네를 원망하거나 그런건 아니고"
경일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운동화 발로 바닥에 비벼끄며 말했다.
"이왕 시간제한도 없는 미션. 팀장 말대로 급할 것도 없는데 영장 치는 것 정도는 우리한테 맡겨 줬으면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네"
"진짜 행님은 종잡을 수가 없네요. 적응이 안돼"
"뭐?"
"어떤 때 보면 이 사람이 내일, 모레 불혹을 바라보는 베테랑 형사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또 어떤 때 보면 지금처럼 '아 이사람은 정말 천상 형사구나' 하는 생각"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준혁의 말에 경일이 발끈한다.
"야! 반올림하면 30대 중반이거든? 사람을 나이 40먹은 아재로 만들고 있네"
"전 그런 행님이 좋아요"
"...?"
준혁의 말에 경일이 입을 다물었다.
"행님이 제 첫 조장이라서 졸라게 좋다구요"
준혁의 장난스러운 말에 경일이 피식 웃었다.
"나 그런 취향 없다. 위에 동네 말로 일 없습네다"
준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참나.. 저도 행님처럼 배불뚝이 아저씨 취향 아니거든요? 사람을 뭘로 보고. 차라리 병재선배가 낫지"
"그 목석같은 남자랑 1주일만 같이 있어도 니 성격에 답답해 미칠 것 같은데?"
"그건 인정..."
"차라리 희연이는 어때? 객관적으로 미모 하나는 도내 경찰서 전체를 통틀어도 최고잖아?"
"농담으로라도 그런 무서운 말은 하지 말아 주실래요?"
"하하하하하하하"
자신의 말에 기겁하는 준혁을 바라보며 경일이 기분 좋은 얼굴로 크게 웃다가 말한다.
"나도 니가 좋다. 졸라게"
"..."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히어로"
경일의 말에 준혁이 씨익 미소 지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