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블린의 치료는 그녀의 여행계획안에 포함되었던 일이었지만 일레인은 루카스를 치료하면서 이 일이 그녀의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선뜻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아, 내 소개를 잊었구나. 난 루카스 글링턴. 이 스타르 왕국의 북쪽 지방을 다스리는 글링턴 백작 가문의 후계자다. 내가 널 데려가려는 곳도 바로 백작 성으로 넌 이블린의 병을 살피면 된다. 네가 동생을 낳게만 해준다면 사례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주마. 게다가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성이 생활하기 더 편할 거다. 아니면, 이곳을 떠나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일레인은 이미 루카스를 살리기 위해 가지고 있던 모든 신력을 사용했다. 얼마나 지나야 신력이 돌아올지 또 이블린을 치료하는데 얼마의 신력이 필요할지 알 수 없는 지금으로써는 아무 생각 없이 루카스를 따라가도 괜찮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신력이 충분하지 못해 이블린을 치료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면? 천계에 있을 때야 신력이 모자를 일이 없으니 걱정해 본 적이 없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건 아니지만…….”
“말해 보아라.”
“저……. 이곳을 떠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나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환자의 상태를 봐야지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일레인은루카스와 함께 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답을 미뤘다.
일레인의 목적지 역시 백작 성이었다. 이대로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대답에 실망하면 어떡하나 걱정돼 고개를 숙고 있던 일레인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루카스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다. 그럼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해라. 시간이 별로 없다.”
“네?”
“환자 아니 이블린을 봐야 알 수 있다고 하니 서둘러 성으로 가자는 말이다. 이브 그러니까 이블린의 상태가 요즘 안 좋아서 네가 빨리 봐주었으면 좋겠구나.”
“네?, 아, 네.”
루카스의 재촉에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어깨에 둘러멘 일레인이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다 되었습니다.”
“그게 다란 말이냐?”
“네. 전 이 가방만 있으면 됩니다.”
“하긴……. 이런 산골에서…….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 성에 도착하면 네가 필요하다는 것들을 모두 구해 주겠다.”
“저 그러실 필요 없는데…….”
“사양 할 것 없다.”
일레인은 그녀의 가방에 들어 있는 수많은 보물을 떠올리며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고작해야 가녀린 여인의 등을 반도 못 가리는 작은 천 가방을 곁눈질하는 루카스의 눈에는 측은지심이 담겨 있었다.
루카스는 일레인과 함께 산길을 내려오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일레인을 그의 왼쪽에 두고 오른팔로는 그의 검을 들고 몬스터가 나타날 때를 대비했다.
한참을 산길을 내려가던 일레인이 나무뿌리에 걸려 휘청거리자 루카스는 단단한 팔로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잡아 주었다.
몬스터들을 살피느라 바빴던 루카스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일레인의 얼굴을 내려 보며 급하게 휴식을 결정했다.
일레인이 앉을 수 있을 만한 나무 그루터기를 발견한 루카스가 일레인을 자리를 안내하며 문뜩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뭐가요?”
그가 혼자 산길을 헤매고 다닐 때는 한 시간에 한 마리 이상의 몬스터들과 싸움을 벌일 정도로 얼음산은 몬스터 천국이었다.
하지만 그사이 누군가 그들은 다 내쫓은 것처럼 단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 수상했다.
“이곳은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지. 한데 반나절 동안 산에서 내려오면서 몬스터는커녕 단 한 마리의 동물도 보이질 않아.”
루카스의 말에 일레인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못 봤어요.”
“아무래도 조짐이 이상해.”
일레인의 말에 얼굴이 어두워진 루카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굳은 얼굴로 일레인을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서둘러야겠다. 동물과 몬스터가 의식적으로 피해 갈 정도라면 분명 강한 몬스터가 근방에 있다는 뜻인데 네 체력으로는 내 속도를 따라오기 힘들 거다. 아무래도 내 등에 업혀야겠다.”
“네?”
루카스는 몸을 떨며 얼굴을 붉히는 일레인을 보며 듬직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다. 넌 내 귀한 손님이다. 몬스터가 나타난다 해도 내가 지켜줄 것이니 그리 떨 것 없다.”
루카스는 강한 몬스터라는 말에 일레인이 두려워한다 생각했지만 사실 일레인은 몬스터 때문이 아니라 언젠가 호수를 통해 보았던 셔츠를 탈의하고 검을 휘두르던 그의 넓은 어깨와 단단해 보이던 근육들 위에 그녀의 몸이 포개질 것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나온 신체 반응이었다.
굳이 오해를 풀지 않은 일레인이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스는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등을 내어 주었다.
“자 어서 업혀라.”
“네? 아, 네!”
일레인은 언젠가 보았던 루카스 등에 업혔던 이블린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루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루카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몸을 일으켰다.
‘흡.’
갑작스럽게 와 닿은 그의 뜨거운 체온을 가슴으로 느끼며 일레인은 오랫동안 바라만 봐왔던 그의 넓은 등에 가만히 뺨을 기댔다.
작은 일레인과는 달리 체격이 큰 루카스의 등에 업히는 일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등에 뺨이 닿았지만, 덕분에 저 위에 위치한 루카스의 목을 껴안기가 힘들었다.
자꾸만 잡았던 놓은 놓치며 그의 등 위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며 미끄러지는 일이 반복되자 루카스가 가슴을 울리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자세가 많이 불편한가 보군.”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루카스라 내려주겠다고 할까 봐 벌어진 다리로 그의 허리를 조이며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휘감았다.
“흠. 저기 목을……. 조르지는 말고…….”
“아! 죄송해요.”
일레인은 그녀 때문에 켁켁 거리는 루카스 때문에 놀라 목에서 손을 떼버리자 이번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의 등 위에서 휘청거렸다. 루카스가 상체를 숙이며 흔들리는 그녀가 무게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중얼거렸다.
“어, 조심! 이제 보니 영 조심성이 없는 아가씨군.”
신으로 태어나 신으로 자란 일레인은 인간들이 익숙하게 해내는 평범한 일들이 서툴 수밖에 없었으나 그래도 루카스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죽는 것만큼이나 싫었다. 속상한 마음에 울먹거리듯 사과하자 오히려 루카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무라던 것이 아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 없느냐?”
“예, 괜찮습니다. 한데 이렇게 가는 게 더 힘들 것 같은데요? 그냥 제가 걸어가는 게.....”
“잠시만 기다려라.”
루카스의 말과 함께 갑자기 일레인의 몸이 그에게 엉겨 붙듯 가까워졌다. 심지어 손에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녀와 그의 주위를 에워싸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어떠냐?”
“손을 놓고 있는데도 불편하지 않아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천을 몸에 두르듯 마나를 압축시켜 둘러봤다. 괜찮다니 이대로 속도를 올려 내려가야겠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루카스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자유로워진 손을 그의 등에 대고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이는 근육의 움직임을 손을 통해 느끼면서 빠르게 사라지는 주변의 경관을 감상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일레인의 소매 속에 몸을 의탁한 니아 역시 루카스의 움직이는 속도에 감탄하며 일레인과 같은 자세로 휙휙 지나가는 나무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바라보는 한 쌍의 검은 눈동자 역시 루카스와 비슷한 속도로 움직임을 숨긴 채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