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연이 나한테 실망한 거 같네···.“
그런 혼잣말을 뇌까리는 나.
“그러게.“
그럼에도 별이는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넌··· 왜 안 나가?“
나는 불안한 눈초리로 별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라니? 누나가 동생 버리고 가는 거 봤어?“
그런 내게, 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넌··· 나한테 실망 안 했어?“
“응? 내가 왜 너한테 실망해?“
“나, 김설한테 엄청 심한 말했는데···.“
내가 뒤늦게 자각해봤자, 이미 한번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나한테 한 건 아니잖아? 뭐, 나한테 했으면 넌 죽었겠지만.“
“그러네···. 서 있는 거··· 안 불편해?“
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리 그곳에 우둑커니 멈춰 서있었다.
나는 그게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멈춰 서있는 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새삼 실감하게 해주기 때문일까?
“딱히? 너도 내가 가슴 때문에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고 생각하는 거야?“
별이가 가늘게 뜬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강조하듯 팔짱을 꼈다.
“아, 아니야···. 그럴 리가···. 그냥 다리 아프진 않을까··· 해서.“
시선을 내려 깔았지만, 역시 그 모습을 뇌 속에 그린다.
“걱정 해주는 척 하고 있네. 사실은 자기가 날 만지고 싶은 거면서.“
“···잘 알고 있네···. 그, 그럼···.“
“지금 날 만지면··· 너, 죽을 텐데?“
내 떨림을 별이가 단칼에 잘랐다.
“···어째서 얘기가 또 그렇게 되는 거야?“
그건 싫었다. 거부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살짝 토라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영이 네 목숨, 그거 누구 거지?“
별이는 그런 나를 무시하고는 차가운 목소리를 내뿜었다.
“···별이 거···.“
나는 몸을 움츠리며 답했다.
“내가 실증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지, 안 그래?“
그 목소리가 내 몸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깊어진다.
“그래···.“
대꾸할 수 없다. 아니, 해서는 안 된다.
“인형 주제에 건방지게 행동하지 말라니까? 진짜 참는 것도 한계라고···!“
무서웠다. 이제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나는 그래선 안 되기에.
“미안해···. 용서해줘···.“
“하아···.“
별이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넌 살아있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실증나기 전까지 살려두는 거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인간이라고 해서··· 네가 진짜 나랑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영아?“
“······.“
“감정 없는 인형이었던 주제에··· 너 요즘 너무 막나간다고.“
어느새 멈춰있던 다리를 움직인 모양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별이는 내가 있는 침대에 걸터 앉아있었다.
“너, 살기 싫어? 지금이라도 같이 죽을까?“
“···아직··· 더 살고 싶어···.“
“살고 싶다는 건 「나」때문일까? 아니면 지금쯤 울고 있을 「개」 때문일까?“
“남겨진 게 아직 있어··· 그것만 정리하고···.“
“그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 텐데? 다시 기회를 줄게. 살고 싶다는 건 「나」 때문이야? 아니면···.“
“너! 별이 너 때문이야!!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거잖아! 절대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아···. 이제는··· 절대 아무도 죽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럼 네가 제대로 살아야겠지?“
“···그래···.“
“한 번만 더···.“
내 턱을 들어 올린 채 다가오려 하는 별이. 그동안에도 나는 그저 멍하니 녀석을 기다렸다
별이는 자신의 입술을 나의 목 언저리에 가져다됐다.
그리고, 물어뜯듯, 강하게 이빨을 세웠다.
아프다. 스스로 목을 조르던 그때보다도,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
“···아···! 으큭···!!”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몸똥아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참아.“
그런 비명조차 허락하지 못하는지, 별이가 내 입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꽉 눌러 덮었다.
“참으라고···!“
별이의 말은 강압적이었으며 또 고압적이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이를 악물며 이 고통의 시간을 견뎠다.
그 폭력적인 행위가 끝나고··· 아픔 탓에 그만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파?“
별이는 자신의 입가에 묻은 피를 혀끝으로 핥았다. 살이 뜯겨 나간 나는 별이의 물음 앞에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너는 평생 그 아픔을 기억해야 될 거야. 오늘 나는 그것보다 수천수만 배는 더 아팠으니까···. 그건 아마 이나연 그년이랑 개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나는 그 말에 대꾸도 하지 못했고, 고인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그냥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이걸론 부족한 거 같아.“
그 말에 피가 말렸다. 숨이 막혔다. 너무 무서웠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요 ,용, 용서해주세요···.“
살고 싶다. 죽기 싫다. 아프기 싫다. 또, 또··· 학대받기 싫다.
“흐음, 걸작. 10년 넘게 공들인 보람이 있단 말이지. 아··· 일방적으로 학대받는 걸 너무나 무서워하는 내 겁쟁이 동생. 나는 그런 네 모습이 미칠 거 같이 좋아♥ 나는 있잖아··· 네가 헐떡이는 게 계속 보고 싶어. 이걸 어쩌면 좋지?“
얼어붙을 것만 같은 그 미소가, 폭력적으로··· 살인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누, 누나! 하···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다신 건방지게 죽을려고 안 할게요···. 제발···. 아픈 건 이젠 싫어요···.“
“후훗, 잘했어. 동생이 울면 누나가 머릴 쓰다듬어줘야겠지? 이리와, 나의 영아.“
상처부위에서 줄줄 흐르는 피의 감촉이 불쾌했다. 그럼에도 그때 그 시절처럼 날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별이에게서 나는 벗어날 수 없었다.
“흠··· 피가 많이 나네. 내 파자마랑 네 티셔츠가 다 얼룩졌다고?“
“죄송합니다···.“
나는 그 부드러운 감촉을 받으며 별이에게 사과했다.
“잠시 기다려. 밖에서 망할 년 불러올 테니까. 정말 넌 짜증난단 말이지. 멋대로 피나 흘리고···!“
“짜증나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또 한 번 사과했다.
그런 내 모습에 별이는 만족한 듯 웃으며 내 몸을 매만졌다.
“그치만··· 내 몸에 이런 「더러운 피」를 묻히는 동생도, 이 누나는 정말로 좋아한답니다.“
매만지는 손길이 한순간 거세지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형의 상태를 살피기 위한 아주 잠깐의 손짓이었다.
“좋아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별이의 손이 내게서 떠났다.
동시에, 별이는 자신의 뜻대로 변한 내게 싱긋 미소를 남기고는 거실로 나갔다.
침묵이 나를 엄습해왔지만, 비명을 내지르고 싶어 하는 나의 요동치는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이불자락을 부여잡은 채 눈가에 고였던 눈물을 쏟아냈다.
아직까지 강압의 잔류가 남았기에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그저 숨죽여 흐느꼈다.
그리고 흐느끼면서··· 별이가 남긴 또 하나의 말을 되뇌었다.
“「더러운 피」“
이것이 내가 살아있는 이유이자, 살아있기에 받는 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