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저물고 거리에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쩝..쩝.."

　옆 자리에서 세상 모르고 졸고 있는 경일을 보며 준혁이 눈가를 문질렀다.

　"얼굴 까먹겠네... 언제 나오는거야 젠장..."

　준혁이 조용히 중얼거리며 옆에 놓여 있던 오철식 일가의 사진들을 다시 바라봤다.

　"남의 가정 파탄낸 새끼가 마누라에 자식까지 낳고 번듯하게 잘 살 수 있는 나라..."

　준혁이 출발하기 전 확인한 오철식의 전과는 살인을 포함하여 7범이었다.

　1건의 살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범죄들은 단순 폭행이나 음주운전 따위였기에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다.

　'문제는 그 1건의 살인...'

　준혁이 오철식이 저지른 살인에 대한 구체적인 1)범죄사실이 기재된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 피의자 오철식은 남양평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이다.

　피의자는 1991. 5. 7. 14:20경 경기도 양평시 소재 남양평고등학교 1학년 7반에서 피의자의 친구인 피해자 박수홍이 "너희 애비 노가다판 뒹구는 술쟁이 절름발이라며? 애미도 없고. 어쩐지 얼굴에 뗏국물이 줄줄 흐르더라 더러운 새끼" 등의 욕설을 한 것에 격분하여 소지하고 있던 컷터칼을 이용하여 피해자의 목을 1회 그어 2)절상으로 인한 경동맥 과다출혈로 살해하였다. >

　위 범죄사실에 대한 지방법원 주문.

　피고인 오철식을 징역 장기 5년 단기 3년에 처한다.

　압수된 컷터칼 1자루(증 제1호)를 몰수한다.

　3)양형의 이유

　이 사건 범행은 피고인이 사소한 말다툼 중에 피해자를 칼로 찔러 살해한 것으로, 만 16세의 피해자가 아무런 가능성도 꽃 피워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그 유족들은 피해자의 어머니가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다만,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피고인은 만 16세의 소년으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이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계속된 폭행을 당하면서 자라 왔고, 평소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또래 친구들로부터 집단 폭행과 괴롭힘을 당해 왔던 점, 이 사건 범행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이고 피해자가 유발한 면도 있는 점, 피고인에게 범죄 전력이 없고 아직 나이가 어려 개선 가능성과 장래를 고려할 필요가 있는 점 등 형법 제51조가 정한 양형조건을 두루 참작하여 위 주문과 같이 형을 정한다. 

　"오철식은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일 확률이 높다"

　종이뭉치에 적혀있는 내용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은 준혁이 중얼거렸다.

　가정형편이 불우하고 어린 시절부터 주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집단적인 괴롭힘을 당해 온 아이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소시오패스라고 한다. 

　이 소시오패스들은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침해하기 때문에 반복적인 범법행위를 일으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가정환경이나 장애가 만능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지'

　조금씩 마음이 약해지던 준혁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짧게 한숨을 쉰 준혁이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행님! 행님!"

　준혁이 소리 낮춰 부르는 소리에 입까지 벌려가며 졸고 있던 경일이 눈을 떴다.

　"뭐야? 뭐?"

　"저거 박미자 아니에요? 오철식 부인 있잖아요"

　목이 뻐근했는지 좌, 우로 목을 꺾던 경일이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맞는 것 같은데?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네? 조금 더 늙었나 그래도 사진에 포샵질은 많이 안했네"

　경일이 옆에 놓여 있던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분명히 오철식의 처 박미자의 얼굴이었다.

　"빙고!"

　밖으로 걸어나오는 박미자에게 시선을 집중하던 준혁이 순간 밝은 얼굴로 미소 짓자 경일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아니 그러니까 꼴통... 아니 준혁님. 오철식이 마누라, 아니 그놈 할머니의 할머니가 나와도 이 난관을 도무지 어떻게 헤쳐나갈지 제 작은 짱구로는 전혀 짐작도 못하겠거든요. 이제 좀 시원하게 설명좀 해보시죠"

　"박미자 손을 잘 봐요"

　"손?"

　경일이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쓰레기 봉투?"

　경일의 중얼거림에 준혁이 씨익 미소 지었다.

　"애들 있는 집은 다른 집들보다 쓰레기를 더 자주 내놓잖아요. 행님 집도 안그래요? 설마 올라온 당일에 이렇게 내놓을 줄은 몰랐지만..."

　준혁의 대답에 경일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럼 쓰레기봉투 내놓는 것 때문에 가족들 얼굴까지 다 외우고 있으라는 거였어?"

　"쓰레기 내놓는거야 보통 애들 시키기도 하고, 아줌마들이 내려오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래도 쓰레기봉투를 매일 내놓는건 아니잖..."

　준혁이 경일의 말을 중간에서 끊는다.

　"오철식이 하나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 보다는 낫잖아요?"

　"...뭐 그야"

　"결론적으로 이렇게 잘 풀렸구요"

　"..."

　경일이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아.. 이제는 멋진 조원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남의 집 쓰레기까지 뒤지게 생겼네"

　"그것도 팀장한테 닦이는 것 보다는 낫잖아요?"

　"내가 졌다. 이 새끼야. 나은 것도 많네 애나 낳아라 쓰벌..."

　경일이 말에 준혁이 피식 웃었다.

　"박미자 들어갔네요. 슬슬 나가보죠"

　말을 마치고 차량에서 내리는 준혁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경일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시은아, 아빠가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번다"

　유난히 딸 생각이 간절해지는 경일이었다.

　부스럭, 부스럭

　"어때? 있어?"

　"기다려봐요. 열심히 찾고 있으니까"

　"빨리 좀 찾아봐. 이번에는 좀 일찍 내려가자. 팀장놈 스트레스 줄 거 생각하면 치가 떨려요 내가"

　"아 그럼 같이 좀 찾아봐요. 조원은 쎄가 빠지고 있구만!"

　말을 마친 준혁이 쓰레기봉투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을 바닥에 와르르 쏟기 시작했다.

　"찾아요! 같이!"

　뒤적, 뒤적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쉰 경일이 쓰레기 더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 두 손으로 팍팍 뒤져봐요! 나중에 씻으면 그만이구만!"

　집게 손가락으로 깨작깨작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경일의 모습을 보고 준혁이 역정을 냈다.

　"후레자식아! 나 조원 때는 힘들고 더러운 일은 조원이 알아서 척척 다하고 그랬어. 어디 조장 손에 물이라도 묻혔는 줄 알아? 조장이 힘든 일 좀 하려고 하면 바로 달려가가지고 '아이고 선배님. 뭐 이런걸 직접 하십니까, 제가 다 하겠습니다' 하고..."

　"아오 진짜, 말 그만하고요. 담배 못찾으면 또 몇날 몇일 잠복하고 팀장한테 닦여야 하는데 진짜 그걸 원해요?"

　"에이 시팔! 팀장 얘기는 하지 말자. 찾으면 될 것 아냐!"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를 발로 한 번 차버린 경일이 다시 쭈그리고 앉았다.

　"...어?"

　앉자마자 눈 앞에 보이는 물체에 경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준혁아"

　"아 진짜 말 그만하고 찾아요!"

　"그래, 내가 찾은 것 같다"

　"예?"

　경일의 말에 준혁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심봤다."

　경일이 장갑을 낀 손으로 쥐고 있는 담배꽁초를 보고 준혁이 눈을 크게 떴다.

　경일이 다시 한번 큰소리로 외친다.

　"심봤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아주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 한다.

　"별 미친 양반 다보겠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리는 아주머니를 신경쓰지도 않고 미친 듯이 웃고 있는 경일이었다.

　1) 특정한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위법하고 6하원칙에 따른 유책한 구체적 사실을 말한다.

　2) 끝이 예리한 물체에 의하여 입는 체표의 상처. 절창(切創)이라고도 한다. 칼 ·금속기 ·유리파편 등에 의한 것이 많다.

　3) 법원이 형사재판 결과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에 대해 그 형벌의 정도 또는 형벌의 양을 결정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