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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무협물
무극상도
작가 : 황정검
작품등록일 : 2016.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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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화기로 쌓은 내공을 신기로 돌려 연기화신을 수련하는 무당파 신선류.
그곳의 수장인 태허진인의 가르침 아래 천하제일 고수로 거듭나는 청우의 강호유람기.
영기를 얻으면 무림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3. 고인이 도(道)의 껍질을 깨부수니
작성일 : 16-04-10 19:28     조회 : 611     추천 : 0     분량 : 18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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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시(寅時,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초.

 만물이 어둠 속에 묻혀 있을 시각으로, 팔선전 또한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팔선전 내 태허진인의 수련실 바로 옆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소동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내는 소리였다.

 졸린 눈을 비비며 창 쪽으로 몸을 이동한 소동이 창문을 가린 천을 활짝 젖히었다.

 창가로 옅은 달빛이 스며들어 왔다.

 창을 열고 공기를 환기한 소동은 가볍게 몸을 풀더니,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창 쪽을 바라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손바닥을 위쪽으로 향하도록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것이 평범한 운기조식의 자세였다.

 처음에는 의식적인 호흡으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더니, 몇 호흡 지나지 않아 소동의 안면에 평온한 기색이 돌며 숨소리가 안정되어졌다.

 이윽고 길고 낮아지다가 종래에는 호흡을 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고요해졌다.

 무료한 바람이 방 안을 휘 젖고, 창밖으로 별들이 한참 동안 흘러갔건만 소동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이치고는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입적한 고승처럼 움직임이 없던 소동은 묘시(卯時, 새벽 다섯 시에서 일곱 시)가 한참을 지나고서야 반개한 눈을 뜨고 일어났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소동의 얼굴 위에서 부서지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햇살이 간지러운 듯 얼굴 가득 미소를 피어 올리고 있는 소동을 자세히 보니 누군가와 많이 닮아 있었다.

 바로 청우였다.

 옹알이를 하던 청우가 벌써 일곱 살을 먹은 것이다.

 청우가 한밤중에 일어나 자세를 잡고 호흡을 조정하는 것은 연정화기(練精化氣)를 위한 복식호흡(腹式呼吸)이었다.

 복식호흡은 호흡을 통해 들어온 공기를 단전 상부에 위치된 비장까지 깊숙이 끌어들여 공기 속에 포함된 천기(天氣)를 흡수하는 호흡이었다.

 비장에 심상을 두고 복식호흡을 하면서 정기를 내가진기로 변화시키는데, 생성된 내기는 하강하여 단전에 축적되었다.

 청우가 태허진인에게서 심법을 처음으로 배운 것이 네 살 때였으므로, 벌써 삼 년 동안 축기로 새벽을 연 셈이었다.

 태허진인이 네 살의 청우에게 처음 가르친 것은 간단한 호흡법이었다.

 왜 굳이 어렵게 호흡을 해야 하느냐는 청우의 질문에, 자연의 이치로 정기신(精氣神)이 무엇이고, 천지인 삼재가 조화되면 기(氣)가 생성되어 어떠한 작용을 한다고 설명하여 주었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 문도들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 설명하던 습관대로 조금 자세하게 설명해 준 셈이다.

 그런데 두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청우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태허진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부님 말씀대로 하니 ‘기’라고 생각되는 것이 생겼는데 어떻게 해야 움직일 수 있느냐고 청우가 물어 왔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 살 때부터 글을 깨우쳐 이제는 혼자서도 곧잘 책을 읽을 수 있는 청우였다.

 지나치게 빠른 감이 있지만 태백진인의 진단처럼 청우가 영기를 지녀 뇌력이 뛰어나서 진도가 빠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좋은 것과 기감이 뛰어난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순간적으로 태백진인이 복용시킨 검은 환단이 스쳐 지나갔지만 태허진인은 애써 부인하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태백진인이 뇌를 보호하고 신기를 영험하게 한다고 했지, 기감까지 좋게 한다고 하지는 않았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었다.

 기감이 뛰어나다는 것은 무인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도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신선류에서 이루고자 하는 연신환허, 연허합도의 경지도 깨우침 이전에 연정화기, 연기화신이 경지에 이르러야 이룰 수 있었다.

 장차 신선류의 도대(道垈)위에 무당파의 무공을 익힐 청우에게 ‘기감’은 가장 절실히 필요한 능력이기도 했다.

 천진한 모습으로 눈을 반짝이며 묻는 청우의 얼굴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청우를 똑바로 앉힌 태허진인이 급히 심안을 발휘했다.

 심안을 처음 얻었을 때에는 집중해야만 가능했는데,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바로 발휘되는 게 능력이 많이 향상된 것 같았다.

 심안을 발휘하여 청우의 단전 속을 관조하니, 미세하지만 내기가 보였다.

 원기(元氣)라고도 칭해지는 정기(精氣)는 인간이 음식을 통해 지기를 흡수하면서 쌓아 가는 기운으로, 인기(人氣)와 지기(地氣)의 총화이다.

 정기는 신장(腎)에서 생성되고 피도 되고 정액도 되고 오장육부에서 활동하는 진액으로도 변화되는데 그 일부는 비장에 저장되어진다.

 바로 이 비장 속에 저장된 정기가 호흡을 통해 들어온 천기와 혼합되면 천지인 삼재가 합일되어 내기로 변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단전호흡을 한다고 다 내기를 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기와 공기 중의 천기를 반응하게 만드는 촉매제가 있는데 바로 호흡자의 마음이다.

 호흡자의 마음 즉 심상을 담아야만 내기가 완성된다.

 때문에 내기에는 호흡자의 영성이 담겨지고, 이러한 이유로 내기가 호흡자의 의지에 따라 이끌려 경락을 순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복식호흡은 평안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심상으로 비장을 비추고, 천기 속의 기운을 정기가 동화시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가 않다.

 고요한 상태에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심상으로 비장을 비추는 것도 어렵고 천기 속의 기운을 정기와 동화시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명문가에서 글도 못 뗀 어린아이에게 호흡을 가르치고, 수많은 심법들이 무림에 난무하는 이유였다.

 호흡을 가르친다고 바로 기를 느낄 수도 없었다.

 청우에게 재능이 있다는 전제하에 최소한 일 년을 생각했던 태허진인이었다.

 그런데 단 두 달여 동안에 청우가 연정화기를 이룬 것이다.

 내심 크게 놀랐지만 태허진인은 표정을 관리하여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자칫 자만하여 노력을 게을리 할 것을 저어해서였다.

 대신 연정화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축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심상 수련’을 강조했다.

 그리고 임독이맥(任督二脈)을 뚫어 소주천을 행할 수 있게 된 이후에나 운기가 가능하므로 향후 일 년 동안은 축기만 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태허진인의 예상대로 다섯 살 때 임, 독맥이 소통되고 여섯 살 되던 해에 십이정경과 기경팔맥이 소통되어 대주천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도 매일같이 축기로 새벽을 여는 청우였다.

 축기가 끝나면 단전에 축기된 기운을 경락을 통해 온몸으로 순환시키는 ‘운기(運氣)’를 했다.

 운기로 내기를 이동하면 내기가 지나는 부위가 활력을 얻게 되고 오장육부 강화 및 상처 치료의 효과가 있다.

 또한 운기행공이 깊어지면 경맥(經脈)이 넓어져 한꺼번에 많은 내공을 보낼 수 있으며, 락맥(絡脈)도 발달하고 이후 세맥(細脈)까지 세밀하게 기를 조정할 수도 있다.

 운기를 마친 청우는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예복(禮服)으로 갈아입었다.

 매일같이 행사하는 삼신지례(三淸之禮)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삼신은 삼청으로도 불리는데 원시천존, 영보천존, 그리고 도덕천존인 태상노군을 가리킨다.

 원시천존은 우주가 아직 모습을 갖고 있지 않았을 때 태어난 신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이며 천상세계 삼십육 층 중 가장 높은 천상계인 대라천(大羅天)에 거하고 있다.

 수백, 수천에 이르는 도교의 신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도교의 깊은 뜻을 전수해 준, 모름지기 도교 최고신이 바로 원시천존이었다.

 영보천존은 우주의 시작인 혼돈을 상징하는 신으로, 양손에 태극을 상징하는 음양경(陰陽鏡)을 들고 있으며, 태상노군은 무위자연을 내세우며 도가(道家)의 개조가 된 노자를 일컬음이다.

 삼신지례는 매일 아침 묘시 중반에 행해지며, 이때는 팔선관에 거하는 신선류의 모든 도인들이 팔선전에 모여 예를 올렸다.

 삼신지례 이후 양쪽에 늘어선 팔선의 선인상에 예를 마치면 아침 행사가 끝났다.

 행사가 끝난 후 간단히 조식을 마친 청우는 진시(辰時, 오전 일곱 시부터 아홉 시) 중반에 수련실로 향했다.

 바로 옆방이라 수련복으로 갈아입는 것 외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었다.

 선무옥실(仙舞玉室)은 팔선전 내에서도 아주 특별한, 신선류의 수장인 진인이 술법과 무공을 수련하는 방이었다.

 태허진인도 예전에는 많이 드나들었지만, 요즘은 명상 등 정신 수련에 치중하느라 제자인 청우에게 내주고 수련실로 사용토록 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수련실의 양쪽 벽면에 원색으로 무공도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한쪽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권법을 펼치고 있는 젊은 도인의 모습이었다.

 권법을 펼치는 젊은 도인의 주변으로 붉은색, 푸른색 물감이 어우러져 신비스럽게 그려져 있었는데, 그림은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탈색되어 있었다.

 맞은쪽 벽면에는 하얀 수염을 흩날리는 노 도인이 검법을 펼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입실한 청우는 권법이 그려진 벽면을 향하여 수련실의 정중앙에 섰다.

 가볍게 손발을 휘둘러 몸을 푸는가 싶더니, 곧이어 진지하게 자세를 잡았다.

 두 발을 나란히 모으고 선 청우가 왼발을 뒤꿈치, 발끝의 순서로 들어 어깨 너비로 벌렸다.

 이어 손등을 위로 하여 서서히 어깨 높이까지 들어 올린 다음 무릎을 굽히며 팔꿈치를 떨어뜨리고 손바닥을 배꼽 높이까지 서서히 내리눌렀다.

 태극권의 기세식과 유사한 수법이었다.

 동작만으로 비교하면 몇 배 느리게 펼친다는 것뿐, 다른 차이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초식 또한 태극권의 야마분종과 유사한 수법이었다.

 야마분종 초식은 쳐 오는 상대의 주먹을 잡고 다른 팔을 상대의 겨드랑이에 껴서 발을 건 채 가슴과 목 부분을 횡단으로 미는 수법이다.

 내기를 운용하지 않아도 정통으로 당하면 팔이 부러지거나, 흉곽이 주저앉을 수 있으며, 깊은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청우의 야마분종 초식을 자세히 보면 태극권의 야마분종과 큰 차이점이 있었다.

 지나치게 느리고, 평온함을 넘어서 고요함이 느껴진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초식도 약간 다를뿐더러, 초식을 펼칠 때 기세가 밖으로 일절 표출되어 나오지 않았다.

 청우의 내공 수준이 낮거나, 억지로 운기하지 않고 권을 펼치는 것은 아니었다.

 청우의 내공은 태허진인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향상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태극권을 펼칠 때 미세하게나마 내기가 엿보여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한 점의 내기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내기가 흘러나오기는커녕 락맥(絡脈)에 남아 있던 내기조차 깊숙이 침잠되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어찌 보면 권법이 아닌 부드럽고 고요한 춤사위 같았다.

 이어서 펼친 초식 또한 태극권의 백학양시(白鶴亮翅), 루슬요보(樓膝拗步)와 유사했다.

 백학량시는 상대에게 팔목을 잡혔을 때 상대의 겨드랑이 밑에 팔뚝을 넣고 꺾어 올려 상대를 제압하는 초식이고 루슬요보는 상대의 발차기를 한 손으로 걷어내고 다른 손으로 가격하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 두 초식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느리고 고요하며 부드러우면서도 절제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백학량시는 말 그대로 학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듯 보였고, 루슬요보도 동작만으로는 절대 막고 가격하는 강렬한 초식이라고는 믿지 못할 듯했다.

 그나마 백학량시와 루슬요보는 나은 편이었다.

 연이어 펼쳐지는 수휘비파(手揮琵琶)는 상대의 쳐 오는 주먹을 잡아 양손으로 꺾어 누르며 제압을 하는 초식인데, 마치 여인이 악기를 품고 섬세한 손길로 음을 고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신선류 태극권은 심의를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권법이었다.

 아니, 권법이라기보다는 심공(心功)이라 불려야 옳았다.

 연정화기로 축기된 내기를 신기로 바꾸는 비법이 바로 신선류 태극권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고요하고 혼원함으로 음양을 조화시켜 밖으로 태극을 구현하고, 우주의 기운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이를 내면으로 도인하여 단전을 감싸면 내기 속에 간직된 오행의 기운이 변화되어 신기로 승화된다.

 이것이 신선류 태극권의 요체였다.

 태극을 구현하고,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어, 우주의 기운과 내가 하나로 일치되려면 신심이 고요해야 한다.

 또한 하늘의 마음과 정신을 도인하여 단전 속에 갈무리된 내기에 깃들이기 위해서는, 당연 몸 안의 내기를 활성화시키지 않고 거두고 단속하여야만 한다.

 초식을 펼쳐도 내기가 뻗혀 나오지 않는 이유였다.

 벽면의 권법은 총 삼십육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빠르게 펼친다면 일각도 걸리지 않을 터이지만, 청우가 삼십육식을 마쳤을 때에는 어느덧 반 시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신선류 태극권 삼십육식을 모두 마친 청우는 면건(棉巾)을 들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쉬지 않고 반 시진을 수련하면 피곤할 듯도 한데 청우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 보였다.

 오히려 몸에 활력이 돋는 듯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땀을 닦자마자 다시금 태극권의 기세식으로 돌아갔다.

 신선류 태극권 삼십육식을 재연하고, 그도 부족한지 다시 한 번 펼치고 나서야 아침 수련을 멈추는 청우였다.

 

 부모 없이 태허진인의 품에서 자란 청우에게 태허진인은 스승 이상의 존재였다.

 주변에 관심을 끌고 사랑받고자 하는 존재가 태허진인뿐이었다.

 가끔 말썽도 피우고, 응석도 부렸지만, 이는 태허진인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세 살 때 청우가 태허진인이 아끼던 도자기를 깨트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부에게 물려받은 유품으로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던 도자기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챈 청우가 자지러지게 울어 댔다.

 그런데 깜짝 놀라 달려온 태허진인은 깨진 도자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청우의 몸이 다쳤는지부터 확인하고 괜찮다고 위로하며 울음을 그칠 때까지 청우를 꼬옥 안아 주었다.

 심적으로 놀랄까 봐 청우에게 어색한 웃음까지 지어 보여 주었다.

 너만 괜찮으면 그 무엇도 다 필요 없다고 했다.

 그날 이후 청우는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더 이상 태허진인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신 어떻게 하면 태허진인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을지 고심했다.

 태허진인이 글을 가르치면 열심히 따라 익혔고, 하루도 쉬지 않고 심법과 신선류 태극권을 수련했다.

 열심히 노력하여 성취를 보이면 태허진인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태허진인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세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네 살 때부터 육경(六經) 등 본격적인 학문을 익혔다.

 청우가 이른 나이에 심법과 태극권을 수련할 수 있었던 것도 학문적 소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청우가 여섯 살 나던 해의 일이었다.

 태허진인이 심법과 태극권에 성취를 보일 때보다도 학문적 성취를 보일 때 더 기뻐하는 것 같자, 청우가 태허진인에게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태허진인은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청우야! 하늘의 수리가 고고한 것은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이 있어서가 아니라 높게 날 수 있는 날개와 넓게 살펴볼 수 있는 매서운 두 눈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도 폭 넓게 사고하고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인재가 될 수 있는데 그 기초가 학문적 소양이다. 깊은 성찰과 풍부한 경험이 더해져야 하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열심히 공부하도록 해라.”

 청우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학문적 소양이 무공에도 도움이 되나요?”

 태허진인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청우의 당찬 질문 속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자신이 청우에게 거는 기대에 충실히 부응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응답이 청우의 인생관과 무공관에 지표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의 무공관을 설명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허허허! 당연하다. 무공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물론 훌륭한 무공과 스승도 중요하지만 자질과 노력이 없다면 결코 고수가 될 수 없다. 이중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상 후천적으로 노력하여 배양시킬 수 있다.”

 말을 하면서 살펴보니 청우가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듣고 있었다.

 어린 나이지만 집중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태허진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자질 중 이해력과 집중력, 판단력, 근성이 그러하다. 또한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평정심과 깨달음이 필수인데, 이해력과 집중력, 판단력 거기에 평정심과 깨달음까지도 학문을 통해 많은 것을 접하고 넓고 깊이 사색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자에게 유리하다. 학문의 도리와 무공의 도리는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상승보완 작용을 해 준단다.”

 “그것 말고도 훌륭한 무공은 대부분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잖아요.”

 “맞다. 음양과 오행을 모른다면 무당의 절학서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지.”

 “헤헤! 사부님! 학문의 도리와 무공의 도리는 다르지 않다는 말은 아주 의미심장한대요.”

 “허허! 녀석도.”

 결국 태허진인이 청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청우의 보문전행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 대화였다.

 

 신선류의 중요 도서들을 소장하고 있는 보문전(寶文殿)은 주변에 크고 오래된 고목과 기암괴석이 산재해 있는 경관임에도 불구하고 외지인을 전혀 구경할 수 없었다.

 팔선관 심처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 출입을 엄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문전 내에는 물경 십팔만여 권의 서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무당파의 삼청궁(三淸宮)에 보관된 책자를 다 합친 것보다 세 배나 많았다.

 이는 무공 관련 서적이 대다수인 삼청궁에 반해 유불도 삼도의 서책은 물론 고문, 천문, 의학, 잡학 등 구할 수 있는 모든 서책이 망라되어 보관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문전 내부에 들어서면 커다란 서가가 빼곡히 중첩되어 미로를 형성하고, 늘어선 서가 사이로는 독서객을 위한 작은 탁자들이 간간이 놓여 있었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창가.

 청우가 탁자에 앉아 커다란 책을 붙잡고 작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속독법을 익혀 웬만한 책은 반 시진 이내에 다 읽는 청우였다.

 그런데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조금 어려운지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가 평시보다 많이 느렸다.

 샤르락~ 샤르락~

 미시(未時, 오후 한 시부터 세 시) 초에 잡은 책을 두 시진이 넘도록 보고 있었다.

 중요한 내용인 듯 책장을 넘기면 정독(精讀)한 이후에야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온 정신이 책속에 함몰되어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못할 듯싶었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는 법.

 샤르륵, 탁!

 마침내, 두꺼운 책의 최종장을 넘기더니 왼쪽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의역진원(醫易眞原).

 

 청우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책자의 제목이었다.

 의역진원은 인체와 천문의 구조를 음양오행 및 사상팔괘를 대입하여 비교함으로써 그 참된 원리를 규명코자 하는 작자 미상의 책이었다.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보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을 바탕으로, 무엇보다 주역과 의술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

 책자를 다 읽은 청우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이후 ‘의역진원’이라 이름 붙여진 책자를 소중하게 안아 제자리에 꽂아 넣고는 만족스런 미소로 보문전을 나섰다.

 책자에서 얻은 것이 많았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청우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워 보였다.

 

 그날 저녁.

 선무옥실에서는 청우가 또다시 신선류 태극권을 수련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유시(酉時, 오후 다섯 시부터 일곱 시) 중반 경에 시작된 운동이었다.

 청우가 한참 태극권을 수련하고 있을 때 수련실로 한 노도(老道)가 들어섰다.

 바로 수련실의 주인인 태허진인이었다.

 청우는 훈련에 집중하느라 태허진인이 입실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문을 열고 한참을 바라보던 태허진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요즘 들어 청우의 성취가 부쩍 는 것 같아서였다.

 무당파 검선류의 태극권이 현묘한 무공이지만, 태허진인은 신선류 태극권이 훨씬 더 신묘한 무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청경과 화경 등 공수의 묘는 담겨 있지 않지만, 신선류 태극권 속에는 천지간의 비밀스런 조화 작용이 내재되어 있었다.

 바로 천외비기인 연기화신의 비법이었다.

 연기화신의 비법이 반드시 무당파에만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터였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기인과 불세출의 영웅들이 명멸해 간 무림인지라 이름만 다를 뿐이지, 연기화신의 효과를 갖는 다른 수련법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허진인의 생각에 신선류 태극권처럼 효과적인 수련법은 단연코 없었다.

 신선류 태극권의 시초는 다름 아닌 무당파 조사인 장삼봉이었다.

 무공이 천의무봉의 경지에 달한 장삼봉은 말년에 죽음을 예견하고 제자들을 불러 각자에게 심득을 전해 주었는데 유독 첫째 제자가 마음에 걸렸다.

 누구보다 무공이 뛰어난 제자였지만 아들의 중죄로 장문인직을 맡을 수 없었던 첫째는 이후 무공 대신 신선술에만 일로 매진하던 터라 딱히 무공을 전해 주기 난처했던 것이다.

 그래서 첫째 제자인 송원교에게 비밀리 전수해 준 신선술이 바로 신선류 태극권이었다.

 그러나 이 수법은 송원교 사후 딱히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수많은 세월이 흘러 무극진인이 그 진가를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무림 최고수로 적수가 없었다는 무극진인의 전언(傳言).

 이후 무당파에 신선류라는 지류가 생겨났다.

 그런데…….

 일 년, 이 년, 심지어 삼 년이 넘었는데도 누구도 아무런 성취를 얻지 못했다.

 오 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한두 명이 연기화신을 이루었다고 공포했다.

 십 년이 지나자, 수많은 도인들이 신선류 태극권 수련을 포기했다.

 연기화신을 이루었다는 도인들의 무공이 갈수록 퇴보함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끈기 있게 이십 년 이상을 수련한 도인들은, 오감이 증대되고 신기(神氣)가 축적되어 이적을 발휘하는 능력을 얻었으나 그뿐이었다.

 삼십 년은커녕 사십 년을 수련해도 무극진인이 말한 연기화신을 뛰어넘는 극고한 경지에 아무도 이르지 못했다.

 결국 무당파의 주류 자리는 검선류에게 다시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신선류의 세가 확연히 준 것은 아니었다.

 무극진인에 대한 믿음과, 신선류 태극권을 익혀서 얻는 나름의 효과가 아직까지 신선류의 영명에 큰 보탬이 되고 있었다.

 무극진인은 연기화신이 경지에 이르면 심안을 이루고, 연신환허의 경지에 들면 무림 초절정고수가 두렵지 않을 것이며, 경지를 넘어 영안을 이루면 반신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연기화신을 익혀 연신환허만 이루면 무림제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태허진인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연기화신과 연신환허는 선인의 도(道)였다.

 도가 깊어지면 천지간의 오묘한 조화를 헤아리고, 신묘한 능력으로 이적을 행할 수 있겠지만 신기난측한 무림인들과 싸워 백전백승할 수는 없었다.

 연신환허의 경지에 든 도인이라도 무림의 귀계와 암투 속에서 어이없이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물론 영안을 이루어 반신선의 경지에 이르면 무림 초절정고수의 암수라도 능히 방비할 수 있을 터이지만, 인간이 반신선의 경지에 오를 확률은 너무도 낮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연신환허의 경지에 든 무림 고수…….

 태허진인이 청우를 굳이 진무관에 들게 하려는 이유였다.

 심안으로 살펴봐도 청우의 성취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밖으로는 음양이 상호 전환하면서 사상과 팔괘의 조화가 초식으로 발현되어지고 안으로는 천지인, 삼재가 오행을 감싸 대우주의 기운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연기화신의 경지가 멀지 않은 것이다.

 문득 청우에게 태극권 하나만 가리킨 것을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태허진인이었다.

 아직 연기화신에 입문하지는 못했지만 이처럼 빠른 성취는 다른 곳에 정신을 분산하지 않고 외골수로 신선류 태극권만 수련했기에 가능했음이 분명했다.

 신선류 태극권 삼십육식을 다 마친 이후에야 청우는 실내에 외인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언제나처럼 태허진인이었다.

 사부님인 걸 발견한 청우가 쪼르르 달려와 인사를 올렸다.

 “사부님 오셨어요.”

 “허허! 그래. 이리 와 봐라. 우리 청우 한번 안아 보자.”

 태허진인이 청우를 바짝 들어 가슴에 안았다.

 “어이쿠! 무거워졌는걸. 그런데 오늘 보니 우리 청우가 많이 늘었구나. 조금만 더 정진하면 ‘화신’을 이루겠던데.”

 “정말이세요? 어쩐지 요즘 감이 좋더라구요.”

 “뭐? 감이? 허허허허!”

 뭐가 그리 좋은지 태허진인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헤헤헤!”

 청우도 기분 좋게 따라 웃었다.

 “청우야! 오늘은 무엇을 공부할까? 뭐 궁금한 것 있느냐?”

 “사부님이 전에 기종(氣種)과 기성(氣性)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그랬었나? 허허! 나이가 드니 한 말도 금방 까먹는구나.”

 괜히 너스레를 떤 태허진인이 청우를 옆에 내려놓고는 마음속으로 가르칠 내용을 정리했다.

 “그럼 오늘은 기종에 대해 공부해 보자꾸나. 내기란 천지인 삼재 속에 각기 담겨진 오행의 기가 하나로 합일되어야만 생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내기가 그러하다. 그러한 내기만이 완전하고 인간의 몸에 위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단다.”

 “왜요?”

 추임새를 넣듯 청우가 질문했다.

 “하나 물어보마. 무당파 내외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중에 같은 사람이 있느냐? 또, 같은 나무에서 난 잎새 중에서 완전히 같은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아니요, 없어요.”

 “맞다. 하늘 아래 완전히 동일한 것이 있을 수 없듯 천지인 삼재 속에 내재된 오행지기의 특성도 저마다 다르다. 하물며 부모가 다르고 태어난 장소가 다르며 또한 태어나면서 처음 들이킨 천기가 다른데 같기를 바랄 수는 없지.”

 청우의 추임새가 없자 태허진인은 연이어 입을 열었다.

 “때문에 내기는 완전할 수가 없다. 부족함과 부조화로 인해 음양이 분별되고 오행의 치우침이 생기는 것이지.”

 “불완전하지만 완전에 가까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무당의 무공이라 하셨잖아요.”

 “맞다. 완전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무당의 무공이다. 소림사와 아미파도 완전을 추구하지만 다른 문파들은 문파의 특성에 따라 추구하는 바를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왜요?”

 “무공의 특성 때문이지. 문파마다 무공의 특색이 다르고, 문파 내에서도 무공의 종류에 따라 요구되는 내기의 특성이 다르단다. 일례로 검선 장로인 태화장로를 보자꾸나. 태화장로도 입문 초기에는 태극기공을 익혀 오행의 조화를 추구했지만 이후 화룡장을 연마하기 위해 오행기중 화기를 집중적으로 강화했단다.”

 “오행의 조화가 무너진 내기 때문에 몸이 상하지는 않을까요?”

 태허진인이 청우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누가 이 아이를 일곱 살이라고 할까?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이해력이 남다르다 하지만…… 참으로 대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꼭 그렇지는 않단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정이 있으면 반이 있듯이 여기에도 해결책이 있단다. 약물이나 신비한 금속, 또는 치우침을 보강하기 위해 별도의 심법을 운용하는 이도 있단다.”

 “어쨌든 불편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불편한 것을 왜 하려고 하죠?”

 “왜긴!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지. 극단적인 예를 들어주마. 흉명이 높기로 이름난 무공 중에 마교의 빙혼장이 있다. 어린아이를 오랫동안 빙동 속에 가두고 내공을 연마시켜 수기 중 한기를 극대화한 무공인데 이 장력에 스치기만 하여도 오장육부가 얼어붙는단다. 생존확률이 너무 낮고 몸을 보할 절세영약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익히기만 하면 일반 고수는 상대하기 어렵단다.”

 “그럼 완전을 추구하는 무당심법이 다른 문파들에 비해 약한 건가요?”

 “허허! 절대 아니다. 물론 내공이 경지에 들기 전에는 사파의 사악한 무공과 마교 등의 흉악한 무공에 상대적으로 열세지만, 경지가 높아지면 사마가 감히 범접할 수 없단다. 무당파의 심법이 괜히 신공이라 불리겠느냐?”

 “와! 역시! 무당파 심법이 제일이군요.”

 기분이 좋은지 청우가 갑자기 위쪽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물러 가거라! 천하제일신공이 나가신다.”

 내려서며 손을 앞쪽으로 휘젓는 것이 매우 신나 보였다.

 “어쨌든 나중에 무림에 나가면 특이한 내공을 지닌 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기성은 다음에 설명해 주마.”

 “네! 사부님.”

 “좋은 밤 되거라!”

 청우에게 작별 인사를 한 태허진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선무옥실을 나섰다.

 이미 청우의 하루 일과표를 꿰뚫고 있는 태허진인이었다.

 태극권 수련을 마친 청우는 한 시진 반 정도 축기를 한다.

 축기 후 운기를 하고 명상 시간을 가진 후에야 잠을 청했다.

 청우와 상의하여 일과를 정하는 중 태허진인은 청우에게 다른 시간은 줄이거나 빼먹을 수 있으나, 명상만은 빼먹지 말도록 신신당부를 했었다.

 연기화신이 경지에 든 이후 명상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태허진인이었다.

 명상을 하면 기성이 청정해져 연정화기에 효과가 좋지만, 무엇보다 신선류처럼 신기를 수련하는 자에게 더 할 수 없이 효과가 좋았다.

 그러나 효과가 직접적이지 않기에 검선류에서는 그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당파 금청에 보관된 청심경에 먼지가 가득 앉아 있는 것만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일 년 전 태허진인은 청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자가 있는지 금청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한참을 살펴 얻은 책이 바로 청심경이었다.

 마음을 맑게 해 준다는 설명에 한번 뒤적여 보았는데, 보면 볼수록 좋은 책이었다.

 은은한 향기가 묻어나는 책이랄까…….

 책을 가지고 와서 청우에게 외우도록 시켰다.

 이후 명상하기 전 음미해 보도록 했는데, 청우가 정말 좋은 책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

 

 선무옥실을 나와 팔선전을 벗어난 태허진인의 눈에 둥근 달이 들어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달빛이 밝은 것 같았다.

 달 옆으로 유유히 흐르는 작은 구름도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뜬금없이 산책이 나서고 싶어졌다.

 그것도 평소 잘 다니던 산책로가 아닌 다른 길로 가 보고 싶어졌다.

 태허진인이 산 언덕배기로 난 소로로 발걸음을 떼었다.

 구름에 달 가듯이 여유로운 걸음새였다.

 ‘오행문 같은 기문에 대해 설명을 더 해 주어야 했나!’

 길을 걷다 청우와의 일이 생각나자 태허진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무당파의 연정화기는 조금 부족하지만 연기화신은 거의 완벽하다는 내용을 설명해 주어야 했을까!’

 혼자 고민하다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후 청우의 진전을 살펴 설명해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인 교육이 될 것 같아서였다.

 내용은 짧았지만 오늘 가르침도 그런대로 괜찮았던 것 같았다.

 청우의 빠른 진전에 생각이 미치자 다시금 태허진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속도라면 반년 안에 연기화신의 경지를 이룰 수 있으리라.

 삼 년 후 진무관 입관.

 천하에서 난다 긴다 하는 아이들이 모여드는 진무관이었다.

 과거 신선류의 숱한 기재들이, 입관 후 중도탈락 해야만 했던 마의 관문이기도 했다.

 그들처럼 청우마저 견디지 못하고 중도 포기케 할 수는 없었다.

 청우를 모질게 수련시키는 태허진인도 속이 편치는 않았다.

 자식 같은 제자여서 더욱 그랬다.

 어쨌든, 웃는 얼굴로 잘 따라와 주는 청우가 너무 고마운 태허진인이었다.

 그런데, 청우 생각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너무 깊이 들어온 것 같았다.

 달빛에 비춰지는 정경이 너무 낯설었다.

 그리고 왠지 기운이…… 주위에 음산한 기운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상한 예감을 느낀 태허진인이 몸을 날려 근처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심안으로 안쪽 숲속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태허진인이 몸의 기척을 감추고 조심히 접근했다.

 ‘허!’

 태허진인은 하마터면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숲속 공터에서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터 중앙에 어둠보다 몇 배나 짙은 검은 그림자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림자는 커졌다가 작아지고, 땅에 납작 엎드려 넓게 퍼지는가 싶더니 물처럼 스며들어 사라져 버렸다.

 갑작스레 땅속에서 가시달린 검은 줄기가 수십 가닥 뻗혀 나와 엉키고 성기더니 한 덩어리로 뭉쳐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귀기가 뭉쳐 형성된 괴물인가?

 그림자 주변으로 음산한 귀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공터에 있는 것은 그림자 괴물뿐이 아니었다.

 그림자 괴물과 오 장여 떨어진 곳에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괴인은 쏘아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림자 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에 드러나는 괴인의 얼굴은…… 놀랍게도 태청장로였다.

 갑자기 사제의 눈에서 광망이 번뜩였다.

 그러자 공터 중앙에서 흐느적대던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불그스름한 목각 인형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살처럼 쏘아지다 또다시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

 휘스스슷!

 어느새 그림자가 목각 인형의 발목을 칭칭 감고 있었다.

 발을 타고 오른 그림자는 순식간에 팔을 둘둘 감고 목을 조르고 입과 코를 틀어막는가 싶더니, 촉수 같은 여러 줄기가 뻗어 나와 인형의 사지를 꽁꽁 묶어 버렸다.

 사람이라면 움직임이 봉쇄됐다가 목뼈가 부러지고 숨이 막혀 죽으리라.

 그 순간 생각나는 황당한 전설 하나.

 태허진인이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혼마룡! 전설이 사실이라는 말인가?’

 등줄기로 차가운 한기가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아닐 것이다. 혼마룡은 무극진인조차 간신히 제압할 수 있었다는 지저(地低)의 요괴가 아니던가? 게다가 백(魄)이 남았더라도 지금쯤은 소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숨 막힐 듯한 귀기(鬼氣)는…….’

 신선류 진인에게만 비밀리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 중에 혼마룡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무극진인에게 제거당한,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마수에 대한 전설이었다.

 그동안은 그냥 전설로 치부해 귀담아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눈앞의 요물은…… 부정하면 할수록 자꾸만 의심이 더해졌다.

 결국 태허진인은 심안을 풀고 나서야 의심을 다소 지울 수 있었다.

 심안을 푸니 그림자 괴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마룡은 요악스러운 괴물로 전해 내려왔지, 저처럼 귀기 넘치는 요귀로 표현되지는 않았었다.

 혼마룡이라면 당연히 육안으로 보일 것이었다.

 정상적인 생명체가 아니라서 다소 희미할 터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저런 요귀들은 시전자의 정신력을 먹고 자라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동안 힘들여 쌓은 신기와 자신의 수명을 줄여 가며 요귀를 키울 사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저것이 혼마룡의 변형체라면…….

 입술을 앙 다문 태허진인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상조차도 두렵다는 표정이었다.

 태허진인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공터에는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태청장로의 품속에서 느닷없이 십여 줄기의 광망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백색으로 번쩍이는 소도들이었다.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았는데 발출된 것으로 보아 사제가 신기를 사용한 것 같았다.

 소도들은 한쪽 방향으로 폭사되어 나아갔다.

 목표는 아직껏 검은 그림자에 묶여 있는 목각 인형이었다.

 그런데 소도를 발출한 태청장로가 이상한 행동을 했다.

 갑작스레 두 손을 들어 열 손가락을 쫙 펴더니, 두 손을 상하좌우로 이동하고, 구부리고, 뒤집는 등 괴상한 동작을 하는 것이었다.

 태허진인의 시선이 급작스레 소도 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

 신기로 공간을 격해 검이나 도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신선류 비전의 수법이었다.

 신선류 장로 이상만 배울 수 있는 비기이기도 했다.

 무리지어 한 방향으로 날아가던 소도들의 진형은 어느새 크게 변해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으며 날아가는 형세도 각양각색이었다.

 천천히 나아가다 갑작스레 빨라지고, 공중에서 휘돌아 솟구치다 직각으로 꺾어지고…… 베고 찌르는 것이 도 하나하나에 생명이 깃든 것 같았다.

 지금껏 요상한 괴물을 조종하느라 정신적인 피곤함이 상당할 터인데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사제의 운신력이 매우 높아졌음을 실감하는 태허진인이었다.

 연기화신이 무르익으면 자신처럼 심안을 이루고, 이후 자연스럽게 연신환허의 경지에 들 수가 있다.

 하지만 심안을 이루었다고 다 연신환허의 경지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한 차원을 깨고 새로운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걸 맞는 깨달음이 필요했다.

 특히나 연신환허는 하늘이 인정하여 생사현관을 열어 주어야만 가능했다.

 하늘에 이름을 등재시키는…… 천고의 기연이 바로 연신환허인 것이다.

 오죽하면 천신의 가호라고 표현할까?

 자신 또한 십 년 전 심안을 이루었지만 아직껏 연기화신의 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깨달음은 사제인 태청장로에게 유난히 더 가혹한 것 같았다.

 연기화신이 경지를 넘어 신기가 차고 넘치는데 아직껏 심안조차 이루지 못했다.

 오늘밤 기사는 넘쳐 나는 신기를 달래기 위한 몸부림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위험해 보였다.

 사제의 수련은 신기를 달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마치 무림 고수를 상대하는 듯한 인상이 짙었다.

 변화무쌍한 소도들의 위력을 보니 한두 해 수련한 것도 아니었다.

 차가운 달빛이 날카로운 소도에 꿰뚫려 처참하게 부서져 나갔다.

 이후 목형의 구대 요혈에 차례로 박혀드는 소도.

 마지막 소도는 목형의 심장 어림을 관통하여 뒤로 빠져나가 버렸다.

 “헉! 헉!”

 어지러운 듯 잠시 비틀거린 사제가 창백한 안색으로 뭐라 중얼거리자 그림자 괴물은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극기에 가까운 수련을 마친 사제는, 소도를 수거할 힘조차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힘겹게 자리를 벗어나는 사제의 한쪽 발이 땅에 끌리고 있었다.

 ‘사제! 무슨 사연이 있는가? 힘들면 말하게. 이 우형이 힘써 돕겠네.’

 수련을 마치고 공터를 벗어나는 태청의 뒷등을 향하여 태허진인이 속으로 속삭였다.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되돌아오는 길은 한참이나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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