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시간 뒤, 동사무소로 돌아간 준혁을 반긴 것은 피곤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순해의 모습이었다.

　'일부러 농땡이 좀 피우고 왔더니...'

　분위기를 살피며 양 손에 빵과 우유가 들어 있는 봉투를 들고 천천히 순해가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가던 준혁이 멈칫한다.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뗀 순해가 준혁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하..하.. 순대.. 아니 순해님. 일이 좀 많죠? 비싼 피자빵으로 대령했습니다"

　준혁이 순해의 눈 앞에서 장난스럽게 빵봉지를 흔들었다.

　"..."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순해가 눈 앞의 민원인이 의식되었는지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타다다닥, 타닥, 타다닥

　순해가 자판을 내려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은 준혁의 착각일까.

　멋쩍게 웃은 준혁이 다시 말한다.

　"저 순해님.. 제가 부탁한 건...?"

　쾅!

　순해가 옆에 있던 종이뭉치를 들더니 '쾅' 소리가 나게 내리 던졌다.

　그 모습에 눈 앞에 민원인과 준혁이 깜짝 놀랐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민원인에게 상냥하게 미소 지어준 순해가 그 표정 그대로 준혁을 바라보더니 말한다.

　"꺼져"

　"..."

　"갖고 꺼져"

　씹어먹을 듯이 중얼거리는 순해를 바라보며 준혁이 식은땀을 흘렸다.

　재빨리 순해가 던져 놓은 종이뭉치를 주섬주섬 챙기던 준혁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말한다.

　"저..."

　순해가 힐끗 바라보자 준혁이 뒷말을 잇는다.

　"혹시 한번 더 와야 될 수도 있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옆에 있던 텀블러를 집어드는 순해를 보며 준혁이 급히 입을 다물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누님"

　고개를 꾸벅 숙인 준혁이 빠르게 동사무소를 빠져 나왔다.

　********************

　사무실에 돌아온 준혁이 눈 앞에 123명의 유사 전과자 사진들을 펼쳐 놓기 시작했다.

　"뭐하냐?"

　다른 직원들은 모두 외근을 나갔는지 혼자 무료하게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경일이 자못 궁금하다는 듯이 다가왔다.

　"일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인데 남자들 사진을 이렇게나 펼쳐놔? 너 설마..."

　 경일의 마치 징그러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태도에 준혁이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그런거 아니라는거 잘 알잖습니까?"

　"난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거든. 취향존중!"

　"..."

　대놓고 무시하는 준혁을 바라보며 경일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그래서 지금 뭐하고 있는건데?"

　졌다는 듯이 말하는 경일을 힐끗 바라본 준혁이 대답한다.

　"장기미제사건인데 범인 좀 잡아보려구요"

　준혁의 대답에 경일이 씨익 웃었다.

　"오우. 우리 조형사님, 팀장님 특진하는 거 보니까 왜 승진 욕심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시나?"

　"그런건 아니구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경일을 바라보며 한숨을 쉰 준혁이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잇는다.

　"행님. L연쇄살인사건 알아요? 십 수년 전에 왜 있잖아요?"

　잠시 침묵하던 경일이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 사람 죽이고 조각칼로 시신에 L자 그어 놓던 그 미친 싸이코패스놈? 잘 알지, 전국에 있는 경찰관들이 그놈 잡아 볼거라고 모조리 달라 붙었는데도 결국 못잡아서 경찰이 무능하다느니 말도 많았지. 그 사건은 나도 경찰에 들어오기 전에 터진 일인데? 너 그 놈 쫓냐?"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경일이 계속해서 말한다.

　"왜 하필 그 놈이야? 뭐 잡을 만한 단서라도 있어?"

　눈을 반짝이는 경일을 보며 준혁이 대답한다.

　"꼭 잡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요"

　"그 이유가 뭔데?"

　"..."

　준혁이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자 경일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경일이 말한다.

　"말하기 싫으면 말 안해도..."

　"누나"

　"...?"

　"친누나가 그 사건 마지막 피해자였어요"

　"..."

　"제가 경찰관이 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 아직도 가끔 누나 꿈을 꾸거든요. 저를 엄청 예뻐해줬었는데.."

　"...미안하다"

　상당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경일을 보고 준혁이 씨익 웃었다.

　"행님이 미안할 건 뭐요. 정 미안하면 좀 도와주세요. 이새끼 잡는거. 물론 마지막에 그 놈 손에 수갑 채우는 건 양보 못하지만..."

　"재주는 곰이 부리고 공(功)은 조형사님이 잡수시겠다?"

　곧 바로 평소의 태도로 돌아온 경일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본 준혁이 말한다.

　"참나... 이 놈 잡게만 해주면 내가 평생 행님 꼬붕하지"

　"야. 너 그 말 책임져라. 약속했다?"

　"물론"

　"남아일언은?"

　"중천금"

　준혁의 대답에 경일이 신난다는 듯이 말한다.

　"아싸 꼬붕 제 1호"

　"잡고 말씀하시죠"

　경일의 태도에 한숨을 내쉰 준혁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사진들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이놈들은 뭔데?"

　"제 예상이 맞다면... 이놈들 중에 그새끼가 있어요"

　"뭐!?"

　경일이 놀란 눈빛으로 준혁을 보더니 눈 앞에 있는 사진의 개수를 세알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열개씩 열두줄에.. 이 123명 중에 그 미친 싸이코패스가 있다고?"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일이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들었다.

　"우리 조원 대단해. 십 수년간 뒤꽁무니도 잡지 못한 놈을 123명으로 줄여 놓다니.. 수 틀리면 이 123명만 다 조져도 잡을 수 있다는 거잖아?"

　"...제 예상이 맞다면요"

　"와우~ 오랜만에 사나이 가슴에 불을 지피는구만.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뭐야?"

　경일이 자못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오자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준혁이 지금까지 자신이 수사한 내용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경일이 장난스럽게 말한다.

　"가능성 있어. 좋은데? 조원 덕분에 나도 사법경찰관 한번 해보는 건가?"

　경일의 현재 계급은 경사다.

　순경, 경장, 경사는 사법경찰리, 그 위 계급인 경위부터 사법경찰관이라 칭한다.  

　준혁이 손에 쥐고 있는 오래된 흑백사진을 힐끗 본 경일이 말한다.

　"그럼.. 1)선면수사?"

　"예"

　준혁이 사진들을 대조해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경일이 함께 걸러내기 시작한다.

　"이놈은 쌍꺼풀 부터가 패스, 이놈은 코가 너무 뭉툭해서 아니고, 이놈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혼자 중얼거리며 사진을 골라내기 시작하는 경일을 보고 준혁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르게 생각보다 쉽게 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준혁이 눈 앞에 놓여 있는 3장의 사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김두호, 오철식, 이승호..."

　"내가 봐도 이놈들 상판이 그놈 얼굴이랑 제일 비슷한데?"

　경일이 준혁의 손에 쥐어진 사진을 턱짓하며 말했다.

　"누구인 것 같아요?"

　준혁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경일이 말한다.

　"내 추측일 뿐이지만... 만약 알려진 사실대로 죽은 시신에 L이라는 알파뱃을 그어 놓은 이유가 자신의 행동을 세상에 어필하기 위해서라면..."

　"이니셜?"

　준혁의 물음에 경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뭐 내 생각은 그렇다고. 추측일 뿐이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말고"

　"그럼 이승호 뒤부터 파보는 걸로 하죠!"

　"야! 그냥 내 생각일 뿐이라니..."

　"그러니까요"

　"...?"

　준혁이 씨익 웃더니 말한다.

　"전 행님의 직감을 믿으니까요. 이승호가 아니면 어때요? 뒤 파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 때 다른 두 놈 뒤도 밟아보면 되는 거지"

　"..."

　"아까 행님 말대로..이제는 123명도 아니고 딱 3명만 조지면 그놈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준혁의 말에 경일이 기분좋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