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진이 떠나기까지 약 한달동안 형사팀은 특별한 사건, 사고없이 조용했다.
그 기간동안 준혁은 본격적으로 누나를 잃은 연쇄살인사건의 미제사건기록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준혁의 예상대로 미제사건기록에서 범인을 특정할만한 특별한 단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희생자가 7명이나 발생하는 동안 뒤꽁무니도 못 본 놈이니까..."
준혁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준혁에게 위안거리가 되었던 것은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준혁이 첫 번째 살인사건의 미제기록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범인이 두 번째 살인사건부터 특별한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에 비해 첫 번째 살인사건에서는 비교적 많은 흔적을 남긴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다른 사건들에 비해 첫 살인사건에서 놈이 남긴 흔적이 많다. 첫 살인이라 당황했나?'
잠시 생각하던 준혁이 서류를 넘기며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1998년 10월 21일, 서울 은평구 xx번지 장미아파트.
피의자는 이사할 집을 보러 왔다며 위 아파트에 방문, 당시 집주인이자 피해자인 34살 여성 김미령씨가 피의자를 맞이함.
피해자에게는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10살짜리 아들과 11살짜리 딸, 그리고 남편이 있었지만 사건 당일에는 집에 혼자있었던 것으로 확인.
그날 오후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딸이 평소처럼 엄마를 찾았고, 안방에서 성폭행을 당한 뒤 혁대로 목이 졸려 숨져 있는 것을 발견.
경악한 딸이 이웃집에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고 이웃주민의 도움으로 112에 신고됨.
이후 수사본부 설치, 수사개시.
수 백페이지는 되어 보이는 서류들을 수첩에 간략하게 정리한 준혁이 계속해서 기록들을 읽기 시작했다.
현장에 남은 체액에서 범인의 DNA와 혈액형을 채취함.
국과수에서 관리하고 있는 DNA에서 범인과 일치하는 DNA는 발견할 수 없었고, 범인의 혈액형은 AB형으로 확인됨.
범인은 피해자를 성폭행하여 혁띠로 목을 졸라 살해하고, 죽은 피해자의 집에서 지갑을 절취.
이후 피해자의 신용카드로 12회에 걸쳐 171만원을 빼내기까지 한 것으로 봤을 때 피해자가 살아 있을 때 목숨을 위협하여 카드 비밀번호를 알아냈을 것으로 추정.
당시 현금인출기 폐쇄회로에 녹화된 범인의 흑백사진을 첨부함.
여기까지 읽은 준혁이 사건기록에 첨부된 범인의 흑백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시 CCTV의 화질은 그리 좋지 않은 수준이라 준혁의 눈에도 범인의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고 흐릿하게 보였다.
'이러니 못 잡았겠지. 우리나라 강력범죄 검거율이 얼만데..'
만약 사진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더라도 범인을 잡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인적사항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사진만으로 범인을 잡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명수배를 통해 범인의 사진을 전국에 배포해도 검거가 쉽지 않다.
개인주의가 극에 달해 있는 현대사회에서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국민들이 대부분이다.
'놈의 얼굴을 아는 지인이라면 모를까...'
속으로 한숨을 쉰 준혁이 시계를 바라봤다.
오전 8시 45분.
형사들의 출근시간은 9시지만 최근 들어 준혁은 연쇄살인사건 기록들을 살펴보고 정리하기 위해 남들보다 2시간 일찍 출근했다.
"오늘이 그날인가.."
오늘은 준혁의 첫 형사팀장인 용진이 떠나고 새로운 팀장이 발령받아 오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사전에 계획된 형사2팀장 발령식 시작 시간이 오전 10시.
준혁이 제 몸에 대고 킁킁 냄새 맡아보고는 한숨을 쉬며 지하 샤워실로 향했다.
몇 일 깎지 않은 수염은 지저분했고, 씻지 않고 출근해서 퀴퀴한 냄새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팀장님 가시는 날인데...'
준혁이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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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북부경찰서 2층 대회의실.
용진이 밝은 얼굴로 직원들과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막 정식 발령식이 끝이 난 참이었다.
"누나"
준혁이 옆에 있는 희연을 불렀다.
"응?"
"팀장님이랑 또 다시 근무할 수 있을까요?"
경위 이하의 경찰관들과 다르게 경감부터는 2년 단위로 경찰서를 옮겨 다니며 근무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짬되는 경감들은 같은 경찰서에서 부서만 계속 옮겨다니지만 용진의 경우 이제 막 경감이 되었기 때문에 예외였고, 옆 경찰서 112상황실로 발령 받게 되었다.
준혁의 말에 희연이 피식 웃었다.
"아쉽니?"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가 간절히 바라면 혹시 알아? 몇 년 있다 팀장님이 우리 경찰서 과장님으로 돌아오실 수도.."
"새로운 팀장님은 어떤 분이에요?"
준혁의 말에 희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좋은 분은 아니... 아니다. 직접 만나기 전부터 선입견 가질 필요는 없겠지. 니가 직접 보고 판단해봐"
"예?"
의문스럽다는 듯 반문하는 준혁을 보며 희연이 더 해줄 말이 없다는 듯이 용진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용진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 사랑하는 우리 팀원들. 여기 다 모여 있네"
용진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을 듣고 경일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팀장님, 아니 이제 실장님이네. 실장님 승진한거 제 지분도 있는거 알고 계시죠?"
경일의 물음에 용진이 자못 의문스럽다는 듯이 반문했다.
"니 지분? 뭔 지분?"
"와 사람이 뒷간 들어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더니, 잘 풀려서 가시면 사랑하는 팀원들도 좀 챙기시고 하셔야죠?"
"뭐 챙겨줄게 있나, 알아서 다 잘 하는 놈들이"
"아 그래서 이제 팀원도 아니니까 모르는 척 하겠다는 거에요? 뭐에요? 딱 그것만 말씀해 보세요. 나중에 더 승승장구하시면 우리 잊지 않고 챙겨주실거요? 말거요?"
경일이 건들거리며 말하는 모습을 보며 용진이 피식 웃었다.
"너 하는거 보고"
"뭐요?"
"너 하는거 보고 생각해본다고 임마"
"세상에... 더럽다 더러워 퉷 퉷"
경일이 과장된 행동을 취하자 용진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병재야"
"예.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팀장님"
병재의 말에 용진이 미소 지었다.
"너처럼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놈이 없었는데, 너 같은 놈 밑에 두기에도 쉽지 않은데 앞으로가 걱정이다 정말"
용진의 말에 병재가 미소 지었다.
"저한테도 가장 듬직한 팀장님이셨습니다"
병재가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며 용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형사 김희연님?"
"팀장님이 이제 가실 때가 되고 나니까 제대로 알아보시네요"
희연이 혀를 삐죽 내밀었다.
"한 20년만 기다리면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경찰청장도 볼 수 있는거지?"
"절 뭘로 보고.. 20년도 길죠"
장난스럽게 말하는 희연과 악수를 나눈 용진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내"
"예! 팀장님"
"여기서도 질질 짜고 그럴 거 아니지?"
용진이 웃으며 말하자 준혁이 얼굴을 붉혔다.
"...아닙니다. 제가 언제 질질 짜고 그랬다고..."
준혁의 말에 용진이 경일을 돌아봤다.
"경일아, 사진 안찍어놨냐?"
"아, 팀장님 제가 그 생각을 못했네요. 눈물, 콧물 질질 짜는 모습이 그냥 역대급 못난이였는데 와~ 아까비..."
"아니 제가 언제 눈물, 콧물 질질...!"
버럭 성질을 내려는 준혁의 손을 용진이 맞잡았다.
"준혁아"
"..."
"언제든지 연락해라. 내가 그 때 한말 잊어버리지 말고. 개인적으로 너 같은 형사 정말 좋아한다"
"와 팀장님. 그거 남이 듣기 딱 오해하기 좋을만한..."
"넌 좀 조용히 하고 있고"
용진이 다시 준혁을 바라보자 준혁이 씨익 미소지었다.
"연락하면 소주 사주십니까?"
"소주받고 2차 맥주까지 콜"
용진의 말에 희연이 끼어든다.
"아 팀장님 저는요? 제일 적게 본 막내만 너무 편애하는거 아니에요?"
"오케이 희연이도 콜. 병재도 말 안해도 콜"
용진의 말에 경일이 발끈한다.
"저는요!?"
"넌 생각 좀 해보고"
경일이 씩씩거리는 모습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던 용진이 말한다.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은데... 딱 한마디만... 그동안 못난 팀장 따라다니면서 뒤치다꺼리하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 고맙다"
말을 마친 용진이 깊숙히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형사2팀원 전원이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