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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신세계(완결)
작가 : 레일
작품등록일 : 2017.3.1

자전이 멈춘 미래. 생존의 사투와 종말에 엮인 거대한 비밀의 이야기

 
12화
작성일 : 17-03-01 17:58     조회 : 285     추천 : 0     분량 : 5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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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오른편에 침대가 있고, 그 옆으로는 책꽂이가 벽을 거의 모두 가릴 정도로 공간을 채웠다. 대부분 기계, 인체, 유전과 관련된 전문 책자였다. 경비일에 종사했다던 사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방 한가운데에는 서랍을 겸비한 책상이 있었다. 책상에 들어갈 회전의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책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암호 해독 및 수정 프로그래밍’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윗 서랍에는 총알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게 어떤 건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젠시는 총집에서 리볼버를 꺼내 장전했다. 딱 들어맞았다. 다섯 발이었다는 확신은 착각이 아니었다. 에페가 한 발을 빼서 가져간 것이다. 모닥불을 사이로 두고 처음 마주했을 때 그가 총을 건네주지 않았던가.

 

 맨 밑 서랍에는 옷이 나왔다. 젠시는 그것을 들어 털었다.

 

 십자 모양으로 접힌 종이쪽지가 떨어져 나왔다. 젠시는 그것들 폈다. 삐뚤삐뚤하고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체였다.

 

 ‘갑작스레 떠나서 미안해. 여기선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 할 거야. 내 말 명심해 에페. 나는 이 일을 오랫동안 생각해왔어.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고. 미친 거라거나 그런 게 전혀 아니야. 난 확고해. 그러니 내가 당부했던 대로 해줘, 부디 유토피아호를......’

 

 젠시는 읽다가 그쳤다.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신발을 털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젠시는 마저 빠르게 읽었다.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유토피아호를 폭발 시키게. 몰래 엔진에 불을 질러. 다시는 달리지 못하게. 제발, 내가 자네를 열어서 완전히 설득시킬 수 있겠지만 치사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네.“

 

 의혹은 확신이 되었다.

 

 .

 

 에페는 바닥에 신발을 털었다. 뭉친 눈이 떨어졌다. 등불을 앞에 내밀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숨을 내쉴 때마다 허연 입김이 나왔다.

 

 온도는 영하 15도. 그렇게 머릿속 회로에 새겨졌다.

 

 ‘뭐, 아직 고장날 정도는 아니군.’

 

 벙커 방호문에 당도했다. 중앙에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다. 일련의 번호가 반짝반짝 빛났다. 에페는 장갑을 벗었다. 금방이라도 동상시킬 듯한 냉기를 감내하고 보안장치에 숫자를 입력했다.

 

 비밀번호 : 10120421

 

 안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난 후 문이 열렸다.

 

 거실에서 젠시가 총을 들고 에페를 겨누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등불 안에 입김을 불어서 불을 껐었다. 그렇지만 의외의 상황에 그 규칙을 깨고 말았다.

 

 “

 

 “당신, 유토피아호는 왜 가려고 하는 거지?”

 

 “뭐야?”

 

 “유토피아호는 왜 가려고 했던 거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알아야겠어. 지금 여기서.”

 

 “이봐, 젠시. 일단 총은 내려놓고 이야기 하게”

 

 “싫어.”

 

 “내가 보기엔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자기 자신을 신이라 하는 당신도 마찬가지지”

 

 에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발을 한 발짝 내딛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

 

 “왜?”

 

 “움직이면 당신을 쏠 거야.”

 

 “정말?”

 

 “맹세코.”

 

 “그런데 손은 왜 떨리지?”

 

 에페는 고개를 살짝 낮췄다. 젠시는 자신의 손을 흘끔 쳐다봤다.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 숨을 가다듬고 총을 바로잡았다. 에페가 발을 움직였다.

 

 “움직이지 말랬지!”

 

 그러나 에페는 점점 다가왔다. 젠시는 그에 따라 뒷걸음질 쳤다. 에페는 손가락질 했다.

 

 “난 네가 총을 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

 

 “아니, 쏠 수 있어”

 

 젠시는 총을 고쳐 쥐었다.

 

 “사고 나기 전에 얌전히 내려놔”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뭘?”

 

 젠시는 안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에페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왜 유토피아호로 가려는 거지?”

 

 “젠시, 총을 내려놔, 지금 뭔가 착각을 하고―”

 

 “다가오지 마. 우린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니까.”

 

 젠시는 공이치기를 당겼다. 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화약이 터질 예정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젠시, 진정해”

 

 에페는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선 후 손을 들어올렸다.

 

 “거기, 그 쪽지에는 불을 지르라고 나와 있지.”

 

 “그래서 절더러 엔진까지 안내해 달라 이거였나요? 엔진에 불지르려고?”

 

 젠시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자코 있었다.

 

 “어쩌자는 건가? 날 쏠 건가?”

 

 “내가 열차에서 떨어지기 전날의 소동도 당신의 소행이었나?”

 

 에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엔진에서 화재소동이 있었어. 그게 당신의 소행이었나?”

 

 에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젠시는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소동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침착할 리가 없었다.

 

 “쪽지를 준 건 누구야?”

 

 “젠시, 내 말을 들어봐. 우린 열차를 멈춰야 해. 언젠가 너도 깨닫게 될 거야. 그 열차가 얼마나 부조리한 피조물인지를.”

 

 에페의 목소리는 한결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졌다. 살살 놀리는 혀는 젠시의 의심을 잠식시키려 했다.

 

 “그리고 떠올려 봐. 사람들이 죽어갈 때, 넌 무얼 하고 있었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너도 느꼈을 거야.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하고 거대한지.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고 확 미쳐버릴 것 같지. 생존자들은 그 고통을 몇 년을 견뎠어. 그런데 넌 그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떨고 있을 때 무얼 했느냐고,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했지.”

 

 “하, 그래서,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들까지 같이 죽어야 한다는 건가? 응? 당신, 자기 자신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생각은 해봤어? 그들은 애초에 찌질한 패배자들이고, 이 종말을 초래한 사이비 종교쟁이들이라고. 우리들의 자유와, 가정과 일상을 앗아갔어. 그들이 뺏은 것을 스스로 되찾는 것이 무슨 잘못이지? 이건 지극히 정당한 대우야.”

 

 젠시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심장이 벌컥벌컥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과도하게 분비되어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그 몸뚱이는 대체 누구 거야?”

 

 “뭐라고?”

 

 “넌 이미 죽었어. 서랍에 L-16, 마지막 테이프가 숨겨져 있더군.”

 

 “난, 죽지, 않았어.”

 

 “넌 죽었어, 에페. 아니, 제이콥이던가?”

 

 에페는 또다시 발을 움직였다. 젠시의 눈은 그것을 잡아냈다. 등에 흐르던 땀줄기가 떨어졌다.

 

 “움직이지 말랬는데.”

 

 그러나 에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춰, 멈추라고. 정말로 쏠 거야. 이건 B급 코미디 영화가 아니야. 네가 좋아하는 카메라는 여기에 하나도 없다고.”

 

 “내가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주지.”

 

 “뭘?”

 

 “그 편지에 대해”

 

 “그래, 지껄여봐, 누가 한 거지? 누가 너더러 열차에 불싸지르라고 한 거야?”

 

 “플랭크 제인.”

 

 젠시은 순간 누그러졌다. 바로 옆에서 대종이 때리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여 총을 쥐던 손아귀가 약간 풀렸다. 에페의 입에서 나온 그 두 단어는 쉽사리 뇌에 입력될 수 없었다.

 

 “누구라고?”

 

 “플랭크 제인, 내가 널 처음 봤을 때 어디서 널 본 적 있는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젠시 제인 네 아버지지. 네 아버지가 시킨 거다.”

 

 “말도 안 돼, 거짓말 하지 마, 우리 아버진 이미 수 년 전에 돌아가셨어. 열차에서 사고로 떨어지셨다고.”

 

 “그가 죽는 걸 직접 봤나?”

 

 그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냇가에 떨어지셨다 .그렇지만 주변엔 억센 폭포가 있었고, 당연히 거기에 떠밀려 추락한다면 생존은 기대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럴 터였다.

 

 “그렇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살았다, 너처럼. 그리고 내가 발견해서 살았지.”

 

 “말도 안 돼, 헛소리 지껄이지 마”

 

 “거짓말일 것 같아? 이건 사실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네 아버지 이름이 그냥 나올 리가 없지. 넌 네게 네 아버지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었잖아.”

 

 젠시는 목이 메이는 것을 힘겹게 삼키고 절망하듯 고개를 저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

 

 “네 아버지가 시킨 거야. 그가 말했어. 이 열차는 부조리한 피조물이라고.”

 

 “아버지가 살아있다고.......?”

 

 에페는 또박또박 말했다.

 “분명히. 내 앞에 서서, 내 앞에서 옥수수통조림에 땅콩버터를 발라먹으면서 내 앞에서 말했다.

 

 ‘식사메뉴를 선택할 수 없다면 자유는 죽은 것이다.‘

 

 라고.”

 

 젠시는 머릿속에 새하얘졌다.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린 채 살아왔어. 애초에 열차서 낙사한 것도 사고가 아니었다. 자살이었지.”

 

 “광신도한테 동정심을 가졌었다고? 아니야. 아버지는 살아평생 그들을 미워했어. 증오하고 저주했다고. 게다가 자식을 두고 자살할 리가 없잖아.”

 

 “자식이 있는지 잃었는지는 모르지. 그건 중요치 않아. 핵심은 그가 자살을 실패한 이후 열차를 정차시키기로 마음먹었다는 거다. 처음에는 내게 부탁했고, 불과 몇 년 전에는 열차에 잠깐 들렀었지. 그는 애초에 승인된 승객이니 경보에 걸릴 일도 없었겠지.”

 

 “열차에.......왔었다고?”

 

 “근처 숲의 벙커에서 누군가를 만나겠다고 하더군. 그것도 엔진을 폭파시키게 설득하려는 목적이었겠지”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만약 아버지가 정말로 열차에 왔었다면 왜 젠시를 보러 오지 않았던 걸까.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야. 넌 거짓말을 하고 있어. 애초에 넌 이름을 속였고, 진짜는 이미 죽었어. 내 삶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그건―”

 

 “넌 유토피아호로 가기 위해 날 회유하려 하고 있어. 그것도 내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서!”

 

 젠시는 총구를 돌렸다. 자신의 관자놀이에 바짝 댔다. 그러자 에페는 다시 발을 멈췄다. 이제 서로는 약 일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무슨 짓이지? 넌 그러지 못할 텐데.”

 

 “왜 못해? 어차피 내가 널 열차로 데려간다 해도 난 열차에서 죽을 거야. 반대로 내가 없으면 넌 열차에 타지 못하는 데서 그칠 테고, 뭐가 더 좋은 거 같아?”

 

 잠시 적막에 휩싸였다. 공기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각자가 자신이 숨을 내뱉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가 에페가 먼저 움직였다. 눈 깜짝할 새였다. 과연 경호원에 몸을 바쳤다고 할만 했다. 에페는 몸을 던지다시피 뛰어서 총열을 잡고 잽싸게 위로 올렸다. 방아쇠는 뒤늦게 당겨졌다. 리볼버의 마지막 총알이 에페 등 뒤를 지나 천장에 맞았다.(결국 마지막까지 리볼버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탄알은 도탄이 되어 등불에 맞았다. 총알은 유리를 깼다. 등불은 중심을 잃고 카펫 위로 떨어졌다. 불이 옮겨 붙었다. 점점 타오르기 시작했다.

 

 에페는 젠시를 밀어 눕힌 후 깔고 앉았다. 팔을 붙잡아 완전히 제압한 후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에페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정당성이 묻어 있는 사람과 같았다.

 

 젠시는 그의 주먹이 내리치는 것을 보았다. 위에서 점점 아래로, 가속되더니, 관골과 관자놀이 부근에 충돌했다. 그 순간, 젠시는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영혼이 튀어나간 기분을 느꼈다. 정전기가 동시에 수 만 번 일어나는 것 같은 자극이 고동쳤다. 그렇게 몇 번이 반복되었다. 힘이 축, 빠졌다.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뭉개진 신문지가 된 기분이었다.

 

 주먹이 다시 하강. 또 다시 상승, 그때, 에페가 무너졌다. 에페가 없을 때면 늘 풀어두었던 샤비가 방에서 나온 것이다.

 

 “이놈의 개새끼가”

 에페가 소리쳤다.

 

 젠시는 에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반대편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에페의 방에 바닥에 떨어진 도끼가 있을 터였다. 눈을 꿈뻑거렸다.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흐릿했다. 쓰라린 고통 때문에 턱을 벌린 채 머리에 손을 댔다. 피가 줄줄 떨어졌다. 입은 알 수 없는 신음을 숨 쉬듯 뱉었다. 거의 헐떡거리는 모양새였다.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발이 잡혔다. 귀신에게 잡힌 것처럼 아래로 쭉 빠지기 시작하더니,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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