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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무협물
몽검마도
작가 : 송진용
작품등록일 : 201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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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검마도』, 그 제목 그대로 그 명성 그대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던 명품 무협!

지금 먹빛 수묵화로 그려낸 거친 사내들의 이야기가
작가 송진용의 손에 새롭게 각색되어 그려지다!

세월을 격하여 새롭게 쓰인 몽검마도!
이제 그 명성을 확인할 때다!

 
제 19 화
작성일 : 16-07-19 17:01     조회 : 491     추천 : 0     분량 : 6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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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우리는 잠시 마교(魔敎)에 대하여 언급하고 넘어가야 한다. 지루한 일이지만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이 부분은 숙지하고 있어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마교로 불리고 있는 홍화교(弘華敎)와 무림 제파의 연합인 정도맹과의 싸움은 그 역사가 백여 년에 이르고 있었다.

 원말(元末)에 일어나 명초(明初)에 득세했던 홍화교는 원래 도교의 일맥으로서 스스로는 정통임을 내세웠다. 도교는 불교가 중원에 전래되기 훨씬 전부터 자생하고 있던 종교였다.

 민중의 신앙에 접목하면서는 온갖 방술(方術)과 사술(邪術)을 자행하는 집단으로 변질되어 질시당하는 바도 없지 않았으나, 노자(老子)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본래의 그 가르침은 연원(淵源)이 심오(深奧)하고, 도리(道理)가 깊어 처처(處處)마다 현묘(玄妙)하지 않음이 없었다.

 당(唐)대로부터 도교는 황실의 비호를 받으며 활발한 포교 활동을 벌여, 산중에는 저마다 정종(正宗)의 도맥(道脈)임을 자부하는 백문(百門)의 도파(道派)가 생겼고, 민간에는 술법(術法)의 신통(神通)을 내세우는 천문(千門)의 도당(道堂)이 생겼다.

 그것이 명대에 이르자 이제는 집집마다 신당(神堂)을 만들어 모셔 두게 됨으로써 생활의 한 부분이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온갖 금기(禁忌)와 기복(祈福), 주술적(呪術的) 행위 등으로 대표되었던 신비주의적 성향은 명대 사람들의 의식주에 깊이 관여하던 미신적 도교 신앙의 형태였다.

 그것은 민간의 속신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어느덧 도교의 참뜻에서 벗어나 그 폐해가 자못 심각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장춘진인(長春眞人) 장원적(張源積)이 세운 홍화교는 이러한 민간의 속신 숭배로부터 떠나 참된 도교의 이념과 수행을 부르짖고 있었다.

 장원적은 절강성(浙江省) 청전현(靑田縣) 태생으로, 원나라 말엽 단경산(端經山)에서 득도한 후 그곳에 도량(道場)을 열고 자신의 교를 홍화교라고 하였다.

 도의 밝은 빛으로 널리 미욱한 백성들을 교화한다는 의미였다. 당시는 백련교(白蓮敎)가 하남지방을 휩쓸고, 공공연히 원 제국에 반기를 든 홍건적(紅巾賊)이 횡행하던 때였다.

 불교의 한 종파로서, 미륵불을 신봉하는 백련교에는 주원장도 몸담고 있었다. 그는 달리 명교(明敎)라고 불리기도 했던 백련교도로서의 일을 잊지 못하여 훗날 자신이 세운 나라를 명(明)이라고 했으니 백련교의 열렬한 신자였음이 틀림없다.

 어쨌거나, 장원적이 그런 세상의 흉흉함에는 아랑곳없이 절강성 단경산에 칩거하여 홍화의 도에 침잠해 있을 때 이십 칠 세의 주원장이 몸을 피해 숨어 들어왔다.

 주원장은 십 칠 세에 황각사(皇覺寺)에 들어가 이십 오세 되던 해 여름 그곳을 나와 홍건적에 몸을 던졌다. 처음 그는 홍건 일파인 곽자흥(郭子興)의 군에서 십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하급 무장으로 있었다.

 그 후 고향 친구인 서달(徐達), 탕화(湯和) 등을 끌어들여 세를 불렸는데, 그들의 도움으로 원군과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승승장구 진급한 끝에 곽자흥의 부장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당시 반군 토벌의 책임을 진 자는 차칸테무르라는 원의 상승장군이었다. 그는 아들 쿠쿠테무르를 파견하여 산동을 토벌하고 계속 남하하던 중에 주원장이 이끌던 군세와 부딪쳤다.

 강소성(江蘇省) 무석(無錫)에서 원의 대군을 맞이한 주원장은 대패하여 단신으로 달아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숨어든 곳이 단경산이었던 것이다.

 장춘진인 장원적과 주원장은 첫눈에 의기가 투합했다. 주원장은 진인의 신묘한 도술과 인품에 반했고, 진인은 주원장의 야심과 포부를 높이 샀던 것이다.

 잠시 장춘진인 밑에서 교화를 받은 주원장은 무리를 이끌고 찾아온 서달을 따라 다시 세간으로 떠났지만 진인과의 만남을 잊지 못해 교류를 계속했다.

 그 후 주원장은 싸움마다 승승장구하여 항주(抗州)와 소주(蘇州)를 함락하고 남경(南京)에 입성하였다.

 그곳에서 북벌군을 편성하여 본격적인 원 제국 타도에 들어가는 한편, 황제의 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명,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이십 칠 세에 진인과 만난 후 어언 십사 년이 흘러 그의 나이 사십 일 세 때의 일이었다.

 황제의 위에 오르자 주원장은 장춘진인을 불렀다. 그러나 속진(俗塵)을 멀리하고 신도(神道)를 추구하는 진인이 그 명을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한사코 거절하던 진인은 제자 유준(柳濬)에게 도맥(道脈)을 넘겨주고 깊이 은거하여 신선이 되었다. 주원장으로서는 허전하기만 한 일이었다.

 유준은 사부 장춘진인과는 뜻이 달랐다. 이십 여 년이 흐른 뒤 그는 스스로 주원장을 찾아가 남경에 머물렀다.

 단경산에서 안면을 익혔던 유준을 통해 마음속의 사부로 여기고 있던 장춘진인을 상기하게 된 주원장은 그를 빈객(賓客)으로 예우하였다. 일 년을 머무르고 남경 성을 나올 때의 유준은 들어갈 때의 유준이 아니었다.

 문무백관들이 그의 행차에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고, 황자(皇子)들이 스승으로서의 예를 갖추어 동문 밖까지 배웅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황궁을 나왔을 때 유준의 명성은 이미 천하에 진동하고 있었다.유준은 아예 남경으로 도량(道場)을 옮겼다.

 그는 온누리에 홍화교의 도리를 전하겠노라 외쳤고, 주원장으로부터 태사(太師)의 직함을 받아 황궁에 거하며 황자들을 가르쳤다.

 방대한 도장경(道藏經)의 간행사업을 통해 세간에 널리 도교의 이치를 전하는 한편, 황자들의 교육에도 열의를 다하던 그 무렵까지만 해도 유준은 뭇 사람의 존경을 받는 진인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주원장의 비호아래 홍화교는 황실에 뿌리를 든든히 내려갔다. 황실이 홍화교의 교전(敎殿)이 된다면 구차하게 세간을 떠돌며 교도를 모으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 무렵의 홍화교는 장춘진인이 세웠던 홍화교와는 달라도 한참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유준의 홍화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은 결코 높이 오르지 못하는 법. 낮은 곳으로만 흘러야 하는 것이 물의 도리이고 순리 아닌가. 일찍이 노자는 말했다.

 <최고의 선덕(善德)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그에 대하여 하상공(河上公)은 <가장 착한 사람은 물 같은 성품을 지녔다(上善之人, 如水之性)>라고 주(註)를 달았던 바, 도의 본면은 스스로를 낮추는 물처럼 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또 말하기를, <그러므로 물의 특성은 도에 가깝다(故幾於道)>고 하였던 것이다.

 유준의 지나친 의욕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주원장이 칠십 일 세를 끝으로 몰(沒)한 후, 황태손(皇太孫) 주윤문(朱允文)이 뒤를 이어 제위(帝位)에 오르니 그가 바로 이대 건문제(建文帝)였다. 그 무렵 권력의 핵심에 머물러 있던 유준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한 가지 뿐이었다.

 단맛에 한껏 취해 있던 정상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건문제의 그림자라도 붙잡고 매달려 있어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는 황자의 난으로 불리는 정난(靖亂)의 변(變)이 벌어졌을 때 건문제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대세는 연왕(燕王) 주체(朱棣)에게 기울었다.

 일찍이 유준은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주체의 심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릇이 크고, 야심은 그것보다 더 큰 인물. 그래서 유준은 주체를 멀리하였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견제해 왔었다.

 그가 황제가 된다면 수중에 넣고 마음대로 휘저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주체를 도태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 뜻은 번번이 주원장에 의해 가로막혔다.

 주체를 도태시키지 못한 것이 한이었지만 어쨌거나 황통은 자신이 원했던 바대로 심약한 황태손 주윤문에게로 이어졌고, 유준은 뜻을 이룬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불과 사 년이 못 되어 주체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천추의 한이 되어 돌아왔다.

 남경에 입성한 연왕 주체에 의해 피의 숙청이 있을 때 유준은 그를 두려워하여 밤을 틈타 황궁의 담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치밀하게 자신을 감시하던 연왕의 친위병 스물네 명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도주하였다.

 손속에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남겨두지 않아서, 황궁 내원(內院)의 고수들 중에서도 가르고 갈라 뽑은 그들 스물네 명을 모두 무참하게 살해하였던 것이다.

 주체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겠지만, 진면목을 보인 그의 손속은 실로 무섭고 잔혹한 것이었다.

 그 일로 유준은 황사에서 하루아침에 역도로 전락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황궁의 고수는 물론, 황실에 고용된 무림의 고수들이 벌떼처럼 몰려다니며 뒤쫓았다. 유준이 그들의 만리추적을 뿌리치는데 삼 년이 걸렸다.

 그가 삼 년 동안이나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그의 무서운 능력을 세상에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유준은 옥문관(玉門關) 너머에서 단신으로 황실의 고수와 소림(少林), 무당(武當), 청성(靑城)을 주축으로 한 일단의 무림 고수들로 구성된 오십 여명의 추적자들과 경천동지할 싸움을 벌였다.

 꼬박 사흘 밤낮에 걸쳐 벌어졌다는 그 싸움에서 놀랍게도 유준은 그들 고수 모두를 격살하는 신위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유유히 사막 너머로 사라져갔다.

 세상은 다시 한 번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일전 이후 유준의 모습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비로소 세상은 안심하였고, 홍화교는 마교로 몰려 자취를 감추었으며, 유준에게는 혼세마왕(混世魔王)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호가 붙었다.

 그 후 오십 여 년이 흘렀다. 정난의 변을 일으켰던 삼대 영락제도 몰하여 이미 한 줌 진토로 돌아갔고, 세상은 이제 더 이상 홍화교와 혼세마왕 유준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다시 반 갑자의 세월이 더 지났을 무렵, 홀연히 홍화교의 깃발이 안휘성의 야트막한 탕산(蕩山) 정상에 펄럭였다.

 구대 헌종(憲宗) 이십육 년의 일이었다. 그로 인해 팔십 년 전의 악몽을 되살려 낸 황실과 무림은 경악하여 졸도할 지경이었다.

 과거 유준에 의해 자파의 고수들이 몰살당하는 수모를 겪고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소림과 무당, 청성이 주축이 되어 구파일방(九派一幇)을 소집하였고, 정의맹(正義盟)을 급히 결성하였다.

 그러자 각 파(派)와 각 인(人)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친분이 있던 무림의 명숙들이 앞 다투어 맹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그 무리가 무려 일만에 육박하였으니, 정의맹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파 무림 그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을 좋아하며 지켜볼 사마(邪魔)의 무리들이 아니었다.

 유사 이래 찾아볼 수 없었던 정파 무리들의 대 결집에 불안해진 사마의 무리들도 앞 다투어 홍화교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강호라는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며 생멸해 가던 무림인들이 두 개의 썰물처럼 일시에 강호를 빠져나갔다. 강호라는 대해(大海)가 텅 비게 된 것이다.

 그 대신 홍화교와 정의맹만이 더욱 거대해진 몸집으로 우뚝 섰다. 더 이상 커질 수 없게 된 힘은 결국 가두고 있던 막을 찢고 폭발하기 마련이다.

 헌종 이십 육년 구월, 드디어 마교로 낙인찍혀버린 홍화교와 정의맹 간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정사대전(正邪大戰)으로 불리게 된 피의 제전이었다.

 당시 홍화교를 이끌던 교주는 단자경(段紫慶)이라는 인물이었다. 스스로는 적멸진인(寂滅眞人)이라고 칭했으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칫 혈세멸천(血世滅天)의 화를 가져올 지도 모르는 대마인(大魔人)에 불과했다.

 얼굴이 유난히 희고 깨끗했던 그를 두고 세상은 그래서 백안마군(白顔魔君)이라고 불렀다. 구름처럼 많은 고수들이 편을 갈라 죽고 죽이는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무림의 정기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그 흉흉한 살기는 민간에까지 전염되어 세상 전체가 뒤숭숭하고 인심이 각박해졌으며, 오상(五常)의 유교적 이념마저 문란해지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방관하고 있다가는 통치권 자체에까지 그 여파가 미칠 지경이었다. 드디어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황실에서 개입하고 나섰다.

 더 이상 무림의 일로 치부하여 묵과하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헌종은 태감(太監) 유언징(劉彦澄)을 보내 마교와 정의맹 간에 화해를 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 원한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두 집단의 지도부들에게 화해라는 말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황제의 칙사로 쌍두마차에 올라 뭇 시종을 거느리고 왔던 유언징이 돌아갈 때는 목이 없는 시체가 되어 딱딱한 관에 실려 갔다.

 대담한 흉수가 누구인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모두 마교의 소행이라고 믿었다. 흉악한 사마의 집단이 아니고서는 감히 누가 황제의 칙사를 목 없는 시체로 만들겠는가.

 권위가 짓밟힌 헌종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의 일갈이 있자 그것이 아래로, 아래로 하달되면서 척사탕마(斥邪蕩魔)의 조서가 꾸며졌을 때는 무려 삼천언(三千言)이나 되었다. 마교의 준동을 반역으로 몰아 토벌대가 나섰다.

 황제 직속의 금의위(錦衣衛) 통령(統領) 순무(淳武)가 이끄는 오천 금군을 선봉으로 하여 일만의 어림군(御林軍)과 일만 오천의 성군(省軍)이 더해져 도합 삼만의 대군이 정사대전 사이를 대나무를 가르듯 단숨에 쪼개고 들어갔던 것이다.

 그 위세 앞에 정의맹과 마교 모두 혼비백산하여 바람에 날리는 검불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헌종의 분노로 정사대전은 중단되었으나 이미 무림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보고 난 뒤였다. 정사의 수많은 명숙, 고수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만큼의 절학들이 실전되었던 것이다.

 홍화교주 백안마군 단자경이 분루를 삼키며 도주할 때 그의 뒤를 따르는 자는 불과 몇 명의 교도뿐이었다.

 그리고 선대의 교주 유준이 그랬듯 옥문관 밖에서 황궁의 고수들과 정의맹의 고수들에 의해 포위되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선대의 유준보다 오히려 더욱 신비해지고 현묘해진 단자경의 술법에 그를 가로막았던 고수들은 속수무책, 맥을 못 추고 눈앞에 다가올 죽음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두 명의 괴인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꾀죄죄한 행색의 도인(道人) 한 명과,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걸승(乞僧)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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