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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붉은 마음 - 반려(伴侶), 너의 자리
작가 : 지연(금난비)
작품등록일 : 2016.10.7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 이벤트에 당첨된 지연. 일생일대의 행운에 부푼 기대를 안고 찾아간 매장에서 이제 막 상위 0.1%의 고급 대접을 받으려던 그 때, 정말 생뚱맞게도 공간 이동을 한다. 그래. 좋다, 이거야. 공간 이동, 차원 이동 이런 거 전부 내가 원하던 일이란 말이지.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내가 속옷을 갈아입는 이 순간이냔 말이야! 그리고 처음 마주친 사람은 칼을 들고 설쳐대는 미친놈이라니! 나 그냥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래! 앙큼 내숭 변태녀와 냉혹 까칠 우울남의 마을 재건 프로젝트 시작!

 
5화. 이제는 지겹다.
작성일 : 16-11-16 21:22     조회 : 280     추천 : 0     분량 : 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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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어어엉,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죽이려고 해. 뭘 잘못했는데, 도대체 왜! 흐아아앙!"

 

 

 벌써 한참이다. 이제는 슬슬 지칠 법도 한데, 그녀의 입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스스스

 

 

 얌전하던 나무가 한순간 흔들렸다. 누렁이가 힐끗 나무를 쳐다봤다. 숲속 모든 존재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바람 하나 없이 움직이던 그 존재는 주변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오직 그녀만 이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월운, 그의 매서운 눈이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보낸 기척을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입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분영을 한 방에 죽인 힘을 소유한 그녀라면 이 정도 힘은 당연히 눈치를 챘어야 했다. 둔한 것인가, 약은 것인가.

 

 그녀를 관찰하는 월운의 눈이 더욱 매서워졌다. 숲의 초입부터 그들을 경계하던 시선들도 덩달아 날카로워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나쁜 놈, 히끅. 싸가지..."

 

 

 '하아.'

 

 

 긴장감이 전혀 없는 그녀의 투정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울음 섞인 딸꾹질에 말하기도 버거울 텐데, 그래도 분노를 꾸역꾸역 표출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끈질겼다.

 

 자신의 판단이 틀린 것일까? 표정 없이 지연을 보던 월운의 얼굴이 조금씩 흔들렸다.

 

 

 "나아아아쁘은노오옴!"

 

 "끼잉!"

 

 

 갑작스러운 절규에 누렁이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놀란 것이 분명한 표정으로 월운을 올려보는 누렁이의 눈은 애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는 못 참아! 우리 그만 이거 버리고 여기서 나가자, 응?'

 

 '아직... 아니다. 그리고... 네가 자초한 일이야.'

 

 

 단호한 월운의 눈빛에 누렁이의 귀가 축 처졌다. 내딛는 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안쓰러운 그 모습이 자신의 탓인 양 토닥토닥 등을 다독이는 그녀의 손길이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온화한 지연의 모습에 월운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분영, 그 괴물이 따를 정도였다. 그것을 가차 없이 죽일 정도의 냉철함도 있었다. 적이라 판단할 수 없고, 우리 편이라 판단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인다. 그뿐이다. 그래서 그리 행동한 것인데, 지금 그녀의 기는 모든 것을 품을 것처럼 따스하고 따뜻하다.

 

 지연을 바라보는 월운의 눈이 더욱 흔들렸다. 판단이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후회를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힘없이 처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월운은 처음으로 후회라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자식한테 죽었을 거야. 흑, 정말 고마... 흐앙!"

 

 

 죽일까...

 

 간신히 멈춘 울음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끈질긴 그 소리에 이제 막 고개를 들던 생소한 감정이 순식간에 짜증으로 뒤덮여졌다.

 

 월운의 기가 전에 없이 바짝 날이 섰다. 그의 기운에 처져있던 누렁이의 꼬리가 따라 올라섰다. 붕붕 흔들기까지 하는 것이 그의 변화가 어지간히도 반가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찰나였다. 금세 기운을 감춘 그의 모습에 누렁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조금 뒤면 알게 되겠지.'

 

 

 잔뜩 움츠린 기들이 숲 어딘가에 숨어 지켜보고 있다. 영역을 침입한 그들이 달갑지 않은지 연신 불편한 기운을 보였지만 이상하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숲 너머 그것들을 조용히, 강하게 응시하던 월운이 천천히 기를 거두기 시작했다.

 

 

 '마음껏 날뛰거라.'

 

 

 월운의 기에 눌려 차마 다가오지 못하던 것들이 슬금슬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월운 눈치 한 번. 지연 눈치 한 번.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무리가 일제히 한 곳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울질을 끝낸 그들이 향한 곳에 지연, 그녀가 있었다.

 

 곳곳에 숨어 있던 검은 무리가 슬슬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질서없이 모여들던 그들이 지연의 주위를 점점 에워싸기 시작했다.

 

 검은 기운이 모여들수록 월운은 더욱 기를 숨기며 자신을 죽여갔다. 그의 눈은 오직 지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죽는다면 거둘 것이고, 살아남는다면 죽인다. 그뿐이다.'

 

 

 **

 

 

 불어오는 바람이 가볍게 지연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아아, 살았다. 지연을 지나친 바람이 그녀의 두려움도 함께 거둬갔다. 공포감으로 벌벌 떨던 몸이 땅으로 추욱 처지고 있었다.

 

 

 "아!"

 

 

 좁아진 시야가 넓어지자 그녀의 입에서 깊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늘하늘거리는 은색 빛들이 눈앞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춤을 추고 있는 듯 아름다운 그 모습에 지연의 눈이 멈췄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려움과 원망의 대상이었던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사랑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지금 지연의 눈에는 오롯이 은빛만, 그의 얼굴만이 비치고 있었다.

 

 

 -스스스스

 

 

 다시 바람이 분다.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지연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또다시 멈춰버렸다. 홀로 나풀거리는 은빛이 아름다워 지연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가 움직인다. 빠르게 느리게.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아름답다. 화려하고 수려한 동작들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무대 위 홀로 검무를 추는 노련한 무용수 같아 눈을 뗄 수가 없다. 그의 팔이 올라간다. 그녀의 손도 따라 올라갔다.

 

 만지고 싶다.

 

 그를 향한 강한 충동이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아!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는데. 지연의 손이 안타까움에 연신 허공을 더듬거렸다. 조금만 더 뻗으면 닿을까.

 

 강한 소유욕에 지배당한 그녀의 몸뚱이가 움직였다. 한 발 한 발. 뻗은 손이 끈질기게 그를 향하고 있다.

 

 조금만 더.

 

 그를 감싸고 있던 바람이 지연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부는 강한 바람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휘청. 온몸이 흔들린다. 그에게 더는 다가가지 말라며 바람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조금만 더.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다독이며 고집스럽게 그를 향했다. 만지고 싶다. 손바닥 가득 그 감촉을 느끼고 싶다. 흩날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짜릿한 감각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드디어 닿았다. 상상 이상의 감각에 모든 이성이 날아갔다. 손바닥은 부족하다. 온몸으로 그를 느끼고 싶다.

 

 고개를 든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지연이 그의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대감에 양 볼이 금세 발그레 붉어졌다. 그녀의 행동에 바람이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온몸 가득 부드러운 감각을 느낄 것이라 잔뜩 기대하던 그녀는..

 

 

 -퍼억!

 

 "허업!!"

 

 

 명치 가득 닿은 단단한 팔꿈치의 날카로운 감각을 잔뜩 느끼며..

 

 힘겹게 왔던 길을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날아가고 있었다.

 

 ..아니, 내동댕이쳐졌다.

 

 사나운 바람이 그녀를 비웃으며 점점 사그라들었다.

 

 

 "커억, 켁! 크허어억!"

 

 "젠장!"

 

 

 괴물만을 쫓던 그의 눈이 드디어 지연을 향했다. 바닥에 구겨져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월운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꾸웨에에에엑!

 

 

 방심한 월운의 뒤를 괴물이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승기를 잡은 양 내지르는 괴성이 기세등등하다. 월운을 향해 내리꽂은 팔이 사정없이 땅으로 박혔다. 대지가 울리고, 숲이 울렸다.

 

 

 -끄아아아아악!

 

 

 허무한 감각에 분노를 이기지 못한 괴물이 울분을 토해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검고 지독한 기운이 튀어나올 듯 요동을 쳐댔다. 감고 있던 눈이 떠진다. 붉고 어두운 눈이 빛을 발한다.

 

 그의 살기가 천천히 쏟아졌다.

 

 

 *

 

 

 두렵다.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세상에서 생전 처음 보는 무시무시한 존재에 심한 공포를 느꼈다.

 

 아프다.

 날카롭게 맞은 명치끝이 아직도 고통으로 꿈틀거린다.

 

 괴롭다.

 터억 막힌 가슴에 가는 숨을 쉬기도 힘들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다.

 

 하지만 지금,

 그 생소한 감각들을 잊을 정도로 그녀는..

 

 창피했다!

 진심으로, 창피해서 죽고 싶을 정도다!!

 

 괴물에게 잡혀 죽을 수도 있는 긴박한 순간이다. 그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괴물에게 짓눌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에 대한 고마움이 아닌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동작에 맞춰 지연의 몸이 흔들렸다. 그런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월운의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지연의 몸도 긴장감으로 단단히 굳었다.

 

 특히 그녀의 배가.

 

 

 '도대체 왜! 이 자세만 고집하는 건데!!'

 

 

 공주님 안기? 어부바?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건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숲 어딘가에 버리고 가라고! 이건 너무 수치스럽잖아!

 

 중력을 이기지 못해 축 처진 배가 그의 강한 손안에서 움찔거렸다. 두 겹으로 겹쳐진 채 잡힌 모양새에 지연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팔이 민망함에 연신 허우적거렸다.

 

 

 "얌전히 있어."

 

 

 한마디 말을 내뱉은 그가 지연을 잡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컥!"

 

 

 안 그래도 숨쉬기 힘든데. 조이듯 압박하고 있는 그의 팔에 숨이 턱 막혔다.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강한 압력에 놀란 그녀가 정신없이 그의 팔을 꼬집으며 반항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냉정한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앞만 보며 무심히 달려나갈 뿐이었다. 좁아진 숨구멍으로 거친 숨을 내쉬며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그녀의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가 이제는 익숙하다. 지금의 상황이 지겹기까지 하다.

 

 끔찍한 숲이 보인다. 그 숲이 멀어지고 있다.

 

 그래, 이제는 끝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안녕.

 

 그녀의 인사가 닿은 것일까. 아득한 정신이 보여주는 허상인 걸까.

 

 갑자기 나타난 미지의 존재가 숲의 입구에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존재가 뭐가 되었든 이제 그녀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 잠깐..'

 

 

 지연은 다급하게 날아가려는 정신을 움켜잡았다. 흐릿한 시야로 인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저 존재, 분명히 낯이 익었다. 익숙한 실루엣이 존재한다고? 어딘지도 모르는 이 낯선 세계에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부릅뜬 그녀의 눈이 매섭다. 보인다. 존재의 모습이 조금은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 어어?'

 

 

 자신을 향해 열렬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거라 생각한 그 존재는..

 

 가려진 얼굴 사이로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향해 가운뎃손가락만을 보이며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이... 씨...'

 

 

 빠르게 사라지는 그 존재처럼 그녀의 정신 또한 빠르게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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