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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불멸의 검, 악마의 칼날 위에 서다.
작가 : 박현철
작품등록일 : 2023.11.28

악마와 싸우는 안티히어로

 
태풍의 눈 속에 머물다
작성일 : 24-04-05 16:51     조회 : 18     추천 : 0     분량 : 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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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화

 태풍의 눈 속에 머물다.

 

  나는 1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야코는 아부가 심하다고 했고, 아야코 어머니는 당신 후계자가 한국인이 되는 거 아니냐고 좋아했다. 아야코 아버지는 흡족한지 가벼운 허밍까지 흥얼거리며 한잔 더 따라줬다. 이번에는 얼음도 넣지 않고 결의에 찬 가미카제 요원처럼 그 자리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술이 약한 나는 그 술이 온몸에 퍼진 직후 그 자리서 뻗어 잤다. 천만 원짜리 술을 먹고 잔 것이었다. 두 잔을 먹었으니까... 얼마지?... 음냐, 음냐...

 

 아야코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린 후부터 명실공히 스에마쓰 집안의 사위가 되어 있었고 사위처럼 굴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뻔질나게 아야코 집에 갔다. 6인방이 가기도 하고 쥰페이와 가기도 하고 혼자 가기도 했다.

 아야코 부모님은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다. 술 두 잔에 뻗은 내가 무엇이 좋은지

 지극정성으로 나를 대했다. 심지어는 아야코도 안중에 없었다.

 아야코는 장난으로 투정을 부렸지만, 내가 아야코 부모님으로부터 사위를 넘어

 아들 이상으로 칙사 대접을 받자 흐뭇해했다.

 

 - 우리 집이야?

 - 응?

 - 뭐해?

 - 부모님이랑 니 흉봐, 넌?

 - 나도, 작은 아빠랑, 숙모님이랑, 동생이랑 몽 흉봐, 큭...

 

 나와 아야코가 전화로 나눈 대화였다.

 나는 아야코 집에 아야코는 숙모 집에 있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보니 아야코와의 요시야 서점에서의 있었던 일로 생겼던

 어색함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숙모와 작은아버지도 아야코가 나타나면 만사를 제쳐놓고 같이 어울렸다.

 동생들도 내가 옆에 있어도 아야코만 찾았고 나는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그런데 나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알 수 없는 좋은 기운에

 휩싸여 있는 거 같았다.

 

 (E) 푹~

 - 윽~, 뭐고?...

 - 킥~

 

 아야코가 내가 핸들을 잡은 자전거 뒤에 타고서 내 머리에 종이봉투를 씌웠다.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아야코가 가라고 하는 방향으로 가면 됐으니까... 그렇게 간다면

 세상 무서울 것도 세상 겁날 것도 없고 어떤 고난과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을 거 같았다.

 

 - 좌로, 우로, 달리고, 급정거, 자동차를 피하고... 사랑해~

 - 나도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

 - 못 믿겠어, 믿을 수 있게 증명해 봐?~

 - 돌아앉아서 증명해?

 - 응.

 - 벽에 처박혀도?

 - 안 처박혀, 내가 있으니까.

 - 사랑의 안전벨트로 채울래?

 - 아니, 사랑의 에어백으로 감쌀래.

 

 닭살이 돋을 만큼 간지러웠지만, 이제는 이런 표현도 제법 익숙해졌다.

 우리는 두 번 다시 운우지정을 나누지 않았어도 애틋함은 전보다 더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농도 짙은 프렌치 키스는 하지 않았어도 스킨십은

 시도 때도 없이 했다. 다만 한 번씩 좋아서 내게 안기는 아야코의 풍만한

 수밀도 젖가슴의 뭉클함에 속으로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기는 했어도...

 그렇다고 굳이 따지자면 아야코와 나는 결혼이라는 세레모니를 치른 사이라

 남 이목을 신경 쓸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내가 현실적으로 마뜩지가 않아

 머뭇거렸다. 그러면 아야코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치며 눈을 흘겼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중간시험까지 치른 고3이 되었다. 뻔질나게 만나던, 아야코와 나, 쥰페이, 유리나, 미나미, 다이히토, 6인방은 어울림의 횟수를 서서히 줄였다. 대학 입시라는 현실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공부에 일가견이 있다는 유리나와 미나미도 긴장이 되는지 면학의 분위기에 녹아들어 열심히 했다. 그 예쁜 얼굴이 누렇게 뜰만큼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장난친다고 허리를 안아도 전혀 놀라지 않고 무감각인지 촉점 잃은 눈만 멀뚱한 채 나를 쳐다봤다.

 

 도쿄 대학은 워낙 날고 기는 자들이 많이 와서 그런 거 같았다. 다이히토는 도쿄 대학보다도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하버드나 예일, 스탠퍼드, 옥스퍼드, 캠버리지 등을 알아봤다. 알아봤다는 것은 무난하게 합격한다는 거였다. 선택만 하면 되었다. 쥰페이는 처음부터 가쿠슈인 대학에 갈 생각이라 지금 실력으로 충분하기에 나하고 놀 작정만 했다. 매일 매일 신나게 노는 아이템을 들고 왔다.

 

 나는 숙모가 뒤에서 다잡아 주지 않으면 가쿠슈인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쥰페이랑 더 오래 놀고 싶으면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놀고 공부를 파다 보니 몸이 감당이 안 됐는지 코피까지 쏟았다. 숙모가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나는 숙모가 실망할까 봐 실토도 못 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

 

 아야코는 대학 진학이 문제가 아니었다. 스에마쓰 그룹을 내세워서 일본 정부의 난제를 해결해 달라는 부탁이 많았다. 에너지 문제, 탄소 문제, 환경 문제, 2차전지 문제, 난민 문제, 등등 지구상에 얽히고설킨 문제들을 아야코가 특임 대사가 되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 세계를 뛰어다녀야 했다. 글로벌이 자기 앞마당이었다. 워낙 내가 벽창호라 이제야 생각해보니 2학년 때도 국가로부터 부탁이 있었는데 나에게 집중한다고 거절했던 거 같았다.

 그렇다고 스에마쓰 그룹 미래를 책임져야 할 숙명인데 계속 난색을 표명하기엔 심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룹을 통한 국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거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나와 만나는 날이 하루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보름이 되고 보름이 한 달이 되었다. 심지어는 캄캄한 밤에 비행기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일각고래를 타고 약속한 장소에 가서 수상비행기로 나에게 날아오기도 했다.

 

 - 아야코 그러지 마, 왜 힘들게 그래, 불안해하지 마, 난 변하지 않아...

 - 고마워, 회사가 좀 그래...

 - 내가 고맙지, 니회사 내 회사니까... 니가 내 대신 수고해주는데 나는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면 되니까, 헤...

 - 역시, 내 사랑.

 

 아마 스에마쓰 그룹이 추진하는 사업이 국가의 일과 밀접하게 연계돼 기계의 기어처럼 물고 물려 있는 거 같았다. 아야코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내 짐작에 대충 그럴 거다였다. 그렇다고 내가 뭣이라고 아야코 일에 나서서 미주알고주알 참견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아무튼 그래서 아야코의 건강과 안전이 문제라 내가 간곡한 부탁도 하고 으름장도 놓아 아야코와의 만남을 넉넉한 시간이 되면 만났고 아니면 문자나 영상통화로 서로 잘 있는지를 확인했다.

 

 - 몽, 시험 잘 쳐.

 - 응, 너도, 왜 어디 아파? 안색이 좀 그렇다.

 - 조금... 배가 아파... 아마 피곤해서 그럴 거야.

 - 땅이 아닌 거 같은데?

 - 응, 비행기 안이야.

 - 아무리 회사 일이라도 좀 쉬면서 해.

 - 그렇게 해, 그런데 피곤해, 아마 나이 탓인가? 큭...

 - 맞을 거야, 우리 나이가 적은 건 아니니까, 킥...

 - 영감, 보고 싶소, 큭...

 - 나도, 할망... 우리 시험 끝나고 돼지고기 숭숭 썰어 넣은 김치찌개 먹으러

  갑세 할망, 킥...

 - 좋지, 빈대떡도 먹을 거야. 돼지고기 말고 오징어 넣은...

 - 그건 울 엄마 주특긴데... 아야코를 괴롭히는 일본국은 나빠,

  우리 빨리 좋은 한국으로 가자.

 - 요즘 아버님 중고차 도매상이 잘 되는가 보지?

 - 응, 엄마 반찬가게도 잘 돼, 헤...

 - 어머님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긴장이 되네, 아버님, 어머님께

  안부 인사드려주세요, 서방님, 안녕, 사랑해~~, 쪽쪽~

 

 아야코와의 마지막 영상통화였다.

 마지막 영상통화라는 말은 그 무렵이 아니라 지금, 현재, 삼류 대학 조교로

 있는 이 순간까지를 말한다.

 

 가쿠슈인 대학에서 정신없이 시험을 치르고 나왔다.

 먼저 후다딱 시험을 끝내고 남들보다 일찍 나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쥰페이와 어깨동무하고 우리들의 아지트 블루 아워에 갔다.

 망고 주스를 시키고 주스 잔에 든 얼음을 깨물어도

 아야코, 유리나, 미나미, 다이히토 넷은 오지 않았다.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화도 받지 않았다.

 

 쥰페이가 사방팔방 수소문을 했다. 쥰페이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고 흙빛이 됐다.

 내가 왜냐고 물었다.

 스에마쓰 아야코가 시험 중간에 포기하고 나갔다는 흉흉한 소문만 돌았다고 했다.

 

 핸드폰을 꺼내 계속 전화를 해봤지만, 아야코는 봤지 않았고

 문자나 영상통화도 없었다.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쥰페이가 알아보겠다고 해서 쥰페이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반갑게 맞이한 건 카나와 미츠토시 동생 둘뿐이었다. 깜깜한 밤인데도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퇴근하지 않았다. 그날 밤늦게 작은아버지와 숙모가 들어와서 내가 깨기 전에 나갔다.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벽창호인 나는 바쁜 일이 있는가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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