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판타지/SF
빛이 들지 않는 땅의 등불
작가 : 솜덩어리
작품등록일 : 2022.7.13

혼돈의 세력에게 위협받고 있는 세계. 다양한 힘을 가진 종족들 사이에서 아무런 무기를 갖추지 못한 인간들은 신이 내려주신 마법의 노래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중에는 신의 자비로운 빛이 닿지 못한 자들도 있었으니, 그들은 벙어리라 불리었다.

 
05 - Ep. 멍청이 고블린(5)(fin)
작성일 : 22-07-29 17:14     조회 : 150     추천 : 0     분량 : 9402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05.

 

 

 

 이곳은 볕이 들지 않는 땅. 각종 난폭한 괴물들과 잔혹한 환경이 도사려, 단 하루라도 찢어지는 단말마가 들리지 않는 날이 없는 지옥. 오늘도 예외는 아니라 누군가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라면 메이르에게 이런 소리는 들려주지 않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상황이다.

 

 소리의 근원이 된 생물은 회색 털이 덥수룩한 인간들이 말하는 곰과도 같은 마수. 커다란 덩치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악명을 펼치던 녀석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온몸으로 느끼고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녀석을 노리는 사냥꾼은 멈추지 않고, 자그마한 이빨로 두터운 가죽을 뚫어 목을 뜯어먹는다. 마치 한껏 굶주린 이리와도 같은 사냥법을 가진 그 포식자는, 다름 아닌 이 숲에서 가장 나약한 생물. 메이르였다.

 

 원래도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이 특기였지만, 외눈 거인의 피를 마시고 난 후로는 힘이 한층 더 남아도는지 커다란 마수들에게도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더 이상 위험한 일은 겪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저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고블린의 나약한 몸으로는 어지간해서는 그녀를 보호해주지 못할 것만 같다.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신체 능력으로 주변 괴물들을 사냥하고 다니니, 한동안은 마음대로 설치게 다니게 내버려 둘까.

 

 그럼에도 날이 어두워졌으니 "이제 돌아가자"라고 그녀에게 말한다. 낮이나 밤이나 보기에 커다란 차이는 없지만, 해가 지고 나서의 괴수들은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내 목소리를 들은 메이르는 죽어버린 마물의 시체를 질질 끌며 이쪽으로 뛰어왔다.

 

 처음 사냥을 성공했을 때와 같이 환하게 웃으며 전리품을 내보이는 그녀지만, 이번 사냥감은 고블린이 한 군락이 있어도 잡기 힘든 난동꾼. 얼굴에 한껏 띄운 미소에는 피와 살점이 흘러내렸다. 엄청난 성과지만 솔직히 기뻐할 수만은 없는 마음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스스로 몸을 지키기에는 충분하겠지. 그렇게 보면 안심할 수 있어, 메이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제는 키도 훌쩍 커버려서 까치발을 해야 겨우 닿는 수준이지만. 잠깐의 칭찬 시간을 마치고 녀석과 나는 보금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식사는 마수의 고기를 가볍게 양념해서 구운 것. 나름 맛도 좋고 영양가도 풍부한(아마도), 이런 땅의 끄트머리에서나 먹을 수 있는 특식이다. 요리를 끝내고 바닥에 깔린 간이 탁자로 이동하자 메이르가 군침을 흘리며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음식을 내려놓자 마자 허겁지겁 해치우는 그녀. 아까 입으로 마수의 생 고기를 뜯어먹었을 텐데, 식욕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안 먹어 성장기이기도 하고, 특히 좋아하는 요리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내 몫까지 녀석에게 건넨다. 평소에도 조금씩은 넘겨주지만 아예 모든 것을 양보한 적은 없어 의아했는지, '안먹어?'라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내온다.

 

 "별로, 안배고, 파서."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치 그녀가 베푸는 듯이 가볍게 웃더니 자신의 몫까지 해치우기 시작한다. 성장기의 아이들은 여름에 소나기가 내리듯이 먹는다 하더니, 그게 정말일 줄은 몰랐다. 저렇게 먹는데 어찌 안 줄 수가 있을까.

 

 물론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맞았다. 하지만 조금은 이상한 것이, 고블린은 주로 성욕과 식욕으로만 이루어진 천박한 생명이다. 그것은 멍청이 고블린이라고 다를 것은 없어서 그 또한 소의 다리 하나쯤은 거뜬히 끝낼 만한 위장을 가졌다.

 

 그런데도 그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니 사실 고프지만, 이 고기는 먹고 싶지 않았다.

 

 

 

 

 

 

 

 

 

 밤이 찾아왔다.

 

 멀리서 이제야 잠에서 깨어난 야행성 마물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리고, 풀잎이 바람에 스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작은 동굴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자그마한 소녀의, 인간의 숨소리가 새액새액 스며든다.

 

 배를 채운 메이르를 잠자리에 보내고, 자신도 잠이 들기 위해 뒤척거리고 조금이 지난 후. 멍청이 고블린은 최근 들어 이 시간에 매일 눈을 뜨고 있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누구라도 아주 간단히 알아낼 수 있었다.

 

 그를 잠 못 들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메이르였다.

 

 분명히 멍청이 고블린은 그녀를 아끼고, 보호하고 싶고, 안전하게 키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어중간하더라도 부모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지금까지 해왔으며, 실제로 메이르에게 그런 위치의 존재로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쪽 면. 전체가 아닌 반절. 고블린이 아닌 멍청이의 생각이었다.

 

 고블린이라는 존재는 혼돈의 세력이다. 항상 피를 갈구하고, 그 나약하고 추한 몸으로 약자를 조롱하는 것을 즐기는 녹색 악마다. 허나 이 숲에 그들보다 더 약한 이들은 찾기 힘들었기에, 가끔씩 이곳을 헤매는 인간들이 주목표였다.

 

 그가 책이라는 존재를 발견하기 전. 단순히 거대한 고블린 군락 속의 한낱 고블린이었을 시절엔 그 또한 그런 약탈 행위에 동참했다. 반짝거리는 것을 빼앗고, 고기를 탐하고, 여자를 탐했다. 단순히 원초적인 욕망에 몸을 맡기며 그들을 유린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잘못 된 행위가 아니라, 그저 고블린에게 맡겨진 역할이었을 뿐이다.

 

 메이르가 아직 피붙이였을 시절.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인간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작고 위태로웠기 때문일까, 혹은 그저 사람의 고기가 아직 소화되지 않았을 무렵이라 무덤덤 했던 것 일까. 어느 쪽 인지는 확실치 않다.

 

 허나 인간은 자란다.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했던 얼굴은 날렵하고 우아하게 바뀌었고, 그와 상반되게 삐쩍 마른 몸에는 살이 붙기 시작해 굴곡이 생기며, 날이 갈수록 그 나이에 걸맞은 색기를 갖추었다. 특히 메이르는 평범한 인간들보다 용모가 배는 뛰어나니 그 변화가 더욱 더 크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런 고블린이 탐내는 요염하고 살이 오른 육체를 '부모와도 같이' 여기기에 경계하지 않고 항상 무방비하게 살결을 내비친다. 덕분에 시커먼 욕망이 담겨있던 항아리는 점차 차오르기 시작해, 이젠 찰랑찰랑하며 넘치기 직전이었다.

 

 실제로 어느 보름달이 뜨는 한밤중에, 고블린의 야성이 이성이 만들어놓은 울타리를 넘어 활보한 적이 있었다. 고블린의 원초적이고 추악한 욕망에 뇌를 잠식당한 멍청이 고블린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메이르의 곁으로 향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그녀. 갈수록 사랑스러움을 더하는 긴 속눈썹과 발달하기 시작한 흉부가 그의 눈을 사로잡는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어린 소녀의 땀과 살의 냄새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고블린의 하반신에 달린 욕망이 사악함으로 채워지며 더욱 더 그를 벼랑으로 내몬다.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상황. 아주 조금만 더 있어도 그녀는 녹색 재앙에게 악몽과도 같은 일을 당하겠지.

 

 그런 그를 막은 것은 마침내 행동하고자 다리를 움직였을 때 발에 챈 자그마한 바구니. 눈앞의 소녀가 커다란 과일만 한 크기였을 때. 이런 진흙 속에 던져졌을 때 담겨있던, 고급에 잘 짜여진 바구니. 추억 속의 물체를 본 순간 고블린은 방금 자신이 하고 있던 일도 잊어버리고, 바구니를 매만지며 과거를 추억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억을 떠올려냈을까. 멍청이 고블린은 드디어 공상 속에서 현실로 돌아오며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수치스러워했다. 죽고 싶어 했다. 녹색 몸 안의 감은 내장 속이 전부 죄악감으로 채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그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 쏟아냈다. 고블린의 추악한 욕망과 죄악의 고통을.

 

 그 또한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라며 미뤄뒀었는데, 이제 직접 경험해보게 되자 그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 독이 된다. 그녀의 존재가 자신에게는 나방들을 태워죽이는 불빛과도 같았다. 이 행복하기만 했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함을 느끼고, 그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연신 동굴 안을 걸어 다녔다. 그리고 초조한 발걸음이 그를 이끈 곳에는 짐승 해체용 칼이 걸려있었다.

 

 멍청이 고블린은 바로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아직 헤어지기에는 슬프고, 그녀를 해치는 일은 죽어도 하기 싫은 그에게 남겨진 선택지. 그는 한 손으로는 칼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반신에 달린 재앙의 씨앗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힘껏 내려쳐 그의 몸에서 부정함을 떼어냈다. 어쩌면 메이르가 느낄 수도 있었을 고통을 만끽하며, 고통과 동시에 이제 일상은 안전하다는 안도감에 취해 미치광이처럼 낄낄거렸다. 마물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 하더라도 무서워서 덤비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결단을 내린 그는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성욕 다음으로는 식욕이 오는 법. 인간으로 즐길 수 없게 된 고블린의 육체는 인간의 맛을 탐하기 시작했다.

 

 마수의 고기가 무미건조한 흙덩이처럼 바뀌고, 끊임없는 식욕에 휩싸인다. 공복감과는 상관 없이 사람의 피를 갈구하는 혼돈의 욕망은 배출구가 하나 사라지자 더욱 더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입을 뜯어 낼 수도 없고, 입을 꿰맬 수도 없었다. 멍청이 고블린으로서는 이런 욕망을 메이르에게 드러내는 것 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헌신적인 녀석은 분명 무언가를 할 것이 분명하기에.

 

 녀석은 좀 더 빛나는 곳에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외모와 상냥한 마음씨, 뛰어난 능력을 살릴 수 있는 어딘가. 어딘가 볕이 드는 곳에. 이런 끔찍한 구렁텅이에 살며 수많은 죄를 저지른 자신을 위해 동족을 사냥하는 아이가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충분히 사랑받는 아이로.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해결 할 수 있을까. 이 사태를 빠져나갈 구멍은 없을까. 언제나와 똑같이, 고블린은 조용히 바위 위에 앉아서 최선책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서두르거나 머리를 두드리지는 않는다. 이번엔 그도 무엇이 정답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밤은 땅을 바라보는 고블린을 기다려주지 않고 흘러간다. 꿈을 꾸는 인간 소녀와 함께.

 

 

 

 

 

 

 

 일 년에 딱 한 번, 빛이 닿지 못하는 땅에 볕이 드는 날이 있다.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자신의 제자와 숲을 돌아다닐 수 있는 유일한 날에, 멍청이 고블린은 한창 짐을 싸고 있는 도중이었다. 각종 중요한 서적들과 모아둔 약초를 천에 싸서 보따리에 넣고, 약간의 비상식량도 곁들였다.

 

 그 광경을 옆에서 바라보던 검푸른 머리칼을 가진 소녀는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는 채로 그것을 돕고 있었다. 오밀조밀하고 하얀 손으로 평소 자주 사용하던 무기들을 모아 끈으로 묶어 고블린에게 건네주었다.

 

 그렇게 곧 떠날 ー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조차 아직 모르지만ー 메이르를 위한 여행 짐을 전부 싼 후, 고블린은 나약해진 체력을 체감하며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멍청이 고블린은 눈앞의 궁금증으로 가득 차 금방이라도 질문을 던져 올 듯 한 아이를 마주 보았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눈을 맞추려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아야 했는데, 이제는 그녀가 자신을 내려본다.

 

 길어진 신장, 더욱 더 아름다워진 얼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눈가와 손바닥의 주름밖에 없는 자신과는 다르게, 녀석은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시련들을 겪어왔던 것을 생각하니, 괜스레 눈물이 핑 돈다.

 

 그렇기에 이번 이별도 단순히 그녀의 수많은 성장통 중 하나가 되기를 바라며, '무슨 일이야?'하고 바닥에 글씨를 끄적인 그녀에게 말을 내뱉었다.

 

 "이제, 이 짐을 가지, 고. 숲 바깥으로, 나가라."

 

 순간 메이르의 얼굴이 움찔 하며, 혼란스러움인지 충격인지 모를 무언가에 의해 뒤틀렸다. 아마 이렇게만 말해서야 잘 모르겠지.

 

 "너는, 이곳에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야."

 

 마지막 순간에는 말을 더듬지 않고 보내주고 싶은데, 그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인간의 말은 여전히 어색했다. 역시 제대로 된 스승이 없어서일까.

 

 갑작스레 이런 얘기를 전해 받은 녀석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가 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드는 듯 보였다. 이건 무언가의 비유거나 시험하는 게 아니라고 말해도 도통 알아먹지 못하는 모습이다.

 

 '잘 모르겠어'

 

 그녀는 얇은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지면의 진흙에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자신이 가르치긴 했으나, 어느 책에 비교하더라도 밀리지 않는 수려한 글씨체다.

 

 "너는 볕이, 드는 땅으로 가야 해. 그곳에서, 사는 거야."

 

 '그러니까 그걸 잘 모르겠다는 거야. 난 버려진 아이잖아? 신님도 날 안 돌봐주실 텐데 왜 여기를 떠나야 해?'

 

 확실히 그녀가 하는 말은 옳다. 이미 자비로운 여신님과 축복받고 사랑받아야 할 부모에게서 버려진 아이. 이런 세상의 끝까지 내몰려진 아이에게 갈 곳은 많지 않았다. 인간세계로 돌아간다고 해도 행복할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축복받은 아이였다. 마법을 부여 받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튼튼한 육신과 정신이 있다. 말은 하지 못해도 그것을 잊게 만드는 외모가 있다. 운이 없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식이 있다.

 

 어느 것이고 세간에서는 칭송받아 마땅한 재능을 이런 고약한 변두리에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장미를 잡초와 같이 두지 않듯이, 이야기 책에서 공주와 단역들을 같이 두지 않듯이. 메이르는 더욱 더 빛날 가치가 있다.

 

 "되고 싶지 않니? 이야기 속, 용사님."

 

 억지로 떨어트려 놓으려는 속셈으로 느꼈는지 뾰로통했던 얼굴이, 방금의 한마디로 금방 흥미진진하게 바뀌었다. 역시 녀석도 갈망하고 있던 것이다. 그녀에게 걸맞은 대서사극을.

 

 "너라면, 가능해. 위험에 빠진 왕국을, 구하는 것도, 세상을 뒤덮은, 혼돈을 쓰러트리는 것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업적을 세우는 것도. 너는 선택받은 인간이니까.

 

 마치 좋아하던 인물의 영웅담을 읽을 때와 같이, 언제부턴가 핏빛이 섞이기 시작한 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눈에는 자신의 능력을 깔보는 겸손함이나 이곳을 나가, 자신과 떨어진 후 닥칠 위험들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단 한점도 담겨있지 않았다. 녀석의 장점이다.

 

 그렇게 이제 다 설득했다 싶었는데, 잠시 미소로 가득 찬 얼굴에 잠깐의 먹구름이 들어선다. 그러더니 내팽개쳤던 나뭇가지를 다시 펜 삼아 이리 써 내려갔다.

 

 '하지만 그러면, 선생님은 안따라가?'

 

 어떻게 보면 대충 예상하던 질문이 나와서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녀석에게, 녀석의 삶에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되기 전에 내보냈어야 했는데. 물러터진 성격과 이기적인 욕심이 그녀의 다리에 족쇄를 채운 것 처럼 보였다.

 

 물론 같이 숲을 떠나 세상을 여행하는 것도 생각은 해보았다. 하지만 들켰다가는 큰일이고, 더 이상 인간ー언저리ー에서 멀어지는 자신으로써는 무리였다.

 

 언제 한번은 녀석이 자고 있을 때 숲을 벗어나려 해본 적이 있었다. 나중에 메이르가 이곳을 떠날 때 헤매지 않도록 지도를 만든다는 것을 핑계로 한 일이지만, 그저 혼돈의 세력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대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 달려 나간 곳에는 하늘을 가득 메운 가지들이 옅어져, 듬성듬성 밝은 연둣빛을 뜨는 잔디밭이 무수히 있었다. 하나같이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더 이상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어째선지 자신이 저 땅을 밟는 순간, 그 빛은 색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메이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어둠에 더럽혀져도 빛깔을 잃지 않는 그녀가.

 

 "그래, 나는 못 따라가. 하지만, 나를 위해서 책을 써주렴. 바깥에서 겪은 모험과, 네가 직접,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권이던 느긋하게 읽을 테니, 이곳에서 몇 년이던, 기다릴 테니."

 

 분명 그 아름다운 땅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것도 자신의 사랑해 마지않는 유일한 제자이자 자식과도 같이 느껴지는 메이르의 이야기라면 지금까지 읽은 책들과 비교가 되지 않겠지.

 

 자신 못지않게 책벌레인 그녀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는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부디 자신의 존재가 녀석의 욕망보다 크지 않기를. 본적도 없고 믿지도 않는 신께 기도한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방금 한 말을 취소하고 싶다. 이곳에 있어 달라는 말을 꺼내고 싶었다. 이제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고블린의 본능이 그녀를 탐하라는 신호를 미친 듯이 울리고 있다.

 

 만약 그녀가 이곳에 남겠다고 한다면 그다음에 일어날 일은 장담하지 못했다. 자신이 이 정도로 벼랑에 몰려있었나, 하고 실감한다.

 

 안타깝게도, 다행히도 그녀는 끄덕였다. 살짝 붉게 물들인 양 볼에 기대와 흥분을 감추고서.

 

 고블린의 추악한 얼굴에 미소가 띄워지며, 그는 안심한다. 사람으로서 자기 자식을 떠나보낼 수 있단 마음에 안도하였으니까.

 

 각종 짐이 담긴 보따리를 소녀의 등에 얹어주고, 몇 날 며칠을 밤새워 만든 철제 둔기를 허리춤에 끼워준다. 숲을 나서기 위한 자원은 충분할 테니 그녀 정도라면 아마 도달 할 수 있겠지.

 

 남겨둔 미련만큼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로, 메이르는 한 바퀴 돌아 이쪽을 보며 미소 짓는다. 방실방실 웃는 모습이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런 저주받은 숲도 그녀의 앞날만은 축복해주는 지, 소녀의 발길이 향할 방향은 환하게 빛나고 산들바람이 피부를 가볍게 간지럽혔다.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상황에, 그에 걸맞은 주인공. 아마 이것이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기나긴 이야기. 고블린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영웅담의 도입부겠지.

 

 '다. 녀. 올. 게'

 

 얇고, 하얗고, 가늘지만 야무진 손을 힘차게 흔들며 그녀의 의부모에게 작별을 고한다. 시력이 나빠진 그를 위해 한껏 과장되게 벌린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지만, 그 입 모양 만으로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해졌다.

 

 "다녀오렴."

 

 그에 화답하는 고블린의 말은 지금까지 내뱉은 말 중에서 가장 인간답고, 가장 자연스러운 한마디였다. 주름진 녹색 손으로 천천히 그의 자식에게 작별을 고한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오래된 보금자리를 떠나길래 한참은 더 시야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더니, 어느새 소녀는 점이 되고, 티끌이 되어 사라진다. 이젠 더 이상 보이지도 않는데 고블린은 여전히 서서 손을 흔든다.

 

 볕이 드는 것도 온종일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숲에는 끝없는 어둠이 찾아온다. 시끌벅적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조용한 땅으로 변한다.

 

 멍청이 고블린은 밤이 찾아올 때 까지 가만히 서 있더니, 작은 동물들이 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야 그의 보금처로 돌아갔다.

 

 이제는 거의 남은 물건이 없는 동굴에서,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살림살이를 끌어모으며 메이르와 나눈 약속을 떠올려낸다. 그녀의 책을 기다린다는 거짓말을.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애초에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내뱉은 소리다. 앞으로 자신의 남은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것도,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때 마주하게 될 자신은 지금의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치려 한다. 고블린은 한 자루 남겨둔 단검을 한손에 쥐고, 끈으로 칭칭 묶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이별을 계획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그에게는 어느 생각이 맴돌았다. 만약 몇 년 만에 메이르가 돌아온다면, 다른 고블린과 자신을 어떻게 구별 할 것인가?

 

 그때는 단순히 다른 고블린들이 위험하기에 외견에 차별점을 둔다는 대안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확실히 해결법을 알 수 있었다. 머리를 두드리지 않아도 말이다.

 

 고블린은 자신이 시작한 일을 끝마치기 위해 일어서서 걷기 시작한다. 메이르가 볕이 드는 땅으로 나아간 것 처럼, 그의 보금자리가 아닌 고향으로. 그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좀 더 볕이 들지 않는 곳으로 나아갔다.

 

 더 이상 그를 멍청이라 부를 이는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 멍청이도 아니고, 고블린도 아니게 될 것이기에.

 

 그리고 그곳에 고블린이 있었다.

 
작가의 말
 

 어쩌다보니 거의 만자가 됐네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스토리 시작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5 05 - Ep. 멍청이 고블린(5)(fin) 2022 / 7 / 29 151 0 9402   
4 04 - Ep. 멍청이 고블린(4) 2022 / 7 / 13 148 0 5524   
3 03 - Ep. 멍청이 고블린(3) 2022 / 7 / 13 146 0 5321   
2 02 - Ep. 멍청이 고블린(2) 2022 / 7 / 13 172 0 6743   
1 00 & 01 - 멍청이 고블린(1) 2022 / 7 / 13 245 1 5988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최강의 포식자
솜덩어리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