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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정령왕의 소환자
작가 : 천향
작품등록일 : 2022.2.26

정령왕을 소환한 사내

 
드래곤 케르샤
작성일 : 22-02-28 23:57     조회 : 179     추천 : 0     분량 : 15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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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자신과 프란일행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눈꼽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 자신만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엘라임과 라온에게 익숙해진 실피드는 알아서 혼자 프란을 침대로 옮기고는 그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알렌을 쳐다보았다.

 

 두명 다 자그마한 체구여서 침대에는 충분히 들어갔지만 실피드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알렌에게 불만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사실 알렌을 치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그녀가 바로 깨어나기란 힘들었다. 그럼에도 실피드는 알렌을 툭툭 쳤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응?"

 

 침대에 걸터앉아 잠든 알렌에게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알렌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한참동안 지켜보던 실피드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여전히 잠에 빠져 있는 알렌에게 다시 한 번 나직이 속삭였다.

 

 "아르테온 데려올까?"

 

 움찔!

 

 실피드의 나긋한 말에 순간 알렌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드디어 원하던 반응이 나오자 실피드는 더욱 느긋하게 말했다.

 

 "엘라임도 여기 있으니 조금만 기운을 흘리면 바로 올텐데~할 수 없지 뭐"

 

 실피드의 말이 채 끝나자 마자 잠들어 있는 줄만 알았던 알렌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감겨진 눈에 숨겨져있던 새빨간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실피드의 눈을 그대로 직시했다.

 그리곤 자그마한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죽는다, 너."

 

 

 "너랑 계약하고 난 후 얼마 뒤 동면에 들었다가 최근에 깨어났어. 약 500년이나 지났으니 세상이 얼마나 바꼈는지 모르는게 당연하잖아. 그래서 어린아이의 모습을 택했지. 알다시피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몰라도 자연스러운 거잖아?거기다 이렇게 귀여운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선뜻 도와주고 싶어지잖아. 그런 다방면의 이점을 고려해서 이 모습을 선택했던 거지 절대 사심이나, 그런건 없었어."

 

 케르샤는 자신이 왜 어린아이의 모습을 택했는지를 구구절절히 설명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모두의 표정이 심드렁한 것을 보곤 재빨리 다음 화제로 옮겨갔다.

 

 "그러다가 프란을 만나게 되었어. 너도 알다시피 프란은 사실 쌍둥이 공주.

 존재해서는 안되는 핏줄이었지."

 

 케르샤의 이야기는 프란이 실피드가 자신을 안다는 사실에 어째서 그렇게나 충격을 받았는지에 대한 이유였다.

 

 "프란은 내가 로메르만 왕국의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다가 만난 아이야. 당시 프란은 자신이 쌍둥이공주란 걸 모른 채 농부의 딸로 살아가고 있었지. 인간들이 멍청한게 자신들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선 일단 겁부터 먹고 보잖아? 프란도 역시 그들이 가진 공포의 희생양이었지. 뭐,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죽었어야만 했던 아이가 유모가 빼돌린 덕에 그나마 살아있었다는 게 행운이었다면 행운일수도."

 

 성이 없이 프란으로만 불렸던 그녀는 사실 프란 제이니스 로메르만이란 왕가의 성을 가진 숨겨진 공주였다.

 

 그리고 프란 자신조차 그 사실을 불과 3일 전에 알게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사실이었다.

 

 전쟁 중 프란의 쌍둥이 남동생 프라하 제이시스 로메르만이 죽게되자 로메르만 왕국의 혈통이 끝나게 되었고 반란의 명분과 구심점이 필요했던 반란군은 그 때서야 숨겨진, 그리고 마지막 혈통인 프란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프란은 그녀 자체가 아니라 죽은 줄 알았던 프라하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으로 자리를 대체했다. 유일한 왕녀면서 왕자가 된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는 반란군에게 프란을 소개한 유모와 반란군을 이끄는 타르안 장군,그리고 어머니의 친우이자 자신의 숙부인 로슈먄 대공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에서 그들 모두 전사했다.

 

 "나는 프란이 꽤 맘에 들어서 한동안 함께 지냈어. 그러다가 프라하 왕자가 전투로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유모가 프란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 나도 따라 나섰지. 따라 나서는 날 떼어놓으려 한 사람들에겐 마법을 조금 보여줬지.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아인 줄 알던 내가 마법사란 걸 알곤 바로 태도가 달라지더군."

 

 "전쟁 중이니 마법사란 존재는 그야말로 귀한 존재니까. 그런데 너 무슨 마법을 보여줬는데?"

 

 실피드의 물음에 케르샤가 상큼하게 대답했다.

 

 "파이어볼."

 

 실피드가 머리를 짚었다.

 

 "잘~한다! 고작 10살짜리가 라이트닝도 아닌 파이어볼을 시전하는 걸 봤다니 그들이 놀라 쓰러졌겠구만!

 

 "그러게, 덕분에 날 바로 프란의 경호로 붙이더라고."

 

 케르샤는 실피드가 비꼬는 걸 모른채 오히려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그리곤 자그마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데 난 사실 프란이 그 곳에 있는 게 싫었어. 그 애가 농부의 딸로 성장해 농부로 성공하는 걸 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3일동안 계속 설득했는데 얘가 말을 안 듣더라고. 뒤늦게서야 핏줄에 대한 자긍심이라도 발견한건지. 하지만 결국 마지막 전투에서 아르티안의 군대가 이겼고 난 군사가 타르안 장군의 목을 들고 우리에게 오는 걸 보고 바로 공간이동으로 이곳에 온 거지. 물론 프란은 내가 이정도의 마법을 할 수 있는 줄 모를테니까 적절히 마법의 부작용을 당한 척 피를 뿜는 연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거고."

 

 "일을 번거롭게 만들었구나."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있었을 뿐이야. 최대한 개입하지 않고."

 

 "그래, 그럼 이제 내가 해석할 차례인건가?"

 

 "우웅?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다 설명했잖아?"

 

 갑자기 무슨 말이냐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한 케르샤를 실피드가 눈을 가늘게 하며 쳐다보았다.

 그리곤 심호흡을 하곤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니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이유는 사실 동면에 들기 전에 읽었던 소설때문 아냐? 분명 가난하고 연약한 어린 아이가 역경을 이겨내고 성장해나간다는 감동스토리를 읽었겠지.그걸 보고 감동을 받은 너는 유희를 시작하자마자 소설처럼 아이의 모습을 따라했고 ."

 

 실피드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케르샤의 고개가 조금씩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프란을 보며 넌 딸키우기 게임의 실사판을 생각했겠지. 니가 그 게임에 한동안 정신 못 차리고 빠져있었단건 아르테온의 증언으로 확실히 알고 있어. 니가 지금 아르테온 이야기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는 이유가 엔딩보다 열받아서 그 게임팩을 부셔버렸기 때문이잖아. 자기한테 게임팩 빌려가놓곤 부셔버리자마자 동면에 들었다고 아르테온이 난리 치던데."

 

 케르샤는 어느새 실피드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였다. 자신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보여주기 싫다는 심산일까.

 그런 케르샤를 보며 실피드는 끝까지 추궁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마 농부엔딩을 생각한 듯 한데 네 생각대로 프란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지겨워진데다 인간은 게임처럼 리셋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프란을 우리에게 떠넘기려고 여기로 데려온거아냐?"

 

 "아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케르샤가 소리쳤다. 하지만 곧장 말하진 못한 채 우물쭈물 대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으...리셋...할...수가 없어서 그런건 아냐...리셋하기...싫은거지."

 

 그 말이 그 말인듯 한데다 어쩌면 더 심한 말인 듯 들리지만 그것은 케르샤에겐 큰 차이점이었다.

 그는 프란과 지내면서 프란에게 정이 들었다.

 

 "그래...니 말이 맞아. 난 프란이 농부로서 커주길 바랐어. 그리고 난 내 의도대로 프란을 만들기 위해 프란의 기억을 지울수도 있었어. 하지만 난 내가 아는 프란이 없어지는 게 싫었어. 그녀를 반란군에서 빼내올 수도 있었지만 도메르만의 공주로서 그 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는 프란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어. 그러기 싫었던 거야. 네 말대로 프란은 게임 속의 캐릭터가 아니니까. 자아를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니까. 내가 이 곳으로 온 이유는...더이상 로메르만의 공주로서 살 수 없게 된 프란이 앞으로 어떤 삶을 선택하든 그녀가 원하는대로 살게 해주고 싶어서야."

 

 어느새 돌아선 케르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사실 난 여기서 프란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고 싶었어. 내가 죽더라도 너는 너의 인생을 살라고. 부모님의 뜻에 따른 농부도, 핏줄에 따른 공주도 아닌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라고. 그리고 마지막 선물로 프란의 모습을 바꿔주고 떠나려 했지. 아무래도 그 모습은 프란에게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케르샤가 소리쳤다.

 

 "그런데 엘라임과 니가 여기에 있는 바람에 내 계획이 다 엉망이 되어버렸어. 난 이대로 죽은 척하고 사라질 생각이었는데 다시 살아났고 프란은 너를 이용해 다시 로메르만을 일으킬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

 

 "하지만 프란은 내가 아르티안의 첩자라고 생각하는걸."

 

 "그래서 그렇다고 인정할거야?"

 

 "아니."

 

 단번에 부정하는 실피드. 케르샤는 화룡점정을 찍듯 눈물이 잔뜩 고인 눈망울에서 한 방울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불쌍한 프란은 이제 부모님도 잃고 자신의 나라까지 잃었어...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친구마저 떠나간다면 그녀는 너무나 외로울 거야..."

 

 "방금까지 스스로 떠날 계획이었잖아."

 

 실피드의 지적에도 케르샤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이 어린 소녀를 누군가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눈에 고인 눈물을 살짝 손으로 훔치며 흐느끼는 듯 말하는 케르샤.

 실피드는 그런 케르샤를 빤히 쳐다보다 말했다.

 

 "너 그냥 우리한테 맡기고 싶은거지."

 

 또다시 어깨가 움찔한다.

 

 "또 그 특유의 감성폭발로 소설로 느꼈던 그 감동이 생각나면서 프란하고 지내다 감정이입이 되니까 어떻게 해서든 챙겨주고는 싶은데 귀찮아서 끝까지 맡기는 싫고 그래서 이러는 거지."

 

 들썩!

 

 아주 온몸으로 티를 내는 케르샤.

 그만큼 실피드가 예리하게 정곡을 찔러서이다.

 실피드는 여전히 가늘게 한 눈으로 케르샤를 쳐다보고 있었다.

 

 "쳇"

 

 옆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케르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케르샤의 혀를 내두를만한 연기에도 실피드는 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봤다.

 

 '내가 너를 백년 이백년 봤냐...조금만 슬픈 거 봐도 감성폭발에다 게으름뱅이에 변덕쟁이...괜히 아르테온이 케르샤의 아들이란 소문이 나는게 아니지.'

 

 게다가 아르테온이 아끼던 딸키우기 게임팩을 망가뜨려놓고선 책임지기 싫어 나몰라라하며 잽싸게 동면에 든 철면피였다. 동면에 든 드래곤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철칙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한바탕했을 아르테온은 결국 분에 못 이겨 주위에 있던 왕국하나를 날려 버렸다.

 

 "그래서, 저 인간을 이곳에 두겠다는 거냐."

 

 서늘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케르샤와 실피드의 눈이 한 곳으로 향했다.

 잠자코 케르샤와 실피드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엘라임이 마침내 나선 것이다.

 

 "여기는 지금 라온과 내가 머물고 있는 곳. 네 녀석이 원한다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성에 호소하는 자신의 눈물을 보고도 동요의 기미조차 없었던 엘라임의 무표정은 아까부터 케르샤를 질리게 했다.

 

 "...냉혈한...!"

 

 라온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엘라임에 대한 모든 말에 반응을 보이는 라온을 말리는 역할인 실피드가 라온을 붙잡았다.

 

 "워, 워. 라온, 진정해. 같은 소환사끼리 너무 열내지 말자."

 

 같은 소환사란 말에 라온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설마 케르샤를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생각한 걸까?

 아무튼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실피드가 말했다.

 

 "그럼 라온의 동의만 있으면 엘라임은 이 애가 여기서 머물러도 괜찮은 거야?"

 

 "전 싫어요."

 

 엘라임에게 묻자마자 단칼에 대답하는 라온.

 

 "어머니와 함께 있는 공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아까 프란이 여기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겠다고 했잖아. 집안일이든 뭐든...그럼 너도 엘라임 곁에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나는 거 아냐."

 

 케르샤가 라온을 설득하는데 거들었다. 엘라임을 향한 집착을 파악한 그는 지금은 일단 엘라임보단 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돌리는게 우선인 듯 했다.

 케르샤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라온은 곧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래도 싫어요. 전 누가 어머니와 함께 있는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싫어요."

 

 집을 찾아온 방문객에 관해 좋은 기억이라곤 없는(오히려 악몽같은 기억만 있는) 라온이 낯선 불청객을 인정할 리 없었다.

 더이상 협상의 여지를 보이지 않는 라온의 거부에 케르샤는 난처해졌다.

 

 '엘라임은 왜 이런 녀석과 계약해버린 거야?! 내가 드래곤이라는 데 겁도 없어?'

 

 겁도 상실하고 상식도 상실한 듯한 라온이 아니꼬왔지만 결국 부탁을 하는 것은 자신. 아무리 철면피일지라도 상대가 이렇게 철벽을 쳐대면 어쩔수가 없었다.

 고심을 하던 케르샤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답이 나오지않자 결국 실피드에게 도와달라는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한 발짝 물러난 채 케르샤가 어떻게 설득할지 지켜 보던 실피드가 결국 다시 나섰다.

 

 "그럼 이건 어때?"

 라온이 엘라임과 함께 있는 것을 얼마나 중요시 알기에 일반적인 제안은 절대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실피드는 과연 라온이 흥미를 느낄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다 어떤 것에 생각이 미쳤다.

 

 "라온,엘라임과 여행을 떠나보는 거 어때?"

 

 실피드의 제안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지 어떤 말이든 단칼에 잘라내버리던 라온이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피드의 입술이 작은 호선을 그렸다.

 그가 떠올린 것은 바로 라온의 기억. 그의 어머니가 죽기 전 마지막 날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생각났다.

 어둡고 무섭기만 한 동굴 너머에 다양한 종족과 빛과 축복이 가득한 나라들이 존재한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라온은 한순간에 빠져들었고 그 때 라온이 느꼈던 흥분과 호기심은 관찰자였던 자신에게까지 전달될 정도로 강렬했다.

 

 평생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

 실피드는 그것을 다시 한 번 자극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너는 그 어디에도 매여있지 않은 자유의 몸이야.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어."

 

 실피드의 말에 라온은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라온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목이 매인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눈에 엘라임이 보였고 책장이 보였다.

 그리고 집 안에는-

 밝은 빛이 가득했다.

 

 "어..."

 

 라온은 그제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각한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굴 이후로는 항상 갖혀 있었고 그곳에서 빠져 나온 직후부턴 항상 어머니만을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나 기뻐서 주위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온 정신을 어머니에게만 쏟아 부은 나머지 그 외의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실피드의 말로 인해 자신이 모르고 지나쳤던 사실을 깨달았다.

 

 "빛..."

 

 아주 당연한 듯 자신의 주위에 존재하고 있는 빛을 라온은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곤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빛을 무심코 잡아보려 손을 휘젔다가 실피드의 말을 되내었다.

 

 "자유..."

 

 케르샤는 갑자기 자신의 주위를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라온의 모습이 이상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직감적으로 지금 라온의 반응이 설득에 아주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 라온. 기억해? 어머니가 네게 밤새도록 들려줬던 세상 모든 흥미로운 이야기들. 너는 이제 그것들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어."

 

 어머니의 이야기를 상기시키자 라온의 얼굴이 들떴다.

 딱 한 번의 이야기였지만 여전히 단 한 마디도 틀리지 않을 만큼 생생한 어머니의 이야기 속 내용들이 떠오른 것이다.

 귀가 뾰족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엘프, 작고 사랑스러운 정령들(라온은 자신이 정령왕을 소환했음에도 정령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 엘라임과 정령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넘치고 신들의 축복이 함께 한다는 왕국에 사는 사람들...그 모든 것들이 보고 싶었다.

 

 라온은 실피드를 향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싶어요!"

 

 그리곤 엘라임을 향해 말했다.

 

 "어머니, 죄송해요."

 

 라온은 그 때 어머니의 숨소리와 말투 그리고 웃음 그 모든 것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머니의 말 속에는 분명 숨기지 못한 그리움이 들어 있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엘라임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라온은 오히려 그 모습이 더욱 안타까웠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 하던 것들을 자신때문에 참고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온은 어머니에게 한없이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여태껏 알아채지 못하다니...역시 난 아직 멀었어.'

 

 스스로의 열망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바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라온에게 여행을 가는 것은 이제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럼..."

 

 라온이 결심을 한 듯하자 케이샤가 슬금슬금 말을 꺼냈다.

 

 "너희가 여행 가 있는 동안 프란이 여기에 머물러도 되지?"

 

 "안 돼요."

 

 또다시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라온.

 케르샤가 눈을 등잔만 하게 떴다.

 여행을 갈거면서도 그 빈집조차 양보하지 않겠다는 라온의 말에 케르샤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왜 안 되는 건데?야! 이 xx야! 니가 여기 전세냈냐? 어? 사실 따지고 보면 여긴 나랑 실피드의 집인데 니가 뭔데 된다 안된다야?어?"

 

 결국 폭발해 눈에 쌍심지를 켠 케르샤는 멈추지 않고 더욱 몰아붙였다.

 

 "야, 그리고 너는 x만한 xx가 몇 살이야?어? 어른 공경도 모르냐? 어른이 이렇게까지 니 편의를 봐주서 이러이러 하자 하면 감사히 여기고 네~해야지 어디서 이건 싫고 저건 싫고 도리질이야??? 너 몇 살이야, 어???"

 

 결국 나이 공격에까지 이르는 케르샤의 분노!

 금방이라도 입밖으로 브레스라도 내뿜을 듯한 기세에 결국 또다시 나서는 것은 실피드였다.

 그는 요 며칠사이 자신이 중재의 화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워,워. 케르샤, 진정해. 그리고 라온. 너도 그렇게 마냥 네 주장만 내세울순 없어."

 

 그는 불꽃이 튀는 둘 사이에 서서 조곤조곤한 말투로 설명했다.

 

 "설마 케르샤가 이 곳에 찾아올 줄은, 더군다나 이 곳을 쓰려고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너희에게 이 곳에서 살라고 했던 거야. 여기는 내가 쓸 장소로 만든 것이긴 하지만 이 곳을 만들 때 케르샤의 힘도 들어갔기 때문에 그 역시 이 곳에 대한 권리를 어느정도 주장할 수 있거든."

 

 실피드가 자신을 옹호하자 케르샤는 조금 기분이 풀린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거봐라는 눈으로 라온을 쳐다보았다.

 라온은 케르샤의 의기양양한 시선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둘을 보고 실피드는 잠시 쉼호흡을 한 뒤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거야."

 

 그는 주먹을 쥔 손에서 검지 손가락을 세웠다.

 

 "하나, 라온과 엘라임이 떠난 후 프란이 이 곳에 머무른다."

 

 라온은 그 말에 상상하기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실피드가 두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둘, 라온과 엘라임의 여행에 프란을 데려 간다."

 

 "네?"

 

 "뭐?"

 

 너무나도 뜻밖의 제안이 나오자 라온과 케르샤 모두 되물었다.

 실피드는 둘의 반응에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별 수 없잖아? 라온은 어머니와 자신의 보금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케르샤는 프란이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수 있기를 원하는 거잖아. 그렇다면 프란이 라온과 엘라임의 여행에 따라가면 라온이 원한대로 이 집은 다른 이가 쓰지 않게되는 거고 이 곳에 머무는 것보단 여러 곳을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울테니 프란에게도 스스로의 삶을 생각해보는데 좋은 경험이 되겠지. 그러니 이게 가장 최선의 차선책이야."

 

 실피드의 논리정연한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는 라온이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그의 어린애같은 고집이 남은 것이다.

 실피드는 그런 그의 머리에 손을 얹히며 말했다.

 

 "괜찮아,라온. 분명 프란은 너와 어머니의 여행에 도움이 될 거야. 생각해봐. 어머니는 이 세상에 나온지 얼마 안 된 상태고 너도 세상물정을 잘 모르고 있어. 세상엔 밝고 좋은 것들도 많지만 어둡고 무서운 것들도 많아. 운이 나빠 너희를 이용하려는 자들을 만날수도 있어. 하지만 프란은 너희보다 이 세상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지. 그리고 아까 내가 본 프란은 자신이 아끼는 자를 지킬 줄 알고 상황을 빠르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러니 라온 네가 프란에게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준다면 그녀는 분명 너와 어머니의 여행이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거야."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는 실피드의 말에 라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피드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동굴과 탑 안에 갖혀 있었기 때문에 바깥세상에 대해 잘 몰랐고 어머니는 정령이 되면서 인간의 기억을 잃은 듯 자신보다 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니 그런 자신들이 세상을 쉽게 여행하기 위해선 조력자가 있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런 논리정연한 생각보다 라온에겐 마법같은 말이 있었다.

 실피드의 말 중 프란이 어머니의 여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라온은 한순간에 설득당해버렸다.

 

 케르샤는 라온과 엘라임의 여행에 치중된 실피드의 설명이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 실피드가 프란을 파악하고 그녀를 칭찬하는 말을 하자 결국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둘 모두에게 무언의 긍정이 이루어지자 실피드는 엘라임을 쳐다보았다. 엘라임은 그 와중에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골라 어느새 독서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론이 뭐든 상관않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실피디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침대 위였다.

 기절한 프란은 곧 자신의 의지완 전혀 상관없는 결정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과연 어떻게 될까?'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흥미가 동하는 걸 느낀 실피드는 결국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잠든 줄 알았던 알렌이 갑자기 눈을 떠 자신을 죽일 듯 쏘아보았지만 실피드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일어나자 마자 바로 욕을 내뱉는 알렌을 보고도 오히려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그러게 대체 이게 무슨 장난이야?"

 

 알렌은 대답하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을 툭툭 털어 흙먼지를 떼어 냈다.

 분명 방금까지 침대에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처방을 들은 알렌은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한 번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침대에서 빠져나오다 자신의 키보다 몇 배나 큰 실피드를 올려다 보며 짜증을 냈다.

 

 "야, 너 고개 숙여! 네 녀석이 그렇게 내려다 보니 기분 엿같잖아."

 

 인상을 쓰며 자신에게 당당히 요구하는 알렌에게 실피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누가 그런 꼬꼬마 모습이 되래?"

 

 "에이, x"

 

 놀랍게도 앙증맞을정도로 작은 입술에선 귀여운 소녀에게서 나오는 말이라곤 믿기 힘든 험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분명 처음 볼 사이인 두 명이 꽤나 친해보인다는 것이다.

 

 "아르테온이 하는 말은 잘만 쓰네."

 

 아르테온이라는 말을 들은 알렌의 눈에서 불꽃이 틔었다.

 

 "너, 아르테온 부르기만 해봐"

 

 "나도 됐거든요~아르테온이 찾지 못할 장소가 얼마나 드문데 여길 또 알려 주겠어? 난 엘라임에게 미움 받기 싫다고"

 

 알렌은 그의 말에 씩씩거리며 쳐다보았다.

 

 "너,날 속였구나!"

 

 작은 어깨를 화가 나 들썩거리더니 결국엔 못 참고 빽 소리쳤다.

 

 "네 소환자한테 그러기냐?!"

 

 전혀 예상 밖의 내용에 라온이 어머니를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드디어 알렌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엘라임은 마침 그 타이밍에 맞춰 읽고 있던 마지막 장을 끝냈다.

 독서가 끝난 엘라임은 그제야 실피드를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한 번에 꽂히자 실피드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라온과 실피드가 하도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다 보니 어쩌다 그들에게 숨긴 셈이 되어 버렸다. 실피드는 뒤늦게 알렌을 소개하려 했다.

 

 "엘라임. 그리고 알렌. 소개할게, 얜..."

 

 "실피드"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엘라임이 실피드의 말을 가로 막았다.

 

 "으,응?"

 

 "틀렸어."

 

 갑자기 뜬금없이 틀렸다는 말을 하는 엘라임.

 아직 설명도 하기 전인데 뭐가 틀렸다는 걸까?

 실피드는 뭐가 틀렸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케르샤에 대해 말하는 가 보다 생각하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순서가 좀 늦었네. 얘가 나이만 많지 철이 좀 없어서...너도 알고 있지? 레드 드래곤 케르샤."

 

 "뭐라고? 난 저 녀석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 감히 내게 철이 없다는 말을 하다니 저 녀석이야말로 태어난지 얼마 안 돼서 장단도 맞줄 줄도 모르는 꽉 막힌 놈이야!"

 

 자신을 설명하는 실피드의 말에 알렌이 바로 불같이 화를 냈다. 그녀는 바람의 정령왕의 소환자 드래곤 케르샤였다. 그녀가 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왜 스스로 죽어가는 척하고 있었는지 실피드는 케르샤와의 대화로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 전에 라온이 거세게 반발을 했다.

 

 "감히 어머니에게 무슨 말이야!"

 

 "뭐? 저 놈은 또 뭐야. 어머니라니? 설마 엘라임을 말하는거냐?"

 

 "틀렸어."

 

 엘라임이 또다시 중얼거렸다.

 주위에서 화를 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하는 엘라임을 보고 결국 모두가 조용해졌다.

 대체 뭐가 계속 틀렸다는 걸까?

 아무래도 케르샤 이야기가 아니란 걸 눈치 챈 실피드가 머리를 갸웃거리는 사이 케르샤가 알겠다며 손을 탁 쳤다.

 그리곤 자신의 머리 옆에 원을 그려 가며 웃긴 녀석이라며 낄낄거렸다.

 

 "그럼 틀렸고 말고. 감히 인간따위가 드래곤에게 맞설 생각을 하다니. 그래, 저 녀석이 엘라임 소환자지? 인간이라 해서 대체 어떤 놈인가 궁금했는데 정신 나간 녀석이었구나!"

 

 하지만 엘라임은 케르샤가 뭐라고 하든 말든 여전히 실피드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못 알아 들었나? 이 책말이다."

 

 갑자기 책을 가르키는 엘라임의 손을 따라 실피드도 재빨리 책을 쳐다보았다.

 

 "음?"

 

 "네가 추천한 이 책, 내용이 전혀 맞지 않다."

 

 ".................................."

 

 아까부터 계속 틀렸다고 한게 대체 뭔가 했더니 알고 보니 책 얘기였다.

 너무나도 뜬금없는 주제 이동에 실피드는 멍하니 책을 쳐다보다가 다시 엘라임을 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된다는 실피드의 눈길을 받고 엘라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 3장 95쪽에 적혀있는 '인간의 습성'편."

 

 엘라임은 차가운 눈빛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130쪽 12번 째줄에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며 남의 일에 관심이 많고 특히 어린아이와 여성들을 보호하려는 습성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하지만 라온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피드는 케르샤를 소개하려던 순간에도 한 줌의 관심도 없이 꿋꿋이 자신의 책에만 집중한 엘라임에 그만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애초에 엘라임은 케르샤든 알렌이든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니 그에 관한 설명도 필요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책을 보고 든 의문점에 대한 해답뿐.

 

 "아...음...그렇긴 하지?"

 

 실피드는 일단 엘라임의 페이스에 맞춰주기로 했다.

 

 '그래 원래 이런 녀석이었어.'

 

 생뚱맞긴 했지만 엘라임의 성격을 아는 실피드이니만큼 곧 엘라임의 질문을 이해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상처입은 두 여자, 그것도 어린 여자아이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면 조금이라도 도와 주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이 책에서 말하는 인간의 특성이었다. 하지만 인간인 라온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귀찮게 한다고 쫓아내려 했다.

 

 실피드는 책의 챕터와 페이지,그리고 몇번째 줄인지까지 정확히 말하며 자신을 향해 따지는 엘라임을 말을 계속 들었다.

 

 "9장 1021쪽 3번째 줄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한 설명은 라온의 행동은 인간의 범주 안에 속하지 않는 듯하다. 애정관계는 지속되지만 어느 정도 독립을 하고 새로운 상대를 만나 사랑이란 걸 한다고 되어 있는데 라온은 책에 적혀져 있는 대로라면 28페이지에 적혀져 있는 유아기 상태다."

 

 "그...렇지."

 

 "그러니 이 책은 엉터리군. 이런 책을 보라고 하다니."

 

 '아니, 결론은 그 쪽이 아니라 반대라고!'

 

 실피드는 엘라임의 표정을 읽고는 자신을 타박하는 그에게 당장 그 결론을 정정해주고 싶었지만 일단 그 문제는 나중에 따로 단 둘이 해결하기로 했다.

 엘라임은 소란 중에서도 끝까지 집중해서 읽은 오류투성이 책을 책상으로 가볍게 내던졌다.

 

 "그리고 케르샤 라고 했던가. 나의 소환자에게 그런 무례한 말을 하지 마라."

 

 여전히 아까와 같은 무미건조한 말투였지만 그 내용은 실피드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머지 사람, 아니 라온과 드래곤의 눈이 커다래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전혀 신경도 안 쓰던 엘라임이 갑자기 자신을 나무라는 말을 하자 케르샤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실피드를 툭 쳤다.

 

 "야, 쟤가 니가 말했던 그 물의 정령왕 맞냐? 그 쌀쌀맞고 감정도 없는...?"

 

 "...하하...나도 좀 낯서네."

 

 "어머니..."

 

 엘라임의 한 마디에 놀라움과 의심 그리고 감격의 눈동자가 한데 모여있었다.

 

 *

 잠시간의 정적이 가라앉고 케르샤는 가벼운 티타임을 가지자고 제안하며 티테이블과 의자를 만들어냈다.

 라온은 아까 케이샤가 한 말을 마음에 두고 끝까지 그가 만든 의자엔 앉지 않겠다고 우겨 엘라임의 옆바닥에 앉았다.

 모두가 자리를 잡자 실피드는 본격적으로 질문을 시작했다.

 

 "그래서, 네가 왜 이런 모습으로 여기까지 찾아 온거야?"

 

 "별거 아냐. 유희 모르냐?유.희."

 

 "알긴 아는데...너정도면 그런 상처쯤은 간단히 치료하잖아. 아니, 애초에 순간이동한다고 피 토하는 드래곤이 어디 있어?"

 

 차의 향을 음미하며 우아한 자태로 마시던 케이샤는 실피드의 핀잔에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우쒸...역할에 심취하다 보니 그랬다 왜!"

 

 "아~그래서 아까 내가 정화의 기운을 쓸 때 내 기운을 밀어낸 거구나~ 그런 거였구나~"

 

 케이샤가 자신의 기운을 알게 모르게 밀어내는 바람에 자신이 피로해질 정도로 기운을 써야 했던 실피드가 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의 이마에 살짝 돋아있는 힘줄은 일단 덮어두자.

 

 "뭐...그러게 그쯤했으면 대충 알아서 눈치채고 그냥 못 고친다고 끝냈어야지 뭘 그리 끝까지 치유하고 있어?!니가 무슨 치유의 정령왕이냐??에잉 쓸모없다!"

 

 케이샤는 마시던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오히려 자신을 치유해준 것에 적반하장식으로 불평을 해댔다. 실피드는 또다시 옆에 살짝 돋아나는 두번째 힘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엘라임은? 당연히 그러든가 말든가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죽었다하고 이번 유희는 끝내려고 했는데 네 녀석이 망쳐놨잖아!"

 

 "그러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니가 유희를 끝내려는지 아닌지! 그럼 알아서 생각을 전하든가!! 아니, 그것보다 그래, 그럼 대체 왜 여기로 저 여자앨 데려온거야?"

 

 "...그건..."

 

 케르샤가 잠시 우물거리자 실피드는 보기 드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너의 유희의 결과물을 우리에게 떠넘기려는 건 아니겠지?"

 

 누구라도 반할 백만불짜리 미소를 보며 살짝 불안감을 느낀 케르샤가 입을 오물댔다. 그의 이마에 정답이라는 글씨가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케르샤는 곧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얼굴을 바꿔 당당하게 말했다.

 

 "뭐!내가 오면 안 되는 거라도 있냐? 여긴 네 녀석만 쓴다고 했지만 난 너의 계약자고, 거기다! 여기 내 힘도 들어가 있잖아?"

 

 마지막 문장에 강하게 힘을 주는 케르샤의 말에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던 엘라임이 입을 뗐다.

 

 "너의 힘?"

 

 그리고 그 순간 실피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여긴 실피드가 만든 곳 아닌가?"

 

 케르샤는 조용히 듣고 있기만 하던 엘라임이 자신에게 질문을 하자 자신의 편으로 만들 생각에 신이 나 말을 하려 했다.

 

 "여기 만들 때 이 녀석이 데리고 있던 놈때문에 내가 힘을 좀.."

 

 "케르샤."

 

 실피드가 케이샤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아주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마치 공기가 굳어 버린 것처럼.

 라온이 갑자기 변한 공기의 흐름에 재빨리 실피드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동요없이 그저 케이샤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케르샤는 주위의 기운을 느끼곤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공기의 흐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소처럼 되돌아갔지만 케르샤는 그대로 더이상 아무말도 않고 불편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리곤 결국 그 분위기를 참지 못해 토해내듯이 자그마하게 말했다.

 

 "미안."

 

 그의 사과에 실피드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됐어. 어쨌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실피드는 어느새 예의 느긋한 표정으로 케르샤의 계획을 물었다.

 케이샤는 실피드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얼굴을 하자 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자신이 하려던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시 시끄러워진 티타임의 자리에서 엘라임과 라온은 평소엔 볼 수 없었던, 아주 잠시동안 희미하게 굳어있던 실피드의 보랏빛 눈동자를 보곤 그저 아무말 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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