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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정령왕의 소환자
작가 : 천향
작품등록일 : 2022.2.26

정령왕을 소환한 사내

 
기억의 조각 3
작성일 : 22-02-28 23:51     조회 : 187     추천 : 0     분량 : 11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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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은 잠에서 깨자 마자 주위를 황급히 둘러 보았다.

 하지만 곧 자신이 어제의 마지막 기억처럼 어머니에게 안겨 있단 걸 알아채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밤중에 추웠던 모양인지 몸에 살짝 오한이 들자 소년은 어머니가 깨지않도록 조심히 담요를 덮은 다음 어머니를 위한 아침을 준비했다.

 밤 ㅈ우어제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의 보답으로 평소보다 더 신경쓰다보니 시간이 조금 길어졌지만 다행히 어머니는 그 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식사 준비를 마친 소년은 가볍게 방청소를 끝낸 뒤 서둘러 다시 어머니의 곁에 앉았다. 그녀가 깨어나기를 바라는 소년에게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소년의 콧노래가 멈추고 음식이 차갑게 식어가도록 어머니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결국 그는 어머니의 곁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 다음날을 맞이했다.

 

 그 후 소년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방문한 사람을 보았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는 한달에 한 번씩 동굴을 방문하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는데 큰 키에 두건과 마스크로 얼굴을 덮어 눈만 간신히 보이는 남자였다.

 남자의 눈은 얼핏 보기에도 너무나 깊고 차가워 순간 몸이 떨릴 정도로 한기가 들었다.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온 그는 집을 한 번 휙 둘러 보다 여인을 곁에 멍하니 앉아있는 소년을 발견하곤 성큼성큼 다가왔다.

 

 소년은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남자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잠든 듯 눈을 감은 여인을 바보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소년을 곧바로 한 손으로 잡아 올렸는데 그제야 어머니의 손을 놓칠 뻔한 소년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의 손을 놓치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하지만 마를 대로 마른 작은 소년이 건장한 성인인 남자를 당해낼리 없었다.

 

 그는 소년의 손목을 가볍게 한 손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가느다랗고 얇은 손목이 그만 맥없이 부러지고 말았다.

 순간 눈 앞이 번쩍할 정도의 고통이 소년을 관통했지만 소년은 뼈가 부러진 아픔보다 어머니에게서 떨어진다는 사실에 더 겁이나 아픈 줄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하지만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며 반항하던 소년의 힘은 안타깝게도 남자에게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거세게 몸부림치는 소년을 어깨에 들쳐매곤 집을 나갔다.

 

 바로 눈 앞에서 어머니로부터 억지로 떼어지자 남자의 어깨에 들쳐져 매인 소년이 어머니를 부르며 악을 썼다.

 그리고 붙잡은 사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팔을 깨물고 발길질하고 마구 때렸다. 그게 통하지 않으니 사내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욕을 하고 애원을 하다 자지러지듯 울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는 마치 감정이 없는 바위마냥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묵묵히 걸었고 미친듯이 울부짖던 소년은 집이 보이지 않을 즈음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소년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소년의 옆에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표정을 전혀 알수 없이 가려진 얼굴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

 가만히 소년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소년은 눈을 피하고 싶었으나 그의 눈동자에 속박된 듯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겁에 질린 소년이 속으로 어머니를 부르는 순간 남자가 소년에게서 눈을 돌렸다.

 

 숨이 벅차 하악거리는 소년을 두고 그는 아무 말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소년은 어머니를 생각했다.

 3일동안 어머니는 깨어나지 않았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던 어머니가 무서웠지만 그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된 걸까.

 눈을 떴을 때 자신을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사내가 나간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사내대신 새까만 로브를 뒤집어 써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리곤 내보내달라는 소년의 외침을 무시하며 우악스러운 손길로 어디론가 끌고갔다.

 

 로브를 쓴 사람들은 이상한 문양 위로 소년을 데리고 가 그의 몸을 결박했다.

 소년의 몸이 조금도 움직일수 없을만큼 단단히 사슬로 묶이자 그들은 소년을 둥그렇게 둘러쌌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의 웅얼거림이 들렸다.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 다양한 음색을 띄며 변해갔고 그와 함께 아주 조금씩 소년의 몸 밑에 그려진 문양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 나왔다.

 그것은 서서히 문양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어느 순간부터 마치 생명체처럼 소년의 몸을 맴돌았다.

 

 마치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탐색하듯 살갗 위로 기어들어가는 기분나쁜 느낌에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를 부르던 소년의 눈에서 불안과 공포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소년은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소년은 온몸을 뒤덮은 고통에 다시 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손목이 부러졌을 때의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몸 속 전체를 관통한 고통에 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몇 번이고 까무러쳤다.

 하지만 정신을 차릴 때마다 자신을 덮치는 고통은 더욱 깊이를 더해갔고 소년이 고통에 몸부림칠수록 그의 주위를 감싼 검은 연기는 더욱 늘어났다.

 ..................................

 

 마지막 기억 속의 소년은 16살이었다.

 

 검은 재들이 나비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짙은 안개 속.

 소년이 쓰러져 있었다.

 

 소년은 많이 변해있었다.

 얼굴은 아직도 어린 티가 묻어있었지만 키만 큰 소년의 눈동자는 완전히 죽어 있었다.

 흑요석처럼 새까맣던 소년의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해있었다.

 

 무엇보다, 창백하리 만큼 하얗던 소년의 몸엔 이상한 문양들로 가득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소년의 몸 속으로 파고 들은 듯 소년의 창백한 살갗 속 의 검은 문신이 번들거렸다.

 

 소년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폭발한 듯 여기저기 타다남은 연기만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몰골은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 것처럼 얼굴과 옷은 피투성이었다. 그의 하얀 머리칼은 검붉은 피에 젖어 탁한 적빛을 함께 띄고 있었다.

 그의 몸에선 새하얀 연기가 마치 수증기처럼 계속해서 흘러 나왔다.

 

 소년은 자꾸만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손가락을 스스로 부러뜨렸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던 몸이 천천히 고통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조금씩 조금씩 감각을 찾으며 소년은 몸을 움직였다.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몸이라 짐승처럼 기다시피 해 간신히 구덩이를 빠져나오자 검붉은 하늘이 점차 푸른 빛으로 물들며 어두워 지고 있었다.

 

 하늘을 보며 누운 그는 모든 것이 고요해진 순간 속에서 살며시 눈을 감고 자신을 스쳐가는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딛고 있는 대지의 감촉을 느끼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모든 것이 낯설지만 소년이 그토록 다시 느끼고 싶어 했던 것들이었다. 자신의 곁에 있는 그 모든 자연은 굉장히 낯설면서도 옛기억을 되살리게 했다.

 

 그렇게 가만히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모든 자연의 기운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던 소년이 문득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머니..."

 

 까슬하게 나오는 목소리와 함께 메마른 눈 안으로 피가 스며들었다. 소년은 힘겹게 손을 들어 눈을 슥 비볐다. 그리곤 멍하니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피가 섞인 붉은 빛의 액체가 그의 손에 묻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미끈거리는 액체를 조심스레 만졌다. 그렇게 한참동안 멈춰 있던 소년은 이젠 완전히 말라버린 손을 조심스레 꼬옥 쥐었다.

 

 "...................어머니............"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 그 이름.

 다시 살아서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그 이름.

 꿈에서마저 부르고 싶었던 그 이름.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가 그의 볼을 가로질러 또르륵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소년의 기적이었다. 언제나.

 

 너무나 많이 흘려버려 이제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이 붉은 빛을 띈 채 차올랐다.

 눈물로 범벅이 된 손을 쳐다보던 소년은 울다 웃다가를 반복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황폐한 대지. 그 위에서 울려퍼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푸른 하늘은 평온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후우..."

 

 아르테온이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의 마법이 흐려지면서 노이즈가 심하게 생기기 시작하더니 라온의 기억영상이 점차 끊기다 결국은 멈춰 버리고 만 것이다.

 바로 그 다음 기억이 흘러나오긴 했지만 아르테온은 자신의 마법이 중간에 방해받았단 것이 매우 못마땅했다.

 

 실피드는 라온의 기억이 끝나자 눈을 떠 아르테온에게 물었다.

 

 "왜 중간에 끊긴 거야?"

 

 아르테온은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이 보이길 거부했어."

 

 "거부?...그게 가능해? 그럼 이 아이가 너보다 정신력이 강하단 말야?"

 

 "실피드! 얜 인간이고, 난 드래곤이야! 그럴리가 있겠어?...일단 내 마법이 완벽하지 않아서 그런 걸수도 있어."

 

 실피드의 말에 아르테온이 흥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지만 그 역시 찜찜한 표정을 지우진 못 했다.

 실피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아이의 이름이 라온이구나."

 

 "흥. 건방진 녀석이 이름도 기분나쁘네."

 

 "왜? 좋지 않아?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많이 사랑한 듯해."

 

 "사~랑? 형 혹시 방금까지 졸았어? 얘 엄마가 애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못 본거야? 인간세상에선 그런걸 사랑이라고 하나? 내가 아는 사랑과 그나마 비슷해 보이던 모습은 딱 하루였는데 말야. 아님 설마 졸다가 그 하루의 기억만 본거야??"

 

 아르테온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피드의 말에 반박했다.

 

 "하하, 그건 아니야. 그냥...빛이란 말이 너무 예쁘지 않아?"

 

 "흥 예쁘긴...이름하곤 성격이나 외모가 완전 딴판인데 뭘."

 

 "아무튼 이 아이가 왜 그렇게 엘라임을 보고 이상한 행동을 한건지 알겠네."

 

 "내 말이...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설마 정령왕에게 자신의 어머니 모습을 투영시키다니. 음흉한 녀석이네 이거."

 

 아르테온의 퉁명스러운 말을 들은 엘라임이 아르테온을 쳐다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자신을 쳐다보는 엘라임의 시선에 순간 당황한 아르테온은 멋쩍음을 감추기 위해 머리를 벅벅 긇었다.

 

 "아니, 브라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니 엄청 아름다운데 그걸 굳이 모습을 바꿔가며 자신의 어머니로 만든..."

 

 그의 말을 다시 엘라임이 자르며 되물었다.

 

 "어머니라니?"

 

 "...엘라임, 너 몰랐어?"

 

 아르테온 대신 실피드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실피드의 반응을 본 엘라임은 그제사 뭔가를 알게된 듯 표정이 잠시 일그러러졌다. 그리고 그 즉시 자신의 앞에 커다란 물의 거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곤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하고 말았다.

 

 "이건..."

 

 찰랑거리며 투명한 표면이 엘라임의 모습을 비춘 순간 차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평소의 자신이 아닌 엘라임에게 아주 낯선, 하지만 낯익은 모습이었다.

 

 "아까 본 여자."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에 온화한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여인.

 이 모습은 분명 자신이 방금 라온의 기억 속에서 본 여인이었다.

 

 "몰랐단 말야? 나 아까 보자마자 되게 깜놀했는데도 내색 안 하려고 완전 노력했는데!"

 

 "..."

 

 "원래 모습도 되게 좋은데 왜 갑자기 모습을 바꿨나 해서 혼자 엄청 궁금했다고!"

 

 아르테온의 투정을 흘려들은 채 엘라임의 자신의 모습을 그저 말없이 쳐다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충격받았네...'

 

 실피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엘라임의 표정이 재밌긴 하지만 너무 충격 받은 듯한 모습을 보니 조금 안쓰럽기도 해서 그는 엘라임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건냈다.

 

 "내가 보니 넌 이미 이 아이와 계약을 한 상태야. 너와 이 아이는 지금 연결되어 있어서 너도 그 영향을..."

 

 "난 계약한 적 없다!"

 

 갑작스레 외치는 엘라임에 실피드는 깜짝 놀라 한걸음 물러났다. 화가 난듯 보이는 엘라임을 보고 난처해졌지만 그래도 결국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인걸. 조금만 정신을 집중해도 느껴질텐데."

 

 그 말에 엘라임은 그제사 자신의 기운이 라온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모르고 있었던 거야?"

 

 실피드의 물음에도 엘라임은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지금의 상태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아닌 엘라임이었으니까.

 결국 실피드는 답을 찾지 못한 엘라임을 대신해 고민을 하곤 조심스레 추측을 꺼냈다.

 

 "...처음 계약을 한 데다가 물의 공간에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나 보구나. 아무래도 직접 겪는 것과 그냥 알고 있는 것은 다르니까."

 

 "그럼 이 녀석이랑 연결 되어 있어서 아까 엘라임이 그랬던거야?"

 

 아르테온은 실피드의 설명에 생각이 난듯 잽싸게 아까 자신에게 보여준 충격적인 엘라임의 행동에 대해 물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엘라임의 행동이 여간 충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열성적인 질문에 실피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엘라임을 살폈다. 그리곤 라온을 쳐다보았다.

 

 실피드에겐 지금 신경쓰이는 것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저런 어린 인간이 정령왕을 소환해낼수 있었는지, 소년의 정신력이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엘라임도 알지 못하는 사이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으로 바꾸었는지, 그리고... 아까 소년의 기억에서 본 문양.

 그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일단 그 사실은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오늘 처음 느껴볼 감정에 여러번 빠져있는 엘라임을 위로해 주었다.

 

 "엘라임, 너무 충격받지 마. 모를 수도 있지. 이건 정말 드문 일이야. 소환자가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 있을 때 정령이 그 모습을 투영해 나타난다는 건"

 

 "...난 계약한 적 없다."

 

 엘라임은 다시 한 번 어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은 채 느릿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그 말은 이제 아까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실피드는 엘라임의 부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이 그를 더 큰 충격에 빠뜨릴 것같아 걱정이 되었다.

 

 "음......아무래도말야..."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곤 결국 소근대듯 말했다.

 

 "강제 계약된 것 같아."

 

 "강제 계약...?"

 

 '아아, 이것봐. 엘라임, 너를 소환한 자는 내가 아냐. 그러니 그렇게 나를 얼려버릴듯 쳐다보지 말라고.'

 

 옆에서 엘라임의 눈에서 광선이 나올것 같다는 아르테온의 알수없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며 실피드는 엘라임의 눈을 피했다.

 

 "나도 직접 본적은 없는데, 소환자의 부름이 정령의 의지를 넘어설 때 정령의 의지완 상관없이 소환자와 연결이 된대. 내가 이 말을 들었던 것도 아주 특이한 경우였어. 이미 계약이 된 상급정령이 계약자가 마음에 안 들어 소환을 거부하는 것을 계약자가 목숨을 걸어 억지로 중간계에 소환시킨 거였거든. 근데 그것도 이미 계약이 된 상태였으니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계약 자체에서도 그게 가능한 건지는 오늘 처음 알았어. 사실 우리도 계약을 해본적은 몇 번 없으니까 알 수 없는 것들이..."

 

 실피드는 몸이 따가워지는 것을 느끼곤 말을 멈췄다.

 

 엘라임은 지금 그야말로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있었다.

 그의 눈빛에 서려있던 냉기는 어느새 몸 전체에 흐르고 있었는데 실제로 엘라임의 주위론 하얀 빛들이 반짝였다.

 그것은 얼음조각들이었다.

 

 물의 공간도 엘라임의 감정에 감응해 급속도로 얼어붙어 갔다. 아르테온과 실피드의 숨에 하얀 수증기가 서릴 정도로.

 물론 그 기운에 타격을 받을 만한 이들은 아니었지만 점차 공간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기세로 조여들자 둘은 어서 엘라임이 제정신을 차리기만을 기다렸다.

 

 갑자기 들어선 새로운 사실로 복잡한 머리완 달리 엘라임의 기분은 지금 완전히 다운. 저기압상태였다.

 

 설마 오늘 같은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 줄은 몰랐다.

 항상 모든 것에서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볼 뿐 관여하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망설임없이 내치고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계약자라니.

 

 그 존재 자체도 잊고 살았던, 자신을 태어나게 한 주신을 처음으로 찾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럼 이 계약자가 다치면 브라더도 다치는 거야?"

 

 "자신의 실체화에 계약자의 힘이 필요한 정령이라면 그렇지만 엘라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실체화 할 수 있으니까 그건 아냐. 어차피 라온은 중간계에 속한 자고 엘라임은 정령계에 속한 채 연결되어있는 것뿐이거든. 하지만 만약 계약자의 목숨이 달릴 정도로 위험하다면 그건 또 얘기가 달라지겠지."

 

 엘라임은 한 귀로 실피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 냉정을 조금씩 되찾았다. 원래 그는 화가 날 수록 더욱 냉정해지는 성격이었다.

 방금의 경우는 그가 스스로 제어하기 힘들정도로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표출된 것일뿐, 정신이 든 그는 곧 본래의 침착함을 되찾았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니 라온이 자신을 보자마자 계속 어머니라 부른게 이해가 되었고 어째서 자신이 그것을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이해할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소환자는 분명 자신을 어머니 대신, 아니 어머니 그 자체로 스환했고 또 그렇게 여겼다.

 

 엘라임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회상에서 본 여자의 그 한 마디때문에 물의 정령을 자신의 어머니로 믿다니. 그리고 그 믿음에 한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다니.

 자신으로선 이해할수도, 이해하기도 싫은 사고방식이었다.

 

 엘라임이 고민하는 그 와중에 아르테온은 자신의 사자갈기같은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으며 고뇌하는 포즈를 지으며 울분을 내뱉고 있었다.

 

 "브라더를 강제소환해내다니...그런 방법이...나도 그럴걸..."

 

 순간 아르테온의 머리로 날카로운 얼음창이 날라갔다.

 엄청난 기세로 날아가던 창은 아르테온이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자 목표물을 잃고는 공중에서 사라졌지만 곧 그의 주위로 새로운 얼음창이 꽂혔다.

 아르테온은 엘라임을 향해 재빨리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아니라고 세차게 소리쳤다.

 

 

 "그냥, 속상해서 그랬어! 진심은 아냐! 이 정신나간 녀석이 브라더를 자신의 어머니로 소환한거라니! 자신의 어머니가 물의 정령이 되겠다고 해서 정말 물의 정령을 소환해내서...!"

 

 말을 하던 아르테온은 또다시 속에 천불이 나는지 크윽하며 신음을 흘렸다.

 

 "근데 왜 하필 그걸 정령왕으로 소환해내냐고!!!"

 

 아르테온이 그렇게 홀로 괴로워하는 사이 실피드는 그들이 지켜보다가 엘라임에게 다가섰다.

 어느 정도 인정할 건 인정하고 상황을 냉정하게 볼 정도로 안정을 되찾은 지금이 그는 이 말을 할 가장 적기였다.

 

 "내가 알기론 인간들은 보통 정령을 소환할 때 그 모습은 신경쓰지 않아. 정령의 모습보단 정령을 어떻게 다룰지에만 신경을 쓰거든. 그리고 상급정령을 부를수록 자신의 야망을 위해 그 힘을 이용하는 데 그 소환의 목적이 있고. 대부분이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한 도구로써 정령을 이용하지."

 

 아무말없이 실피드의 말을 듣고 있는 엘라임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도구라는 말이 정령에게 붙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실피드는 그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어질 말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엘라임을 위해서도. 라온을 위해서도.

 

 "하지만 라온은 정령을 존재 그 자체를 위해 불러냈어. 네가 정령왕이든 아니든 저 애에겐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오직 너야. 정령왕의 힘을 가진 엘라임도 아니고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엘라임도 아닌 오직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너 자체."

 

 어머니로의 존재.

 

 엘라임은 그 말이 굉장히 멀게 느껴졌지만 실피드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될거 같았다.

 

 "라온은 네가 그 모습만을 유지한다면 니가 어떤 태도를 취하듯 받아들일거야. 그러니 정령왕으로서의 너가 아닌 스스로를 위해 이 계약은 너에게 아마 많은 것을 가르쳐 줄거라 생각해."

 

 정령왕으로서의 내가 아닌 나의 존재라니.

 엘라임은 그 말에 심한 모순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대꾸한 것은 아르테온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정령왕의 모습을 자신의 의지대로 변화시키기가 얼마나 힘든데! 아니, 보통은 변화시키지도 않지. 인간들에게 정령왕의 모습은 자신들의 미의 기준에서 꿈도 꾸지 못할 것인걸! 그 중에서 특히 아름다운 브라더가 저 계약자떄문에 계속 그 모습을 해야 한다는거야? 브라더는 어떤 모습이든 브라더니까 좋은 거지만...으으 생각할 수록 열받네!!"

 

 아르테온의 호들갑을 간단히 무시하고 엘라임이 실피드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 이젠 저 녀석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꼭 깨어나야만 하는 거야? 이대로...아니아냐!"

 

 대답 외엔 좀 닥치라는 엘라임의 눈빛을 받아 기세가 확연히 죽어 우울해 하던 아르테온이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또다시 소리쳤다.

 

 "아! 그런데 저 녀석 꽤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데 그 몸의 문신은 뭐였지? 기억을 읽을 뿐이었는데도 되게 기분나빴어 .어쩌면 그거때문에 내 마법이 흔들린 걸지도 몰라! 아 그런 거야 그런거였어!!"

 

 대화의 내용이 순식간에 이리갔다가 저리갔다가 정신이 없었다.

 

 아르테온의 성격은 정말이지 외모와는 전혀 딴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운 얼굴선과 연약해보이는 모습이 여성으로 착각할만큼 아름답지만 성격은 그런 여성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남성임을 온 몸으로 과시하듯 다혈질에다 변덕쟁이인 아르테온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면 거기에 혼자 들떠 열을 내는데 그 모습이 마치 다중인격을 떠올리게 했다.

 

 열심히 혼자 떠드는 아르테온을 내버려 둔 채 엘라임은 라온을 살펴 보는 실피드에게 다가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라온을 보는 실피드의 평소엔 보기드문 진지한 표정에 엘라임이 묻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한없이 가라앉아 있던 신비한 보랏빛 눈동자가 엘라임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자 순간 느슨해졌다.

 왠지 그런 변화가 맘에 걸렸지만 그 순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엘라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그냥. 물의 정령을 자신의 어머니로 소환해내다니. 아르테온 말처럼 되게 특이한 인간인거 같아. 그렇지?"

 

 아까 자신에게 조언을 할 때의 진지한 모습 대신 장난기 서린 말투로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편안한 웃음을 띈 채 자신을 바라보는 실피드를 엘라임은 잠시동안 바라보다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한 인간.

 

 자신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계약이라 크게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나 그 계약을 건 이 자가 특이하단 건 아무런 반박없이 동의한다.

 소환 자체는 생각하기 싫지만...

 기분나쁜 기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령을 소환해내고 물의 정령을 자신의 어머니로 인식하는 인간.

 자신의 순수한 의지만으로 물의 정령왕인 자신에게 목소리를 닿게 한 인간. 그는 자신의 이해범주에 도저히 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뿐일 뿐이었다.

 

 엘라임에게 라온은 자신을 소환해낸 소환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실피드의 말대로 이 자는 자신의 능력을 원한게 아니었고 단지 어머니의 모습을 그토록 보고 싶어 어머니를 불렀다면 이제 이 소환자에 대해선 신경쓸 것이 없을 것이라고 엘라임은 생각했다. 소환자가 깨어나면 다시 중간계로 되돌려 주고 자신은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되돌아가면 된다. 이따금 어머니로서의 얼굴이나 비춰 주면 되겠지. 아니면...

 

 문득 엘라임의 머릿 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엘라임은 흘깃 라온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라온의 과거는 엘라임에게 그다지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조금 이상한 일에 말려 들긴 했으나 결국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것이 엘라임 고유의 사고방식이었고 지극히 엘라임다운 생각이었다.

 

 엘라임은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말없이 자신의 상아빛의자에 앉는 엘라임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조금 궁금해졌지만 실피드는 엘라임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향했던 라온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는 라온. 실피드는 그를 향해 조용히 물어보았다.

 

 '과연 너는 엘라임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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