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엎친 데 덮친다고.
박 부장과 김 부장의 환장 협업도 모자랐는지, 다음날 우리 부서에 태풍이 몰아쳤다.
갑작스레 등장한 윤 비서를 보고 기겁한 박 부장이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자… 자네가 왜 왔어? 또 본부장이 날 찾아?”
윤 비서는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을 전했다.
“식품 개발팀, 전원 본부장실로 오시라고 합니다.”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박 부장은 재차 확인했다.
“윤… 윤 비서, 정말 우리 부서야? 다른 부서잖아. 우리 부서에 잘못 온 것 같은데. 확인해 봐. 마케팅 부서가 문제지, 왜 우리가 책임지냐고!”
윤 비서는 횡설수설하는 박 부장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히 전달했다.
“일개 비서인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는 단지, 본부장님의 지시 사항만 전해드렸습니다. 박 부장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포승줄에 묶여 저승길로 끌려가듯, 박 부장의 필두로 우리 부서 직원들이 본부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윤 비서와 눈인사를 주고받던 내 머릿속에는 정리해고가 떠다녔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근데. 뭘 또, 그렇게 섭섭해하냐. 홍 임수. 이만하면, 잘 버틴 거지. 괜찮아… 괜찮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본부장실에 들어갔다.
***
재현 본부장은 긴 테이블 중앙에 앉아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앉으세요.”
염라대왕 앞에서 업보를 평가받듯 숨죽인 우리 부서 직원들은 뭉그적거리며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박 부장도 긴장했는지 몇 가닥도 남지 않는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매만지며 말문을 열었다.
“다, 왔습니다. 본부장님. 하실 말씀 하시면 됩니다.”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재현 본부장의 입가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회사의 재무가 상태가 어떤지, 여러분들도 다 아신다고 봅니다. 부득이하게, 정리해고가 시행될 겁니다.”
섣불리 입을 뗄 수 없는 우리 부서 사람들은 멍하니 재현 본부장만 바라봤다.
새하얗게 질린 박 부장은 떨리는 입술로 따져 물었다.
“정리해고, 좋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만요? 본부장님요!”
정리해고 대상이 아닐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대들지도 못한 직원들은 재현 본부장의 입만 응시했다.
재현 본부장은 여유로운 미소로 투정 부리는 어린애를 달래듯 조곤조곤 대답했다.
“우선 요번에 출시한 밀크트가 결정적인 것 같습니다.”
박 부장은 억울한 표정으로 울먹이며 따졌다.
“아니~그건! 위쪽에서 내려왔습니다. 저희랑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위에서 던져준 제품을 가공한 죄밖에 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그건 이사 쪽에서!”
미간을 구긴 재현 본부장이 냉담하게 지적했다.
“식품 개발팀이니까! 유감스럽지만,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건 이사님과 회장님 아니…아무튼 위쪽에서”
“그러니까요. 아무리 위에서 찍어도, 식품 개발팀이면! 거부하셨어야죠.”
씨알도 안 먹히는 재현 본부장의 냉정한 말투에 박 부장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렇게 따지면, 본부장님요?”
재현 본부장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어떻게든, 이 회사를 살리고 싶어 하시는 회장님의 뜻에 따라. 투자금을 끌어오는 조건으로 본부장이 된 겁니다.”
여기서 더 따져 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기에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본부장님.”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우리 부서 사람들과 달리 재현 본부장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잠깐~홍 대리님, 새로 들어올 인턴사원 교육 담당입니다. 이만 나가보세요. 이분들은 더 하실 말씀이 많으신가 봅니다.”
***
사무실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둔 내 사표를 꺼내 봤다.
“어차피, 정리해고로 나갈 거. 내 손으로 사표 내고 나갈까. 강제로 쫓겨날 판에, 아주 깽판 치고 나갈까.”
만지작거리는 내 사표를 가로채 간 똥파리 김 과장이 비아냥거렸다.
“벌써, 이직 준비하나 보네. 능력 좋으신 홍 대리! 설마 스카우트 제의라도 들어왔나 보지.”
내 사표를 들고 억지를 부리는 김 과장이 딱한 마음에 선의를 베풀었다.
“이제야, 저의 능력을 인정해주시네요.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이름 칸 비워둔, 그 사표 드릴게요. 작으나마, 사표 쓰실 김 과장님의 번거로움을 덜어 줄 겁니다.”
“야! 말이면 다 줄 알아! 네가 그러니까, 정리해고 1순위지. 어디서 감히 대리가 과장한테, 대들어! 징계감이라고. 시말서 가져와.”
격분한 김 과장이 갖고 있던 사표를 꾸겨 내 얼굴로 던졌다.
분풀이로 던져진 사표를 서류철로 홈런을 날리듯, 되받아 쳐준 나는 아니꼽게 응수했다.
“어차피, 정리해고 1순위인데. 뭔들 무섭겠어. 김 과장, 님. 나가는 마당에 시말서? 말이야 막걸리야!”
약 올라 울부짖는 똥파리 김 과장을 놔두고, 온전한 나의 휴식처 화장실로 갔다.
“H 그룹의 홍 회장님 뜻대로 되겠네. 빌어먹을!”
***
고백받은 누나의 뒷걸음질에 마음 한구석이 무너졌다.
어느 정도는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누나에게 매몰차게 거부당한 통증은 쾌 쓰라렸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을 가슴에 품고, 출장을 가장한 가출을 강행했다.
불행히도 내 크나큰 착각이었나 보다.
내가 끓여준 미역국을 태연하게 먹는 누나를 멀리서 지켜보며 안도감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날 찾지 않은 누나가 야속했다.
“언제쯤, 날 남자로 봐줄 거야. 누나, 나 좀 아프다.”
***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고 하더니. 지금, 내 꼴이 그 짝이다.
누나가 기다리는 포근한 내 집을 놔두고, 잔소리 대마왕 정우 옥탑방에 기거한 꼴이 한심스러웠다.
돌직구 고백 한 번에 멀어진 거리만큼.
일에 열중하는 남자가 멋있다는 지식인 대답처럼, 누나의 일터에서 맴돌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다.
동생이 아닌 남자로.
비장한 표정으로 누나가 사준 정장을 입고 면접 준비를 서두리는데.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정우가 오이를 씹어 삼키며 뭐하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나가야? 꼭두새벽부터 안 입던 양복과 시계까지 차시고. 어딜 가? 혹시 누나한테 빌러 가야?”
“잠이 주무셔. 네가 내 마누라냐. 뭘 궁금해.”
방바닥에 드러누운 정우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발길질을 해댔다.
“야~재워주고, 먹여줬는데. 은혜도 모르는 버터 새끼! 꺼져. 그렇게 나오신다면, 소개팅? 누나~지국장이 소개팅 나가요~.”
생활비 안 내놓는다고 생떼 쓰듯 헛소리해대는 정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먹깨비! 누나한테 이상한 소리만 해봐! 그때, 나 살고. 너 죽어. 이~씨. 나 취직했다고 누나한테 말했지.”
“뭐 하는 회사길래 너 같은 놈을 뽑냐? 이름이나 알자.”
“누나가 다니는 H푸드에 출근하는 걸로 됐어.”
정우가 불쌍한 놈을 동정한 듯 혀를 찼다.
“어쩌다가. 버터 새끼가…이제 스토커까지 됐냐? 집착 쩔어. 불쌍한 놈. 사랑이 죄다. 죄야. 쯧쯧쯧.”
“저걸 죽일 수 없고. 아무튼 누나한테 비밀이야. 그리고 내 사랑은 내가 알아서, 쟁취할 테니까. 신경, 끄셔.”
“하!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두 가지나 하셨는데, 꿈도 야무지다.”
으쓱대는 정우가 얄밉지만, 내심 궁금한 내가 물어봤다.
“뭐? 뭐 했는데. 내가.”
“성추행과 스토커. 이 버터 새끼야!”
피로에 지친 정우를 위해 아침 밥상으로 박력 넘치게 인디언 밥으로 응징하고 나왔다.
재현 본부장을 방패 삼아 에치 푸드 회사를 삼킬 생각이었다.
그래서 굳이 호랑이 굴에 의탁한 여우 재현 본부장을 선택했는데.
괘씸하게도! 재현 본부장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누나에게 눈길을 거두지 못하니 나설 수밖에 없었다.
“H 푸드 인수 안 하면, 안 했지. 음흉한 여우, 재현 본부장에게 우리 누나를 빼길수 없지. 누나는 내가 사는 이유라고! 감히, 내 누나를… 어림도 없다.”
***
H 푸드 회사 근처 커피숍으로 면접을 가장한 선전포고 하러 들어갔다.
약속 시각 전에 미리 도착한 재현 본부장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침부터 광고 찍나? 반사판도 없는데, 얼굴은 나보다 더 하얗고. 하라는 일은 안 하고, 회사원이 패션모델처럼 입고 다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마음에 안 들어. 저 인간.’
회사 초년생처럼 재현 본부장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재현 본부장님, 인턴 지국장입니다.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본부장의 미소로 내게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지국장 인턴사원. 앉으세요. 일단 주문부터 하시죠. 이걸로 계산하세요.”
재현 본부장이 건네 카드로 계산하고, 캐러멜 마키아토를 홀짝거리며, 제자리에 앉았다.
캐러멜 마키아토를 마시는 내 앞에서, 이력서를 훑어보던 재현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부도나도! 이상할 것 하나도 없는 회사에. 굳이 인턴으로 오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기선 제압하듯 질문하는 재현 본부장의 차가운 눈빛에 철없는 애처럼,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음~할아버지가 가라고 해서요.”
미심쩍은 눈초리로 재현 본부장은 압박 면접을 진행했다.
“그래요. 할아버지께서는 장 씨인데, 인턴사원은 지 씨네요.”
“그게, 중요합니까? 아직도, 호구조사도 하나?”
“등본상으로는 부모님은 다 돌아가신 거로, 나오고. 장 지자, 욱자이신 어르신이 호적상 외할아버지도 아니신 거 같고. 궁금하네요.”
귀찮은 표정으로 내가 오히려 반문했다.
“글쎄요? 내가 할아버지도, 아니고. 딱히 손해 보지도 않는데. 굳이 할아버지한테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요? 돈 많은 할아버지면, 만사 오케 아닌가?”
“그래요? 그래도 나라면 궁금할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제가 단순해서요. 재현 본부장님이 보시기엔, 우리 할아버지가 왜 그럴까요?”
어이없는 내 대답에 한숨을 쉴 법한데, 재현 본부장은 여유롭게 되받아쳤다.
“후계자 수업하시나 보죠. 지국장의 할아버님에 큰 그림은 M&A이라는 거죠. 그럼, 지국장 인턴사원의 개인적 목적은 뭔가요?”
“꼭 그렇게 거창하게 있어야 하나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추궁하듯 내 입만 바라보는 재현 본부장을 약 올리듯 커피만 마셨다.
‘판을 읽을 줄 아는 재현 본부장님이라는 건 이미 알아봤지만. 이젠 내 판까지 흔들어 보시겠다. 그렇다고, 흔들어질까요. 내가?’
‘아무것도 몰라요.’ 표정을 집어치우라는 듯, 재현 본부장은 나에게 점잖게 경고했다.
“이력서에 화려하게 수놓은 스펙을 보니, 업무능력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우리 할아버지한테조차 말하지 않은 다만, 다음에 나올 조건이라도 있습니까? 재현 본부장님.”
떠보는 내 질문에 재현 본부장은 하룻강아지 보듯 피식 웃으며 경고장을 날렸다.
“직원들 흔들지 마세요. 아직 까지는 H 푸드의 본부장으로 말하는 겁니다. 이건 사원증입니다. 그럼, 이만 일어나죠.”
일어난 재현 본부장을 올려다보며 도발했다.
“별생각 없이 입사했지만, 재현 본부장님 때문에 목적이 생겼네요.”
“생각은 없지만 하고 싶은 말은 많네요. 인턴.”
“만약, 아~주 만약에. 흔들 생각으로 H 푸드에 입사했다면요? 본부장님.”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보던 재현 본부장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망하기 직전이라도, 인턴이 흔든다고, 흔들린 회사가 아닙니다. 사내 정치라도 할 생각인 모양인데. 인턴 주제에, 그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지국장 인턴!”
“입은 삐뚤어져서도, 말은 정확히 하셔야죠. 인턴 나부랭이가 아니라. H 푸드에 투자한 낙. 화. 산! 주제라서. 가능하죠.”
입을 꽉 다물고 화를 삭이는 재현 본부장은 놔두고 카페에서 먼저 나왔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들어. 천지 분간도 못 하고, 덤빌 줄 알았는데. 너무 평온하잖아. 약 오르게. 생각보다 만만치 않겠어. 하긴 그런 놈이니까, 우리 누나를 좋아하지. 눈만 높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