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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붉은실의 끝맺음
작가 : allzero
작품등록일 : 2022.2.23

1930년, 경성. 나라도 마음도 자유롭지 못하던 그 날의 어디선가 만나 아무도 모르게 붉은 실로 얽힌 이들의 이야기.

 
#23. 심리전
작성일 : 22-02-28 22:55     조회 : 185     추천 : 0     분량 : 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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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늦은 밤, 비가 그친 숲 안에서는 기분 좋은 흙냄새가 났고 초록이 무성한 잎사귀에서는 빗물들이 한 방울, 두 방울 맺혀있다, 이내 소리를 내며 차례대로 떨어졌다. 호숫가에 비친 달빛은 영의 마음을 위로하듯 잔잔하게 반짝거렸다. 자신들의 일에 괜히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 까지 상처를 받게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던 영은 무작정 해월관을 뛰쳐나와 습관처럼 이 호숫가에 발을 들였다. 숲에서도 길을 타지 않고 갓길에 들어가야 찾을 수 있는 이 호숫가는 어릴 적 승준과 연진과 자주 오던 곳이였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스며 들여갔던 버릇이 아직도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었다. 영은 병에 담겨있는 술을 마시며 호숫가에 비친 달빛을 보고 있었다. 빗속에서 소리 내 울던 신아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처음 승준의 죽음에 대해서 얘기해 줬을 때도 울지 않았던 아이인데......이제 와서 그렇게 서럽게 운건 역시.....하람 때문이 였을까. 너무 많은 생각들 때문에 술을 마시는 족족 소화가 안되는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영의 뒤에서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리가 났다. 적막하던 곳에서 순간 들리는 인기척에 영이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본 그곳에는 연진이 서있었다. 연진도 호숫가 에서 영을 만날 거라 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뜻밖의 만남에 뻘쭘해 하던 연진이 조심스럽게 영 에게 물었다.

 고연진: 옆에...앉아도 돼...?

 연진의 물음에 영은 어색한 듯 눈치를 한 번 슥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려서 부터 부끄럽거나 뻘쭘한 상황에서는 대답을 피하는 영의 습관을 잘 알고 있었던 연진이였기에 앉아도 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영의 작은 행동 만으로도 영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연진은 터벅터벅 걸어가 영의 옆자리에 풀 썩 앉았다. 앉아서도 아무 말도 안 하는 연진을 보며 영이 자기가 들고 있던 술병을 연진 에게 건넸다.

 허 영: 마실래...?

 연진은 영이 건넨 술을 아무 말없이 받아 들었다.

 고연진: 여기....아직 기억하고 있었네.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술병을 내려놓고 호숫가를 바라보며 연진이 말했다.

 허 영: 당연하지. 여기만큼.... 행복했던 기억이 가득한 곳은 없거든. 너도....그래서 기억하고 있는 거 아니야.....?

 연진은 자신이 계속 이곳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이끌리듯 습관처럼 찾아오는 곳이였는데.....영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이곳에서 보냈던 친구들과의 추억을 어렴풋이 라도 쭉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잊고 싶지 않아서......계속 기억하고 싶어서.

 고연진: 그런 가봐....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때의 내가........너무 쓸데없이 많이 행복했다.

 차라리 그때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리워할 필요도 죄책감에 매일매일을 후회 속에 살 일도 없었을 텐데......연진은 마냥 모든 순간을 행복하게 보내기만 했던 그때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영은 그런 연진을 보며 무겁게 입을 뗐다.

 허 영: 신아가 다 알아버렸어..........승준이 죽음, 우리 일, 하람이가...누구 자식인지.

 영의 말에 연진이 놀란 듯 빠르게 고개를 돌려 연진을 쳐다 봤다.

 허 영: 너도 같은 이유 때문에 여기 온 거지.....? 하람이도 알게 된 거야....?

 떨어져 있는 동안 연진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어젯밤 해월관 에서 연진이 자신한테 거짓말을 하는 걸 보고 영은 바로 눈치챘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 때로는 숨기고 싶은 비밀도 서로에게 제일 먼저 들키곤 했다. 지금처럼.

 고연진: 핳...허 영 눈치 빠른 건 여전하네..........

 어렸을 때도 이런 일이 이따금 있었다. 연진은 표정을 못 숨기고 단순했고 영은 눈치가 빨랐다. 장난을 치던 거짓말을 하던 영 에게는 단번에 걸리고 들켰었는데....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어릴 적 그대로 인 자신들을 보며 연진은 순간적으로 피 식 웃음을 보였다.

 허 영: 많이 울더라....원래 잘 안 우는 애인데...

 고연진: 하람이도....많이 울더라......내 앞에서 한 번도 운적 없는 애였는데......

 허 영: 좋은 아버지인 거 맞아?

 웃음이 많은 만큼 눈물도 많을 것 같은 하람이 연진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다는 말에 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조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고연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잘 모르겠어....이제는.

 하람 때문에 마음 고생을 꽤나 하고 있는 것 같은 연진을 보며 영이 말을 돌렸다.

 허 영: 하람이......꼭 옛날에 너 보는 것 같더라. 잘 웃고, 쉽게 뜨거워지고, 거짓말도 못하고.

 고연진: 당연하지.... 내 아들인데. 걔 잘생긴 것도 나 닮은 거야.

 허 영: 그건 하연이 닮은 거고.

 하람이 자신을 닮았다는 말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 장난을 치는 연진 에게 영이 단호하게 딱 잘라 반박했다.

 고연진: 눈은.........나 닮았어.

 단호한 영의 태도에 쭈글이처럼 쭈볏쭈볏 말하는 연진이 제법 귀여웠는지 영이 웃음을 보였다.

 허 영: 연진아

 영의 진지한 부름에 연진이 고개를 돌려 영 에게 시선을 맞췄다.

 허 영: 처음에는 널 원망했어.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우릴 버린 네가 미웠고 그 선택을 이해하고 싶지가 않았어. 근데 어느 날 신아가 그러더라. 승준이가.....우리가 못 만들었던 조국을 자기 손으로 만들겠대.

 자신에게 그 얘기를 해주던 어린 신아를 떠올리는 영의 눈빛이 잠시 나마 반짝거리다 촉촉해졌다.

 허 영: 근데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우습게도 네가 제일 먼저 생각나더라.

 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연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허 영: 우리한테 조직을 만들자고 했던 것도 조국을 위해 살자고 했던 것도 다 너 였잖아. 근데 너 그거...............다 진심이였잖아.....

 영의 눈의 끝에서 겨우 매달려 있던 눈물 들이 자기들끼리 부딪히더니 이내 눈 밖으로 마구 쏟아졌다. 마지막 순간에 연진이 자신들을 배신했어도 연진의 말과 행동이 전부 거짓이 아니였다는 것 쯤은 영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들이 한 약속에 가장 진심이였을 연진이 그 약속을 저버리는 순간에 어떤 마음이 였을지 그 마음을 가늠하고 나면 그 순간에 친구의 옆에 있어주지 못하고 원망만 하고 있었던 자신이 미치게 한심해져서 그래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허 영: 너 우리한테 한 번도 거짓말 한 적 없었잖아....!! 진작 말을 했어야지......말을 했으면.......그렇게 긴 시간 동안 널 원망하면서 살지 않았을 거 아니야.....!! 흑....

 영이 연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그동안의 참아왔던 눈물 들을 토해냈다. 20년 동안 묵힌 감정을 그제서야 너무 너무 보고 싶었던 친구 앞에서 털어놓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안겨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꺽꺽 거리며 우는 영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건 연진도 마찬가지였다. 연진은 사는 동안에 정말 못 견디게 외로웠었다. 외로운 간에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언제나 자신의 옆을 지켜주던 친구들이였다. 하지만 이성을 뒤엎고 묶어 놨던 감정들이 비집고 세어 나오려 할 때 마다 계속해서 요령 없는 거짓말을 해댔다. 자신에게 까지 그 거짓말이 소용없어질 때 쯤 영을 만난 것이다. 사무치게 그립고 보고 싶었던 친구를 다시 만났다.

 고연진: 미안해........크흑...미안해....미안해.......

 연진은 영의 옷 자락을 부여잡으며 흐느껴 울었다. 그렇게 몇분이 흘렀을까. 아이처럼 서로를 부등껴 안고 소리 내서 몇 분을 목 놓아 울고 나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목소리는 맛이 가고 눈은 팅팅 부어서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그런 서로의 몰 꼴이 영 창피했는지 부등껴 안으며 울 때는 언제고 지금은 거리를 두고 쭈그려 앉아서 애꿎은 호숫가만 눈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는 두 사람이다.

 허 영: 난 너 용서했어.......이미 오래전에....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깬 건 영이였다.

 허 영: 우리 일로 애들까지 누군 가를 원망하며 살게 할 순 없잖아. 하람이도 너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다며...나도 그래....승준이도...........그럴 거야.

 영의 말에 겨우 진정됐던 연진의 눈에 또 한 번 눈물이 고였다.

 허 영: 그러니까 연진아....너도 이제 그만 편안해 져. 그만 자책하고 털어버려.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어쩌면 평생을 그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탓이 아니라는 말....이 비극의 원인은 나라고 이 비극의 시작도 나라고 그러니 나는 그 순간을 그리워 할 자격도 없다고 연진은 그렇게 자신을 다그치고 몰아붙이며 살았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며 흔들림 없이 말해주는 영의 말에 연진은 또 한 번 코 끝이 찡해졌다. 더 나올 눈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끊임없이 나오는 눈물에 자신도 당황스러울 지경이였다. 하지만 뭔가 마음은 후련했다. 20년 동안 자신의 마음을 막고 있었던 두껍고 무거운 천막 하나가 벗겨진 기분이였다. 깊어져 가는 밤 속에서 두 사람은 20년 만에 서로의 진심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 가는 그 밤에 적응 하지 못하고 홀로 지새우고 있기도 했다.

 똑똑

 신아의 방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가 났다. 신아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무거운 몸을 일으켜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영민이 손에 든 술을 보여주며 신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영민: 들어가도 돼,,,,,,,?

 영민이 애써 웃음을 보이며 신아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왔다.

 조영민: 오늘 밤은 술 없이 잠들기 힘든 밤인 것 같아서.....너도....나도.

 거리는 한산했고 테이블 위에는 달빛을 받고 있는 술들이 잔 속에서 잔잔하게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비가 온 후여서 그런지 날씨가 조금 쌀쌀했지만 답답한 것 보다 야 훨씬 나았다. 두 사람은 신아의 방 테라스에 앉아 어떤 말도 쉽게 꺼내지 못하고 깊어져 가는 밤을 보고 있었다.

 조영민: 아까 수장이 하는 얘기 들었어..........어떻게 생각해....?

 영민이 먼저 무거운 침묵을 깨며 물었다.

 류신아: 잘......모르겠어.

 신아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류신아: 너무 답답해.....머리로는 이해가 되는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아.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아는데도.....이런 상황 속에서도 누군 가를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못 한 다는 게 억울해....

 신아는 답답한 마음에 지금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무자비로 꺼내 한꺼번에 토해내듯 말했다.

 조영민: 평생 누군 가를 원망하며 산 수장도.....보상 받은 삶은 아니였을거야. 그걸 아니까 말씀 해주기 전에 너한테 약속해 달라고 하신 게 아닐까. 넌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해서.

 언제나 밝은 영이였지만 가끔 짓는 생각 많아 보이는 아련한 표정이 영민은 늘 걸렸었다. 말은 안 해도 어렴풋이 모두가 마음 한구석에 영의 표정을 주시하고 있었을 거다. 모두에게 살갑고 친근하게 대하는 것 같은 영도 어딘가 모르게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있었다. 늘 옆에서 영을 지켜보고 있는 조직원들은 누구보다 그 선의 거리감을 잘 알고 있었다.

 조영민: 신아야...영 형님 말씀 듣고 나도 생각해 봤어. 내가 이 일에 당사자는 아니지만 너랑 하람이의 친구고 무엇보다.....너희를 아끼니까 너희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서.....이번 한 번만 주제넘은 참견 할게.

 망설임이 서려 있던 영민의 눈빛이 이내 확신으로 물 들여 져갔다.

 조영민: 그냥 잊어버려 신아야. 너한테 이런 말 하는 거 정말 못 할 짓인 거 아는데 나는 영 형님처럼 네가 후회만..... 남긴 인생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류신아: 그냥 잊어버리라고.....?

 신아가 영민의 말에 반박하듯이 물었다.

 류신아: 어떻게 잊어야 하는데?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니까, 만난 적도 없는 아버지니까....!! 믿었던 친구한테 배신 당하고 억울하게 죽었어도 그냥 나는 없었던 일처럼 잊고 살라는 거야......?! 넌 그게 돼..........?

 그냥 잊어버리라는 영민의 말이 신아의 귀에 비약 해서 들렸다. 흥분한 신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조영민: 그럼 어떡할 건데?!

 이성을 잃어가는 신아를 보며 영민이 강 단 있게 몰아세웠다.

 조영민: 지금 당장 어쩔 거냐고. 조직을 배신했다는 하람이의 부친을 찾아가서 너희 아버지를 대신해 복수라도 할 거야? 아님 이 모든 일의 시작이 하람이 때문이라고 핑계 대면서 네 마음 편하 자고 하람이를 원망하면서 살 거야?

 영민은 제발 신아가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랬다. 당장에 닥친 상황을 감정적으로 판단해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짓 같은 거는 하지 말라고.....영 처럼 하루하루를 후회로 지새울 선택 같은 거는 하지 말라고.....영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신아의 앞에 무릎을 궆히고 눈을 맞추며 얘기했다.

 조영민: 신아야. 이미 너도 알고 있잖아....인정을 못하고 있는 거 뿐이지. 내가 너한테 잊으라고 했던 건 너희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야. 받아들이기 힘들면 잠시 잊고 살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냥 잠시 잊고 평소처럼 살다가 문득 떠오를 때,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아. 그래도 돼.....대신..... 영 형님이랑 약속했던 건 꼭 지켜줘. 누군 가를 원망하지는 않겠다고. 그게 하람이 라면 더더욱. 당장에 보이는 감정에 속아서 네가 널 외롭게 만드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신아의 눈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류신아: 위로해주라....영민아.

 영민은 몸까지 떨며 말하는 신아 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주었다. 어렸을 적 신아가 내민 손을 잡던 그 작고 상처 많은 손이 어느새 인가 이렇게 크고 듬직해져서 자신을 안아주고 있었다. 그 어린 손이 이렇게 커질 동안 변함없이 지금처럼 영민이 자신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신아는 그 날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떤 것도 상황이 해결된 건 없었지만 그래도 입 밖으로 털어내고 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였다. 처음으로 영민의 어깨에 기대 소리 내어 울던 그 날, 신아는 이 세상에 나 말고도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따뜻한 일인 지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연진은 아침 일찍 부터 만형의 집을 찾았다.

 고만형: 안 그래도 사람을 보낼 참이 였는데 알아서 와줬구나.

 만형이 연진에게 직접 차를 건네주며 말했다. 만형이 건넨 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라왔다. 연진은 쉽사리 만형 에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다가 결심을 한 듯 이내 고개를 올려 입을 뗏다.

 고연진: 부탁 드리고 싶은게 있스.....

 고만형: 옛 친구는 잘 만났니?

 연진의 말을 끊으며 묻는 만형의 말은 소름 돋기 그지없었다. 옛 친구........자신이 영을 만났다는 사실을 만형이 어떻게 아는 거지...? 애초에 자신이 영을 만났다는 걸 안다면 영이 살아있다는 것도....알 텐데.....그럼 설마 이미 영 에게 무슨 짓이라도

 고만형: 벌써 부터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아직 아무것도 시작 안 했으니.

 만형은 마치 연진의 표정을 꿰뚫어 보듯 대답했다.

 고만형: 하람이가 네 아들이긴 한 가보다. 그 나이 때 네가 하던 짓이랑 어쩜 그렇게 다를 게 없던 지..... 뭐 덕분에 놓는 수들이 다 예상이 갔지만...

 만형이 차를 한 입 마시며 차분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고만형: 너도 참 마음이 안 좋겠구나. 네가 친구도 꿈도 청춘도 다 버려가며 지킨 아이인데 그런 아이가 지금 너랑 똑같은 처지에 놓일 상황이니.

 만형의 말에 연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올려 만형을 쳐다봤다.

 고만형: 뭐 , 나는 놓친 토끼를 다시 잡을 기회를 얻었으니 그 점은 따로 뭐라 하지 않으마.

 말을 끝낸 만형은 하람이 자신이 건넨 마지막 기회를 놓친 순간을 떠올렸다. 하람이 집을 빠져나와 해월관으로 가던 그 날 밤, 만형은 하람이 담을 넘어 숲으로 들어가는 걸 그림자 너머에서 지켜 보고 있었다. 애초에 일본 유학도, 수형이 하람이를 일본으로 불렀다는 얘기도 그저 확인을 위한 만형의 덫이 였다.

 고만형: 그 겁 많고 여린 작은 아이가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만형의 눈빛이 이내 날카로워졌다.

 고만형: 친구를 잘 못 사귀어 서다. 그때의 너처럼. 이번에는 너에게 선택하게 하지 않으마. 넌 그저 기다리면 된다. 하람이의 선택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앉아 있기만 했던 연진이 만형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고연진: 하람이 한테 무슨 짓 하셨어요?!

 고만형: 그저 옛날의 너에게도 그랬 듯, 아주 약간의 잔인한 선택을 하게 했을 뿐이다. 그 정도

  에도 흔들리는 마음이라면 더 이상 거두지 않는 게 낫겠다 생각이 들었지만 네 아들이라는 점에서 조금 기대를 걸어 볼까 한다. 그때의 너도 내가 원하는 대답을 가져왔으니.

 같은 시간 하람은 집안에 홀로 누워 만형이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이미 만형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자신과 해월관 과의 관계, 영과 신아가 살아 있고 지금 경성에 있다는 것, 그동안의 거리가 시끄러웠던 자자란 사건의 배후가 동년회 였다는 걸. 만형은 아마 하람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다. 덕분에 하람도 만형의 입으로 타고 들어오는 몰랐던 사실들에 더 많은 충격을 받았다.

 고만형: 너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마. 하나, 해월관 조직원들을 잡아들 일 수 있게 해주면 네 친구들은 살려주마. 신아랑 영민이라고 했던 가.....애초에 윗대가리들만 잡아 싹을 자르면 그만 이니 그 아이들이야 어찌 되는 상관없다. 뭐 그게 싫으면

  다른 선택도 있다.

 하람을 쳐다보는 만형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고만형: 도망가라 하람아. 집안의 뜻에서 벗어나 영영 돌아오지 말고 살아라. 놓아주마. 대신..

 예상외의 선택지에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만형을 쳐다보는 하람을 보며 만형은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고만형: 너 때문에 네 사람들은 다 죽을 거다. 해월관 조직원들도, 네 친구들도, 아마 연진이까지. 전부 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웃고 있는 만형을 보며 하람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살기였다.

 고만형: 왜, 내가 못 할 것 같니? 살아 있어봤자 나한테 득 될게 없는 아들 따위 얼마든지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다. 해월관 조직원들도 굳이 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언제든지 잡아 들 일수 있지만 그건 너무 귀찮은 방법이라....좀 꺼려지더구나. 네가 도와주면 손쉽게 해

  결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회를 주는 거다. 그러니 이제 선택하렴. 나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렇게 해줄 준비가 이미 돼 있단다.

 하람의 선택에 너무 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인생이 걸려있었다. 물론 하람 자신도 예외는 아니였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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