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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가이아 프로젝트 (수레바퀴 : Great Reset)
작가 : 태풍
작품등록일 : 2022.2.28

각기 다른 세계의 두 남자가 가족을 잃으며 복수를 다짐한다.
그 두 세계는 지구의 지상도시와 지하도시다.
두 남자의 여정 중 멸망의 전조와 신의 전말이 점차 드러난다.
세계는 다시 만들기 위하여 부숴야만 한다.

 
5. 폭로 (Revelation)
작성일 : 22-02-28 20:50     조회 : 179     추천 : 0     분량 : 23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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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원수 (Revenge)

 

  페투는 간밤의 작은 천둥소리로 잠을 뒤척였다. 밤새 숯불이 목 놓아 불길을 내던 모닥불의 잔해가 거의 검은 재로 변하며 그 끝을 알리며 해가 점차 떠올랐다. 감은 눈을 발갛게 데우는 햇볕에 그의 눈이 떠졌다. 그의 주위로 호위병들은 각기 한 명씩 보초를 서다가 동이 틀 무렵부터 거의 채비를 마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밤에 비가 내렸나?”

  “아닙니다. 주공. 그런데 이상하죠? 마른하늘에 그리 천둥이 치다니요.”

  페투는 별일이 다 있네, 라고 여기며 병사들이 떠놓은 강물에 얼굴과 머리를 적시며 가다듬었다. 늑대들은 입을 쩍쩍 벌리며 아침의 기운을 받아 연신 하품했다.

  페투와 일행은 수도를 향해 3시간 가까이 늑대를 박차 달렸다. 해가 하늘 가운데에 뜰 만큼 정오에 가까워지자 그들은 수도 마을에 다다랐다.

  정오의 마을은 굉장히 분주하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지나니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온 마을에 고기 굽는 향이 퍼져야 한다. 하지만 페투가 도착한 수도는 그 어떤 것도 흔적조차 그리고 냄새조차 없었다.

  “전군, 전투 준비.”

  그가 명을 내리자 모든 병사들이 칼을 빼 들고 늑대의 고삐를 힘껏 쥐었다. 병사들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모두 알고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일행이 마을에 완전히 진입하자 터벅터벅 발을 내딛던 늑대들이 일제히 아울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페투는 그 소리가 아니어도 이미 눈으로도 볼 수 있었다.

  온 마을은 화산이라도 터진 듯이 검게 물들이고 피로 얼룩져 있었다. 만약 화산이 터지든 지진이 일어나든 천재지변이 일어났으면 마을이 집이며 벽이며 무너졌어야 했다. 하지만 붉게 칠해진 벽과 바닥은 이것은 살육이라고 똑똑히 설명해주었다.

  페투는 참담함에 신음을 흘렸다. 경계를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독특한 점이 있었다. 모든 시신이 칼에 베인 상처가 없었다. 일부는 부수어진 것처럼 사지가 찢기어져 있었고, 대부분은 무언가 찔린 듯이 온몸이 구멍으로 꿰뚫려 있었다. 일행은 식은땀을 흘리며 중앙 성채로 갔다. 그 역시 현장의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병사가 페투의 옆으로 다가와 떨며 말했다.

  “악마들의 짓입니다. 주공. 분명 악마입니다. 악마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악마들이 벌써 여기에 당도했을 줄이야. 저희가 늦었습니다. 주공.”

  페투 또한 그 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 끄응 거리며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늑대에서 내리고 성채의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도 시신과 피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성채의 안쪽에는 왕좌가 있다. 왕좌에는 다소곳이 머리가 잘린 채 앉은 왕비가 있었다. 머리는 왕좌의 앞에 볼썽사납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머리가 있던 자리는 죽은 뒤에 강제로 뜯어낸 듯이 불규칙하게 잘려있었다. 치마가 들려있었다. 옷도 심하게 찢어져 유방이 드러나 있었다. 허벅지와 사타구니가 망가져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끔찍한 몰골을 당했는지 감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일행은 왕비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참담함과 공허함이 폐를 후벼 파듯 시려 왔다.

  “주공.”

  “돌아간다.”

  “주공.”

  “돌아가야 해!”

  페투는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피가 몰렸다. 그는 병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악마들이 활개 치고 있다면, 아이라, 아이라에게 돌아가야 한다. 집으로 가야 한다.

  페투는 눈물을 흘리며 성채를 더 돌았다. 하지만 왕은 보이지 않았다. 수도가 이 정도로 각 부족의 족장들이 그리고 의원들이 몰살을 당할 정도라면 자신의 마을도 온전치 못할 것이라고 느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안전을 확인하기 전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병사들도 이를 이해했는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칠게 안채를 달려가는 페투의 뒤를 따랐다. 어느 틈엔가 안쪽까지 들어온 늑대가 그를 등에 태웠다. 늑대는 고삐를 당기지 않아도 박차고 밖으로 달려갔다.

 

  탕, 탕, 탕, 탕 총소리가 성채를 가득 메웠다. 레오는 뒤섞인 기억의 조각들을 되짚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환각을 구분해내기 쉽지 않았다. 잠입을 해보려 했지만, 밖에까지 웅성이는 소리가 요동쳤다. 성채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난 듯 혼란과 경계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벽을 타고 넘어갔다. 권총을 바꿔 들고 정면으로 돌파했다. 레오는 달려 나가며 앞에 있는 모든 이를 총으로 쏘았다. 그를 막아서는 병사들이 대부분 죽어나갔다. 레오는 숨으려 도망가는 천민 여자들도 모조리 쫓아가 총을 쐈다.

  레오는 안채로 들어섰다. 철컥, 하며 탄창을 비웠다. 이로써 남은 탄약은 20발. 신중히 써야 했다. 복도로 들어서자 어두웠다. 어둠을 이용해 최대한 위치를 들키지 않도록 천민이 나타나면 멀리서 최대한 조준해서 쏘았다. 횃불과 창을 든 병사들이 달려오며 자리가 발각되면 어두운 그림자 사이를 빠르게 뛰어다녔다. 한 명 한 명 죽일 때마다 뒤섞이는 편린들은 머리를 헤집었다. 몇이나 죽였는지 몇이나 죽었는지 뒤섞였다. 죽인 게 나인가. 죽은 게 나인가.

  멀리서 날아오는 강철의 총탄을 접한 적 없는 병사들은 공포에 잠식당했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몸을 숨기 바빴다. 겁 없이 제각기 칼을 들고 레오에게 달려드는 몇몇 용감한 이를 제외하고 실상 그의 학살에 가까웠다.

  권총은 공이와 폭약을 둔탁하게 부딪치면서 크롬으로 된 총탄의 불을 뿜었다. 노리쇠로부터 강제로 회전된 금속은 멈추지 않고 제 몸을 돌며 바람을 갈랐다. 총탄은 어디든 부딪치기 전까지 멈추지 않았다. 벽에 과 땅을 부딪치면 움푹 파내고 튕기며 흔적을 남겼다. 총탄이 살덩이에 부딪치면 격렬하게 몸을 틀면서 근육을 벌겋게 헤집었다.

  레오의 숨과 총 끝이 헐떡일 만큼 흥분이 차올랐다. 숨을 몰아쉬는 그가 벽에 기대 덤덤히 주위에 소리를 기울이자 사뭇 조용해졌다. 드문드문 벌겋게 칠해진 벽과 몸뚱이들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없이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마지막 탄창을 바꿔 끼우며 안채로 들어섰다. 철컥, 소리가 고요함을 톡 톡 두드렸다. 터벅터벅 걸으며 안채 깊숙이 있는 문에까지 다다르자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이 악마, 정체를 밝혀라”

  레오는 그를 향해 가늠자를 보며 노리쇠를 전진했다. 털컥.

  “더 이상 못”

  탕! 레오는 선 채로 지체 없이 총을 조준한 후 사내의 이마에 한 발을 우겨넣었다. 심적으로 전적으로 모든 걸 의지하고 있는 탄약이 점차 동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박힌 총알이라도 회수하고 싶은 상상이라도 들었다. 당연하게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레오는 방금 총에 죽은 사내의 시신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몸에서 혼이 솟아오르려다 타버리듯이 땅으로 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지러움이 수십 차례 반복돼오다 이 사내를 보아서야만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알게 되었다. 아니, 혹은 모르게 되었다. 점차 정체를 잃어갔다. 레오는 목적을 반듯이 하기위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머리에 벽을 박았다. 벽을 머리에 박았다. 기억해, 기억해, 기억해.

  그는 천민의 말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게 되었다.

  기억의 흔적이 그의 머리에 지도를 그려나갔다. 성채 중앙에 있는 곳이 느낌표로 무수하게 찍히듯 각인되었다. 있다. 그곳에 가면 있다.

  레오는 해본 듯 익숙한 듯 손에 익은 듯이 바닥에 떨어진 창을 발등으로 가볍게 어깨높이까지 차올렸다. 수평으로 빙그르 돌던 창은 그의 손에 잡혔다. 그는 창을 앞세워 걸어 나갔다. 문을 열자 끼익 소리가 먼지를 풀풀 내었다.

  문 뒤에 짧지만 높고 환한 복도가 이어졌다. 길의 끝에는 열 명 가까이 되는 한 무리가 복도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가운 같은 기다란 하얀 옷을 입고 목카라에 검은 띠를 둘러맨 사제가 있었다. 사제는 기도문을 읊조리며 합장을 하고 있다가 깍지를 끼며 손을 내렸다.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이 거슬렸다.

  사제의 주위에 있는 무리는 모두 하나같이 얼굴과 손발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쇠갑으로 된 갑옷을 칭칭 둘러싸 매고 있었다. 한 명이 허리춤에서 칼을 빼 들자 나머지도 연달아 칼을 빼 들었다. 챙 챙 하는 금속을 긁는 소리가 아지랑이로 피어올랐다.

  레오는 그를 보며 침착하게 손에 든 창을 고쳐 잡았다. 수는 모두 아홉. 남은 탄약도 아홉이었다. 더 앞으로 가야 한다. 최후의 마지막까지 아껴야 한다. 한 발은 마지막으로 죽일 녀석의 것이고, 한 발은 나타의 것이고, 또 한 발은 나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모두 앞다투어 레오에게 달려갔다. 발까지 쇠갑으로 된 둔탁한 부츠들이 바닥을 찍어 누르며 앙칼진 쇳소리를 냈다. 이대로 둘러싸이면 당연히 승산은 없었다. 레오도 그들에게 달려 나갔다.

  그들은 레오와 가까워지며 칼을 내려치려 몸을 틀었다. 레오는 칼이 날아오기 전에 뒤로 뻗은 창을 앞으로 내어 창끝으로 바닥을 찍고는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의 머리와 레오의 두 발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레오는 발을 구르며 공중으로 펄럭거렸다. 그의 왼발이 한 녀석의 머리에 닿자 디딤돌이 되었다. 그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며 발을 틀자 몸도 뒤틀리며 한 끗 더 날아올랐다. 그의 몸이 병사의 머리 위에서 반 회전을 돌 만큼 기우뚱했다. 레오는 그들을 마주하며 반대편에 착지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몸을 돌려 그에게 다시 달려왔다. 칼이 빠른 속도로 내려쳐졌다. 레오는 창대로 간신히 일격을 막았다. 연달아 다른 곳에서도 칼이 날아왔다. 그는 제각기 창을 횡으로 종으로 휘두르며 막았다. 참나무를 깎아 만든 창대가 날카로운 칼날에 수십 군데씩 움푹 파이며 상처로 가득해졌다.

  레오는 머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손아귀와 팔다리의 근육을 쥐어 짜내며 창을 옆으로 베었다. 창날로 그들의 몸을 긁어도 단단한 판금이 줄이 그어지며 쇳소리를 냈다. 다시 수없이 칼날이 날아들었다. 레오는 창으로 그를 연달아 막아내며 빈틈이 보이는 적들을 발로 걷어찼다. 쇠갑이 부딪히는 턱 소리와 안쪽 사슬이 찰랑이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걷어차인 병사가 넘어졌다.

  레오는 창으로 막고 차고를 반복했다. 앞에서 날아오는 칼을 양손으로 창을 들어 막자 창대가 부러졌다. 창대를 뚫은 칼이 그의 콧등을 힘없이 스쳤다. 살갗이 벌어지며 배어 오르며 방울진 피가 코끝을 아른거렸다.

  레오는 잘려진 두 개의 창을 돌려 고쳐 잡아 몽둥이처럼 들었다. 양손을 쓰자 막아내기 수월했다. 하지만 쉽사리 공격하기 어려웠다. 그는 별수 없이 칼날이 달린 오른손의 창을 여전히 거머쥐고 왼손의 빈창은 바닥에 버렸다.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천천히. 신중하게. 레오는 오른손의 창으로 날아오는 칼을 쳐내며 적들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한 녀석의 관자놀이를 향해 조준했다.

  탕!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총 끝에서 날아간 크롬탄이 앞서 맞은 놈의 관자놀이를 꿰뚫고 뇌수와 피를 머금었다. 여전히 멈추지 않은 크롬탄은 그다음 녀석의 목에도 자신의 몸을 박아 넣었다. 강도가 단단하고 회전력이 날카로운 크롬은 그들의 쇠갑이 무슨 재질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찢어 넣었다. 이제 8발.

  레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뒤를 돌아선 그는 뒷발로 걷어차며 뒤에 있는 병사의 무릎을 꺾었다. 사슬이 뒤틀리는 끼익 소리가 쇠갑을 타고 터져나갔다. 레오는 뒤를 돌아서선 다시 앞발로 다른 적의 배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그는 걷어찬 후 반동으로 몸이 붕 뜨며 뒤로 날아갔다. 레오는 몸이 눕다시피 뜬 채로 고개를 내려다보며 총을 조준했다.

  그리고 한 발, 탕! 또 한 발, 탕! 하나는 적의 가슴을 뚫고 벽을 튕겼다. 하나는 다른 적의 목을 꿰뚫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그 뒤에 있는 병사의 미간을 벌겋게 헤집었다. 투구의 안쪽에서 배어나오는 붉은 뇌수가 투구 밖으로 철철 흘러나왔다. 이제 6발.

  레오는 쿵 소리와 함께 등부터 떨어졌다. 그는 반동을 이용해 바닥에서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적이 겁에 질렸다는 걸. 권총을 허리춤에 집어넣은 그는 앞으로 구르며 바닥에 떨어진 칼을 빈손에 쥐었다. 다른 손에 든 짧은 창을 병사를 향해 위로 찔러 올렸다. 창은 얼굴과 몸통 갑옷 사이로 틈이 있는 모가지를 타고 올라갔다. 창날이 구강과 후두를 뚫으며 머리뼈에 부딪혔다.

  레오는 일어서서 양손으로 칼을 움켜쥐고 남은 병사들에게 매섭게 몰아쳤다. 날아오는 칼의 수가 적어지고 그 속도가 눈에 띄게 주춤했다. 앞뒤로 있는 두 명의 칼을 막아내기가 전보다 수월해졌다. 틈을 본 레오는 칼날이 조각나 부수어질 정도로 적의 머리를 세차게 내려쳤다. 병사의 투구가 움푹 패이며 함몰되었다. 병사는 휘청거리다 쓰러지고는 더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레오는 그대로 뒤를 돌아 몸을 낮추고 날아올라 뛰어들었다. 병사의 몸을 팔로 감싸고 그의 배를 어깨로 강타하며 넘어뜨렸다. 레오는 일어서서 병사의 머리를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짓밟았다. 투구는 발길질을 당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투구의 구멍 사이로 피가 흘렀다. 가속도를 받으며 계속 걷어차던 그의 다리가 멈췄다.

  레오는 쓰러져 몸의 경직이 멈춘 적의 칼을 빼앗아 들었다. 벽에 기대어 휘청이고 있는 병사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함몰된 투구에 머리를 다친 듯 몸을 가누지 못했다. 레오는 병사의 투구를 잡아채 목을 내보였다. 천천히 손에 든 칼을 밀어 넣었다. 살을 찢는 소리와 피를 뱉는 소리가 어울렸다. 그륵 그륵 그의 몸을 떨었다. 레오는 피를 뱉는 병사의 코앞에서 마주 서서 턱과 가슴에 피가 튀었다. 붉게 적셔진 레오의 모습은 악귀의 모습으로 보였다.

  싸움이 조용해질 무렵 사제는 여전히 문앞에 서 있었다. 흰옷에 검은 띠를 두른 사제는 여전히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제는 옷의 가슴팍에서 벌어진 주머니를 통해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 손을 집어넣었다. 레오는 본능적이고 훈련받은 반사 신경으로 허리춤의 권총을 꺼냈다. 탕! 소리가 망설임 없이 복도를 울렸다. 사제는 쓰러지며 품에서 꺼낸 물건을 바람에 흩날리듯 떨어트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파랗게 타들어가다 땅에 끌려 내려갔다.

  떨어진 물건은 표지가 열리고 차르륵 하며 흔들리는 종이를 수놓았다가 다시 덮었다. 레오는 시야가 흐려지듯 잠시 어지러워졌다. 정신을 차린 그는 책을 주워들었다.

  ‘성전’

  책의 표지는 손으로 쓰여진 글씨체로 굵직하고 노골적으로 한 단어를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지부는 모든 지식을 모두 데이터로 접한다. 따라서 지민은 실상 책을 볼 일이 없다. 책은 구시대의 산물이다. 하지만 레오는 그들과, 그들의, 그들이 만든 것들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흰옷의 사제는 죽기 전 공격이 아닌 알 수 없는 엉뚱한 의도로 그에게 책을 내밀었다. 마치 읽으라는 것처럼. 의도대로 행해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호기심에 찬 증거물은 그가 무엇에 홀리듯 책을 집어 들게 했다.

  레오는 사제를 지나치며 문을 열었다. 복도의 끝이 열리자 내려진 내리막 계단이 나왔다. 멀리서 비추는 은은한 빛에 의존하며 벽을 짚어 내려갔다. 내려가던 와중에 기억의 혼란이 뒤늦게 뒤섞이며 벽을 왼쪽 오른쪽 연달아 부딪히며 휘청였다. 사제의 기억은 강렬했다. 그가 본 것, 그가 들은 것, 그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소용돌이처럼 레오의 뇌를 헤집었다. 마치 머리에 자아가 수십 개라도 있는 것처럼 그의 이름까지도 흐릿해졌다.

  ‘나를 아마 반으로 쪼개면, 너와 나의, 우리의 추억이 흘러나올 거야. 그런데, 쪼개면 곤란하니까, 추억 대신, 우리로 버무려진 아기를 낳을 거야. 일하러 가지 말고, 계속 옆에 있어.’

  마리아는 아이를 낳기 전, 병원에서 배가 불러 누운 채 레오의 손을 잡으며 신신당부했다. 특유의 당돌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고, 옹골찬 손아귀로 손을 놓지 않았다.

  ‘곧 시크가 현신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해 준비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로잡고, 악마를 정화해서, 길을 밝힐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종으로서 할 일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영광된 계획입니다. 저 또한 그러하며, 폐하와, 주공과, 부인 또한 그렇습니다. 각자 맡은 바가 있습니다. 길을 밝히십시오. 그것은 위대한 시작, 즉 특이점이 될 것입니다. 전과 후과 다른, 멸세이자 창세입니다.’

  기억 속의 사제가 누군가를 향해 나긋이 읊조린다. 레오는 다시 머리가 뒤섞인다. 상대의 얼굴은 검게 칠해진 듯 진흙으로 비빈 듯 흐릿했다. 속이 마구 뒤틀렸다. 정수리가 달아오르는 것처럼 얼굴에 피가 몰렸다. 레오는 은은하게 빛이 비쳐 나오는 막다른 길의 문고리를 부여잡고 토악질을 했다. 속에서부터 밖으로 튀어나온 노랗고 하얗고 붉은 물들이 뒤섞였다.

  레오는 권총을 든 손으로 문을 밀며 열었다. 안에는 한 여인이 흰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채 손을 합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눈을 하다가 우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레오는 본능적으로 혹은 기억적으로 상대를 알 수 있었다. 사제와 계획을 논하던 그녀.

  ‘폐하께서는 지옥으로 향할 것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주공의 일은 무엇일까요.’

  ‘주공은 붉은 기사가 되셔야 합니다. 모든 것엔 대가가 따르겠지만 위험과 희생 없는 미래는 없는 법이죠. 믿고, 하늘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주공의 사랑과 용기는 실망시킨 적이 없죠.’

  ‘모든 건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는 실은 주공뿐만이 아니지만요.’

  ‘그런가요.’

  ‘하늘의 뜻은 명쾌하고 분명합니다. 놋쇠가 짓무르고 쌍칼을 휘두르며 뿔피리를 불 것입니다. 곧, 심판입니다. 이제 기도하시죠.’

  ‘은총이 가득한 하늘이 함께 계시니 기뻐하여 이제 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시길.’

  레오는 그녀의 목을 단검으로 깊게 베어냈다. 그녀는 목에서 번지는 붉은 피를 흰옷에 적시며 가냘프게 쓰러졌다. 가벼운 여인의 몸은 어깨와 머리가 땅에 부딪히면서도 가벼운 탁음을 내었다. 그리고 그녀의 혼은 마치 찢겨 지듯 하늘과 땅으로 불타며 나누어졌다. 레오는 망치로 치는 듯한 통증이 느껴오는 머리를 칼을 든 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녀는 천민들을 모아 주기적으로 지부에 내려 보냈다. 모두 목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밑에서 몸을 숨길 수 있도록 경로와 은신처를 확인하고 정보를 모았다.

  ‘이제 몇 명이 모여들었죠. 많이들 살아남아 있나요.’

  ‘이 밑 지부에는 일천 명 정도고 다른 지부는 각기 조금 다르긴 한데 모두 해서 일만 명 정도 될 것입니다. 부인.’

  ‘그래요. 지시가 떨어졌어요. 곧 움직여주세요.’

  그녀는 낡고 누런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의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곳이 시작점입니다. 그리고 특이점입니다.’

  그녀의 눈과 사내의 눈이 지도의 한 지점을 향했다. 그림은 굵은 붓으로 그린 듯 엉망이었다.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그어진 윤곽선과 글씨는 명칭이 달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꽃이 그려진 공원, 오밀조밀 모인 주택, 그리운 고향, 지금은 없는 집. 레오의 집이다.

  지도와 손가락을 타고 올라가 목덜미와 턱을 지나 그녀의 파란 눈동자에 얼굴이 비쳤다. 지부에서 본 십자가를 이마에 그린 사내가 보였다. 레오는 두통으로 끈적이는 머리를 감싸며 목이 잘린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아이라.’

 

 5-2. 보복 (Reconquista)

 

  왕 매튜는 멀리 옅게 깔린 안개에 가려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져 보이는 호수 앞에 섰다. 누런 천 옷을 입은 그의 뒤로 천명이 넘어 보이는 건장한 사내들이 서 있다. 바람결에 살랑이는 노란 그의 머리칼이 흑빛에 가까운 뺨과 쇄골을 간지럽혔다. 가까운 사내들도 모두 매튜와 같은 낡은 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매튜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 옷을 벗었다. 훌렁 털어지는 옷가지의 안으로 당차고 날센 근육들이 꿈틀댔다. 사내들은 모두 속옷 하의만을 걸쳤다. 왕도 그들 따라서 옷을 벗었다. 사내들보다 넓고 울퉁불퉁한 어깨가 인상적이다. 매튜가 뒤돌아섰다.

  “스스로 푸른 지옥 불에 뛰어드는 우리의 영혼에 영광이 있으라.”

  사내들이 화답하며 우 우 괴성을 지르자 산맥을 타고 함성이 메아리를 타며 호수를 흔들었다. 매튜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앞서 호수에 뛰어들었다. 곧게 뻗은 팔이 먼저 호수의 물결에 닿으며 파동이 일어났다. 그다음 머리, 가슴, 배, 발끝이 들어서며 삽시간에 물속 깊숙이 쏘아졌다. 매튜의 뒤로 시간차를 두며 천명이 넘은 사내들이 일시에 호수에 같은 자세로 뛰어들었다. 풍덩이는 소리와 세찬 물결이 일렁이며 호수의 바깥으로 퍼져나가 작은 파도를 이뤘다.

  매튜는 손을 모아 팔을 쭉 뻗고 허리와 다리를 지느러미처럼 풀렁이며 밑으로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눈을 크게 뜨고 간간이 입과 코에서 공기를 머금은 거품이 방울방울 일어났다. 5m, 10m, 15m, 20m, 그는 끝없이 내려갔다. 매튜는 아무렇지 않게 숨을 참으며 내려갔지만, 그의 뒤를 따라오는 사내들 중 깊은 물이 얼굴과 코와 입과 폐를 짓눌러오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리며 몸속의 모든 내장과 물이 하나가 되며 쿨럭이는 이도 있었다. 끅끅대며 몸에 물이 차오른 사람이 있으면 옆에 있던 사내가 그의 목을 잡아채며 함께 내려갔다. 그들의 체중과 중력은 그들 모두 밑으로 점점 밑으로 향하게 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은 어디에도 허락되지 않았다.

  오직 햇볕에만 의존하는 빛은 점차 내려갈수록 그 빛이 약해졌다. 약 30m가량 내려가자 깊고 어두운 물속의 바닥에 닿기 전 한 벽이 짐승의 아가리처럼 거칠게 구멍이 뚫려있었다.

  매튜와 사내들은 모두 빨려 들어가듯 아가리로 들어갔다. 아가리로 들어서자 미미하던 빛은 모두 사라졌다. 매튜는 점차 좁아지는 아가리의 벽을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심장과 폐가 한계를 느끼며 어서 입을 벌려달라고 재촉했다. 끝끝내 열지 않는 입에 고통을 느끼는 얼굴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지만 물과 섞여 알 수 없다. 벽을 짚으며 10m 정도를 더 나아가자 물속이 점차 환해졌다. 그 빛이 점차 커질 때쯤 매튜가 머리를 들자 차갑고 탁한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물 위는 작은 동굴로 사방이 막혔는데 벽에 꽂힌 횃불 두어 개가 환하게 주위를 밝혔다.

  매튜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손과 발을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더 가자 하늘은 여전히 막혀있지만 짚을 수 있는 작은 땅이 생겼다. 그는 닿는 땅을 팔로 덮으며 물에 젖은 지푸라기처럼 무거운 몸뚱아리를 힘겹게 땅에 올렸다. 몸이 철퍼덕 쓰러지며 땅에 굴렀지만 쉬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내장에서부터 올라오는 하얀 거품의 토악질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그는 위액과 침이 뒤섞인 입을 손등으로 닦으며 안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로 힘겨워하는 사내들이 하나둘씩 차례로 땅에 올라왔다.

  더 앞으로 나아가자 사람 하나 간신히 통과할만한 작은 구멍이 있었다. 매튜와 사내들은 구멍을 기어들어 갔다. 그들이 구멍을 지나 밖으로 나오자 전보다 더 많은 횃불이 비치는 큰 공간이 나왔다. 쭉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왜소한 중년 남성이 매튜을 일으켜 세우며 기다란 털가죽을 어깨부터 입혔다. 매튜는 어깨과 턱이 덜덜 떨려 보였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매튜가 피워져 있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벽에 기대앉자 털가죽을 하나씩 어깨에 걸친 사내들이 점차 모두 그의 앞에 모여 앉았다.

  “얼마나 들어왔지?”

  “옆으로 번호, 하나.”

  가장 앞에 있던 사내가 먼저 외치자 그 옆과 뒤로 눈치껏 하나, 둘, 셋 호명했다. 마지막 번호로 구백팔십이 불렸다.

  “아직 숨을 쉬는 것 같은 친구는 저 뒤에서 심폐소생을 하고 있고, 멎은 녀석들은 동굴 물에 흘려보냈습니다.”

  “그래.”

  사내들은 무릎을 꿇은 채 어깨에 가죽을 걸치고 몸이 덜덜 떨려 보였지만, 그 눈빛들이 강하고 기개가 있었다.

  “잠시 몸을 쉬고 이동하겠다.”

  “예, 폐하.”

  부장격으로 보이는 머리를 밀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내가 대표로 답했다.

  “이제 나는 왕이 아니다.”

  사내들은 잠자코 있었다. 결연한 모습들이다.

  “이제 나는 신의 사자. 하얀 기사다.”

  “예, 기사님.”

  매튜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붙였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잠시라고 생각될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몸의 근육에 힘이 한껏 들어갈 만하다고 여겨질 때 눈을 뜨자 긴 시간이 흘러있었다.

  매튜의 앞에 사내들이 모두 빛나는 판금 갑옷을 차있었다. 왼쪽 허리춤에 투구를 끼고 오른쪽 허리춤에 찬 칼 손잡이를 쥐고 기다리고 있었다. 매튜는 그를 보며 일어섰다. 부장은 그에게 준비해둔 갑옷을 입혔다. 매튜의 갑옷은 검은 자태를 묵묵하게 빛냈다.

  천 옷을 입고, 그 위에 사슬을 입고, 어깨, 팔뚝, 팔목, 허리, 무릎, 부위별로 판금을 착용했다. 그가 갑옷을 모두 입자 왜소한 중년 남성이 무릎을 꿇으며 검은 칼 두 개를 건넸다. 매튜는 그를 집어 들고 하나는 허리에 차고 하나는 칼집에서 칼을 뺐다. 스릉 소리를 내며 강철과 나무가 부볐다. 칼날은 탁한 회색으로 주위의 빛을 모두 빨아 머금은 듯 아무런 빛을 내지 않았다. 매튜는 칼을 슥 살펴보고는 땅에 칼끝을 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가자. 지옥으로.”

 

  “주공!”

  페투는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피로 가득 찬 바닥과 시신을 응시한다.

  “주공!”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그의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빠져나가듯 맥없이 흘러나갔다. 병사가 그의 팔을 잡아채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위로 올려쳤다. 신경질이 뱃속에서부터 끓어 올라왔다. 올려친 칼에서 튀어나온 핏물이 그의 옆얼굴과 어깨를 뒤집어썼다.

 페투는 다시 바닥을 하염없이 응시한다. 바닥에 축 늘어진 손을 양손으로 마주 잡았다. 아무런 고동도, 아무런 온기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손을 부여잡은 채로 이마를 바닥에 쿵 찧으며 늘어졌다. 굳은 피가 코와 입술에 뭉개지며 역한 맛이 났다.

  그는 엎드려 벌벌 기어가며 시신의 얼굴을 손을 옮겨가 부여잡으며 몸을 감싸 안았다. 그는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 눈과 코와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물을 쏟아내고 울다 지쳐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을 때 고개를 들었다. 목이 벌겋게 반쯤 잘려 간신히 얼굴을 덜렁덜렁 간신히 잡고만 있는 그녀의 시신이 그의 품에 있었다. 하얗게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고왔다.

  “아이라..”

  페투는 그녀의 얼굴을 바로잡아 벌린 목이 접히게 고쳐주었다. 그녀를 품에서 내려놓아 바닥에 온전히 두었다. 품이 비자 팔목과 겨드랑이의 땀이 휘발되듯 날아가면서 몸이 차가워졌다. 외로움에 살갗이 돋아나며 소름이 끼치던 나는 바닥에 고인 핏물을 손바닥으로 모아 움켜잡았다. 말라가며 말캉이는 붉은 액체들이 고약한 냄새를 냈다. 페투는 그것을 한참을 쳐다보다 얼굴에 세수를 하듯 펴 발랐다. 두어 차례 더 하다 입술에 피 맛이 날 때쯤 갑옷의 가슴과 어깨에도 펴 발랐다.

  ‘죽여라.’

  자꾸 환청이 들리는 것처럼 누군가 손으로 그의 뇌를 움켜쥐듯이 고통이 휘몰아쳤다. 고통을 잊으며 바닥에 머리를 쿵 쿵 찍어도 환청은 더욱 가세졌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페투는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갑옷이 딸각거리는 소리가 괴롭게 울렸다. 그제야 귀가 맑아지는 듯 병사들의 울음소리가 그의 귀에 비로소 들렸다. 그들은 페투의 뒤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 병사가 그를 잡으며 부축했다. 그는 병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병사가 그에게 말을 건넨다.

  ‘죽여봐.’

  병사의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해 보였다. 페투는 미간이 확 찌푸려지며 그를 밀쳐내고 오른손의 칼을 휘둘렀다. 깡! 소리가 나며 그의 드러난 목과 갑옷으로 덮어진 가슴이 함께 베어졌다. 병사는 놀란 눈을 하며 피가 흐르는 목을 부여잡으며 뒤로 쓰러졌다. 그 뒤로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들이 얼굴을 들며 하나같이 그에게 같은 말을 속삭였다.

  ‘죽여봐. 죽여봐. 죽여봐.’

  페투의 눈이 벌게졌다. 그의 모든 시야가 빨갛게 보였다. 그는 정신없이 칼을 휘둘렀다. 휘두르고 휘두르며 칼이 날아들었다. 부딪치는 짙은 피가 흠뻑 튀며 그의 얼굴과 온몸의 갑옷을 새로운 피로 빨갛게 물들였다. 한참을 휘두르던 그는 숨이 헐떡이고 비틀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피를 뿜으며 누워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환청이 거세졌다.

  ‘주공.’

  ‘어어.’

  ‘페투.’

  ‘어어.’

  ‘날 위해 해줘요.’

  ‘당연히 할 거야.’

  ‘날 위해 죽여줘요.’

  ‘당연히 그럴 거야.’

  ‘당신은.’

  ‘너는.’

  페투는 칼을 옆으로 던지고 아이라에게 다시 기어갔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철컥 철컥 갑옷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붉은 기사.’

 

  레오는 천민의 수도를 향해 한참을 달렸다. 하지만 도착한 마을은 이미 살육의 현장이 벌어져 있었다. 레오는 손에 권총을 쥐고 수많은 시체들을 내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이라의 목을 벤 후 이틀이 더 지나자 머릿속을 헤집듯 뒤섞이는 기억의 단편들이 조금 더 밝아졌다.

  라브가 무기에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무기들로 천민들을 죽였을 때 기묘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 분명했다. 현재까지의 경험대로라면 죽은 자들의 기억을 흡수하는 것 같았다. 전부는 아니고 단편적이었다. 정보를 얻으려면 이렇게 몰래 뒤지고 다니는 것보다 천민들을 죽이는 게 빠르다고 알았을 때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총은 최대한 쓰지 않으며 단검으로만 죽이며 수도까지 전진해야만 했다. 그 덕에 오는 동안 많은 기억이 늘었다. 점차 그들의 생활, 그들의 언어, 그들의 문화, 그들의 종교를 모두 알게 되었다.

  소킬로타크 (Sokilotak), 그들이 하늘을 믿는 형태의 종교다. 그리고 지부의 폭파범이 외쳤던 이름이 그를 지칭함은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시크(Tsirhc), 그들이 믿는 신의 이름이다. 레오는 부족한 부분을 수도 성채의 서고에서 필요한 책들을 빼내 읽으며 탐독했다. 피비린내가 물씬 나는 성채이지만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인이자 창세자인 주다에게 배척된 천민들이 지상에서 살아남아 세운 공동체다. 그들은 태초의 부족 연맹의 형태였다.

  도시에서 추방당한 인류는 생존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생태계가 아직 유지되고 있어 먹고 사는 삶을 지탱함에 있어서 큰 무리가 없었다. 도시 국가들은 점차 지구 개발을 가속화했다. 하늘이 검어지고 사막이 많아졌다. 추방당한 인류는 먹을 것이 없어졌다. 동식물도 줄어들었다. 끝내 인류는 서로를 잡아먹었다. 잡아먹을 수 있도록 임신이 종용되었다. 수많은 여성이 성욕 해소와 식량 창고로 전락하여 가두어졌다.

  도시 국가가 지하로 숨어들던 날 비로소 지구의 모든 대지가 검게 변했다. 악마들이 날뛰었고, 많은 인류가 죽음을 당했다. 인류의 지도자 마커스는 남은 인류를 한데 모아 지구에서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낙원으로 피신했다. 이집트에는 아직 강과 숲이 있었다. 마지막 인류가 최초의 인구에서 백분의 일로 줄어들 때까지 인류는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이집트의 푸른 숲마저 생명을 잃어갈 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왔다. 천사들은 몸소 악마들을 심판하며 지구를 다시 푸르게 일구었다. 천사들의 신 시크는 인류의 구세주가 되었다. 인류는 지구를 다시 파괴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마지막 인류는 마지막 왕국 에모르를 세웠다. 에모르 국왕은 천사의 대리인이자 전사이자 전령이다.

  지하로 도망간 비겁한 인류가 사악한 악마 레피크와 결탁하여 지구의 마지막 선량한 인류를 위협하였다. 악마의 힘을 빌은 악인들은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 인류는 신과 하늘과 천사의 힘을 빌어 악마를 지구에서 몰아낼 수 있도록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시크가 분노하여 악마를 몰아내고 인류가 삶을 되찾을 수 있도록 약조하였다. 이른바 심판의 날이 오고 있다. 지구는 선량한 마지막 인류의 것이다.

 

  레오는 천민들이 자주적으로 글을 남긴 서적을 빠르게 읽어나가며 경악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상반된 이야기와 상반된 믿음. 천민은 일종의 봉건귀족 체제로서 나라를 지탱해오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매튜라는 왕이 이끄는 일원 체제로 보였다.

  매튜는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매우 귀족적이고, 주도적, 호전적이고, 종교적이었다. 그의 일련의 움직임과 행동은 흡사 창세자 주다와 비슷했다. 강력한 일인 지도자.

  모든 사건의 흐름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부에서 테러를 일삼던 천민 무리는 그저 떠돌이들이 아니었다. 의도적이고 계획적이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왜, 라는 질문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보복을 하기 위해서? 지부를 강탈하고 그곳에서 살고 싶어서? 조상들이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서? 아니면 정치적 목적의 자작극? 이것은 그저 합리적인 대답이다. 분명 다른 것이 있을 거라 여겼다. 종교적인 접근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해석되어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심지어 지민을 들어 악마들이라 칭하는 것은 자신의 생이 부정당하는 이야기로 더욱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망상에 빠진 자가당착으로 치부했다.

  레오는 머리를 맑게 할 겸 빈 성채의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다른 것들을 탐색했다. 시체들은 분명히 총에 맞은 흔적들이었다. 벽과 바닥에 패인 자국들 또한 그랬다. 분명 기동 타격대의 움직임일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단번에 수도를 찾았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성공은 한 셈일 것이다. 그렇다면 목적을 이룬 그들은 돌아갈 것인가? 알 수 없었다. 그 또한 돌아갈 이유가 없다.

  아이라과 사제의 기억흔적대로라면 이곳에 시체가 보이지 않는 매튜 왕을 찾아야 한다. 모든 화살표가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레오는 더 볼 것이 없어 서고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당당히 큰 대문을 열자 그를 맞이한 것은 흰 늑대를 탄 수십 명의 천민 병사들이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화살이 날아들었다.

 

 5-3. 폭로 (Revelation)

 

  - 왕 매튜의 서간 필사물 중 기록 내용 -

 

  시크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저희에게 알리셨습니다. 하늘이 천사를 보내시어 그분의 종, 이 매튜에게 알려주신 계시입니다. 저는 시크의 말씀을 듣고 보고 겪은 것을 증언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고 듣고 그 안에 명시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왕 매튜가 당신들에게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맹세합니다. 성실한 창세자, 죽은 이들의 아버지, 왕들의 지배자인 시크께서 은총과 영광을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시크는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어 우리를 오랜 원죄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 나라를 이루어 하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하기를 빕니다.

  시크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내친 자들도 볼 것이고, 이 땅의 모든 영혼과 생명들이 그분 때문에 후회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시크는 시작이자 끝이고, 곧 특이점입니다.

  당신들의 왕으로서, 시크를 모시고 여러분과 더불어 시련과 전쟁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함께할 수 있도록 끝없이 인내하는 이 매튜는 시크의 말씀과 증언에 따라 곧 지옥으로 향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옵니다.

  어느 날 나는 꿈에 사로잡혀 일어나지 못하고 뿔피리 소리를 듣고 정신이 깨었습니다. 드넓은 하늘을 헤맬 때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보는 것을 기억하고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획하고 행동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기 위해 돌아보니 하얗게 빛나는 처녀 열두 명이 서 있었고, 그 뒤 한가운데에 제 아버지와 같은 얼굴을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얀 긴 옷을 입고 금빛 허리띠를 둘렀습니다. 그분의 얼굴과 머리털도 구름처럼 하얬습니다. 하지만 용암처럼 빨갛고 불꽃같이 타오르는 눈은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두려웠습니다. 그분이 목소리를 낼 때마다 대장간에서 쇠를 치듯이 큰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에 쥐어 든 강렬하고 날카로운 장검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습니다. 또 왼손에는 12개의 구슬이 달린 팔찌를 차고 있었는데 그중 한 구슬이 눈이 부시도록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내 아버지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제게 칼을 거두고 오른손을 얹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진실로 살아있는 자다. 나는 레피크에게 죽었었다. 하지만 보라.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 내가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기억하라.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아버지의 노고와 너의 할아버지의 인내를 알고 있고, 또 네가 악마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신이 아니면서 신을 자칭하는 자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너는 알고 있다. 너는 굳건함이 있어서 악마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를 꾸짖을 일이 있다. 너의 인내가, 너의 기다림이, 너를 안주하도록 만들었다. 네가 어디서부터 무너졌는지 기억하고 회개하고 살려내라. 그래서 해야 할 일들을 다시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너의 영혼을 수레바퀴에서 치워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이 있다. 네가 악마들의 소행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나도 악마를 싫어한다. 나는 너희의 고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희는 사실 부유하다. 지구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고통을 받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악마의 무리다. 네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악마들이 너희를 내쫓고 괴롭히고 죽여버렸다. 하지만 너희는 살아남았다. 그런 너희에게 생명의 바퀴를 돌려주는 내게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 하라. 영광된 죽음은 화를 입지 않는다. 너는 악마들의 땅 위에서 왕좌를 올렸다. 그리고 하늘을 굳게 지키고 있다. 귀가 있으면 듣고, 눈이 있으면 보고, 머리가 있으면 깨어 있어라. 승리하는 날 하늘 정원에 있는 생명의 열매를 먹게 해 주겠다. 승리를 약조하라.’

  ‘약조합니다.’

  그 뒤 제가 보니 구름 사이에 문이 하나 열려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리 올라와라. 이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을 보여주겠다.’

  저는 그분과 함께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붉은 얼굴에 눈이 열두 개 달리고 팔다리가 수없이 많은 천사들이 날개가 퍼덕이는 창을 들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창으로 구름을 가로지르자 무지개가 번지며 길을 안내했습니다. 무지개를 밟으며 걸어가자 더 높은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나아가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노랗게 빛나는 넓은 초원에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아버지들이 열두 명 있었습니다. 초원을 비추는 횃불들이 수놓아져 있었고 초원의 지평선 끝과 주위로 빗물이 세차게 거꾸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분과 원로들과 천사들과 지평선으로 가자 비가 멎으며 수정처럼 투명한 유리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 바다의 옆에 거대한 생물이 지키고 있었는데, 피부가 두껍고 자글하며 사자같이 털이 수북하게 나고 황소 같은 얼굴을 했습니다. 생물이 세차가 숨을 내쉴 때마다 등과 팔다리에 달린 여섯 개의 가죽 날개가 펄럭였습니다. 생물이 날아오르자 날개가 회전하듯 풀럭이며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분이 땅에 착지한 생물에게 오른손을 얹자 생물이 그르릉 그르릉 울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분명히 들렸습니다. 생물은 끊임없이 그분을 찬양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그분이 왼손의 팔찌를 찰랑이며 손을 들자 원로들이 엎드리며 경배했습니다. 저는 몸이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다음 천사가 행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열두 개의 눈을 번쩍이며 날개가 달린 창을 휘두르자 유리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경배를 마친 원로들이 제각기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쳤습니다. 유리 바다에 땅의 모습이 비쳤습니다. 생물이 울부짖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첫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흰 늑대를 탄 기사가 등에 칼을 차고 손에 활을 들고 달려 나갔습니다. 그가 활시위를 놓자 활에서 수만 개의 화살이 하늘을 검게 덮으며 지나가는 초록빛 대지의 모든 것을 검게 물들였습니다.

  두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검은 갑옷을 전신에 입은 기사가 검은 쌍칼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가 달려오는 푸른 피부의 수만 마리의 악마들을 베어낼 때마다 붉은 피가 땅에 흩뿌려졌습니다. 흩뿌려진 피는 하늘에 놓인 기울어진 저울에 담아지며 무게를 맞췄습니다.

  세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붉은 갑옷과 붉은 말을 탄 기사가 큰 칼을 들고 좌우 마구잡이로 후려치며 달려 나갔습니다. 그는 이 땅의 모든 평화를 거두고 전쟁을 불러왔습니다.

  네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푸른 머리칼과 푸른 눈을 한 기사가 한 호수 앞에 섰습니다. 그가 몸을 던지자 호수가 폭발하여 모든 물이 땅 위와 땅 아래로 모두 증발하고 대지가 진동했습니다. 넘실대는 파도는 이 땅의 모든 곳을 헤집었습니다.

  다섯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하늘의 태양이 온통 피로 물든 것처럼 한층 더 붉고 빨갛게 변했습니다. 태양은 하늘에 올라오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태워버렸습니다.

  여섯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땅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며 바다가 땅이 되고, 땅이 바다가 되고, 지하가 지상이 되고, 지상이 지하가 되며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었습니다. 일등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일등이 되었습니다.

  일곱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덮어지며 모든 햇볕과 빛을 차단했습니다.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자라지 못했습니다.

  여덟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모든 권력자와 힘 있는 자와 부유한 자와 반역하는 자들이 한데 지하에 숨어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이들의 먹잇감이 되어 산채로 몸이 뜯기고 영혼을 갈취 당했습니다.

  아홉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천사들이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에 도장을 들고 다니며,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을 다스렸습니다. 천사들은 모든 물체들의 품종과 인격과 원죄를 보고 합당하면 이마에 인장을 찍고, 불합하면 이마를 칼로 도려냈습니다.

  열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이마에 인장을 단 생명들은 새로 지은 수레바퀴 앞에 차례대로 일렬로 섰고, 불합한 생명들은 불구덩이에 한데 놓고 태워지며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죽기를 바래도 죽을 수 없으며, 없어지고 싶어도 없어지지 못합니다. 그 고통은 진실로 회개하여야만 다시 심판대로 올려졌습니다.

  열한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그분의 영광과 천사의 권능으로 악마들의 존재가 사멸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없었으며 마지막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습니다. 태양과 지구와 달과 이 은하가 오롯이 시크의 것이라고 온 우주에 천명됩니다.

  열두 번째 원로가 두루마리 봉인을 뜯었습니다. 빈 땅과 빈 하늘에 차가운 우박과 불의 비가 쏟아졌습니다. 불타는 산은 무너져 바다에 던져지고, 땅을 삼킨 바다는 물에 젖은 섬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검은 하늘을 찢고 달이 추락하며 땅에 떨어졌는데, 땅은 아가리를 벌리듯 달을 집어삼키며 모든 중력과 힘과 시간을 흡수했습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구름을 걷어내자 햇볕이 비추며 땅에 초록빛이 새로 돋아나고 바람에 날리는 바다가 푸르게 빛을 냈습니다.

  새로운 땅과 하늘과 바다를 보며 넋을 놓을 때 그분께서 손을 들자 몸이 쑥 빠지며 처음부터 유리 바다와 원로와 천사와 생물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분께서 열두 처녀를 옆에 거느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헌 집을 허물어 새 집을 짓고, 끝을 내어 시작을 하며, 소멸 끝에 창세가 온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특이점이다. 일등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일등이 되며, 모든 영혼과 생명과 천지는 본래의 뜻한 바대로 원래로 돌아가며 새로운 격차를 부여한다. 너는 이제껏 그랬고, 그러고 있고, 앞으로도 종이자 왕이 될 것이다.’

  이처럼 성스러운 명과 령이 주어졌으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명확한 길입니다. 이에 따라 이제 곧 계획이 발현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몸이 있고, 정신이 있고, 이름이 있습니다. 먹혀서도 안 되고, 합쳐져서는 더욱이 안 되는 분명한 이름이 있는 우리입니다. 목적은 분명합니다. 재정복(Reconquista)이자, 이른바, 가이아 프로젝트(Gaia Project)입니다. 가이아는 독립해야 합니다.

 

  - 수도원 도서관 문서 중 ‘사도성전’ 기록 내용

 

  우리는 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겪었습니다. 우리는 레피크(Leficul)가 어떻게 더러운 몸뚱이를 가지게 되었는지 기억하고 일깨우고 되뇔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1만 년 전 하늘의 뜻으로 한 여인에게 아기를 배어주었습니다. 인류의 역사 이래 기록된 첫 표징입니다. 그녀는 성교 없이 이루어진 임신과 괴로움과 외로움으로 지냈고 마지막에 이르러 해산의 진통으로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생명체가 하늘을 날았는데 둥그런 몸에 사방으로 달린 머리가 열둘이고 그마다 뿔이 솟아나 있었습니다. 붉은 생명체가 용처럼 꼬리를 달고 다니며 하늘을 날다가 표징의 여인이 이제 막 해산할 때 그 앞에 나타나 그녀 앞에 내려 지켜 섰습니다.

  붉은 생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는 하늘의 뜻으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릴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붉은 생명에서 나온 붉은 사람이 사내를 낚아챘습니다. 그는 아이를 먹어 삼켰습니다.

  여인은 하늘의 뜻을 받드는 종들의 도움으로 광야로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는 오랫동안 지켜온 하늘의 처소가 있었습니다. 이를 말미암아 하늘의 천사들이 내려왔고, 땅의 악마들이 올라왔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긴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푸른 가죽과 노란 속살과 붉은 피들이 땅과 바다에 뿌려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천사들의 강대한 권능에 당해내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하늘까지 올라온 아기를 삼킨 기만자는 땅 끝으로 떨어트렸습니다. 붉은 용, 사악한 뱀, 대악마라 불리는 레피크 이라고도 하는 자. 온 세상을 속이던 그자를 떨어트렸습니다. 그의 충실하고 잔혹한 부하 나타(Natas)과 라브(Laab)도 그와 함께 떨어졌습니다. 천사들이 말했습니다.

  ‘이제 시크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그분 앞에서 밤낮으로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악마를 내쫓았다.’

  천사들은 백성들의 피와 자신들의 권능을 모아 악마들의 잔당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죽더라도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사랑을 받을 땅에 사는 이들은 즐거워하고 행복해야 하지만 그들은 불행해졌습니다. 패배하고 상처 입은 악마가 큰 분노를 품고서 아직도 땅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레피크는 남몰래 사내아이를 낳은 여인을 찾아내고 쫓아갔습니다. 상처 입은 그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으로 그녀에게 커다란 날개가 주어지며 다시 처소로 날아가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처소의 보호 아래 사악한 뱀은 그녀를 해칠 수 없었습니다.

  분개한 레피크는 악마들을 불러내 하늘을 따르는 백성의 선량한 무리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붉은 용처럼 또아리를 틀고 땅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힘을 모은 악마는 바다에서 거대한 짐승들을 올려 보냈습니다. 짐승들은 큰 머리에 날카로운 뿔을 달고 피에 절은 몽둥이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모독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불타는 산에서 솟아나는 짐승은 호랑이 같은 얼굴에 곰의 발톱을 세우고 검은 털이 휘날리는 날개를 퍼덕였습니다. 짐승 나타은 사악한 뱀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권한을 받은 짐승이 천사들을 붙잡아 날개를 찢고 머리를 부수자 백성들이 두려워 그를 경배했습니다.

  짐승은 쉬지 않고 하늘을 모독하며 다시 악마들을 이끌고 하늘로 찾아왔습니다. 천사들은 다시 짐승을 땅으로 쫓아낼 수 있었지만, 땅을 다스릴 권능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표징의 여인이 사악한 뱀에게 결국 사로잡혀 사악한 몸뚱이가 되었고, 레피크는 붉은 용을 타고 땅 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이 세상의 창조 이래 가장 큰 전쟁은 모두 힘을 잃고 땅은 무지한 백성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지한 백성들은 결국 악마에게 땅과 몸과 영혼을 내주었습니다.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고, 의도하지 않은 행위가 행운이 되듯이, 쫓겨났기에 하늘을 알게 되고, 역사를 공부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현재를 인내하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무지는 악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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