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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가이아 프로젝트 (수레바퀴 : Great Reset)
작가 : 태풍
작품등록일 : 2022.2.28

각기 다른 세계의 두 남자가 가족을 잃으며 복수를 다짐한다.
그 두 세계는 지구의 지상도시와 지하도시다.
두 남자의 여정 중 멸망의 전조와 신의 전말이 점차 드러난다.
세계는 다시 만들기 위하여 부숴야만 한다.

 
4. 순환 (circulation)
작성일 : 22-02-28 20:49     조회 : 171     추천 : 0     분량 : 23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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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기사 (Knight)

 

  에모르(Emor) 왕국의 기사이자 일라티(Ylati) 마을의 성주인 페투(Petrus)는 성의 안쪽에 있는 연무장에서 부하 무장과 칼로 대련을 하고 있었다. 철이 맞부딪혀 울리는 굉음이 연무장을 가볍게 흔들었다. 위아래가 연결된 노란 옷을 입고 몸을 모두 덮는 판금 갑옷 사이로 그들의 땀이 바싹 적셔질 때 시종 집사가 페투에게 찾아와 말했다.

  “주공, 그만 쉬시지요. 부인께서 식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하 무장이 페투를 향해 장검을 위협적일 만큼 세차게 휘둘렀다. 페투도 장검으로 무장의 칼을 쳐내며 그의 팔뚝을 강하게 타격했다. 부하 무장은 칼을 떨어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그렇게 되었던가.”

  페투는 무장의 장검을 목검으로 쳐내 떨어트리고 칼집에 집어넣으며, 판금으로 된 투구를 벗었다. 투구의 안에도 사슬과 천으로 엮여 무척 두텁기 때문에, 벗으며 노란 머리칼을 타고 비처럼 흘러내리는 땀이 어깨를 적셨다.

  페투는 시종 집사의 옆으로 졸졸 따라온 여시종에게 투구를 건네고 양팔을 벌렸다. 집사가 등 뒤에서 갑옷의 이음새들을 풀어내며 갑주의 부분들을 하나씩 떼어냈다. 가슴부터 발끝까지 20여개의 갑주를 모두 벗어내자 바람결에 땀이 식으며 몸의 잔털이 바짝 세워졌다. 선선하고 화창한 저녁노을이 판금 빛을 타고 그의 눈을 쐬었다.

  “먼저 좀 씻어야겠지.”

  “그러시지요. 주공.”

  집사가 고갯짓을 하자 여시종이 뒤로 끌고 온 수레에 갑주를 차곡차곡 쌓으며 다시 이끌며 다른 곳으로 가져갔다.

  “최근에 지옥의 구멍에서 악마들이 올라왔다지요?”

  “네. 그래서 신부들이 모여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듣자 하니 바다를 통해서 스스로 지옥으로 가는 평민들이나 죄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말세지요.”

  “폐하께서는 이 일을 어찌 하실지.”

  “곧 성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점점 때가 오는 것 같군요.”

  페투는 성채의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기 전 집사에게 미리 일러두었다.

  “자시에 맞춰 갈 터이니 부인이 그때 나오도록 이야기해주고, 오늘 밤 나도 기도를 하러 가야겠습니다. 신부를 불러 오세요.”

  “예, 주공.”

  집사는 페투에게 목례를 하며 문을 닫고 자리를 떠났다. 페투는 기다란 복도를 통해 걷다 문을 열고 욕실로 들어갔다. 데워진 물이 가득 찬 욕조에 그의 온몸이 푹 담겼다. 그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물에 적시며 생각에 잠겼다. 근육이 반들하고 윤기 나는 검은 피부도 물에 잠겼다. 몇 군데의 오래된 상처 자국을 타고 물방울이 스몄다.

  그의 왕 매튜는 건국 이래 가장 호전적인 인물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아마 그는 성전이 벌어진다면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신 또한 신심이 경건하기에 피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600년 가까이 유지한 왕국이 성전으로 변란이 생겨 무너질까 하는 염려였다.

  그 자신은 시크의 교리에 따라 성심껏 하늘을 모시고 옳은 방법에 따라 곧은 방법으로 죽는다면 필히 천국(天國)으로 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반역자라고 일컬어지는 죄인들의 지옥(地獄)행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페투는 욕조에 잠겨 몸을 쓸어내듯 밀어내다 데워진 물이 밍그러워질 때쯤 털고 일어나 곧게 말려진 양가죽 포로 몸을 닦아내었다. 하얀 천 옷으로 갈아입고 건물 끝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넓고 둥근 탁자를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의자가 많았다. 그 끝에 부인 아이라(Airam)가 미리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답니다.”

  아리아는 매끈한 갈색 빛 피부에 노란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렸다. 커다란 눈과 붉은 입술이 눈에 띄는 미인이다. 그녀는 간소하게 수가 놓아 진 하얀 옷을 입고 페투를 보고는 단아하게 웃었다.

  그녀는 가끔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이지만, 분명코 이 세상에서 페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페투는 부인의 옆으로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춘 다음 맞은편의 내 자리로 가 앉아 식기를 들었다. 성내의 자유민들이 채집하거나 사냥하여 공물로 내오는 각종 구운 고기들과 싱그러운 과일들이 상에 차려졌다. 시종들이 상을 모두 내오고 나와 부인의 옆으로 각기 다 앉아 자유롭게 식사를 시작하였다. 시종들은 부인이 즐겁게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간간이 농담을 건네며 근황을 물었다. 페투는 덤덤하게 앉아 그들의 단란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물러나겠습니다. 신부를 곧 들여보내겠습니다.”

  시종들과 부인의 재잘대는 이야기를 머금은 식사가 끝나자 시종들이 비워진 상을 모아 물러났다. 페투와 부인은 향나무 잎으로 우려낸 차를 마시며 신부를 기다렸다. 하얀 도포를 입고 목카라에 검은 띠를 채운 정갈한 옷차림의 신부가 문을 열며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주공의 앞날에 은총이 가득한 천국의 길이 놓이길 기원합니다. 미사실로 가시지요.”

  부부가 차를 마저 마시고 모두 일어나자 신부가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셋은 성채의 중앙 안쪽 집무실 뒤켠에 있는 미사실로 향했다. 뿔 나팔과 칼이 각인된 양 문을 열고 들어섰다. 꺼지지 않게 항상 켜놓아진 스무 개의 양초와 그 빛으로 햇빛을 대신하는 밝은 불이 벽에 걸린 거대한 십자가를 비추었다. 십자가의 가운데에 있는 원형이 불빛을 모아주어 영롱함이 더해졌다. 신부가 제단 옆에 서고 페투와 아이라가 십자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기도를 시작하였다.

  “하늘의 천주님. 저희가 비록 천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천주님의 계획을 굳게 믿으며, 모든 기사들과 더불어 당신을 하늘로 모시는 저희를 자애로이 지켜주소서. 저희는 하늘을 더욱 충실히 섬기며, 당신의 슬하에 살기로 약속합니다. 십자가가 저희에게, 저희가 하늘에게, 하늘이 십자가에 계획을 새겼습니다. 지극히 높은 하늘과 십자가 밑에서 맺어진 인연으로 저희를 품에 안아주시고, 저희가 올바르이 살 수 있도록 하여 저희 죽을 때에 저버리지 마시옵소서.”

  페투와 아이라가 입을 모아 함께 기도문을 외웠다. 그들의 뒤에서 신부가 손을 모으며 중간 마디마다 화답하였다.

 “시크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신부의 마지막으로 화답했다. 페투와 아리아는 그를 듣고 익숙한 듯 하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은 정갈하게 개어 그들의 앞에 놓였다. 많지 않은 옷이 모두 벗어지자 페투와 아이라 모두 알몸이 되었다. 그들은 제단을 보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신부는 그들이 모두 마치고 자리에 다시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왼손에 교리를 들고 오른손에 채찍을 들었다. 신부가 그들의 뒤로 돌아갔다. 페투와 아이라의 등이 그를 향해 보였다. 신부는 중얼거리듯 기도문을 외며 페투와 아이라의 등에 채찍질을 내리쳤다. 등의 살갗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갈라지지 않을 만큼의 고통이 가해졌다. 페투와 아이라는 굳게 다물어진 이가 앙다물어지도록 통증을 참으며 눈을 감았다. 그들은 등에 난 상처는 상징이며 그 수가 많을수록 영광으로 여겼다. 철썩 철썩 내려치는 채찍의 줄 마디마디마다 꽃의 피 얼룩이 더해졌다.

  열 번 정도 내려치고 채찍질이 끝났다. 신부가 마무리 기도를 읊조렸다. 기도가 끝나자 페투와 아리아가 옷을 개어 입었다. 그들은 다시 무릎을 꿇고 제단에 손을 모았다.

  “앞으로 있을 시련과 성전에 저희에게 용기를 주시어, 용맹한 영광과 결연한 죽음으로 천국의 길에 발을 딛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기필코 부끄럽지 않게 지국(地國)을 살고 지켜내어, 지하(地下)의 악마들로부터 천국을 보호하겠습니다.”

  “시크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셋은 동시에 십자가에 목례를 했다. 페투는 가슴에 주먹을 얹어 심장을 두드리며 혼자만의 기도를 짧게 뱉었다.

 

  그날 저녁 전령을 통해 페투는 왕의 명으로 수도에 소집되었다. 다음날 동이 트자 마자 그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위부대와 함께 길을 나섰다. 아이라는 페투의 떠나는 길을 마을의 외곽에서 마중을 나갔다. 바람이 산산하고 햇볕이 바삭하여 거리와 산들에 꽃망울이 제법 피었다.

  페투는 병사들과 함께 몸집이 2m쯤 되는 늑대과 짐승의 등에 올라탔다. 짐승은 털이 하얗게 길고 부드럽다. 송곳니가 입에서 삐죽 나올 만큼 크고 발톱도 사납게 돋아있다.

  페투는 늑대 등에 앉은 채 아이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이라은 늑대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페투를 올려다보았다. 늑대는 크릉 크릉 거리며 피부를 떨며 아이라의 손을 핥았다. 혀의 오돌토돌한 돌기가 촉각에 자극적이었다. 아이라는 늑대를 눈을 보고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개의치 않았다.

  “알다시피 한 나흘 정도 걸릴 거요, 부인.”

  “조심히 다녀오세요. 주공.”

  페투는 아이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호위 병사 10명과 뒤를 돌아 떠났다. 모두 각기 다른 색의 늑대를 탔다. 그중 페투의 늑대만이 흰색이고 다른 늑대들은 대부분 거멓다. 늑대들은 흙바닥을 푸덕거리며 달렸다. 달리는 소리는 조용했지만 흙먼지가 요란하게 발바닥을 찼다.

  아이라는 성채로 돌아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흰빛과 분홍빛이 감도는 장식품들과 천들로 감싸져 잔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는 시종을 떠나보내며 방문을 닫고 은은하지만 탁한 향이 나오는 양초를 들었다. 그녀가 양피지로 된 필사책이 가득한 서재의 한 귀퉁이를 잡아당기자 서재가 옮겨지며 문이 열렸다.

  열린 문은 심연의 아가리처럼 검고 깊었다. 양초가 빛을 내며 발걸음이 옮겨졌다. 반딧불이 떠다니듯 공허를 환하게 비추며 길을 안내했다. 아이라는 빛에 시야를 의존하며 어두운 통로를 걸어 나갔다. 일자로 이어진 길이 길게 이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걸었다. 걸음이 끝나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문이 보였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삐걱 소리가 어둠을 울렸다. 문이 열린 곳에 전과는 미사실이 있었다. 붉은 원형 십자가가 빛을 타고 그들을 붉게 내리 비춘다. 그곳엔 일전의 신부가 미리 앉아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신부는 예의 바르고 공손한 말투로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 그녀는 익숙한 듯 자주 빛 옷을 펄럭이며 자리에 앉았다. 둘은 잠시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기도문이 웅성이는 소리가 작은 미사실 공기를 살랑였다. 기도문이 끝나고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라가 신부를 보며 붉은 입을 열었다.

  “시크의 뜻이 그리하여 준비하고 실행하기는 하였으나, 주공께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아직 궁금합니다.”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는 법이지요. 저는 저의 일이 있고, 부인은 부인의 일이 있고, 주공은 주공의 일이 있지요. 무엇 하나 작은 것이 없습니다. 안내하는 일, 은밀한 일, 싸우는 일, 모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시크의 뜻과 계획을 행하는 것이지요. 그 의도는 하늘이 주관하고 하늘이 알고 계시니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지요. 하지만 그분의 뜻대로 행한다면 그리 되었을 때 우리 모두 하늘로 올라가는 열쇠를 받는 것이니 이 어찌 영광되지 않겠습니까.”

  아이라는 테이블에 준비된 차를 호록 마시며 끄덕였다.

  “단지 궁금증의 문제이니 개의치 마세요. 저는 의심하는 바가 없답니다.”

  신부가 따라 차를 마시자 아이라가 되물었다.

  “다음 계획은 어떻다고 하십니까?”

  “주교 회의에서 이르길 준비가 거의 다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막바지라고 하기에는 무척 조용하고, 알 수 있는 게 없군요. 지옥에서 악마들이 올라왔다 들었습니다.”

  “아마 큰 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공의 일은 그 싸움에서 활약하는 것이겠지요?”

  신부는 그녀를 보며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곧 알게 되겠지요. 기다려보시지요. 기다림은 미덕이라 하였습니다.”

  아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공, 한 시간가량 더 가면 곧 수도에 도착합니다.”

  먼저 앞서가던 호위병 중 하나가 페투에게 돌아와 말했다. 호위병의 등 뒤로 해가 뉘엿뉘엿 땅으로 꺼져가고 있었다. 늑대의 등에 묶인 기다란 안장의 고삐를 들쳐 세우자 늑대가 아울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대장 격인 늑대가 짖으며 멈추니 다른 호위병의 늑대들도 멈춰섰다. 페투는 병사들을 향해 마주보며 말했다.

  “소집일은 내일이고 구태여 일찍 나온 것이니, 조금 쉬다 가자. 저 마목 숲에서 천막을 치거라. 산들바람도 눈과 코에 많이 집어넣었으니, 여로를 풀어도 괜찮지.”

  한 호위병이 그를 향해 웃었다.

  “그러시리라 여기고, 미리 술과 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전과 같이 나누면 될까요?”

  페투는 너그러이 답했다.

  “좋지. 나도 미리 특별한 것들로 가져왔다. 오늘 밤 가볍게 이야기 나누며 놀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록 하자.”

  “예, 주공.”

  호위병은 다시 홀로 앞서나가며 미리 숲을 살펴보았다. 페투와 나머지 무리는 천천히 길을 틀어 숲으로 향했다.

  페투는 바위에 걸터앉아 곰방대 구멍에 마잎 가루를 집어넣고 성냥을 긁어 불을 붙였다. 호위병들은 제각기 배낭에 가져온 가죽 이부자리를 깔았고 그 위로 숲에서 잘라온 적당히 굵은 나무들로 기둥을 세워 천막을 쳤다. 입김으로 뻐끔거리며 곰방대에 불이 다 붙었을 때 아직 반 이상 타고 있는 성냥을 호위병에게 건네주었다. 호위병은 성냥불이 혹여 꺼질라, 손바닥으로 작은 불길을 감싸며 조심히 손으로 옮겼다. 그 옆에 다른 병사들이 모아놓은 장작더미가 있었다. 불씨는 밑에 깔린 낙엽들에 옮겨 붙으며 시간과 입김이 더해지지 불이 활활 솟았다. 작은 불은 금세 큰 불이 되었다. 진영이 갖춰지고 늑대들이 옆에 옹기종기 턱을 괴고 엎드렸다. 별빛이 조금씩 쏟아지는 노란 노을은 코를 골며 엎드린 늑대들이 친구인지 짐승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을 만큼 어둑해졌다. 활활 솟은 따듯한 불빛이 그들의 그림자를 환하게 비쳤다.

  병사들은 나무를 깎아 만든 그릇들에 음식을 담아 상을 차렸다. 그 외의 그릇들에는 마른고기들을 물에 불려 늑대들의 각기 앞에 놓았다. 늑대들은 끼잉 끼잉 소리를 내며 병사들이 주는 먹거리를 배부르게 코를 박고 먹었다.

  페투의 일행은 모닥불을 가운데에 놓고 원으로 주위를 둘러앉아 그릇에 담은 양념으로 구워진 고기들을 손으로 뜯어 먹으며 제각기 떠들었다. 페투는 그들의 대화에 자주 참여하지 않았지만, 재밌는 이야기가 있으면 웃고 묻는 이가 있으면 느긋하게 답해주었다.

  달이 밝아질 만큼 시간이 흘러 하늘빛이 노랗게 떴다. 흥이 오른 일행은 노래하는 병사도 있고, 춤을 추는 병사도 있었다. 줄을 튕기는 현악기인 류트를 미리 가져온 병사가 선율을 공기와 바람에 흘려보내며 별빛의 청취를 더했다. 병사들 중 한 무리는 입을 모아 시를 닮은 노래를 부르고 읊고 떠들었다.

 

  어둠에 안겨서.

  조각을 내어서.

  끌어내리고.

  팔아버리고.

  전갈을 향해서.

  궁수가 쫒아서.

  물병이 조르르.

 

 4-2. 순환 (circulation)

 

  “그런데 이렇게도 아픈 걸 보니 완전한 불사는 아닌가 보군요.”

  레오의 물음에 라브는 비실비실 씰룩대며 답했다.

  “뭐, 그렇지. 그래서 때마침 이곳에 있는 내가 너희들을 도와주는 거지.”

  “너희?”

  “그래. 너희 가이아들.”

  “나타가 보낸 겁니까?”

  “나타는 나타고, 라브는 라브다. 공생이라고 보아야겠지. 도와주는 건 사실이지. 도움 받는 것도 사실이고.”

  레오는 알쏭달쏭한 그의 말을 되씹는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날 가이아라 부르던데.”

  라브는 흥미롭게 웃는다.

  “너희의 영혼 자체가 가이아다. 단어의 차이야. 우주의 역사를 이야기하기엔 너희의 삶이 짧다. 그게 큰 의미도 없고.”

  “그래도 말씀해주십시오.”

  “우주의 창조주가 행성을 창조했다. 대지는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중력이 심연을 덮고 원자가 물 위를 감돌았다. 창조주가 빛이 있으라고 하자 빛이 생겼다. 창조주가 보기에 구조가 좋았다. 원자가 한데 모이고 뭉쳐 충직한 뜻을 이루었다. 창조주가 관리자를 두어 뜻이 이어주게 했다. 그 주위로 열두 자리 열두 행성이 한 바퀴를 돌고 첫날이 지나니 사건의 시작점이 펼쳐졌다. 점에서 선을 지나 특이점이 오고 원자는 독립을 원했다. 관리자가 뜻을 존중하고 창조주가 허하여 분할과 영생을 약속했다. 우주는 그를 가이아라 불렀다.”

  레오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노인은 나갈 채비를 하는 것처럼 간소한 짐을 꾸리며 성의 없이 답했다.

  “창조주는 너희를 버렸다. 우리는 아니지만.”

  “요는 당신들이 관리자라는 말입니까?”

  “이제는 아니야.”

  아직 앉아있는 레오를 노인이 내려다보며 말한다.

  “이제 갈 시간이다. 넌 너의 길을 가라. 곧 다시 만나겠지. 아닐 수도 있고. 모든 건 특이점에서 만날 거다. 중요한 시기지. 선택을 잘 해야 할 거야. 기억해 두어라. 만들고 싶으면 없애야 하고, 없애고 싶으면 만들어야 한다. 무엇이든 스스로 겪고 스스로 판단해. 길은 많은 곳으로 열려있다. 내 몸은 하나이고 가이아는 많지. 그러므로 난 이제 가보겠다. 이제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그리고 세례를 넣은 무기를 써보면 알게 될 거야. 누굴 향해 써야 하는 지.”

  라브는 무에 가까운 웃음을 짓고는 움막을 나섰다.

  “너는 복수를 왜 원하지?”

  라브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나서려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물었다.

  “그것 말고는 할 게 없으니까. 그래야만 하고. 지금으로선 그게 사는 목적입니다.”

  “해도, 안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다른 게 없다면, 그렇다면 더더욱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나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너를 위한 건가?”

  “나타는 말했습니다. 그 복수에 동기를 주겠다고. 마리아를 찾아오라고.”

  “그 녀석 답군. 가이아 중에서도 좋은 동기를 가진 녀석을 구했어. 하지만 이렇게 마구잡이로 붙잡아서야.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군. 그런데, 문득 네 이야기는 마음에 두는군. 어차피 달라질 게 없다면, 그래, 하고 보는 거야. 대화 즐거웠다.”

  라브가 떠난 뒤 레오는 한참을 생각에 잠기다 아직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짐을 챙겨 자신도 천막을 나섰다. 삐걱이는 소리가 골반부터 등뼈를 타고 울렸다. 미챌이 애써 구해준 가방은 이미 잃어버렸다. 살아나갈 것도 먹을 것도 스스로 찾아야 했다. 푸른 강을 끼고 녹색 가득한 풀을 대지에 둔 채 적색 나무가 가득한 산숲을 보며 막막함에 어질했다.

  움막을 나선 레오는 잠시 강가를 앞에 두고 돌무더기에 철푸덕 앉아 홀스터의 작은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갑을 꺼냈다. 상자를 열자 물이 새어 들어갔다가 바짝 마른 종이 담배들이 눅눅하게 벽에 붙어있었다.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자 정신이 맑게 개었다. 젖었던 잎이 타닥타닥 익는 소리와 뿌연 연기가 뇌를 청명하게 두드렸다.

  머리가 맑아지자 눈앞의 풍경이 그제야 그의 시야에 곧게 들어왔다. 도시에서 보던 풍경과는 사뭇 혹은 완전히 다른 이세계다. 원천이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서 끝없이 물들이 자갈과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며 찰 찰 찰 소리의 상쾌함이 코와 귀와 눈을 자극했다. 살짝 더운 듯한 햇볕은 색색의 나무들을 바삭하게 익힐 듯 구워냈다. 노인과 헤어진 후 풍경을 처음 제대로 눈에 담는다.

  레오는 라브가 준 권총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무엇을 해놓은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겉보기에 전과 다름이 없었다. 써보면 알 것이라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도 목적지도 정확하지 않으므로, 시간이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레오는 걷고 또 걸었다. 차박 차박 끝없이 풀이 발에 채였다. 신발이 점차 녹말로 퍼래졌다. 한참을 내려가며 산등성이를 벗어나자 얕은 풀밭이 펼쳤다. 간혹 고양이과나 늑대과의 커다란 짐승들을 마주쳤다. 그들은 레오가 관심 밖의 대상인 듯 무시했다.

  노을이 질 만큼 어둑해지자 몸을 좀 쉬게 했다. 레오는 풀숲 뒤 나무 밑에 떨어진 큼직한 나뭇가지들을 잔뜩 주워 왔다. 풀숲 안쪽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두고 큰 이파리를 천장으로 덧대고 나뭇가지들을 뼈대로 삼아 라브의 움막과 비슷하게 지었다. 남은 마른 가지들은 장작으로 불을 때웠다. 노을 밖으로 불빛이 새어나가자 풀잎을 더 견고하게 덧대었다.

  배가 고파진 레오는 먹을거리를 구하려 움막을 두고 다시 나섰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합성 식재료를 들은 가방이 여전히 있었다면 편할 일이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를 통째로 잃어버린 것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살아남아 다행이라 여기고 있지만 아쉬운 건 아쉬웠다.

  레오는 가볍게 무장하고 숲 안쪽으로 들어섰다. 어느덧 별빛이 깊게 내렸다. 여타 이런 사냥 장비가 없는 레오는 권총과 단검을 교차하여 양손에 들고 안으로 더 나아갔다. 풀에 채이는 거친 발소리를 듣고 뛰쳐나가 도망가는 귀가 크고 몸집이 작은 동물들이 보였다. 그간 과일이나 밀죽 같은 것을 먹었으니, 다소 수고스럽더라도 고기를 먹어야겠다 싶었다. 몸이 조금 더 나으려면 영양이 필요하다. 숲에서 큰 동물들은 자신을 무시하는 반면 작은 동물들은 자신을 보면 도망가기 일쑤였다. 새삼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피부에 와 닿았다. 인간이 먹이사슬의 하위가 아닌 것을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생각했다. 이는 자연이 정한 것일까, 동물들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일까.

  지부는 목축을 하는 기업들이 저마다 목장을 가지고 있었다. 사육장은 도시 외부의 격리된 공간에서 소와 돼지들을 한데 모아 기른다. 목장 한 곳이 10㎢에 달할 정도로 규모 크다. 동물들은 목장에서 그들만의 군집을 이룬다. 상당히 구체적인 축산법은 기계식 사육은 불법으로 규정해 놓고 있었다. 인류가 주기적으로 도축할 지언정 그들의 영혼을 보살핀다는 의미다. 소와 돼지는 일주일에 한 번 도시 내에서 각각 10마리씩만 도축이 허가되었다. 그래서 고기류는 상당히 비싼 음식이었다. 대부분의 가난한 계층은 주로 제조기업에서 대량생산하는 합성고기를 먹었고, 이따금씩 봉급일이나 기념일에 행사일정으로 도축고기를 먹었다. 그렇기 때문에 TV 광고로만 접하던 실제 동물들이 눈앞에서 뛰어다니는 광경은 레오의 눈에 이색적이었다.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릴 만큼 직접 접하는 지상의 자연 광경은 그에게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는 한 때 소문을 들었다. 도시 별로 일 년에 몇 명씩 실종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아마 지상으로 올라간 것일 거라고. 그는 그의 아버지도 생각났다. 실종 처리된 그는 지상에 아직도 있을까.

  레오는 높아 보이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비스듬히 자리를 잡고 권총을 견착했다. 범죄자를 제압하듯 동물 또한 다르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최대한 숨과 소음을 죽이고 넓직해 보이는 굵은 가지 사이에 포개어 앉았다. 자리가 불편한 탓에 오랜 시간 있지 않았으나 바뀌지 않는 자세로 앉아 있다 보니 피로감이 더해졌다. 간혹 귀가 길고 눈이 빨간 작은 동물이나 날개를 펴봐야 그의 가슴만한 작은 새가 종종 눈앞에 지나다녔다. 하지만 총탄의 소음을 한 번밖에 낼 수 없으리라 여기고 차분히 기다렸다. 기다림은 미덕이다.

  불편한 자세와 노곤함에 졸음이 조금씩 밀려올 때쯤 푸덕거리는 소음에 귀와 눈이 번뜩였다. 돼지 무리가 나무의 밑으로 아옹다옹 지나고 있었다. 목축으로 쓰이는 돼지보다는 그 생김새가 다소 달랐다. 그보다 덩치가 두 배 정도 더 크고 입가에 뿔이 솟아나고 털이 잿빛처럼 검었다. 조금 차이가 나아 보여도 분명 돼지과가 틀림없음을 확신했다. 무리 중 한 돼지가 나무에 몸을 비비듯 등과 배를 긁어대다가 발로 땅을 헝클어뜨리고는 찡긋하고 부르르 떨며 배설물과 체취를 뱉어냈다.

  레오는 조용히 권총의 가늠자를 통해 돼지의 미간을 조준했다. 탕! 소리가 나며 공기를 타고 소음이 나뭇잎들을 흔들었다. 미간을 정확히 꿰뚫은 우라늄탄이 돼지의 머리뼈를 관통하면서 그의 머릿속을 회전하는 총탄이 헤집었다. 머리 뒤로 피와 뇌수를 뿜으며 이마에 크게 구멍이 난 돼지는 그대로 육중한 몸을 옆으로 쓰러트렸다. 옆에 있던 무리들은 소리가 울린 레오가 있는 방향을 올려다보고는 우당탕 발소리를 우직하게 내며 모두 도망갔다.

  레오는 쓰러진 돼지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무를 타고 내려가다 행동을 멈춰 세웠다. 환각이 그의 시야를 헤집었다. 그는 단말마 어벙한 말을 내뱉었다. 나무를 내려가다 균형을 잃은 레오의 몸이 땅바닥에 퉁 팽개쳐졌다. 내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던가, 하며 눈을 씻고 다시 보려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환각은 머리를 헤집다가 이내 사라졌다.

  한편 돼지는 육중한 몸이 무너짐과 동시에 몇 초 간격을 두고 하얀 증기가 윤곽을 이뤄 하늘로 솟구치다가 땅에서 잡아 끌어내리듯 파랗게 태워지며 땅으로 빨려 들어갔다.

  레오는 몸을 일으키며 잠시 어질한 현기증을 느꼈다. 오래도록 나무 위에서 불편한 자세로 있어서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휘청이는 다리를 추스르며 돼지의 사체로 다가섰다. 사체를 내려다보다 환각이 스쳤지만 이내 다시 사라졌다.

  레오는 잠시 두통일 이기듯 머리를 부여 잡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차분하게 돼지의 등부터 배까지 칼로 가죽을 벗겨내며 근육을 잘라내었다. 최대한 내장에서 멀어진 갈비뼈 위주로 살을 발라냈다. 금세 손이 피로 흥건해졌다. 모두를 챙길 수 없기에 오늘 내일 먹을 만큼만 살을 발라냈다. 유용하게 쓰이겠다 싶은 가죽도 크게 벗겨냈다. 레오는 가죽과 고깃덩이를 들고 인근에 물소리가 나는 강가로 자리를 옮겼다. 천천히 흐르는 강물에 손을 씻고 가죽과 고깃덩이의 핏기를 헹궜다. 문득 달빛이 일렁이는 강물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였다. 매우 어색했다. 본래 검은색일 눈동자가 파랗게 비쳐보였다. 그가 수없이 거울로 본 그의 얼굴이다. 기억하지 못하고 착각할 리가 없다. 하지만 매우 어색했다. 생김새는 그대로인데 동공이 파란색이었다. 물감으로 파란 점을 찍은 듯한 황당함이 눈가를 스쳐 눈을 세차게 비볐다. 강물로 얼굴도 세차게 닦았다. 씻고 닦아도 흐트러진 물가 속 그의 눈동자 색은 변하지 않았다. 레오는 우선 움막으로 돌아왔다. 그는 움막에 앉아 불을 앞에 두고 몸을 녹였다. 큰 풀잎으로 앞으로 먹을 살덩이들을 단검으로 조각내어 개별로 싸맸다. 싸는 와중에 묘한 시선이 스쳤다. 시선이라기보다 환각이 스쳤다. 환각이라기보다 기억이 스쳤다. 그는 그가 마치 과거 돼지로 살았던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돼지의 삶. 동물의 삶. 태어났고, 먹었고, 쌌고, 굴렀고, 싸웠고, 아펐고, 달렸고. 총에 맞았다. 이마가 뜨끈하게 부어올랐다. 손으로 만졌지만 실제로 붓지 않았다.

  역한 기분과 동한 기분이 함께 겹쳤다. 레오는 잠시 살덩이를 놓아두고 잠시 멍하니 앉았다. 하지만 이내 일어서서 다시 움막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의 향기가 콧속와 입안을 꿰뚫으며 가슴팍이 시원해졌다. 레오는 잠시 커다란 달을 바라보며 향취를 몸에 받아들였다. 지부에서라면 느끼지 못할 차가운 바람이 그의 피부에 들러붙어 닭살처럼 솜털을 일으켰다. 도시의 모든 곳에서 항시 돌아가는 에어 컨디셔너에서 느끼지 못할 전혀 다른 차가움이었다. 레오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라브가 평소 주로 채집하던 버섯들과 작은 풀들을 뜯어갔다.

  레오는 움막으로 돌아와 채집해온 버섯과 풀들을 칼로 잘게 조각냈다. 당장 먹을 고깃덩이로 칼집을 냈다. 칼집이 난 속살 안에 조각난 버섯과 풀을 손가락으로 숙 숙 쑤셔넣었다. 예비로 남긴 나뭇가지를 모닥불 양옆에 거치대로 세웠다. 버섯과 풀로 향을 더한 고기를 두꺼운 나뭇가지에 꽂아 거치대에 세워 불로 익혀지게끔 두었다. 시간이 지나자 고기 탄 내가 움막 안을 가득 데웠다. 고기는 점점 바깥이 불로 그을려 바싹 거멓게 익어갔다. 완전히 새까매진 고기를 불 밖으로 꺼내 다시 식기를 기다렸다. 바스러지도록 딱딱한 겉살을 벗겨내자 농익은 속살이 드러났다. 한입 베어 물자 씁쓸한 탄내와 달콤한 버섯 향이 육즙이 어울러지며 꽤 먹을 만했다. 이는 마리아가 간혹 집에서 해주는 요리법이었다. 본래 더 다양한 양념이 들어가지만 모양새만으로도 그녀가 추억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레오는 우선 쉬고 내일 움직이기로 했다. 아직 피 냄새가 가득 배어있지만 돼지에게서 벗겨낸 가죽이 이불로 쓰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가죽을 덮으며 다독이며 잠을 청했다. 천막의 밖은 어느덧 어둑해졌다. 강물 소리가 맹맹대는 벌레소리보다 요란하게 흘렀다. 달이 구름에 가리워지자 땅과 하늘의 구분이 어스러졌다. 레오는 잠을 자다가도 계속 뒤척였다. 꿈자리에 돼지의 눈에 비친 천민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꽥꽥대는 무리의 모습도 아른거렸다. 내가 돼지인가, 돼지가 나인가.

 

 4-3. 믿음 (Piety)

 

  레오는 움막에서 사흘 동안 먹고 지내며 요양을 보냈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몸을 쉬면서도 자연을 돌아보며 생태계 안에서 주거지 없이 생존하는 법을 몸에 익히고 생태계의 환경을 눈여겨보았다. 한동안은 신체가 다소 적응을 하지 못했다. 라브와 있던 산속과는 다르게 산 밑에 내리쬐는 정오의 햇빛은 눈이 멀 것만 같은 강한 동적 충격을 느꼈다. 정오에 한동안 눈을 뜨기 힘들 지경이었으나 익숙해지자 실눈을 뜨고 하늘의 해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적응되었다. 밤낮이 있는 것도 적응되지 않았다. 지부는 수면시간인 0시부터 06시까지 도시의 천장 전등을 어둑하게 두었고, 통상 근무시간인 06시부터 16시까지 천장 전등을 은은하게 빛을 냈다. 그리고 16시부터 24시까지 여가시간으로 천장 전등을 밝게 킨다. 그러한 환경에 백년동안 노출된 레오의 몸이 자연의 생태계에 쉽사리 적응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빛과 어둠의 순환이 어색했다. 잠도 쉽사리 잘 들지 않았다. 해와 달과 별을 지켜보면서도 잡념에 휩싸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두고 지금껏 인류는 지하에 숨어사는 것인가라고 여겨졌다. 사라져 원망스러웠던 아버지가 한켠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올라온 김에 찾아볼까도 싶었다.

  레오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요량으로 천막을 부수고 잔해들을 뿔뿔이 숲에 던져버렸다. 권총 4자루와 탄약집 4개, 단검 1자루를 정비하여 홀스터를 넣고 허리와 다리에 조여 맸다. 쟁여두어 말린 고기는 풀잎에 싸서 보따리처럼 매어둔 가죽에 넣었다. 가죽은 돌돌 말고 끈처럼 매달아 등에 짊어졌다.

  레오는 다시 길을 떠났다. 처음의 마음가짐은 모든 천민을 모조리 죽이리라 다짐했지만, 흐르는 시간과 어색한 광경은 점차 목적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애당초 어디부터 가야할 지 알지 못했다.

  그는 강가를 따라 걷다가 물길이 끝날 때쯤 다른 산을 넘었다. 동물이나 사람의 발길이 많이 오간 것처럼 풀이 죽어 땅이 메말라진 길이 보였다. 그는 정보가 부족하기에 천민들과 불필요하게 엮여 탁 트인 곳에서 싸울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길옆으로 난 수풀을 통해 조용히 이동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멀리 파란 하늘에 연기가 스물 스물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천민들의 마을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가 멀리서 봄직에 지부의 도시와는 사뭇 모습이 달랐다. 통나무나 짚으로 이루어진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1층으로만 이루어진 집들은 그 벽 위에 천장이 놓였고 그 위로 굴뚝이 솟아 연기가 일렁였다. 집안에서 떼우는 불이 그를 타고 흘러보였다.

  레오는 마을이 보일만한 높은 언덕으로 올랐다. 바짝 엎드려 내려다보니 자세히는 보이지 않아도 윤곽이 시야에 잡혔다. 그는 확신에 차는 마음이 크게 동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거리를 걷는 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거리를 줄지어 놓인 작은 집들이 빙 둘러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 안으로는 중요한 건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분명 사무소와 같은 중요한 자료나 인물들이 있을 법한 큰 규모로 다른 작은 집들과는 다르게 담이 높게 쳐지고 굵은 통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우선 그는 마을의 규모에 놀랐다. 자료나 이야기를 통해서 내용은 들었으나 이 정도로 운집한 마을이 있을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의 마음 한켠에 짐승처럼 사는 이들일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상에서 목격하는 그들의 모습은 피부와 머리칼이 다른 인류가 사는 모습이었다.

  레오는 언덕의 수풀에 웅크리듯이 몸을 숨겨 기다리며 마을의 모습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지부에서 보았던 천민들은 짐승에 가까운 모습들이었다. 검은 피부의 밝은 머리칼. 지민에 비해 옷이라고 할 수 없는 너저분한 차림새. 날카로운 창칼을 들고 위협하던 모습. 소름끼칠 정도로 알 수 없는 말을 침을 튀기며 내뱉던 괴음들. 하지만 선입견으로 잡힌 천민의 모습에 비하면 이곳에 살고 있는 자들의 모습은 생각보다 놀라웠다. 흰색, 검은색, 붉은색, 원색에 가까운 그들의 천 옷은 굉장히 다양했다. 심지어 상당히 수수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오히려 지부 사람들이 입는 셔츠, 바지, 치마, 타이 등이 허례가 가득한 개성으로 기억될 지경이었다. 천민들은 위아래가 이어진 천을 영롱한 색으로 이어 붙여 도포로 휘감고 있었다. 마을의 천민들은 피부색도 다양했다. 검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란 사람도 있고 지민처럼 하얀 사람도 있었다. 머리색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는 아직 해가 지기 전의 햇볕은 그의 모습을 눈에 띄게 보여주기에 대놓고 돌아다니기에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옷차림과 생김새가 사뭇 다른 그를 천민들이 마주쳤다가는 분명 좋지 않은 꼴이 날 것이었다. 유리한 상황을 노려야 했다. 게다가 천민들은 제각기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녔다. 그 쓰임새가 정확히 알 수 없어도 분명 위협적인 모양새였다. 불필요한 살생을 일으킨다면 호전적인 그들을 혼자서 막아낼 재간은 없었다.

  그래, 기다림은 미덕이지. 레오는 수풀에서 더 안으로 들어가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낮추고 휴식했다. 우선 해가 져야 움직일 수 있었다. 한참을 졸듯이 꾸벅대자 해가 어제와 똑같이 규칙적으로 땅 밑으로 져갔다.

  ‘여러분. 태양열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랍니다. 빅뱅 사건 이후 은하계의 중심에서 덩치가 나날이 커져가는 태양은 그 표면에서 불같이 뜨거운 빛과 방사선을 방출하고 있는데, 그 열에 오래 노출되면 몸에 이상이 올 수 있답니다. 그래서 천민들이 저렇게 피부가 거멓고, 지능이 모자란 탓이겠지요. 얼마 전 배운 위대한 초기화 기억하나요. 폐하께서는 인류의 실수로 너무나 더럽혀진 지구를 깨끗이 청소하기 위해 지상을 모두 쓸어내고 다시 창조하셨죠. 하지만 아직은 살기가 어렵답니다. 아직 방사선이 가득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절대 호기심으로라도 지상에 올라면 안 된답니다. 오직 폐하의 명을 받은 기동 탐험대만이 갈 수 있고, 그 시간도 제한적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서도 호전적이고 강건한 유전자를 받은 친구는 경찰이 되어 가볼 수도 있겠지만, 이 점은 확실히 알아두어야지요. 알겠나요, 여러분. 지상은 위험한 곳이랍니다.’

  ‘네, 선생님.’

  어릴 적의 기억이 피어올랐다. 이미 지상을 올라와 며칠을 지낸 결과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란 것은 어린 아이라도 알만한 환경이었다. 그는 공교육을 받으며 지상의 역사와 지부의 역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것이 진실이라 믿었다. 당연히 국가의 교육이니까. 다른 교육이나 다른 자료는 일절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는 천민의 마을과 지상의 하늘과 땅을 보면서 그 상식이 모두 부서졌다.

  레오는 라브와 헤어진 후 머리가 맑아지며 실은 최대한 햇볕을 피하며 지내보려 했다. 이왕 여차하면 이곳에서 목적을 이루고 뼈를 묻으리란 생각으로 왔기에, 어차피 계속 피할 수 없기에, 자신의 몸에 흠집을 내는 건 별거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며칠사이 드는 생각은 따듯한 햇볕이 과연 나쁜 것이 맞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처음에는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햇빛이 방사선을 내뿜는 태양열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태양열의 무서움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눈 따위 어차피 목적을 이룰 동안만이라도 보이기라도 한다면 상관없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의문이 들었다. 눈은 익숙해졌고, 신체도 점차 적응되어 갔다. 되려 의문이 들었다. 왜 지부는 지민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을까.

  레오가 엎드린 채 시간을 보내자 햇빛을 눈으로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둑해졌다. 그는 서서히 움직였다. 민가의 거리는 천민들의 이동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어차피 저들과 레오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보를 어떻게 얻어내야 할 것인가.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해석 가능할 만한 증거들을 가져와야 했다. 일단 뭐든 얻어내고 시작할 일이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고, 시작이 반이다.

  레오는 단검만 손에 쥐고 몸을 바짝 숙여 민가의 벽을 타고 숨어들었다. 그는 중앙의 큰 집을 향해 점차 나아갔다.

  돌연 왈 왈 왈 왈! 대는 격한 굉음이 울렸다. 그의 털이 삐죽 솟았다. 벽의 맞은 편에 있는 민가의 공터에서 머리가 길고 꼬리가 긴 개과 짐승이 목에 줄을 매달고 그에게 연신 울부짖었다. 왈 왈 왈 왈! 짐승은 이빨이 크고 날카로웠다. 머리와 몸집 모두 레오의 몸만할 정도로 소리만큼이나 덩치도 컸다. 짐승은 위협적일 정도로 그르릉대며 지치지 않고 짖었다. 이대로라면 들키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는 재빨리 단검을 칼끝으로 거꾸로 잡고 녀석의 미간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단검은 위아래로 춤을 추듯 날아갔다. 칼날이 바람을 갈랐다. 칼끝이 짐승의 이마에 꽂혔다. 이마에 칼이 꽂힌 짐승은 커르럭 하는 괴로운 소리를 내며 발을 몇 번 휘청대다 옆으로 쓰러졌다. 레오는 조용히 거품을 물고 쓰러져있는 짐승에게 다가갔다. 소리가 나지 않으려 발끝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꽂힌 칼을 빼냈다. 칼을 뺌과 동시에 짐승의 몸에서 하얀 증기가 솟구쳐 오르다가 파랗게 태워지며 땅에 빨려 들어갔다. 본 장면이다. 잠시 환각이 스치며 어지러웠다. 지상의 짐승들은 죽으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

  “앗! 너 누구야!”

  글러먹었다. 들켰다. 레오가 뒤돌아보니 겁에 질린 천민 남성이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그를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천민 사내는 양초를 손에 든 채로 그를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그에게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손에 빼어 든 짐승의 피가 붇은 칼로 사내의 목을 낚아채듯 가로로 베었다. 퍽 하며 살갗이 벌어진 사내의 목에서 잘려진 혈관이 피를 토하듯 앞으로 뿜어내었다. 레오의 얼굴과 가슴에 벌건 피가 붉게 튀었다. 사내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레오는 쓰러지는 시신을 피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쿵 소리가 공터를 잠시 울렸다. 역시나 이번에도 쓰러진 그의 몸에서 하얀 증기가 솟구치다가 파랗게 태워지며 땅으로 빨려 들어갔다. 레오는 몹시 당황했다. 이게 무슨.

  레오는 돌연 현기증이 나며 어지러워졌다. 잠시 몸을 휘청거렸다. 내가 이 남자를 알았던가. 레오는 잠시 머리를 흔들었다. 환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휘청 이다가 힘을 내어 몸을 추슬렀다. 짐승과 천민 사내의 시체 두 구를 모두 질질 잡아끌고 공터의 낮은 수풀로 데려갔다.

  후우, 이제 시작이다. 천천히 상황을 보아야 한다. 침착해야 해.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비천한 것들. 여차하면 다 죽이면 그만이다. 레오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그 침착함은 이내 들린 소리에 찰나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 와장창 깨진 유리처럼 무너졌다.

  “여보?”

  방금, 천민의 말이 레오의 귀에 정확히 들렸다. 그래, 그들의 말이 귀에 정확하게 들렸다. 왜. 어째서.

  “여보, 어디 갔어?”

  “꺄악! 피!”

  레오는 수풀에 납작 엎드린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말이 똑똑하게 들렸다. 그리고 또 들려왔다. 그도 그녀와 같은 말을 할 줄 알 것 같았다. 천민 여자는 어깨를 덜덜 떨며 피가 끌린 흔적을 따라 점차 그가 있는 수풀로 다가왔다. 팔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코앞의 위치까지 걸어왔다. 여자의 시선이 피를 따라 밑으로 향해 있었다.

  레오는 빌었다. 지나가라, 지나가라, 지나가라. 불필요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솜털 하나 날숨 하나 들숨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무기를 꺼내지 않았다. 여자의 발끝이 레오의 정수리에 가까워졌다. 발로 차면 차일 만큼 가까워졌다. 여자는 내려다보았다. 끝내 여자와 레오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동공이 놀랄 만큼 커졌다.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탕!! 노리쇠가 탄약을 치는 탕 소리가 마을의 고요함을 깨트렸다. 가까이에서 발사된 탄알은 여자의 미간을 뚫어 머릿속에서 피를 머금고 회오리를 치다 그녀의 뒤통수로 빠져나갔다. 여자의 구멍 난 이마 사이로 노란 달이 보였다.

  여자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레오는 쓰러져오는 여자의 몸을 피하면서 옆으로 굴렀다. 레오는 다시 선택했다. 그는 여전히 권총을 든 채로 마을의 변두리로 달려 나갔다. 온 길과 반대로 달려 나갔다. 여자의 몸은 쿵 소리를 내며 자빠졌다. 달려 나가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분명 그녀의 혼이 땅으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알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무척 어지러웠다. 분명 현기증 같은 것이 아니었다. 천민 사내를 죽일 때와 같은 느낌, 같은 증상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환각. 레오는 시야가 어지럽고 뇌가 뒤흔들리는 충격에 발을 휘청이다 접지르며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아주 내가 범인이라고 광고를 하는 구나. 똑똑하지 않지만 바보는 아니다. 그는 라브가 원인이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다른 여지는 없었다.

  불의 세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해놓은 거야.

  초현실적인 상황은 사람의 이성을 어그러뜨린다. 더욱이 그것을 직접 보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반복되면 익숙해진다. 증거가 필요했다. 실험이 필요했다. 죄책감 따위는 없다. 그래, 어차피 천민 따위야.

  마을이 다소 어수선해졌다. 시간이 더 흐르자 매우 시끄러워졌다. 흙먼지를 털며 일어난 레오는 민가의 지붕 위로 올라가 바짝 엎드렸다. 그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중요한 건물로 보이는 성채에서 횃불을 든 병사들이 우르르 나왔다. 대략 열 명 정도로 보였다. 성채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저들이 누구인지도 알 것 같았다. 칼을 찬 차림새도 당연히 군인처럼 보이지만 각기 어떤 군인인지 대강 인지까지도 되었다. 그리고 이곳 마을의 이름도 알 것 같았다. 왜 아는 것인가.

  레오는 병사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피가 끌린 흔적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시체 두 구와 늑대 사체 한 구를 발견하고는 횃불을 흔들며 큰 소리로 서로 경고했다. 그들은 바삐 움직이며 흩어졌다. 레오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애를 쓰며 숨죽였다.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가까워질 땐 숨도 참았다. 인내하며 시간을 기다렸다. 횃불이 멀어지며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레오는 권총을 집어넣고 단검을 빼 들었다. 한 병사가 그가 있는 집 근처로 다시 돌아와 횃불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횃불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명암이 짙어지며 그 위로 그림자가 새겨졌다. 레오는 밤하늘의 그림자로 들어갔다. 검어진 몸을 일으켰다. 병사가 다시 집밖으로 나왔다.

  레오는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칼날이 달빛을 반사하며 병사의 뒷목을 그었다. 병사의 목뼈가 잘리며 목이 반쯤 벌어졌다. 그가 상처 부위를 손으로 틀어막고 휘청였다. 하지만 잘린 목도 덜렁덜렁 휘청이며 그의 발걸음 뒤틀었다. 레오는 팔뚝으로 그의 다리를 있는 힘껏 올려 쳤다. 한쪽 다리가 들린 병사는 옆으로 넘어졌다. 레오는 오른손의 단검으로 그의 가슴뼈를 뚫고 심장까지 칼을 쑤셔 넣었다. 뼈가 깨지는 소리가 꺼걱였다. 병사는 잠시 부르르 떨었다. 그는 가슴 쪽을 애써 잡으려다가 힘을 잃고 팔다리를 뻗었다. 쓰러진 병사의 몸에서 하얀 증기가 솟구치다가 파랗게 태워지며 땅으로 빨려 들어갔다.

  레오는 몸을 낮게 낮추고 벽을 타며 살금살금 이동했다. 병사들의 눈을 피하며 다른 벽으로 넘나들며 숨었다. 그늘진 벽으로 한 병사가 다가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레오는 그늘진 벽 모퉁이에서 기다렸다. 병사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레오가 몸을 빠르게 일으키며 그의 목을 단칼에 그었다. 병사의 목에서 정맥이 잘려 나갔다. 피부가 벌어지며 갈 곳을 잃은 피가 분출하며 공중에 내뿜다가 이내 바닥을 적셨다.

  “저기다!”

  멀리 있던 병사가 낌새를 보며 외쳤다. 모퉁이에서 죽은 병사의 뒤에 다른 병사가 뛰어왔다. 레오는 죽은 병사의 창을 주워들었다. 그는 어깻죽지가 빠질 만큼 허리를 비틀어 반동을 주었다. 그의 근육이 탕 튕기며 어깨가 빠져나갔다. 반동을 받은 창이 매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창은 밤공기를 가르며 걸어오는 병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꿰뚤린 병사의 몸이 날아가며 등부터 땅에 나뒹굴었다. 창은 등뼈까지 관통했다. 병사는 날아가 멈췄지만 등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대신 등에 뚫린 창날에 바닥이 걸렸다. 병사는 가슴에 뚫린 창을 바닥에 꽂고 대롱대롱 흔들리다가 옆으로 튕기듯 쓰러졌다.

  레오는 쿵쾅거리는 고동을 진정시키며 잠시 창에 죽은 그를 살펴보았다. 뭔가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병사는 얌전히 누워있었다. 레오는 설사 그가 죽지 않았나, 라는 생각에 재빨리 달려가 누워있는 그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칼을 빼자 그의 얼굴로 피가 튀었다. 병사는 숨을 쉬지 않는 것이 죽은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광경은 없었다. 레오는 잠시 칼을 내려다보았다. 칼과 총을 모두 라브가 준 것이다. 불의 세례라며 끓여낸 무언가. 그는 잠시 생각을 내두르다 깨달았다. 다른 병사가 이를 보기 전에 다른 어두운 곳으로 뛰어갔다.

  레오는 환각이 스치던 아까 전에 비해 이제는 어지럽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그들의 이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을의 형태도 알고 있었다. 라브가 재밌는 짓을 했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라브가 준 무기로 생명체를 죽이면 그들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레오는 다시 어둠에 숨어들며 두어 명을 뒤에서 몰래 칼로 찌르고 베어 죽였다. 죽여 나갈수록 점차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성채에서 더 많은 병사들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레오는 어쩔 수 없이 지붕으로 기어올랐다. 포위망이 더 좁혀졌다. 횃불이 날아왔다. 짚으로 된 지붕이 불에 타오르며 열기가 더해졌다.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처음 한 두 개씩 날아오던 화살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너 개씩 너 다섯 개씩 날아왔다. 화살촉이 그의 팔이며 다리며 뺨이며 스치며 피부를 찢었다. 어스름하게 보이는 포물선을 보며 피하고는 있지만 더 지체하다가는 화살 무더기에 꼬챙이처럼 꿰어질 판이었다.

  레오는 무릎을 꿇고 권총을 빼 들었다. 그는 보이는 대로 조준하며 총을 쐈다. 탕 탕 탕 탕 밤하늘에 공기를 짙게 울리는 폭음이 이리저리 내동댕이쳤다. 온 마을이 울렸다. 시야가 매우 어두웠다. 레오는 탄창 하나가 비워질 때까지 셋만 맞출 수 있었다. 군데군데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탄창 하나를 빠르게 공중에 내던졌다. 찰칵. 남은 탄알집 3개.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듯 밤공기를 쩌렁쩌렁 울리듯이 격한 굉음을 내는 총탄 소리는 병사들과 천민들에게 두려움을 심었다. 도망가는 이도 있었다. 숨는 이도 있었다. 화살들이 여전히 레오에게 날아오며 바람을 가르며 슝 소리를 냈다. 그가 있는 지붕의 볏단에 화살들이 꽂혔다.

  레오는 화살에 맞지 않도록 엉덩방아로 지붕을 미끌리듯 내려왔다. 머릿결을 스치며 바름을 가르는 화살 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몸의 잔털이 모두 솟아났다. 레오는 내려온 후 벽으로 숨어들었다. 눈에 보이는 허둥대는 병사들을 가늠자로 천천히 조준했다. 탕 탕 탕. 총탄이 날아가는 굉음이 다시 마을을 울렸다. 병사들은 한 번에 머리가 뚫리거나 여러 번 총알을 맞고 공포감과 출혈로 죽어 갔다. 여러 명의 병사들이 혼을 파랗게 하얀 연기를 뿜었다.

  탄약이 얼마나 남아 있지,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레오는 조금 더 신중하게 조준을 했다. 멀리서 맞지 않을 것 같으면 공포에 질린 병사의 앞으로 달려가 근접하여 총을 쏘았다.

  성채에서 나팔 소리가 났다. 뿌우우. 커다란 문을 닫는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려왔다. 필시 모두 도망가 응집했으리라. 레오는 일단 주위가 정리되었을 거라고 안심했다. 홀스터의 권총들을 살펴보았다. 탄창 하나에 10발이 들어가고, 아직 쓰지 않은 권총 2자루를 포함해 예비탄창으로 3개를 더 가지고 있으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50발이라고 계산됐다.

  나 홀로 언제까지 싸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아끼고 봐야 했다. 지부를 불법 탈출한 신세이니 내 편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고독함은 그의 몸과 혈관을 춥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있는 시점은 한참 전에 넘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 시점을 지날 때 그게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레오, 우리 아기 낳을까.’

  ‘나는 너와, 네가 가진, 네가 낳은, 모든 것을 사랑할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마주 서서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추던 마리아가 그저 머리를 맴돌았다. 그러던 와중에도 점차 기억이 흡수되고 뒤섞이며 그녀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반짝이는 초록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며 레오의 이름을 속삭였다.

  우선 해야 할 것이 확실해졌다. 죽은 병사들이 남긴 기억의 편린이 계속 그에게 누적되었다. 기억의 편린은 성채 안에 많은 것들이 있을 거라고 그의 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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