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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밀우유유전 (고구려 동천왕기)
작가 : 태풍
작품등록일 : 2022.2.28

중국은 위, 촉, 오의 삼국시대로 접어들었고, 고구려는 위나라의 땅을 침략했다.
위나라에 호의적이던 고구려가 배신하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 참여한 장수 중 밀우는 고구려의 무사였고, 유유는 신라의 낭객이었다.
밀우와 유유는 멸망의 끝에 선 고구려를 구하며 전쟁의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본다.

 
3. 구름 (만남)
작성일 : 22-02-28 20:21     조회 : 198     추천 : 0     분량 : 15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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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우는 1천명의 고구려군과 함께 요동 사막을 건너 안시성으로 돌아왔다. 장장 보름 동안의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전보다 모래와 흙보다는 좀 더 푸르러진 안시성의 성문에 다다르자 성주 유옥구가 백성들을 이열로 거느리고 마중을 나섰다. 득래가 말에서 내려 푸근한 미소를 짓는 유옥구 앞에 걸어가 무릎을 꿇며 고개를 숙였다.

  “신 득래, 요동 원정 후 무사귀환 하였습네다.”

  “잘했그라. 군사가 거의 줄지 않은 것을 보니, 전쟁이 일방적이었거나 무슨 사유가 있어 크게 싸울 일이 없었나보라지? 여튼 모두들 무사히 돌아와서 잘됐다니 잘됐매. 군사들을 가족들에게 돌아가케 하고, 자네도 노곤할 터지만 피로는 조금만 풀고 어서 관에 들어와 이야기 좀 나누라우.”

  “네, 주공.”

  득래는 일어나서 군을 이끌고 병연장으로 돌아갔다. 득래는 수하들을 나누어 위나라에서 논공으로 받은 금붙이나 보화들을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공평하게 천명분으로 원정을 다녀온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사망한 병사들의 몫까지 챙기어 그 가족에게 전달하여 주기를 당부하니 전사자들의 동료들이 감복하여 눈가에 이슬같은 망울들이 맺혔다. 또한 남은 군량은 창고에 넣되, 군사들을 잠시 병연장에 앉아 대기토록 하여 관청의 주부 관료가 각 병들의 신분과 직책에 따라 사병일 경우에는 그 급을 한단계 높혀주고, 성내 백성 출신일 경우에는 일정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 서운한 이가 없도록 세세하게 신경쓴 후 해산토록 하였다.

  밀우는 엄연히 인행무사의 지위가 엄연히 있었으므로 별도의 상을 받는 대신 모두가 떠난 후 자신이 본래 차고 있던 붉은 두건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함께 건내는 칼이 있었는데, 검은 칼집은 은빛으로 보이는 삼족오가 앞뒤로 수마리가 각인되어 있었고, 칼의 손잡이도 검은 주물빛에 흑색 끈으로 동여져 흑빛과 은빛의 조화가 아름다워 외형만 보더라도 그 누가 보든 보검이라 칭할만 하였다.

  “이 검은 성주님께서 특별히 원정길동안 대장간에서 따로 제작하여두신 칼이그라. 사양말고 받아두거라우. 자네도 조금 쉬도록 하고, 쉬는 동안 내 일을 좀 정리하고 자네 집으로 찾아갈 터이니, 성주님을 함께...”

  먀오오- 득래가 따로 시종에게 받아둔 칼을 밀우에게 건내는 동안 그 시종을 졸졸 따라오던 검은 삵이 어느덧 한아름 울며 밀우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새를 못참고 달려갔더라요.”

  여시종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검이가 꼭 사람처럼 그리워했나 봅네다.”

  밀우가 검이를 머리부터 등까지 쓰다듬자 그르릉 소리를 내며 이마를 몇 번씩 밀우의 턱에 비비고는 어깨에 휭 올라탔다. 밀우는 검이가 무엇을 하든 웃으며 잠시 내버려 두고는 몸가짐에 걸리고 불편하여 다시 땅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땅에 발을 디딘 검이는 다리 사이를 이리 저리 오가며 이마를 콩 콩 부딪쳤다.

  “여튼 그건 내 보기에도 굉장히 날센 보검같으니, 잘 지니고 써보게. 하튼 이따 만나자구.”

  “예, 대장. 애쓰셨습네다.”

  밀우는 검이와 동행하며 길을 나섰다. 간혹 종달새가 지저귀는 소리, 대장간에서 쇠를 치는 소리, 이네 저네 떠들며 들리는 우리말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신발을 땅에 내딛을 때마다 짖이겨 퍼지는 흙냄새가 분명 고구려의 체취였다. 깃발과 국경과 땅이 다르다고 어찌 이리도 다를까 싶었다. 가을이 익어 붉노란 잎사리들이 날려 얼굴을 스치웠다. 열매와 익은 풀의 냄새가 그득하였고, 저마다 집집마다 곡을 찧고 알을 따고 솥을 지어 풍족한 향기가 마을을 감쌌다.

  밀우가 전에 묵던 객소에 도착하여 환한 얼굴로 맞이하는 주인의 안내를 받았다. 주인이 빈 목그릇에 살코기를 몇점 놓아 바닥에 두니 검이가 달려들어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허득허득 먹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그새 친분이 있어보였다. 짐을 놓고 끈을 풀어 당당하게 매인 갑옷을 벗으니 근육이 한창 가벼워졌다. 너털너털 옷을 터니 갑주와 옷에 배인 땀냄새가 코를 찌르었다. 몇백일인지 수개월인지 물에 젖고 땀에 젖고 햇볕에 데이고 성할 날 없이 고생한 티가 역력했다.

  후우우

  밀우가 한숨이 푸욱 내쉬어지며 속저고리 차림으로 이부자리에 터불썩 퍼져버리니 눈막이 어두워지며 잠이 들었다. 새곤새곤 코로 숨을 먹고 입으로 뱉는 것이 신체와 마음이 모두 잠든 것이리라.

  창틀 너머 산등을 비추는 햇님이 구름에 가리워질 만큼 시간이 금세 흐르자 톡 톡 하며 문이 두들겨졌다. 아무런 말이 없자 득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허연 빛의 두루마기가 원래도 훤칠한 그의 인물새를 밝게 비추어 주었다. 시신처럼 아이처럼 멋들어지게 잠에 빠져 있는 밀우를 득래는 웃으며 의자를 끌어다 앉아 한참을 바라보다가 햇님이 구름넘어 산에 가리워질 정도가 되자 밀우를 흔들었다.

  “가자우. 언제까지 그래있을텐가. 누가 산 채로 잡아가도 모르겠구만.”

  밀우는 어버어버 눈을 부비벼 얼굴을 이불에 파고들었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화들짝 일어나 득래를 보며 황망하게 허둥대다 넘어졌다.

  “얼굴만 씻어내고 가겠습네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라요.”

  “알았으라.”

  밀우는 탁자에 놓인 물이 담긴 대야에 얼굴을 푸욱 집어넣고는 수십초를 있더니 푸악 하며 고개를 들어 손바닥으로 머리칼까지 물질을 하며 다시 동여매었다. 그리고 득래에게 받은 보검을 잠시 빼어내고는 허리춤에 찼다. 둘이 문을 나서니 가을빛 냄새는 어느덧 밀을 찌고 고기를 태우는 침을 한우걱 삼킬만큼 풍성한 음식의 냄새가 저잣거리에 널려있었다.

  밀우와 득래가 관청에 도착하자, 성주 유옥구가 따로이 방에 자리를 마련하여 곡주와 음식들을 차려놓고 있었다. 소금을 뿌려 불에 데친 고기와 솥에 볶아낸 산나물들이 인상적이었고, 유옥구가 병에 담긴 술을 잔에 따를 때에 탁하고 누렇게 흘러나오는 술의 향기가 꽤나 좋았다. 밀우와 득래가 그간의 여로에서 있던 일들을 소상히 이야기하고 유옥구는 주로 이따금씩 호탕하게 반응하고 칭찬하며 경청해주었다. 사마의를 논할 적에는 치켜세우되 경계하였고, 공손연을 논할 적에는 경멸하되 가여워하였다.

  “그래, 득래 자네가 느끼기에 양평은 어떠하던가.”

  “성은 크지만, 주위가 평지로 가득해 수비에 좋지 않고, 평지가 많아 목축과 농사에 이롭지만, 물이 적어 가뭄에 위태롭습네다.”

  “사람들은 어떻다지.”

  “주로 한족들이긴 하온데, 오환인도 있고, 흉노인도 있고, 중국말에 익숙해진 예맥인도 있고 꽤나 다양했습네다. 주인이 꽤나 자주 바뀌는 성인지라 백성들의 분포도 각색이고 충심도 낮아 외지인이 통치하기에 상당히 어려워 보였습네다.”

  “흐음, 그럼 요동은 어떻다지.”

  “요동은 주로 한족들로 이루어졌는데, 그곳은 흉노와 오환같은 북방인들과 다툼이 잦고, 잦은 침입으로 땅이 다지지 않고 주민도 이렇다 할 호족이 없어 꽤나 혼란스러운 지역 같았습네다.”

  “안평은 취해도 요동은 내비두는 것이 우리한테도 올바르겠구만. 굳이 수고스러울 필요는 없지카이.”

  “제 생각도 그렇사옵네다.”

  “위나라는 안평과 요동건은 어떻게 하겠다고 하던가.”

  “조만간 위나라에서 사신을 보내고 주민과 성을 갈라 국경을 논하지 않겠습니까. 성주께서 수고로이 염려할 부분은 아니겠지요.”

  유옥구는 소탈하게 웃었다.

  “그라매. 우리는 우리가 할 것을 한 거고, 매듭은 왕실에서 중부녀석들이 지어야지. 그나저나 자네도 공을 세웠으니, 직위를 한 대 더 높여야지. 내 이야기를 잘 해놀터이니 큰 물에서 물장구 치라구. 내 자네를 오래 데리고 있었지만, 자네같이 영민한 친구는 중앙에서 큰 일을 하든, 일만의 군사를 이끌어 적국의 목을 치든 해야할 것이야. 난 그리 믿네.”

  한껏 고양받은 득래도 술병을 따라 유옥구의 잔을 채우며 웃었다.

  “밀우는 이제 돌아가야지? 어땠는고, 첫 경험이.”

  밀우는 알딸딸하이 붉어진 얼굴을 부끄러워하며 답했다.

  “흡사 저와 동료들 군 모두가 맹수가 된 것 같았습니다. 칼과 힘은 꼭 써야할 때만 써야할 만큼 자비롭지 않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폭력에 가슴이 지배될 때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광기도 있더군요. 피가 끓어오른다고 할까. 정말 글자 그대로 불에 데인 것처럼 피가 끓는 기분이었습니다. 값진 경험입니다.”

  “흐음, 그래. 자네는 굳센 친구이니 장차 대왕과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무사가 될 것이야. 그 마음 잊지 말게.”

  셋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멈추지 아니 하였고, 고기는 열을 잃어 하얀 기름을 그릇에 묻혀 집어들 때마다 쩌억쩌억 하며 떼어내졌다. 달이 붉으스름하게 동그란 것이 실은 햇님이 뒤에 숨어있는 게 아닐까도 싶었다.

 

  밀우는 붉은 두건을 쓰고 고향 동부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난 날로부터 가는데에 1년, 요동에서 1년, 오는 데에 1년이 걸려 모두를 더해 대략 3년즈음이 걸렸다. 어느덧 밀우의 인중과 턱은 수염이 가득해졌고, 때때금 작은 칼로 정리를 하기도 했지만, 거뭏게 덥수룩해진 것이 떠날 때의 젊을 적보다 자못 위엄이 생겼다. 형 밀풍이 약 계절이 네 번 변하기 전에 먼저 돌아왔고, 동부에서 백 명 가량 정도 되는 군을 이끌고 촌락을 지키는 백인대장으로 장성해있었다. 밀설, 밀풍을 비롯한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버선발로 나와 반겨주었고, 이윽고 고향으로 돌아왔노라며 밀우도 두건을 벗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생이 많았매. 얼굴이 상했구마. 이것은 또 무엇이단가. 범인가.”

  밀풍은 밀우가 걸치고 있던 백호의 가죽을 보며 연신 둘러보며 감탄했다. 밀설도 장성해진 밀우를 보며 온화하게 흐뭇해하였다. 큰 여동생과 작은 여동생은 각기 밀우의 팔뚝과 다리에 매달리다가도 뒤따라 온 검이를 보며 신기해하며 말을 걸기도 하였다. 검이가 이내 그들이 귀찮아 흙바닥을 팽개치고는 밀우의 두루마기를 긁으며 어깨에 올라타 그르릉 노려보면 그조차도 신기한 여아들은 제각기 까르르 웃으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칼을 한번 보여 주그라.”

  밀설이 밀우가 소지하고 있던 검은 칼을 궁금해하였다. 밀우가 건네어 밀설이 칼을 스릉 뽑아보니 강철의 기운이 맴돌고 지는 햇빛에 비추어 밀설의 눈동자를 비추니 밀설은 이내 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명검이구나. 어디서 나었드냐.”

  “안시성의 유옥구 성주가 제작하였습네다. 절 예삐 여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는 필시 안평의 강철로 만들었을게다. 좋은 칼이다. 옥구가 따로 서신을 보내어 내 미리 알긴 했다만, 요동을 다녀왔다지?”

  “예, 아바지.”

  “다치지 않고 잘 돌아와서 다행이다. 넌 엄연히 인행무사였으니 거절하여도 무방한 것이었지만, 넌 그를 수긍하고 다녀왔지. 아마 그것이 시간과 몸을 쓸 만큼 경험해볼 가치가 있다고 여겼겠지. 안그러매.”

  “예, 맞습네다.”

  “내 아들내미를 잘 키워 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만큼은 명확한 듯 싶구마. 예부터도 그랬고 오늘날도 그렇고, 넌 싸움에 있어 댓가를 지불할 지언정 물러서지 않았지. 세상에는 일평생 밭만 일구는 사람도 있고, 관부에 앉아 정치하는 치도 있고, 가축을 몰고 수렵하며 대지를 떠노는 이들도 있지. 넌 수많은 길 중에 그것을 택하고 댓가를 지불한기야.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따르기만 하는 것은 겉으로 좋아하는 척만 하는 것이지. 비록 네가 삶토록 배워온 것이 싸움이 대부분이었겠으나, 내 많은 길을 열어주고 네가 택한 것이니, 의지를 잃지 않도록 해라우.”

  “예, 아바지.”

  밀우는 밀설과 함께 집으로 걸어가며 듣는둥 마는둥도 하였으나, 뇌리에 박히는 것은 분명하기도 하였다. 밀우는 동부의 밀가 집안 자제이기는 하나, 고구려는 능본주의가 만연한 사회였기에, 그 집안의 직위가 높다 하여도 본인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뜻이 다른 데에 있다면 길은 수없이 열려있기도 하였다. 농민 출신도, 어민 출신도, 말갈 출신도 그 어떤 능을 발휘함에 있어 출중하다면, 관부나 중앙정부에서는 능력을 귀하게 여겨 중용하거나, 막지 아니하였다. 단지 밀우는 동부 밀가에서 병법이나 무술을 배워왔기에, 고향에 돌아와서 자신이 뜻하고자 한다면 동부 지방의 지휘관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석양이 지고 밀가 집안이 저녁 식사를 하며 밀설이 물었다.

  “네 인장을 왕실에 올려 동부의 무사로 이름을 올릴 것이다만, 장차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더냐.”

  그간에 고향으로 돌아오며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던 밀우는 솥에 푸욱 삶아진 닭의 뼈를 허겁지겁 뜯으며 답했다.

  “여행길에 이야기를 들으며 푸르게 펼쳐진 큰 물이 있다 들었습니다. 바다라고 하온데, 한 번 보고 올까도 싶습니다. 형님이 다녀온 안평이 좋지 않을까도 합니다.”

  안평을 다녀온 밀풍이 말했다.

  “내 일전에 다녀와보니, 그 빛이 아주 영롱하더매. 그곳 주민들은 물에 들어가서 물질도 하던데, 나는 뭐 그런 것은 처음 봤으니 엄두도 못냈고르. 그런데 왜 오는 길에 들려서지 않았고?”

  “길바닥에 매년 눌러 앉을 수는 없지라.”

  “그렇긴 하매.”

  밀설이 물었다.

  “그럼 언제 떠나려꼬?”

  “크게 정할 필요 있겠습네까, 아버지와 형님께 조금 더 이래저래 배워야지요. 다음 겨울이 올 때에 떠나면 안평이 더울 적에 도착할 것 같으니 그리하여도 될 것 같습네다.”

  “그래. 이제 무사로서 말도 개마하는 법도 알아야지. 옛말에 이르길 유비무환이라 하지 않더냐.”

  “예. 아바지.”

  이틑날부터 밀풍은 백인대를 이끌고 동부와 국경을 맞댄 신라 부근을 순찰하거나 훈련에 매진하였고, 밀설은 관아일이 끝나고 돌아올 때마다 밀우와 동행하여 말을 개마하고 비창하는 법을 사사로이 알려주었다. 개마는 대개 말의 안장을 중심으로 하여 사슬로 이루어진 갑주를 씌우고 말머리에도 뿔을 덧댄 사슬을 입힌다. 이러한 방법 유리성왕 시절부터 착안된 것으로 고구려의 전통적인 갑주술으로 자리잡혀 대부분의 무사들이 사용하고 범용되어 이를 모아 개마무사라 지칭했다. 고구려군의 주된 용병술은 기수의 머리부터 말의 발끝까지 갑주로 무장한 기병을 일백명 단위로 쪼개어 이루어 일시에 적의 본진에 들이치는 것이었는데, 그 어떤 진법이나 방패도 무시하고 수많은 사상을 낼 만큼 고압적이어서 개마무사대라 칭해지는 검은 말과 기수들이 머지를 뿜으여 진군하면 이를 본 주위의 적국들은 겁을 먹곤 하였다. 이때 비창이라 하여 말에 올라타 달려갈 적에 창을 쥐는 법도도 따로 있었는데, 말고삐를 쥐고 말을 차고 달려 말의 속도가 붙으면 두 다리로 안장 다리를 강하게 움켜신어 떨어지지 않되, 창을 왼손으로 거꾸로 꼬나쥐고 창끝을 오른손바닥에 붙여 창의 칼붙이에 부딪히는 것들을 모두 꿰뚫는 형세였다. 이는 개마무사의 전통적인 돌격법으로서 달려가는 이의 수가 홀로 있다 하더라도 갑주의 무거움과 창의 관통력이 매우 위력적이어서 대상을 뚫는 기세가 파괴적이고 효과적이었다. 밀우는 하루에도 수백번씩 말을 타고 달리는 훈련을 반복했다. 그리고 갑주를 입혀 답답해하는 말을 위로하고 마음을 다했기에, 밥을 먹고 책을 보고 잠을 청하는 일 이외에는 항상 자신의 말과 하루를 함께하였다.

  책은 대개 중국의 한문을 빌려 쓰여있고, 대부분의 서적이 한문을 우리말에 맞추어 읽고 쓸 줄 아는 관료나 선비들의 필사나 자작으로 이루어졌기에, 그 값이 매우 귀중하였으며, 삼한의 시절부터 유서 깊은 가문에서 스승의 교육을 받지 않는 한 대부분 말은 통하여 이루되 글은 읽고 쓸 줄 몰랐기에, 이는 일반 백성과 호족의 큰 차이점을 두었다.

  밀우는 말을 기르고 타는 일 이외에 아버지의 서고에서 꺼낸 무예서 천지도법, 병법서 육도삼략, 역사서 춘추좌씨전 등과 같은 책을 들고 대개 자신의 방에서 읽고 외우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창가에 비친 노란 햇빛이 뜨거웠다가 따듯해졌으며, 따듯하다가 차가워졌다. 따스한 노란 바람이 서늘한 회갈 바람이 되도록, 여름에서 가을이 다 되도록 밀우는 책을 놓지 않았다. 또한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유옥구가 준 칼을 휙 휙 휘두르며 무예를 단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밀우는 어릴적 형과 함께 목도를 가지고 놀며 뛰놀던 대숲을 찾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덥수룩해진 수염과 장성해진 체격과 목도가 아닌 철검이었다. 수년 가량이 지나도 하늘이 빚어 만든 자연은 어찌 이리도 그대로인지 풍성하고 촘촘한 대나무들이 참으로 매끄러웠다. 수천 수만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대나무가 다열로 늘어서있고 그 위로 잎싸리가 하늘을 덮으니 이를 본 적 없는 이에게 동부는 녹색 구름에서 녹색 비가 내려 그대로 굳었다고 설명해도 믿을 참이었다. 밀우는 하릴없이 터벅터벅 걸으며 칼이 든 칼집으로 대나무를 퉁 퉁 쳐가며 거닐었다.

  대나무가 제각기 퉁 통 퉁 다른 소리를 내며 운율을 이루었다. 밀우는 소리가 유난히 다른 두 개의 대나무를 퉁퉁 통통통 쳐대며 괜시리 타악을 내기도 하였다. 사르르 대나무들이 한쪽으로 휘날리며 바람을 나부끼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바람은 없는걸 이라고 생각하며 밀우는 의아했다. 검은 새들이 나다녀도 이 대나무에 둥지를 어떻게 틀겠느고 하며 의문이 생기기도 하였다. 밀우는 기이함과 이질감을 느꼈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작은 나뭇가지를 한 대 꺾어 무릎을 굽혀 범도술의 자세를 취하며 나뭇가지를 가볍게 쉭 쉭 휘둘렀다.

  깡 깡, 땀이 모공에 송골송골 맺힐 만큼 움직임이 격해질 때쯤 매우 이질적이고 이 숲에서 절대 들리지 말아야 할 철붙이가 부딪히는 멀지만 나지막히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대장장이 노릇을 할 것도 아니고, 말갈인과 누가 싸움이라도 붙은 것인가?’

  밀우는 나뭇가지를 휙 집어던져 버리고는 칼집을 꽈악 쥐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종종 다시 깡 깡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숲이 넓고 어지러워 소리가 동쪽에서 들리는가 싶다가도 북쪽에서 울리고 서쪽에서 울리는가 싶다가도 다시 남쪽에서 울려 밀우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밀우는 설사 틀릴지언정 굳굳하게 한쪽으로 나아가야 지레짐작할 수 있다 생각하여 곧장 동쪽으로만 발걸음을 재촉했다. 계속 걷고 있자니 철소리가 희미하게 작아짐을 느껴 다시 북쪽으로 발을 돌려 귀를 기울인 채 걸어가니 과연 북쪽이 맞았다.

  밀우는 저 멀리 잔상을 보았다. 검은빛 서너개가 이리저리 휙휙 도는가 하면 갈색빛 하나는 제자리에서 이따금씩 뾰족하게 잔상만 뿌리며 움직였다. 어느덧 사람의 형체와 철소리가 정체가 칼이란 것이 보일 만큼 가까워지자 밀우는 행여 소리라도 들려주고 싶지 않아 천천히 몸을 바싹 엎드려 지켜보기만 하였다. 검은빛은 검은 옷차림에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고, 갈색빛은 얼핏 보아도 고생에 누추해진 해진 옷에 기다란 머리칼이 꽁지만 간신히 묶여 말꼬리처럼 길게 나풀대었다. 누추한 옷의 청년은 얼굴이 흙먼지에 찌듦에도 입술이 붉고 매우 곱상해 보였다. 검은 옷의 장정들은 얼굴을 가렸기에 알아볼 수는 없었다. 검은 장정들이 칼을 들고 일시에 달려들면 누추한 청년은 힘겨워 보이는 몸을 재빠르게 구르고 날고 피해내며 다시 각기 칼을 휘둘러내는 그들의 칼질을 곧장 막아내고 찔러내었다. 청년의 위세가 매우 궁핍하고 위태로워 보였지만 형태로 보아 쫒기는 자임이 분명해 보이고 서로 간에 누가 악한지를 알 수 없었기에 밀우는 단지 잠자코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누추한 청년이 검은 장정 하나가 내리치는 칼을 땅을 딛고 공중에서 피해내고는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다른 장정의 몸을 아래서 위로 긁어내었다. 베인 장정이 윽 하며 주춤거렸고, 청년은 발을 땅에 다시 딛고는 또 다른 장정이 칼을 찔러 내올 때 날랜 속도로 칼을 든 그의 팔을 낚아채고는 몸이 빈 장정의 가슴에다 칼을 냅다 꽂아버렸다. 밀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고 신속한 청년의 몸놀림을 보며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장정이 내지르는 칼에 시신의 몸에 꽂힌 칼을 미처 빼어내지 못하고 급하게 몸을 피한 청년은 빈손으로 칼을 피하며 허둥대다가 대나무를 발로 딛고 껑충 멀리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꽁무니를 내쫓고 있는 힘을 다해 저 멀리 달려나가 도망쳤다.

  밀우는 일순간 충동이 들었다. 왜 그래야 할까 라는 자문은 머리에 있었지만, 그래야 하지 않을까란 답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밀우는 몸을 일으켜 청년을 쫓는 장정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멀리 길을 돌아 그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 내달렸다. 장정 둘은 돌연 각기 다른 길로 헤어져 청년을 쫒을 생각으로 헤어져 달렸다. 청년의 뜀걸음이 그리도 빠른 것일까. 밀우는 자신과 가깝게 달리는 장정을 곁눈질하며 함께 숲을 헤치며 내달렸다. 수초 수분이 흘렀을까, 밀우의 뜀박질을 눈치챈 듯한 장정이 급하게 뜀을 멈추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파르르르르- 밀우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그를 향해 칼을 뽑고 내달리며, 당혹감에 칼을 들어 공격자세를 취하는 장정의 앞으로 털썩 등이 닿을 만큼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아 몸이 속도에 못이겨 땅을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사악- 장정이 미끄러져 오는 밀우에게 아래로 칼을 휘둘렀지만, 밀우가 일자 더 빨랐다. 장정의 칼이 밀우의 머리칼을 가를 때에 밀우의 칼은 이미 그의 정강이를 베며 지나갔다. 장정은 피를 흘리며 몸을 휘청였고, 밀우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휘청이며 그를 향해 돌아보는 장정의 머리를 칼로 내리쳤다.

  퍽! 칼에 부딪혀 머리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장정의 검은 두건이 찢어졌다. 두건이 검은 탓인지 검게 보이는 피와 뇌수가 흘러나왔다. 요동에서의 군사들이 그랬듯 밀우도 장정이 피를 흘리건 말건 쓰러진 그의 등을 향해 칼을 깊게 찔러넣었다. 판단은 순간이고 생사는 수초 안에 가름이 난다. 밀우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불필요한 주저와 만용은 보복을 낳을 뿐이었다. 이미 서로 칼을 들었다면 결코 다쳐서는 안된다고 배웠다. 부상은 죽음보다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밀우는 다시 그들이 있다고 여겨지는 풀 밟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숨이 약간 헐떡이고 허벅지가 당겨올 만큼 달려가자 강을 아래 두고 있는 절벽이 눈앞에 나왔다. 절벽을 가기 전에 누추한 청년이 얼굴을 땅에 박은 채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밀우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두 팔을 잡고 끌어 여러개의 바위들이 제멋대로 쌓여있는 바위 더미 뒤로 질질 끌고 갔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청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밀우의 귀에 멀리서부터 발자국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청년을 쫓던 장정이라고 생각한 밀우는 자신의 가슴둘레만큼 커다란 바위를 끙끙대며 짊어지고는 장정의 발자국 소리가 확연히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이내 가까워지자 냅다 절벽 밑 강에 던져버리고는 몸을 바위 뒤에 숨기었다.

  청년을 쫓던 장정은 날랜 속도로 내달리다가 절벽이 눈에 띄자 뜀 속도를 늦추면서 걸었다. 그러다 첨벙 소리가 나자 다시 절벽으로 뛰어가 강가를 내려다보니 강줄기가 세차게 한 방향으로 흐르는 풍경만이 그의 눈에 담겼다. 장정은 당혹스러운 눈을 감추지 못했다. 장정은 무엇을 확인하려는지 강줄기만을 한참을 무릎 꿇고 앉아 내려다보았다. 청년이 몸을 던져 떠내려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장정은 흔적이나 시체라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강가를 향해 절벽을 기어 내려갔다.

  밀우는 장정이 무엇을 하든 귀에 들리는 소리로만 파악하며 숨을 멈추었다. 간간히 코로만 숨을 마시고 내쉬며 숨을 참아내고 있자니, 자신의 쿵쾅거리는 소리가 근육을 타고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

  찰랑- 물을 첨벙이는 소리가 들려 밀우는 혹여 눈에 띄일까 머리만 빼꼼 내밀며 강가를 살펴보았다. 과연 장정이 물에 발을 담그고는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장정은 물가에서 나와 물줄기를 따라 걸어 내려갔다.

  밀우는 긴장이 풀리고 근육이 이완되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세상모르게 눈을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는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청년은 가느다랗고 길다란 눈썹에 코가 오똑하고 입술이 붉어 인상적이었다. 밀우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 청년의 뺨을 철썩 내리쳤다. 하지만 청년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밀우는 청년을 어깨에 들쳐 메고 걸음을 옮겼다. 키는 작지 않으나 왜소한 편인 것 같았지만, 생각 외로 무게가 크게 나가지 않아 다소 의외라고 여겼다. 발걸음에 따라 털썩털썩 몸이 튀며 청년도 그에 따라 몸이 들썩였다. 하지만 잠시 그간 내달려온 길이 꽤 거리가 멀었는지 시간이 다소 흐르자 밀우도 숨이 약간 지치고 어깨가 뻐근하여 여전히 들쳐 멘 채로 잠시 무릎을 꿇어 주저앉았다.

  후우- 본래는 누군지 몰라도 살려는 주어야 하겠다 싶어 집으로 데려갈 작정이었지만, 밀우는 힘도 부치거니와 식구들이 이를 보고 무어라 귀찮게 추궁할지 몰라 잠시 생각했다. 아마 어릴 적 형제와 함께 뛰놀다 비가 오면 숨곤 하던 바위 무더기 속의 틈사위가 떠올랐다. 동굴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람이 누워 숨어있을 만큼 크기가 여유가 있었기에 지금 처지에 적절하다 여겼다. 밀우는 다시 끄응 대며 힘을 내어 청년을 들쳐메고 걸어갔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같은 풍경만이 보이는 대숲을 지나 은행인나 단풍과도 같은 다른 나무들이 한데 뒤섞여 있는 구간이 나타났다. 촌락에서 통하는 대숲 초입길에서부터는 약간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리 멀지 않는 곳이기도 하였다. 다시 몇십걸음을 걸으니 다행히 여전히 같은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자연의 바위더미가 보였다. 어릴 적과 달리 장성해진 몸 탓에 기억의 착오가 있는 듯 했으나, 다소 부딪힐 뿐 들어가기에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밀우는 자신이 먼저 틈에 들어간 다음 청년의 어깻죽지를 잡아끌고 들어왔다. 과연 전과는 다르게 천장이 낮아져 있었지만, 잠시 지내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밀우는 충동적으로 움직이고 게다가 도와주겠다는 생각으로 전혀 모르는 사람을 살인까지 한 자신을 자책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수습할 방도는 없기에 수습을 하려면 이왕 구한 이 청년을 수습해야 했다.

  잘 싸우고 도망치던 청년이 갑자기 기절한 이유가 있을까 싶어 청년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오른쪽 가슴팍에 반 척 정도 되는 자상이 그어져 있었고, 그에 따라 옷이 찢어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밀우가 옷의 끈을 풀고 젖히니 부상에 덧댄 것인지 가슴을 따라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자상이 그 한 군데 뿐만이 아니었고, 피딱지가 더덕더덕 붙은 자상이 피로 번진 가슴팍 이외에도 몇 군데씩 있었다. 그가 걸친 옷이 실은 하얀 천이었지만, 피와 흙으로 더럽혀져 갈색으로 보인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밀우는 혹시 독에 당한 것일까 싶어 청년의 고개를 돌려가며 핏줄이 솟은 데는 없는지 안색이 푸른지를 살펴보았지만, 단순히 피를 많이 흘리고 피로가 누적되어 잠시 기절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었다. 밀우는 먼저 비록 붕대가 감겨있기는 하나, 칼에 베였기에 지혈을 다시 해야하겠다고 여겨 붕대를 풀어보려 끈의 끝을 찾았지만, 묶은 지 얼마나 시일이 지나고 땀과 피로 절여졌는지 도무지 손톱으로 풀리지를 않아 이빨로 붕대에 상처를 내고는 부욱 찢어버렸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붕대를 찢자마자 봉긋한 가슴이 올라왔다. 피가 잘 안통한지가 오래되었는지 매우 하야였지만 오른쪽 가슴에 베인 자상에 따라 압박이 풀린 자상이 피를 슬슬 흘려내었다. 밀우는 이게 어찌된 일인지 어안이 벙벙하여 손을 놓고 입을 벌렸다.

  챠악! 밀우의 얼굴에 단검이 날아들었고, 밀우는 단검을 쥔 팔목을 낚아채었지만, 이미 살기를 띠고 내질러진 칼은 밀우의 오른뺨의 살점을 긁고 지나갔다. 십수년간 아버지와 형과의 수련에서 반복한 반사신경의 탓이었을까. 아무런 경계 없이 맞이한 칼이었지만, 그 덕택에 살아난 듯도 싶었다. 아버지는 누누이 강조하기도 하였다. 아무리 힘들고 그만하고 싶어도 끊임없이 반복하고 단련하는 것이 그것이 널 언제고 사고에서 살릴 것이라고.

  밀우는 순간적인 분을 참지 못하고 청년 아니 그녀의 목을 노는 손으로 졸랐다.

  “내 너의 은인이거늘! 이게 무슨 짓이매!”

  그녀는 눈을 붉게 희번덕거리며 눌린 목에 힘겹게 나오는 목소리를 쥐어 짰다.

  “능욕할지언정 차라리 죽이라. 결국 이케 됐다믄 내 네 놈의 목을 꼭 베고 나도 이제 그만 죽어야제.”

  밀우는 귀를 의심했다. 우리말이었지만 말투로 보아 분명 신라말이 분명했다. 이 자는 신라 사람인 것인가.

  “신라?”

  그녀는 말이 없이 노려보았다.

  “여긴 고구려의 동부다. 신라놈이 어인 일이매.”

  밀우가 여전히 그녀의 목을 쥐며 물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목이 죄여오는지 간간히 끅 끅 대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수분이 지나더니 끄응 하며 코에서 바람이 빠지더니 몸을 축 늘여뜨렸다. 이에 밀우는 잠시 손을 풀고 지켜보았다. 그녀의 몸은 미동도 없이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에이 씨!”

  밀우는 화를 벌컥 내며 그녀를 눕히고 심장이 뛰도록 가슴을 서너번 쾅쾅 내리치고는 그녀의 입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다시 가슴을 내리치고 바람을 넣었다. 그리고 또 다시 가슴을 내리치고 바람을 넣었다. 이를 몇 번 더 반복하니 그녀가 컥 하며 거친 숨을 내쉬다 새근새근해졌다. 밀우는 후우 하며 주저앉았다. 뺨이 축축하여 손을 대보니 베인 칼에 피가 철철 나는 것 같았다. 밀우는 아닌 날에 이게 뭔 고생이냐며 혼잣말과 욕을 툭툭 내뱉고는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를 잠시 쳐다보고는 바위틈을 빠져나갔다. 밀우는 흐르는 시냇물에 햇빛이 비쳐 어른거리며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아도 벌겋고 축축한 것이 예사로운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악!”

  손가락을 잠시 대어 눌러보니 그어진 자국이 벌려지는 것이 깊은 것이 분명했다. 밀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시냇물로 얼굴을 연거푸 씻어내고는 몸을 숙여 흐르는 시냇물에 얼굴을 한움큼 담갔다. 수초 있다가 어푸 하며 얼굴을 들이 올렸다. 밀우는 다시 바위더미 쪽으로 돌아가며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아 더듬거리면서도 약초처럼 보이는 풀을 뽑아다가 손바닥에 비벼 짓물로 만들어 베인 뺨에 덕지덕지 발랐다. 뺨이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가늠이 잘 가지 않아 시냇물에 되돌아가 비치는 얼굴을 보며 다시 꼼꼼히 바르고는 남은 약초를 두루마기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밀우가 바위사이로 되돌아가니 그녀는 아직 새근새근하며 기척이 없었다. 밀우는 이부랄 시부랄 욕을 해대고는 다시 바위틈을 나갔다. 다시 되돌아온 밀우는 얇은 속상의만 걸친 채 물에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겉옷을 들고 왔다. 밀우는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칼집으로 받친 다음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겨내었다. 상의를 벗겨내고 하의를 벗겨내니 그녀의 몸은 자상이 가득해 보였다. 밀우는 그녀의 속하의도 벗길까 잠시 주춤하고는 내비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을 젖은 자신의 두루마기로 연신 꼼꼼히 닦아내었다. 땟물과 진흙은 다 벗겨낼 수는 없어도 피딱지는 얼추 문질러지는 것 같았다. 밀우는 주머니에 있던 약초를 손바닥으로 열이 나도록 비벼 짓물로 뭉치고는 가장 최근에 베인 것 같아 보이는 자상을 위주로 덕지덕지 발라내었다. 밀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다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아차 싶으며 젖은 두루마기를 입고는 다시 바위틈을 나갔다.

  다시 나타난 밀우는 다른 두루마기로 갖춰 입고 왔다. 손에는 포개어진 두루마기가 있었는데, 그를 펼쳐서는 그녀의 몸에 덮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나갔다 돌아오며 잔뜩 들고 온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들을 한데 모아 지푸라기에 돌맹이를 연신 깡깡대며 긁어내고는 불을 지펴 나뭇가지들을 집어넣었다. 밀우는 불을 나뭇가지로 끄적이며 불을 키웠다. 바위사이가 어둑해질 만큼 해가 지려했다. 밀우는 밖을 돌아보고는 그녀의 머리에 베인 칼집 대신 장작으로 쓰려던 작은 나무목을 받쳤다. 그리고 바위틈을 나가선 그날 밤엔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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