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망함으로 달궈진 홍당무로 물든 내 얼굴을 보이기 싫었다.
서류로 얼굴을 가리자니 유난 떠는 거 같고. 그렇다고 홍당무 낯빛을 보여줄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고개 숙인채 도망치듯 나왔다.
본부장실 문 앞에서 진이 다 빠진 얼굴로 우둑하니 서 있자 윤 비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손을 살포시 잡아줬다.
“손이 너무 차가우신데, 괜찮으세요? 큰소리는 안 났는데… .”
윤 비서의 따듯한 손 마사지가 얼어버린 내 머릿속이 해동시켰다.
“그냥 좀 긴장했나 봐요. 결재 받기 힘드네요. 윤 비서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맛있게 잘 마셨어요. 고마워요.”
한층 밝아진 내 표정에도 윤 비서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조금이나마 내 긴장을 덜어주고 싶은 윤 비서는 살갑게 너스레를 떨었다.
“뭘요. 겨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인데, 고맙기는요. 정말 고마운 건, 저예요. 꽃뱀이라고 누명까지 쓰고 쫓겨날 처지인데. 홍 대리님 덕분에 누명도 벗고 정식 비서도 되잖아요.”
이쁜 말만 골라서 하는 윤 비서를 동생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윤 세이 비서님이죠. 다음에는 커피믹스로 부탁해요. 아니다. 웬만해서는 본부장실에서 커피는 사양할게요. 그만 가볼게요.”
“네. 홍 대리님의 의견을 받들어 홍 대리님의 자리에 커피믹스로 보낼게요. 홍 대리님. 안녕히 가세요.”
***
담이 올 것 같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내 책상에 앉았다.
‘진짜 기 빨린다. 이대로 소파에 쓰러져서 시원한 맥주나 마시고 싶다. 아직도 퇴근할 시간이 6시간이나 남았다. 불쌍한 내 인생.’
타조처럼 책상에 머리를 숨기며 잠시 멍을 때릴 때.
어김없이 저 멀리서, 짜증이 올라오는 소리가 날 불렀다.
“홍 대리~ 홍 대리! 내 자리 와.”
목청만큼은 이사급인 박 부장의 부름에 나는 결재 서류를 끌어안고 최대한 천천히 걸어갔다.
“부르셨습니까. 부장님.”
박 부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위아래로 날 흘려보더니 추궁했다.
“본부장 앞에서 주요 업무 신년 브리핑이라도 했나 봐! 나는 홍 대리가 하도 안 와서. 반차 휴가라도 내고, 퇴근한 줄 알았지.”
박 부장의 책상을 내려다보며, 나는 속으로 대꾸했다.
‘반차 휴가라도 줘보고! 그런 말이라도 해라.~양심적으로. 나도, 정말~ 집에 가고 싶다. 문어 부장아.’
박 부장의 손짓에 쪼르르 달려온 김 과장은 추임새를 넣었다.
“부장님이 홍 대리를 얼마나 걱정하신 줄 알아! 혹시나, 본부장님한테 심한 말 듣고, 사표 내지 않을까? 얼마나 전전긍긍하시던지.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부장님의 마음이 감동입니다.”
‘말은 바로 하자. 사표는 니들 때문에 내고 싶은 거고. 너희들 비리가 본부장의 귀까지 들어갈 봐. 전전긍긍이겠지.’
멍멍 짓는 개소리가 일절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바닥 무늬를 자세히 관찰했다.
박 부장은 으쓱대듯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앉아 거만하게 말했다.
“아~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김 과장밖에 없네. 자네도 알지, 윗사람으로! 누가 내 부하를 건들면 또 참지 못하지. 이래서 내가 출세를 못 해.”
자화자찬을 쏟아내는 한 쌍의 바퀴벌레를 보고 있잖니. 질리다 못해, 내 몸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꼴 같잖은 너희들 관심 따위는 폭력이야! 그냥 무관심 해줘. 제발~ 그게 나를 유일하게 돕는 방법이다. 이것들아, 요점만 말해라. 이 바퀴벌레들아.’
장황한 헛소리 터널을 나온 박 부장이 본심을 꺼냈다.
“본부장이 무슨 트집을 잡았길래. 보고 라인까지 무시한 채, 홍 대리를 불렀어?”
천연덕스럽게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네? 김 과장님께서 먼저 보고하셨습니다. 박 부장님.”
모른 척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김 과장이 다그쳤다.
“박 부장님 말씀이 그게 아니잖아. 몇 년을 직장 생활했는데, 아직도 맥락을 몰라. 그러니까, 홍 대리가!”
“네. 그래서 만년 대리입니다. 김 과장님.”
승진으로 타박을 주려다가, 자진 납세하듯 내 말에 김 과장은 할 말을 잃었다.
보다 못한 박 부장이 책상을 두드리며 큰소리를 쳤다.
“홍 대리! 내가 우습지! 이건 확실히 알아둬. 내가 더 오래, 홍 대리랑 일하는 거. 알잖아. 그럼, 어디서 줄을 서야 하는지. 아~씨. 이런 것까지. 내 입으로 꼭 말을 해야, 알아들어?”
대꾸하지 않은 채, 결재 서류를 무심하게 박 부장의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속 터진 김 과장은 박 부장의 말을 해석해준답시고, 다그쳤다.
“홍 대리! 이젠 뭐, 대놓고 본부장의 라인이라도 잡겠다는 거야? 이걸 묻어보시잖아. 아 답답해. 어~휴.”
“본부장님은 별말씀이 없었습니다. 박 부장님. 김 과장님.”
내 답변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박 부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말이야, 방귀야. 내가 핫바지로 보여. 홍 대리.”
얄미운 시누이처럼 김 과장이 가자미 눈으로 격분한 박 부장을 달래며 제자리에 앉혔다.
“부장님, 혈압 올라가요. 진정~진정하세요. 그리고, 홍 대리도 그러는 거야 아니야. 누구랑 더 오래, 직장 생활할지. 생각 잘해서 말해.”
“그래. 내 혈압을 생각하자. 혈압. 후~ 말해. 홍 대리!”
박 부장과 김 과장이 세상 무너질 듯 유난 떨면서 짖어대는 꼴이란, 참 가관이었다.
“보고서와 다른 실제 영업이익을 물으셨습니다. 그 외는 별말씀 없었습니다.”
넥타이를 풀어헤친 박 부장이 불안하듯 재차 물어봤다.
“정말 그게 다야?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홍 대리, 똑바로 말해. 어서. 한 토시도 빠짐없이 말해.”
불안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박 부장의 시선을 개의치 않듯 무뚝뚝하게 말했다.
“네. 별말씀이 없었습니다. 단지,”
침을 꿀꺽 삼킨 박 부장은 초조한 듯, 내 입을 쳐다봤다.
“단지, 뭐. 사람 답답하게 왜 이래. 빨리 말해.”
박 부장을 약 올리듯, 나는 여유로운 말투로 지시 상황을 전달했다.
“본부장님께서 업무 지시를 결재 서류에 메모해놓으셨다고. 부장님께 직접 갖다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결재 서류를 그제야 발견한 박 부장이 기겁했다.
“왜 이제야 말해! 홍 대리. 알았으니까. 가봐. 꼴도 보기 싫으니까.”
결재 서류의 메모를 훑어보던 박 부장과 김 과장의 동공이 바삐 움직였다.
더듬이를 비벼가며 속닥거리는 한 쌍의 바퀴벌레들이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내가 연막탄을 던졌다.
“아~참, 본부장님께서 이사…?”
‘이사’라는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김 과장과 박 부장이 뒤돌아서는 나의 앞길을 막아섰다.
콧김을 뿜어내던 박 부장은 나를 구석진 자리고 끌고 갔다.
“너 대체, 본부장님이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누굴 죽는 꼴 보고 싶어. 어디서 입 함부로 놀려. 할 말 못 할 말을 가려서 입을 놀려야지. 홍 대리.”
의아한 표정으로 짓은 나는 박 부장에게 되물었다.
“본부장님께 이미 아시고 있는 것 같은데요.”
눈치코치 없이 반문하는 나를 섣불리 건들 수 없던 김 과장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진짜~미치겠네. 아~ 홍 대리, 이게 얼만 심각한지. 아니다. 됐다. 그래서 본부장님께서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데?”
박 부장은 머리를 굴리며 초조한 듯,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빙빙 돌았다.
“설마, 다 알고 있어? 이건, 내 선에서 끝날 일이 아니야. 이건 핵폭탄이라고. 내 말 알아들어! 홍 대리.”
나의 언어유희로 발작하는 바퀴벌레를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수습하는 것도 일이라.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고개를 갸우뚱한 내가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다.
“김 과장님이 이사하시는 거, 본부장님이 알면 큰일 나는 건가요? 부장님. 왜요? 이사가 별거 가?”
박 부장과 김 과장은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표정으로,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이만, 제자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장님.”
내 책상으로 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내 등 뒤로, 박 부장의 절규가 들렸다.
“이런 십장생 같은 게! 저걸, 여자라서 정강이를 찰 수 없고. 귀신은 뭐 하나 몰라, 저 월급 도둑년을 잡아가지 않고. 내 혈압이야.”
“부장님 참으세요. 저건 똘아이예요. 혈압, 부장님의 혈압을 생각하세요. 호흡하세요. 으~하, 으~하. 호흡.”
“내가 임산부야. 으~하 으~하 라마다 호흡법 하게. 김 과장을 잘 좀 하자. 잘~”
***
낡은 식당에 장 집사가 앉아있다.
시장통의 낡은 식당만큼이나 나이 드신 할머니가 물 잔을 갖다 주며 안부 인사를 건넸다.
“오래간만에 오셨구먼. 하도 안 와서, 황천길이나 가셨나 걱정했구먼.”
장 집사는 사람 좋은 미소로 너스레를 떨었다.
“단골이라고, 내 걱정도 해주고, 감사합니다. 이 맛에 이 식당에 옵니다.”
“할아버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들어오는 지국장이었다.
장 집사는 인자한 미소로, 지국장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할아버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요. 앉으세요.”
지국장은 손사래를 치며, 부담스러운 장 집사를 다급하게 앉혔다.
“도련님이십니다. 한번 도련님은 영원한 도련님입니다. 앉으세요. 도련님.”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도 아니고, 오글거려요. 할아버지.”
내가 앉자마자 장 집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갈무리했다.
“아직 이렇다 할, 증거는 잡지 못했습니다. 도련님, 송구합니다.”
착잡한 표정을 숨기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장 집사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정갈하게 숟가락을 그의 앞에 놓아줬다.
아버지와 먹던 국밥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애달프게 쳐다봤다.
“국밥을 너무 애절하게 쳐다보십니다. 먹기도 민망할 정도로. 도련님.”
“아! 드세요. 할아버지. 맛있겠다.”
아차 싶은 나는 애써 웃으며 국밥을 맛깔스럽게 씹어 넘겼다.
‘사장님과 사모님이 도련님을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또 얼마나 대견해하실까! 내가 봐도 이렇게, 뿌듯한데.’
장 집사와 내가 묵묵히 국밥을 먹고 있을 때, 국밥집 할머니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머리털 나고, 주식이란 것도 사보고. 양도라는 것도 해보고. 나도 팔자가 폈네. 폈어. 귀하신 손주분 덕분에.”
장 집사가 서류 봉투를 꺼내 꼼꼼히 살펴봤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내 감사 인사에 국밥집 할머니가 콧등이 시린지 킁킁거렸다.
“감사해야 하는 건, 접니다.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을 처지에. 억장이 무너지는 부모님의 생명 보험금으로 이 국밥집을 지켜주셨는데. 이보다 더한 것도, 해드려야죠. 하늘에서 내려주신 은인이신데.”
배달 갔다 돌아온 국밥집 아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국장이 왔어! 맛은 어때?”
“맛있어요. 국물이 진하면서도, 깔끔하고. 무엇보다 고기 잡내가 나지 않아서 좋네요.”
내 맛 평가에 기분이 좋아진 국밥집 아들이 의기양양 말했다.
“그렇지. 내가 또 마음먹고 하면 잘하지. 이런 나라서, 내가 멋있다! 이러다가 국밥집 프랜차이즈 내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국밥집 아들의 농담에 내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갔다.
“좋네요. 꼭 그 꿈 이뤄지길 바랄게요. 단, 그때 저랑 계약해주세요.”
국밥집 아들은 농담처럼 말했다.
“당연하지. 나도 요식업에 주 선생이라고 칭송 좀 받자. 네 덕분에.”
아들의 너스레가 못마땅한 국밥집 할머니가 국자를 휘두르며 핀잔을 줬다.
“국밥 좀 만다고, 콧대가 하늘을 찌른다. 귀한 손주님한테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주방이라 가봐. 고기나 삶아.”
“네~어머님. 아니, 회장님.”
“저… 저, 주제를 모르고. 네 놈한테~ 귀한 이 식당을 넘겨줄 생각에 잠이 안 온다! 요놈아! 나를 위해서 작작 좀 해라. 속도 없는 놈.”
아들을 타박하는 국밥집 할머니를 잔소리에 그리운 엄마의 잔소리가 내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양말은 아무대나 벗어놓지 말고 했지]
[머리는 그게 뭐야? 옷은 깔끔하게 입고 다니라고 했지]
[나중에 엄마가 죽고 나서 후회하지말고, 있을 때 잘해라~우리 아들!]
장 집사의 눈을 피해 고개 숙여 국밥을 떠먹었다.
장 집사는 검토한 서류를 국밥집 할머니에게 다시 돌려주며 당부했다.
“어르신, 이건 장독대에 묻어주세요.”
“장은 3년 묵어야, 제맛이 나지. 맡겨두세요.”
“준비는 할 만큼 했으니. 시작만 하면 되겠네요. 장 집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