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매무새를 다듬은 김 과장이 밝은 목소리로 본부장실로 들어갔다.
***
“본부장님, 부르셨습니까.”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재현 본부장은 읽던 보고서를 책상에 툭 하고 던졌다.
김 과장은 한참을 벙어리처럼 말을 삼켜버렸다.
마치 재현 본부장의 먹잇감이 된 것처럼, 김 과장은 눈을 내리깔고 숨마저도 죽였다.
‘욕할 거면, 빨리하지. 똥폼이나 잡고 지랄이야. 사람 쫄리게.’
한숨을 내쉰 재현 본부장은 낮은 목소리로 질타했다.
“김 과장님, 설마 만년 과장님을 꿈꾸시는 건 아니실 데고?”
“네?”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상사의 질책만 받았던 김 과장은 느닷없는 재현 본부장님의 승진 상담에 당혹스러웠다.
물론 상사의 말을 굳이 고대로 믿는 김 과장은 아니지만, 재현 본부장의 스타일을 몰라 잠자코 있었다.
재현 본부장은 눈치만 살피는 김 과장을 추궁해봤자 나올 말은 뻔하기에.
“김 과장님은 승진이 빠른 편이시니, 견제를 많이 받으시죠. 그래서, 남들처럼 대충. 적당히 지적받을 만한 보고서를 올린 겁니까? 아니면, 미덥지 못한 본부장을 위한 테스트입니까? 물론 윗전의 뜻이고요?”
새로 부임한 본부장이 군기 잡는 용도로 꼬투리 잡는 단순한 질책으로만 생각했는데. 재현 본부장이 파놓은 함정일 줄이야! 아차 싶은 김 과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윗전이라면, 이사님 라인이라는 알고서? 아닐 거야. 저 성질머리라면, 알았으면. 벌써 들쑤시고 다녔지! 그래도 만에 하나, 그렇다고 치더라도, 박 부장님이 아닌 왜 날 불렀지?’
김 과장의 머릿속은 오만가지 변명거리와 계산기를 두드렸다.
어떤 감언이설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촉에 김 과장은 선택적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그게…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시기 받을 정도로, 잘난 부하직원으로 인정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죄송스럽게도 제가 본부장님만큼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서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김 과장의 변명을 경청한 재현 본부장은 싱긋 웃어 보였다.
‘이렇게 엉망인 보고서를 올렸다는 건, 윗선에서 허락했다는 소리인데. 전 본부장을 제물로 삼았다는 거지. 그걸 또 내가 날름 주워 먹었고. 재밌네.’
재현 본부장의 미소에 등 꼴이 오싹한 김 과장은 도망갈 개구멍을 파고 있었다.
“본부장님, 보고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오늘 중으로. 아니… 오전 중으로, 보고서 다시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재현 본부장은 머리 숙여 사과하는 김 과장에게 너그러운 척 일갈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simple is best’라고, 담당자 홍 대리를 불렀습니다. 그만 나가보세요.”
가시적인 미소로 본부장실에서 나온 김 과장은 일그러진 얼굴로 혼잣말했다.
“어차피 구색 맞추기용, 본부장 주제에. 본부장, 꽃놀이도 한철이야. 이 사람아.”
***
기척도 없이 본부장실 문 앞을 귀신처럼 다가오는 윤 비서를 보고, 김 과장은 기겁했다.
“뭐야! 여우 괴담이라도 찍어. 누굴 심장마비로 죽일 셈이야! 사람 놀래게. 비켜.”
‘똥개가 짖는다’ 표정으로 윤 비서는 종이컵 캐리어 담긴 두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김 과장 얼굴에 들이밀었다.
“본부장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준비했습니다.”
본부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던 윤 비서가 김 과장을 향해 읊조렸다.
“비정규직일때는 정규직들이 대단히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본부장님에게 차 대접도 못 받는 그저, 그런 정규직들이 의외로 많네. 나도 열심히 해야지.”
한낱 비서에게 무시당한 김 과장은 이를 갈았다.
“이게! 어디서, 썩은 동아줄을 잡은 주제에. 기고만장이야. 뭐가 뛰고, 뭐도 날뛰고 있네.”
씩씩거리며 사무실로 돌아가는 김 과장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는 윤 비서다.
그때 홍 대리가 서류뭉치를 들고 본부장실 앞으로 걸어왔다.
홍 대리를 보고 버선발로 나온 윤 비서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홍 대리님. 본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본부장실 문을 노크하던 윤 비서가 들어가는 홍 대리에게 윙크했다.
“정식으로 비서 된 기념으로, 시럽이 범벅된 아이스 아메리카노 쏩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고마워요. 홍 대리님.”
“윤 비서 노력으로, 정규직 된걸, 왜 나한테 고맙다고 그래?”
감흥 없는 홍 대리의 대답에도, 선망의 눈동자로 바라보는 윤 비서다.
“진짜, 짱 멋있어. 섹시 쿨~언니.”
***
내 인기척에 서류를 훑어보던 본부장은 고개를 들어 미소를 보여줬다.
“홍 대리님, 오셨어요? 보던 서류마저 볼 때까지만,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덤으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면요.”
재현 본부장의 천연덕스러움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사무적인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재현 본부장이 말본새를 지적했다.
“대기가 아니라, 맛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날 기다려줬으면 좋겠는데요.”
누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격언을 남겼을까? 그 사람은 분명 성인군자다.
나는 소인배라서, 입안에 있는 침을 힘껏 모아, 능글거리는 재현 본부장의 얼굴에 뱉고 싶었다!
나도 이럴 때, 보면 좀 꼬인 것 같다. 아무튼 재현 본부장의 호의가 달갑지 않았다.
철벽이 최상의 공격이라고 하지 않는가.
“본부장님, 어휘 선택에 각별히 주의 부탁드립니다. ‘기다려줬으면 좋겠네요.’ 이 말씀은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할 단어가 아닙니다. 위력을 이용한 성희롱이 될 수 있습니다. 본부장님!”
농담으로 넘길 일을 유난 떤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경우는 특별했다.
소개팅한 남자가 상사로 내 앞에 앉아있으니, 당연지사 경계심이 똘똘 뭉쳐졌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재현 본부장은 내 곁으로 와 정중하게 사과했다.
“홍 대리님, 제가 무례하게 굴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의외로 이렇게 빨리. 그것도 깔끔하고 담백한 사과에 내가 더 당황스럽다.
“…네. 본부장님의 사과받아드리겠습니다.”
“저의 사과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홍 대리님, 그럼 가져온 서류 좀 검토해도 될까요?”
마주 앉아 서류를 읽어내려가는 재현 본부장을 기다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내 눈길이 그에게 쏠렸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존재했을 법한 이상형의 남자처럼 보였다.
세련미가 풍기는 인상과 깔끔한 매너에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위엄에 홀리는 위험한 마력의 상사의 이미지였다.
‘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 정신 차려! 홍임수! 재현 본부장은 내 상사고. 뭘 어쩌자고. 내 주제에 무슨 사랑 타령!’
재현 본부장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홍 대리님? 홍 대리!”
시치미 떼듯 무표정으로 재현 본부장에게 무덤덤하게 응답했다.
“네? 본부장님.”
“내가 본부장인 알겠는데. 홍 대리님이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재현 본부장의 뼈의 농담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썰렁한 아저씨 농담이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한심해서 흘러나온 자조적 웃음이었다.
문제는 재현 본부장은 자신의 농담에 내가 무장 해제됐다고 착각해 뿌듯한 그의 입꼬리가 승천했다.
기대에 찬 본부장의 눈길에 정색하기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억지 미소는 더 보기 싫었다.
고민 끝에 나는 공적인 업무로 시선을 돌렸다.
“보시는 바와 같이, 영업이익이 증가했습니다. 물론 서류상으로만요.”
사무적인 내 말투에, 재현 본부장은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고 앉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입안을 적신 재현 본부장이 떠보듯 물었다.
“서류 갖고 장난쳤다. 그럼, 전 본부장님께서는 꼬리? 머리? 홍 대리님이 보시기엔, 어느 쪽일 것 같아요?”
재현 본부장의 ‘답장너’가 되는 순간. 사내 정치 한복판에 서 있을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글쎄요? 일개 직원이 뭘 알겠습니까. 더욱 왕따 당하는 직원이라, 사내 정보에 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본부장님, 그런 쪽의 능력은 김 과장님이 탁월합니다.”
냉정한 내 답변이 흡족했는지, 재현 본부장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잘됐네요. 그럼, 왕따끼리 잘해봅시다. 그런 의미에서 동맹을 맺을 겸, 같이 점심 식사 어때요?”
싱그럽게 웃는 본부장을 정면으로 응시한 내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다이어트 중입니다. 본부장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본부장님이 말씀하신 동맹은 저와 같은 일개 직원에겐 충성 맹세를 강요하는 감언이설에 불과합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손님용 소파에서 일어난 내가 재현 본부장님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본부장실의 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내 귓가에 재현 본부장은 본심을 들려줬다.
“다시 묻죠. 홍 대리님의 충성심을 가장한 홍 대리님의 마음을 저에게 주실 의향은 있습니까?”
재현 본부장의 남다른 언어구사력에 비해 이해력이 떨어진 나는 본부장실의 문고리를 잡고 생각했다.
‘월급쟁이에게 충성 요구도 기가 찰 노릇인데, 마음이라? 이건 충성과 다른 뉘앙스인데. 설마 아니겠지. 소개팅 한 번 했을 뿐인데, 내 쓸데없는 망상이겠지.’
무표정으로 무장한 나는 분명하게 거부했다.
“본부장님의 애사심이 남달라, 충성하실 수 있어도. 저는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직원이라 충성 맹세는 어불성설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재현 본부장이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왔다.
“음~어불성설이라. 그럼. 감언이설이라고 생각하는 걸, 제가 팩트로 만들면. 그때. 홍 대리님이 저에게 올래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재현 본부장은 결재한 서류를 내게 건넸다.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오는 재현 본부장에게 놀란 나는 멍하니 그의 눈을 응시했다.
‘이건 마치……프러포즈 받는 것 같다. 이젠, 완전히 미쳐가는구나. 홍 임수~ 정신 차려! 이건 그냥 본부장 똘마니 하라는 소리잖아.’
낮 뜨거워진 망상을 인정할 수 없었던 나는 도리질했다.
내 머릿속을 읽은 듯, 재현 본부장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업무 지시를 했다.
“음~음. 박 부장님에게 드리세요. 지시 상황은 서류에 메모해놨다고 전해주세요. 홍 대리님.”
민망함에 붉게 물든 내 얼굴을 숨기고 싶은 마음에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데.
‘이런 젠장~! 문이 안 열린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하다 하다, 이젠 문도 못 열고. 멍청한 짓은 혼자 다 한다.’
문 앞에서 낑낑대는 내 귓가에 재현 본부장의 목소리가 간지러움을 피웠다.
“홍 대리님. 문고리를 잡고, 밀지 마시고. 안으로 당기세요. 저도 본부장실로 일주일 동안 출근했는데도, 아직도 문 앞에서 헤맵니다. 이왕이면, 저 또한, 밀지 말고. 당겨주세요. 이렇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