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바뀐 후로 처음 제대로 숙면에 취한 신아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잠이 들었다.
이불을 꼭 껴안은 신아가 더 깊은 잠에 빠져들 무렵이었다.
Rrrrr.
달콤한 잠을 깨우는 이가 누구인가.
몽롱한 정신으로 신아가 침대맡을 더듬거렸다.
뚝.
금세 벨소리가 끊기고, 신아의 의식이 점점 더 희미해지는 순간.
Rrrrrr.
또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거칠게 휴대폰을 잡아챈 신아가 발신인을 확인하고 두 눈이 커졌다.
“어, 어머님?”
휴대폰 화면에 정확히 찍혀 있는 ‘어머님’이란 세글자에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
신아가 푸른 화면이 반짝이는 휴대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걸 안 받을 수도 없고.
아니 안 받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진짜 안 받을 수는 또 없는데.
신아가 고민하는 사이 전화가 또다시 끊겼다. ‘부재중 통화 (2)’란 문구가 화면에 선명히 떠올랐다.
띠링.
이번엔 메시지였다.
‘새아가, 나다. 필담이에게 이야기 들었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내일 오후 3시에 봤으면 좋겠구나.’
무슨 이야기?
휴대폰을 확인한 신아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가다 못해 그녀의 두 눈에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 조필담 이 개자식!”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
신아가 침대를 발로 뻥뻥 차고 이제 막 베개에 주먹을 꽂을 때였다.
달칵.
“이신아, 무슨 일이야?”
팔꿈치가 천장을 향해 있던 신아가 천천히 고개를 문을 향해 돌렸다.
이제 막 출근 준비를 마쳤는지 세미 정장을 단정하게 챙겨 입은 수현이 서 있었다.
“어?”
그것도 엄청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수현이 성큼성큼 침대에 다가왔다. 침대 끝에 살포시 앉은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신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어디 다쳤어?”
그런 거 아닌데.
나 이제 막 일어났는데.
“악몽 꿨어?”
신아가 고개를 저었다.
악몽이라니.
차라리 악몽이라면 다행이기라도 하지.
“그럼 뭐 때문인데. 말해봐.”
지금 이거 나를 걱정하는 건가.
놀란 신아가 수현을 바라봤다. 수현의 단단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
이거 참 곤란한데.
신아가 눈썹을 긁적였다. 이 일만큼은 더 이상 수현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말하기 어려우면 나중에 말해줘.”
가만히 신아를 응시하던 수현이 입을 천천히 열었다. 종용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거 없었다. 단지.
“네 옆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만 마.”
언제든 의지해도 좋다고.
그러라고 내 옆에 있게 한 거니까.
“그럼 원수현…….”
“…….”
말하기 망설여지는지 신아가 애꿎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수현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굳은 다짐을 했는지, 신아가 고개를 들어 수현을 바라봤다.
“너 나랑 진짜 마지막으로 잘래?”
***
“부사장님.”
미치겠다.
“오늘 저녁에 JH 그룹 최 상무님과 저녁 미팅이 잡혀있었습니다.”
신아가 책상 위에 올려진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검지로 책상 위를 두들겼다.
탁, 탁, 탁, 탁.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소리가 집무실 안을 울렸다.
“저번 주 미팅에서…….”
정녕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건가.
“……혹시 제가 뭐 실수했습니까?”
“어, 어?”
현규의 목소리가 귓가에 콕 박혔다. 뭐, 뭐라고? 신아가 당황한 얼굴로 현규를 바라봤다.
“스케쥴 내용에 불편한 사항이 있었다거나…….”
“없어, 없지. 근데 혹시 아까 뭐라고 했어?”
“JH 그룹 최 상무님과 오후에 저녁 미팅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
미팅이고, 최 상무고.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미팅이야?”
신아가 묻자 현규가 고개를 저었다.
“간단한 식사 자리입니다. 미루도록 할까요?”
“응, 부탁해.”
“알겠습니다.”
신아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의자를 이리저리 돌렸다.
“부사장님,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힐끗힐끗 신아의 얼굴을 살피던 현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사장님이 이런 모습을 하는 건 입사 이후 처음 보는 거였다.
“나? 왜?”
“근래 들어 부사장님답지 않게 실수도 많이 하시고, 이런저런 고민도 많아 보이셔서…….”
신아의 얼굴이 당황함에 굳어졌다.
상사를 살피는 일 또한 비서의 업무였다.
현규는 착실하게 제 일을 잘 하고있는 것이었지만, 신아는 차라리 현규가 농땡이를 피우거나 일을 설렁설렁하길 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그러니까 김 실장도 김 실장 일 봐.”
일단은 여길 좀 나가주면 좋겠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 더 터질 것 같으니까.
어색하게 웃은 신아가 고개를 돌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부사장님……….”
그런 신아를 보던 현규의 마음이 찡했다.
겉으로 보기엔 싸가지 없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듯한 냉혈한 인간이지만.
사실은 부하 직원 신경 쓰이게 하는 게 싫어서 일부러 더 냉철하게 대하셨던 걸까.
어쩐지 갑자기 존댓말 하실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응?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부사장님이 이렇게 섬세하신 분이셨다니.
이럴수록 부사장님의 오른팔인 내가 더더욱 중심을 잃지 말아야지.
굳은 결심을 하고, 또 하는 현규의 표정이 점점 비장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감격에 젖은 얼굴을 한 현규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하.”
현규가 나가자마자 신아가 한숨을 크게 쉬고 책상 위로 엎어졌다.
그녀의 팔꿈치가 탑처럼 쌓여있는 서류 뭉치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으아아아아아악.”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은 상황이었다.
임원 회의며, 미팅이며.
미룰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다 미뤄봤지만, 아예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현규가 있는 상황에서 수현을 제 옆에 계속 붙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조필담 이 새끼는 진짜……. 인생에 도움 하나 되지 않는 새끼.”
신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새아가, 나다. 필담이에게 이야기 들었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내일 오후 3시에 봤으면 좋겠구나.’
메시지를 받자마자 머릿속에서 필담의 엄마인 순임의 음성이 자동 재생되었다.
고고한 사모님 흉내를 내면서 은근히 신아를 무시하는 목소리. 기분이 팍 나빠진 신아가 눈을 떴다.
‘중요하게 할 말이라니…….’
필담의 얼굴이 곧바로 떠올랐다. 이 자식이 어떻게 입을 놀리고 다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헤어졌다고 말 안 했거나 헤어짐의 원인이 나라는 거.
둘 중 하나겠지.
“하.”
신아가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되는 일이 이렇게 하나도 없을 줄이야.
신아가 손을 뻗어 내선 전화기를 집었다.
-네, 부사장님. 말씀하세요.
큼큼. 신아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원수현, 방으로 와봐.”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수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냉수를 담은 쟁반을 들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신아가 다급하게 소파에 앉았다. 차분히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수현이 신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원수현 너 아직도 나랑 자기 싫어?”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수현에게 같이 자자고 물었지만, 대차게 까인 탓이었다.
“원수현, 우리 계속 안 했잖아.”
“그건 네가 너무 피곤하다고 매번 먼저 자서 그런 거고.”
맞는 말이었다. 부사장의 업무에 적응하지 못해 매번 시든 파김치처럼 집에 들어온 신아였다.
“나 진짜 네 도움이 필요해.”
그녀는 간절하게 그에게 부탁했다.
자신의 두 손까지 맞잡으며 슈렉의 고양이처럼 두 눈을 뜬 채.
“그러니까 무슨 일인데?”
“아 진짜.”
얘는 왜 이런 걸 묻는 거야.
원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니야?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무턱대고 자자고 하면, 내 쪽에서도 좀 곤란하지.”
“왜 곤란해?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잖아!”
“그 최선이 이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 않나.”
수현의 말에 신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전 남친한테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해?
이 상황에 열불이 오른 신아가 냉수가 든 잔을 거칠게 잡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을 마실 때마다 목에 불뚝 튀어나온 목젖이 움직였다.
탁.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은 신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 내일 시어머니 될, 아니 될 뻔한 사람 만나.”
“그게 무슨 말이야?”
수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미 헤어진 사이가 아닌가. 근데 왜.
“조필담 그 자식이 어떻게 입을 턴 지 모르겠는데, 내일 만나자고 연락 오셨거든.”
그것도 헤어진 지 거의 한 달이 다 된 이 시점에서.
신아가 잔을 집었다. 얼음을 문 그녀의 볼이 볼록 튀어나왔다.
“안 만난다고 하면 되잖아.”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더 말하기 싫었지.
“아니면 내가 대신 만나도 되고.”
그건 안 되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그 할 마리 조옴 마나서.”
얼음을 입에 문 탓에, 발음이 어눌했다.
내가 그 집 안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 똥 씹은 표정의 신아가 얼음을 아그작 씹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수현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신아에게 물었다.
그녀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
“아, 있어. 그런 거. 그니까 제발 날 좀 도와줘. 너랑 나 오늘 뭐든 다 시도해보자. 나 진짜 내일 꼭 내 모습으로 만나야 하거든?”
얼음을 다 씹은 신아가 다시 잔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유리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저번에 잤을 땐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또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신아가 수현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게…….”
“여러 경우의 수는 따져보는 게 좋지. 뭔가 확신이 생기면 그때 다시 이야기 해. 물론 나도 찾아볼 거고.”
“…….”
누가 부사장 아니랄까 봐.
신아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수현을 힐긋 바라봤다.
“할 이야기는 이게 다야?”
“어? 어, 어…….”
나는 또, 다른 이유인 줄 알았네.
수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으, 응? 뭐라고?”
신아가 되물어봤지만, 수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자, 잠깐만!”
이럼 안 되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데!
신아가 몸을 일으켜 수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
놀란 수현이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나 진짜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응?”
신아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수현이 잡힌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우리 그때 있었던 일, 오늘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처음부터 똑같이 다 해보자.”
“…….”
“혹시 모르잖아. 간절한 마음 때문에 무슨 변화가 생길지!”
그녀가 비장한 얼굴로 수현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대답이 나올 그의 입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