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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저 이제 은퇴할래요
작가 : 라레
작품등록일 : 2022.2.11

가족을 위해, 백작령을 위해 몸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소처럼 일한 프레이(feat. K-장녀).

그러나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1년 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과 가족들의 냉대, 그리고 지참금에 팔려가는 정략혼 자리뿐이었다.

여태껏 과로한 만큼, 남은 1년만이라도 푹 쉬고 싶었던 프레이는 가문과 연을 끊고 어느 시골 마을로 요양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뒤늦게 정령사로 각성하게 되는데…….

“다른 것들 따위 알 게 뭐야. 내게는 네가 가장 소중해.”

“이상해요. 자꾸 당신에게 시선이 가.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당신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아.”

“전 언제나 당신 곁을 지킬 겁니다. ……제 마음과는 별개로.”

대륙 유일의 정령사인 프레이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 그 속에서 더는 사람에게 상처 받고 싶지 않아 마음을 닫아거는 프레이와 그녀의 마음을 계속해서 두드리는 세 남자.

과연 프레이는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한 사람을 바랐어.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줄, 단 한 사람만을.”

#시한부 #구원서사 #가족후회 #K-장녀 #상처녀 #능력녀 #사이다녀 #걸크러시 #능글남 #인외남 #조신남 #다정남 #집착남 #소유욕 #칠★사이다급복수 #성장물

 
4. 계약서 밑장 빼기 (4)
작성일 : 22-02-21 23:45     조회 : 215     추천 : 0     분량 : 5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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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남자들이 하나둘 켁켁거리며 마른기침을 뱉더니, 목소리가 증발하기라도 한 양 모두 침묵했던 것이다.

 입은 물에서 건져 올린 금붕어처럼 연신 뻐끔거리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소리 없이 울부짖으며 처절하게 비는 남자들을 보자, 프레이는 반대로 자신의 귀가 먹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이게…… 뭐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너무도 기괴한 순간을 목도한 프레이의 사지를 타고 새까만 한기가 올라왔다.

 공포라는 이름의 검은 한기는 스산한 몸짓으로 프레이의 심장을 옭아맸다.

 ‘무서워……!’

 프레이가 겨우 팔만 움직여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왠지 숨소리도 들켜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남자들이 그녀를 해코지하러 들이닥쳤을 때보다 더 선득하고 압도적인 공포가 느껴졌다.

 미지의 무언가가 이곳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인간은 감히 인지할 수도, 이해할 수도, 대항할 수도 없었다. 그저 조아리고 순응할 수밖에…….

 언제 자신이 다음 목표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프레이의 등을 타고 미지근한 땀이 흘러내렸다.

 어떡하지?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이런, 생각보다 많이 놀랐구나. 미안해. 괜찮아, 프레이?”

 갑작스레 정적을 깨고 들어온 맑은 목소리에, 프레이가 소스라치게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겨우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언제 온 건지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 서 있던 라벨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도, 소리 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움직이고 소리 내 말하는 그가 몹시 괴상했다.

 심지어 그는 이 기묘한 대치 속에서 지나치게 여유로워 보였다.

 “라, 라벨……?”

 “응, 프레이.”

 프레이의 부름에 즐거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양 달큰하게 대답한 라벨은 산뜻한 걸음으로 피투성이가 된 바닥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발이 닿는 곳마다 마치 길을 열어주듯 바닥에 낭자한 피가 흩어졌지만, 반쯤 넋이 나간 프레이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라벨은 바닥에 쓰러져 있던 프레이를 안아들고 환하게 웃었다.

 그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고용 계약을 했던 그 날처럼 춤추듯 방 안을 돌기 시작했다.

 “정말 미안. 사실은 좀 더 일찍 도와주고 싶었는데, 널 각성시킬 좋은 기회다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도 훌륭히 각성했구나? 기쁘다. 역시 내 계약자다워.”

 각성? 계약자?

 알아듣지 못할 말을 늘어놓으며 참변의 현장을 무도회 장처럼 휘젓는 라벨이 생소했다.

 물론 평소에도 그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긴 했다. 위화감을 느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 그가 낯설게 느껴지긴 처음이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라벨은 프레이의 고민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천진한 얼굴로 그녀의 의향을 물었다.

 “어떡할래, 프레이? 네가 원한다면 이것들 전부 산 채로 분쇄시켜 버릴까 하는데. 아니면 아예 폭파시켜도 좋고.”

 “라, 라벨.”

 “하지만 넌 너무 여리니까 그런 짓은 못 하겠지? 하긴, 일평생 널 괴롭힌 인간들도 멀쩡히 살려두고 떠나왔으니까. 그래도 그건 네 혈육이었잖아, ​이것들은 아니고. 그러니까 이참에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주는 게 어때?”

 “라벨!”

 프레이가 라벨을 다그치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라벨은 어느 정도 순순히 프레이에게서 멀어졌지만, 그녀를 안은 팔은 절대 풀지 않았다.

 프레이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라벨과 눈을 맞췄다. 그녀는 부디 자신의 눈동자가 형편없이 흔들리지 않길 빌었다.

 “라벨. 저 남자들…… 설마 당신이 저렇게 만든 거예요?”

 “응. 반 정도는?”

 태평한 즉답에 프레이는 그만 아연실색해졌다. 그녀는 찬찬히 호흡하려 애쓰며 정적 속에 절규하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남자들 중 몇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몇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눈알을 까뒤집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프레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저들을 동정하진 않았다. 그들은 엄연히 악질적인 목적을 가지고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이 집에 침입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하지 않나.

 프레이가 가느다란 숨을 뱉으며 라벨을 향해 더듬더듬 의문을 표했다.

 “라벨. 다, 당신​​, 어떻게…….”

 어떻게 검도 쓰지 않고 장정 대여섯을 순식간에 난도질할 수 있었어요? 당신에게 말한 적 없는 내 과거는 어떻게 알고 있고요?

 라벨은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프레이를 향해 여느 때와 같이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겁낼 거 없어, 프레이. 난 오롯이 네 편이야. 우리, 서로 존재를 건 계약을 했잖아?”

 “그게 무슨 소리에요? 우리가…… 뭘 걸고 뭘 했다고요?”

 “이거.”

 라벨의 손짓에 프레이의 콘솔 서랍 두 번째 칸이 열리더니 오래 전에 작성했던 계약서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건 당신 고용 계약서…….”

 “아, 내가 여기다가 약간 장난을 쳤지.”

 라벨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약서는 흐물흐물하게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푸른빛으로 이루어진 알 수 없는 문자 배열이 물 위에 번진 파문처럼 둥근 형태로 나열되어 있었다.

 프레이는 그 배열을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뒤늦게 그 문자가 무엇인지 기억해냈다.

 이건 분명 아카데미 도서관 중앙 현관에 전시되어 있던 창세 시대의 문자였다!

 놀란 프레이가 빛으로 된 문자 위로 손을 서성이자, 라벨이 이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청명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그 때 물었잖아. 정말 이 계약서에 사인해도 괜찮겠냐고.”

 “마, 말도 안 돼. 이건 무효에요. 사기잖아요!”

 프레이가 문자를 흐트러뜨리기 위해 손을 휘저었지만, 얄궂게도 문자는 그녀의 손이 지나가자마자 금세 원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결국 열이 오를 대로 올라 어지러워진 프레이가 휘청거리자, 라벨이 얼른 그녀를 고쳐 안았다.

 하지만 프레이는 그에게 기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티며 창세 시대의 문자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대체 저 계약서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카데미 시절, 교양으로 고대 문자가 아닌 창세 시대 문자를 배울 걸 그랬다. - 프레이는 이 때 창세 시대 문자 수업이 늘 정원 미달로 폐강되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

 그랬으면 이런 황당한 사기 계약의 내용이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프레이는 오랜만에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며 라벨을 추궁했다.

 “당장 저 계약, 없던 걸로 해줘요.”

 “미안해. 이미 맺어진 계약은, 그것도 서로의 존재를 걸고 한 계약은 한 쪽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해제되지 않아.”

 “무슨 그런 억지가……! 난 내 존재 같은 거 건 적 없어요!”

 “지난날 우리가 맺은 계약은 현존하는 다른 어떤 계약보다 무의식이 많이 반영돼. 심지어 프레이 너는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쉽게 네 본질을 내어 주었어. 왜,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은 아무래도 좋아진다잖아.”

 “말인즉 당신은 저 말도 안 되는 계약에 내 죽음을 이용했다는 뜻이군요?”

 “음, 부정은 못하겠네. 그렇지만 그 대가로 프레이는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됐잖아?”

 “!”

 생각지도 못한 순간 허를 찔린 프레이가 입을 다물고 라벨을 정시했다.

 ……근래 빠른 속도로 회복되던 제 상태가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지만, 이미 임계점을 넘어 죽음을 향해 떨어지던 몸이었다.

 그랬던 몸이 하루가 다르게 활력이 돌아오더니 점점 약이 필요 없어지고 있었다.

 프레이는 그 회복이 죽기 직전 잠시 상태가 좋아지는, 그런 건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라고? 정말로 낫고 있던 거라고?

 “내 몸이 나아지던 게…… 당신 때문이라고요?”

 “응. 조금만 더 있으면 보통 사람보다 훨씬 건강해질 거야. 그럼 우리, 같이 대륙을 돌아다니자. 좋지?”

 “아니…… 당신이 어떻게 그 약도 없는 병을…….”

 이쯤 되자 프레이는 다른 무엇보다 라벨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당신, 마법사예요?”

 “아니? 내가 그런 하등한 존재일 리가 없잖아.”

 “그럼…… 용?”

 “용이라. 그리운 이름인걸. 이미 오래 전에 모두 떠나보냈지만.”

 “용이 정말로 실존했던 존재였어요?!”

 그냥 막 던져본 말이었는데 의외의 사실을 듣게 된 프레이가 경악했다.

 그러나 라벨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것처럼 태평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응. 하지만 지금은 없어. 인간들한테는 다행인 일이지.”

 “용이 아니면 당신은 뭔데요? 신?”

 “아하하. 너희가 생각하는 신과 내가 생각하는 신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신도 아니야.”

 그럼 대체 뭔데?

 프레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자 라벨이 짙은 미소를 머금고 답을 알려주었다.

 “정령이야.”

 “……네?”

 예상치 못한 답변에 프레이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령? 설마 그…… 논문에서 가설로서나 언급되던 가상 시대의 존재?

 정령 시대라는 게 진짜 있었던 거였어?

 프레이가 머릿속을 뒤적이며 저가 아는 정령 시대의 조각을 모으려는 찰나, 라벨이 키득거리며 그녀의 의견을 구했다.

 “자, 그래서 저 인간들 어떻게 할까? 말해 봐, 프레이.”

 “……이미 충분해요. 아니, 저 손…… 다시 붙여줄 수는 없어요? 하다못해 손목에서 나는 피라도 멎게 해주면 안 돼요? 저대로 두면 정말 죽을 것 같은데…….”

 “뭐? 하아, 프레이.”

 라벨은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입술을 삐죽이며 푸념했다.

 “이참에 단단히 일러두겠는데, 저런 머저리들은 아무리 자비를 베풀어도 안 바뀌어.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살려준 은혜도 까맣게 잊고 너에게 보복하려 들 걸?”

 “그래도 마냥 죽게 두는 건 좀…….”

 “프레이, 내가 인간을 봐온 세월만 수천 년이야. 저런 놈들은 살아있어 봤자 같은 인간한테도 해 밖에 안 된다니까?”

 “…….”

 여전히 프레이가 망설이자 라벨은 선심 썼다는 듯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살려는 줄게. 대신 손목뿐만이 아니라 발목도 전부 날려버리는 거야. 그럼 나중에라도 널 찾아와 해코지한답시고 설치진 않겠지.”

 “라벨. 제발 그만해요.”

 듣고 있자니 속이 메슥거려 프레이가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막았다. 그러자 라벨이 몹시 당황해서 그녀를 달랬다.

 “​왜 그래, 프레이? 아, 혹시 내가 이런 얘기해서 속이 안 좋아졌어? 미안해. 네가 그토록 연약하다는 사실을 잠시 깜빡했어.”

 “아뇨,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내가 다른 말은 다 믿어도 네 괜찮다는 말은 못 믿겠어. 마나가 이렇게 요동을 치는데 뭐가 괜찮다는 거야.”

 “라벨, 부탁이에요. 저 사람들 좀 낫게 해줘요. 혹시 할 수 없는 건가요?”

 “으음…….”

 라벨은 못마땅한 얼굴로 이미 정신을 잃은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곧 그는 한숨을 내쉬며 프레이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알겠어. 이미 잘린 손목은 못 붙이지만 출혈을 막는 정도는 가능해. 네가 정말로 바라는 게 그건데 내가 어떻게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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