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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꽃을 베다
작가 : 단산
작품등록일 : 2022.2.18

1604년.
임진년에 벌어진 왜란의 막바지에 퇴각하는 왜군 패잔병에게 온가족이 도륙당하고 사울만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가족을 학살한 사무라이의 이름은 미우라 다이크케.
사울은 5년간 무술을 배워 복수하러 왜국으로 찾아간다.
천신만고 끝에 미우라를 찾았지만 그는 최고의 사무라이를 이끌고 조선에 잠입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미우라의 배신으로 가문이 적몰된 미우라의 정혼녀를 만난 사울은 그녀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뒤쫓는다.
사무라이들의 임무는 조선에 남아있는 항왜군 6,000명을 이끌고 저선 국왕을 해치고 조선을 정복하는 것을 알게된다.
하지만 조정에서 사울의 말을 믿지 못하자 사울은 가나에와 함께 사무라이와 6,000명의 항왜군을 막는 싸움을 시작하는데...

 
29
작성일 : 22-02-18 16:34     조회 : 162     추천 : 0     분량 : 6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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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일행과 헤어진 기요하라는 김해도호부의 선창으로 향했다.

  왜관이 있었던 혼잡한 수참을 버리고 압곡으로 갔다.

  초라한 어촌에서 쌀 한말에 작은 어선 한척을 빌린 기요하라는 우선 거제의 사등포로 갔다.

  사등포 앞바다에서 딱히 하릴없이 뱃놀이처럼 지내다 배를 몰아 통영과 거제도를 가르는 좁은 수로인 견내량으로 갔다.

  사등포에서 잔잔한 바다를 타고 가조도의 수로를 지날 때 배는 제법 바람을 타고 나아가더니 지도를 지나고 견내량에 이르자 바람이 더욱 빨라졌다.

  견내량을 통과하여 마침내 멀리 화도 넘어 한산도를 바라보는 곳에 이르자 배는 안정을 찾았다.

 

  견내량을 통과해 한산섬 앞 바다에 도착하는 동안 기요하라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의 고통으로 차마 바다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한산섬 앞 바다는 일본이 자랑하는 수군 장군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이순신장군의 수군과 처음으로 싸운 곳이었다.

  일본에서 수전에서는 적이 없었던 야스하루는 자신 있게 이순신과 싸웠지만 처음부터 처참하게 대패하였다.

 

  그의 수군 70여척 중에 59척이 침몰하고 수군 수천 명을 잃고 겨우 10척만 가지고 도망친 곳.. 한산대첩이다.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던 기요하라는 한산도가 가까워져서야 눈을 떴다.

  사공에게 한산섬에 배를 대게 하였다.

  한산섬이 제법 커서 한나절을 섬에서 보냈다.

  특히 불타 없어진 채 주춧돌과 깨진 기와만 남은 수루 터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수 시간을 보냈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섬들... 섬들 사이로 가끔씩 고깃배가 지나갔다. 이곳에서 지은 이순신의 시는 기요하라도 알고 있었다.

  전쟁 중에도 그런 시를 지을 수 있는 이순신의 호연지기가 느껴져 바락 화가 났다.

  기요하라는 벌떡 일어나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 칼을 빼어 수루 터에 깊게 박았다.

  기요하라가 손을 놓자 칼이 부르르 떨었다.

  마치 수루에 앉아있는 이순신을 단박에 죽인 것 같은 느낌에 기요하라는 하하하... 하며 크게 웃었다.

  아직도 떨고 있는 칼을 빼어 바라보다가 마치 이순신의 피가 묻은 것 같은 느낌에 소맷자락에 칼을 닦고는 집어넣었다.

  그 모습이 마치 엄숙한 예식을 지내는 모습이었다.

 

  수루 터에서 건너편 고동산으로 이동한 기요하라는 화도를 넘어 멀리 견내량을 바라보았다.

  일본수군은 견내량에 오기 전에 옥포, 적진포,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에게 패했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 육군의 주축부대는 내륙으로 진격하고, 수군은 전라도 앞바다를 돌아 서해로 이동하여 한양 인근의 경기도와 충청도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조선군의 저항이 거세지면 장기전이 될 거라고 생각하여 금강으로 상륙하여 전라도와 충청도의 조선군이 한양의 조선 왕을 도우려는 것을 차단하고 조선의 곡창지대를 점령하려던 간파쿠님의 작전이었다.

 

  육군이 파죽지세로 조선을 유린하고 점령해 나가듯이 엄청난 수의 일본수군이 조선 바다를 항해하면 조선 수군은 감히 덤빌 생각도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보낸 첩자의 보고에 조선 수군은 겨우 200척의 배에 수군도 1,000명이 안되었다.

  일본 수군은 군사를 태우고 조선에 상륙한 배만 2,000척이 넘었고, 수군의 수도 만 명에 달했다.

  히데요시님은 절대 일본 수군이 질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순신 때문에 간파쿠님의 모든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패하여 150척이 넘는 배가 침몰하고 10,000명이 넘는 수군이 죽었으며, 경기도와 충정도에 상륙하려던 작전에 차질이 생긴 간파쿠님은 와키사카를 도우러 구키 요시타카까지 보내 조선수군을 격파하려고 했다.

  와키사카가 이끄는 73척과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降)가 몰고 온 42척까지 총 115척의 함대는 견내량에 정박해 조선 수군을 기다렸다.

 

  마침내 조선수군 50여척이 견내량으로 진격해 왔다.

  드디어 일본 해전의 명장인 와키사카와 구키의 작전에 걸린 것이었다.

  구키님은 신속하게 진격하여 적을 무너트리고 물러서는데 익숙한 해적출신의 장군이었다.

 

  ‘견내량으로 들어온 조선 함대는 10여척,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을 공격하여 뒤쫓았다. 도망친 조선수군은 마침내 한산도 앞바다로 나가고 그곳에 조선 수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함대는 조선 수군의 총 함대가 겨우 50척이라는 첩보를 미리 알고 있었다. 115척 대 50척. 더구나 일보수군의 배가 더 크고 수군의 수도 더 많았다.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까지 있다는 첩보를 받은 일본군은 이 전투로 이순신과 이억기, 원균까지 몰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순신만 죽인다면 조선 수군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군은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막상 전투 벌어지자 이순신은 와키사카와 구키가 물리칠 수 없는 명장이었다.

  학익진을 치고 총통을 발사해 선두의 전선을 무력화 시켜 기동성을 와해시키고 학익진으로 벌려 일제히 공격하여 마치 옹기에 담겨 죽음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구키님과 와키사카님은 겨우 50여척을 이끌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구키님이 귀국하여 간파쿠님에게 보고한 내용이었다.

 

  기요하라의 계획에는 당항포를 살핀 후에 당포에 내릴 예정이었지만 배를 돌려 다시 당항포로 돌아가기가 번거로워 그냥 당포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배를 모는 어부에게 당포를 거쳐 노량포에 내리겠다고 이르자 쌀 한말로 어림없다고 타박하여 다시 한말의 삯을 보태기로 하고 당포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당포에 도착하자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하룻밤을 선창 주막에서 지냈다.

 

  아침 일찍 일어난 기요하라는 당포를 내려다보는 산에 올라가 바다를 살펴보았다. 건너다보이는 사량도가 손에 잡힐 듯하자 새삼 분기가 울컥 올라왔다.

  이렇듯 가까이에 사량도가 있는데 일본 수군 척후병은 사량도에 정박한 조선수군을 보지 못한 것이다.

  기요하라는 분기를 누르고 산을 내려갔다.

  당포를 출발한 어선이 노량포에 도착하자 점심참이 되었다.

  약속한 쌀 한말 삯을 포로 치르고 어선을 돌려보냈다.

 

  노량포에서 점심을 먹은 기요하라는 노량 앞바다를 바라보며 수심에 잠겼다. 거제, 통영, 김해, 남해, 여수... 모두 만 명이 넘는 일본 수군이 수장되었고, 이곳 노량 앞바다에는 무려 6만 명의 수군이 희생되었다.

  기요하라는 슬픔과 분노가 겹쳐진 아득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물이 나오는 것을 서둘러 감추었다.

  지금까지 기요하라가 살피고 다닌 곳은 모두 이순신장군에게 일본군이 패배한 곳이었다.

  아니 이순신에게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전패를 당했다.

 

  이순신...

  기요하라는 조선에 종군할 때에 이순신군과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지만 조선 정복을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가 이순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단 기요하라 뿐만이 아니라 조선침략전쟁을 시작하고 지휘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현재 쇼군에 오른 도쿠카와 이에야쓰도, 조선에 종군했던 모든 장군들과 사무라이도, 종군에 참여하지 않은 성주와 사무라이까지도 명백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순신 때문에 전쟁에 졌으며 간파쿠 마저 울화로 세상을 떠났다.’

 

  간파쿠님은 죽기 전에 측근 시동에게 이순신이 죽은 게 진짜인지 수십 번을 확인했다고 한다.

  죽어서 이순신과 같은 곳으로 가면 어떻게 하냐며 겁을 내어 몸을 떨었으며, 이순신이 죽었는지 확인해서 무덤에 알려달라고 유언으로 말하기까지 했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이순신은 간파쿠 전하에게, 일본에게 철저한 원수이자 경외의 대상이었다.

 

  기요하라는 노량포 일대를 천천히 걸어갔다.

  왜군의 탄약을 맞은 이순신은 함선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했다.

  전투가 끝나고 이순신의 시신은 노량포구에 내렸을 것이다.

  만약 진짜로 죽었다면 말이다.

  기요하라는 노량포구 주변을 다니며 이순신에 대한 것을 샅샅이 조사했다.

 

  ‘이순신장군의 시신이 배에서 내려올 때 보았느냐?’

  ‘장군의 시신은 누가 염을 했냐?’

  ‘시신의 모습은 어떠했냐?’

  기요하라는 이순신이 정말로 죽었는지에 대하여 확인하고 다녔다.

  사람들은 장군의 이야기만 나와도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흘렸고, 흠모하는 모습이 역력한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장군의 시신을 직접 봤다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12대 133...

  조명연합군과 휴전이 이루어지지 않자 간파쿠 전하는 정유년에 조선을 재침략하라고 명했다.

  간파쿠 전하가 다시 조선을 정복하려고 생각한 것은 간파쿠가 보낸 첩자가 이순신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첩자의 계략으로 잡병이 되었고 조선수군통제사는 원균이 맡았다.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오합지졸과 다름없다고 판단해 단 한 번의 해전으로 조선수군을 몰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 수군의 병선을 모두 없애버리면 이순신이 다시 돌아와 병선을 만드는 시간에 일본수군은 임진년 침략 때 계획했던 금강으로 상륙하여 조선의 허리를 잘라내 전 조선을 정복하려는 작전이 성공할 것이었다.

 

  간파쿠 전하의 작전은 정확히 맞았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에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과 싸워 160척에 이르는 조선수군을 완벽하게 몰살했다.

  사태가 긴급해지자 조선은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했는데 이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병선 12척뿐이었다.

  조선수군을 완전히 궤멸시켰으며, 일본군에 저항하여 싸웠던 의병장들이 잇따라 반란혐의로 처형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서둘러 금강으로 상륙하라고 명령했다.

  간파쿠 전하의 명령을 받은 일본수군은 서해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12척의 배를 가지고 있는 이순신이 해남에서 일본군선을 막고 있었다. 12척으로 133척이나 되는 일본수군을 막겠다는 이순신을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순신의 능력을 알기에 결코 얕잡아보지 않았다.

 

  12척 대 133척.

  300명 대 10,000이었다.

  겨우 12척밖에 없는 조선수군을 박살내고 이순신과 조선수군을 몰살할 기회라고 생각해 총 동원령을 내렸다.

  ‘반드시 이순신을 죽여라.’

  간파쿠 전하가 내린 명령이었다.

  그러나 간파쿠 전하도, 일본수군도 이순신을 알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순신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15만 명이 모두 덤벼도 이길 수 없는 신과 같은 장군이었다.

 

  울돌목은 조수간만 때 바다가 소리를 내며 급류하는 좁은 목이었다.

  이순신은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일본수군을 기다렸다.

  결국 일본수군 133척은 12척밖에 안 되는 조선수군... 아니 이순신 장군 한사람에게 완벽하게 패했다.

  일본군선 31척의 침몰당하는 동안 조선수군은 단 한척도 잃지 않았다.

  1만 4천석이나 되는 성주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는 목이 잘려 이순신이 지휘하는 군선에 효수를 당하고, 수백 명의 사무라이와 수천 명의 일본군이 죽는 동안 조선군은 단 몇 명만이 부상을 입혔을 뿐이었다.

 

  기요하라는 133척을 가진 일본수군이 12척 밖에 없었던 조선수군에 패한 전라도의 울돌목에 갈 생각은 없었다.

  울돌목 패전에 대하여 일본에서부터 너무나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울돌목 패전은 일본국에 가장 치욕적인 패전이었다.

  간파쿠 전하는 그때부터 속병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요하라의 분노가 더 치미는 것은 간파쿠 전하가 이순신에게 패하여 속병을 얻어 돌아가신 것도 아니었고, 울돌목에서 133척을 가지고 13척 밖에 없는 이순신에게 패한 것도 아니었다.

  바로 이곳 노량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3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노량전투 이전에 이순신에게 전패하며 목숨을 잃은 병사는 모두 합쳐서 2만 명이 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노량 앞바다에서 무려 3만 명이나 되는 일본군이 죽었다.

  죽은 병사가 불쌍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 기요하라는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비록 철저하게 조선인으로 변신하여 조선에 왔지만 3만 명이 죽은 노량 앞바다에서 가엾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해 기도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요하라는 노량포 뒤에 있는 연대봉에 올랐다.

 

  연대봉에 오르니 노량 앞 바다가 훤히 보였다.

  남해현과 하동 사이의 좁은 물길에 급하게 물살이 흘렸다.

  물살이 빠져나가는 오른 쪽으로 멀리 고니시 유기나가님이 주둔한 순천이 있을 것이었다.

  무술년 팔월에 간파쿠 히데요시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조선에 출병한 군사들은 모두 당황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철군을 결정하였다.

  조선 침략은 이순신 단 한 사람 때문에 철저히 실패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님을 총대장으로 하는 일본수군 500척이 순천에서 탈출하려는 고니시님을 도우려 노량으로 진격했다.

  순천에서 성을 쌓고 항전하던 고니시님의 부대는 이미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의 공격을 6차례나 받아 거의 몰살 될 위기였다.

  이순신은 고니시군이 도망치지 못하게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순신에게 전패를 당해 보급을 받지 못한 고니시군은 굶어죽거나 도망치다 조선군에게 죽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서둘러 구하지 않으면 고니시 유기나가님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생각한 시마즈님은 사천, 고성, 남해 등에 있는 모든 일본군을 동원하여 고니시님을 구하려고 출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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