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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증명할 나이
작가 : 계춘
작품등록일 : 2022.2.14

세명의 중년 여성의 서로 다른 삶을 적은 글입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안타까움보다 해결할 것들에 대한 여자들의 압박감에 대해 썼습니다.

 
증명할 나이
작성일 : 22-02-17 19:02     조회 : 170     추천 : 0     분량 : 8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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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이 한국에 들어왔다.

 

  “여보세요.”

 

  “나야. 방금 한국에 들어왔어. 잘 지내지?”

 

  “애들 때문에 전화 했어? 주말에 시간 정해서 데리러와. 아빠 얘기 해 놓을게. 그리고 아이들도 조금은 아는 것 같으니까 어설픈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틀이 지나고 아이들의 아빠가 찾아왔다. 전 시어머니가 아무 연락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서 지훈과 살던 집은 팔아버렸다. 아이들에게는 아빠와 살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고, 언제든 아빠가 보고 싶으면 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족이 모두 모일 수는 없다고 말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아이들도 잘 맞는 가족을 원한다. 물론 어떤 부모 하나가 모자라거나 나빠서 같이 살 수 없는 거라면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그냥 받아들인다. 하지만 윤단은 아이들에게 시시콜콜 설명과 그 이유를 말해야 했다. 그것도 핏줄끼리의 이어진 끈을 끊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힘들었다.

 

  공동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집 안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리고 친정엄마와 지훈의 어색한 만남도 싫었다. 아이들이 내려가고 아파트 앞에서 지훈의 차에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고, 윤단은 거실로 들어왔다.

 

  어느 날 시간이 가면 이런 것도 추억이 될 수 있을지라도 그 때는 아니었다.

 

  친정 엄마와 어색한 커피를 마시고 아무 걱정이 없는 것처럼 집안일을 했다. 하지만 윤단은 많이 걱정이 되었다. 그동안 잘 잡았던 아이들의 마음에 작은 파도라도 치게 되면 그 감당은 윤단이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부도덕한 전시어머니와의 만남에서 어떤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 마음도 모르면서 아파트 앞의 나무들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그 위를 작은 새들이 휘젓고 있었다. 저런 삶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훈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직업도 없이 덜렁 아이를 가지게 되면 여자에게만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본인이 처량할 것 같다는 마음이 컸다. 직업을 갖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면 가지자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삶의 몇 부분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지훈이 학위를 받기 전에 아이가 생겼다. 영화에서처럼 호들갑을 떨고 기뻐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지만, 고맙다거나 사랑한다는 한 마디라도 듣고 싶었다.

 

  “지훈씨, 나 생리 할 때가 많이 지났는데 나오지 않아서 테스트기 해 봤거든. 임신인 것 같아. 내일 병원에 가봐야 정확한 건 알 수 있지만, 아마 맞겠지?”

 

  지훈은 아무 말 없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술만 뜯고 있었다. 많은 걱정들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아내가 임신을 했다고 하면 걱정보다는 행복이 먼저다. 무슨 고등학생이 사고를 쳐서 생긴 아이도 아니고, 밥 먹고 살기 힘들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도 아니었다. 단지 지훈의 계획이었다.

 

  “어, 좀 당황스럽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지? 우리 잘 했잖아.”

 

  윤단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서운함보다는 화가 났다.

 

  “지훈씨, 이럴 때는 일단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아이를 가지면 제일 힘든 사람은 여자야. 어떻게 하면 잘 낳고, 잘 키울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게 먼저라고.”

 

  “미안, 단아. 그냥 이런 일이 처음이고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 그랬을 뿐이야. 서운하니?”

 

  윤단도 지훈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왜 그런 반응을 하였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본인의 마음이 중요하지 않았어야 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힘들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것도 직장을 다니고 있는 여자가 엄마가 된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다음 날 윤단은 월차를 냈다. 지훈과 함께 병원에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반응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행복한 경험을 주고 싶지 않았다.

 

  첫 아이라서 윤단도 많이 두려웠다. 가까운 곳에 산부인과 전문 병원이 있었지만, 호텔 근처에 있는 유명한 대학병원에 갔다. 혹시나 모를 일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대학병원은 처음이었다. 살면서 큰 병에 걸릴 일도 없어서 올 일도 없었고, 고작해야 병문안이 전부였다.

 

  등록부터 번호표를 뽑아야 했다. 기다리고 등록하고, 또 기다리고 진료를 받고, 기다리고 수납을 하고, 기다리고 약을 받았다. 임산부들이 꼭 먹어야하는 철분제였다.

 

  전화가 왔다. 지훈이었다. 오늘 병원에 간다고 했으니 지훈도 걱정은 되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보면 남편이 같이 가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려 했었다.

 

  “단아, 오늘 호텔 늦게 끝나는 날이잖아. 병원은 어떡할 거야? 잠깐 외출 괜찮으면 나랑 같이 가자.”

 

  “나 지금 병원 약국이야. 월차내서 대학병원에 왔어.”

 

  지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서운한지 알리고 싶었다.

 

  윤단은 병원에서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모두가 일하고 있을 시간에 만날 사람도 없고, 일만 하느라 친구도 없었다. 임신을 확인하고 나니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었다. 이런 상황도 알려야 하고 한국에서 워킹 맘이 되려면 친정엄마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엄마, 나야.”

 

  “응? 평일에 무슨 일이야? 엄마 나갔으면 어떡하려고 연락도 없이 와?”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고 지훈에게 서운했던 일들을 말했다. 역시 엄마는 엄마였다. 그 무엇보다 딸이 힘들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순간 윤단은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기뻐서인지 슬퍼서인지 몰랐다.

 

  친정엄마는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밥상을 차려 주었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마음이 많이 다쳤을 것 같았다. 맛있는 밥은 큰 위로가 된다. 친정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밥은 더 큰 위로가 되었다.

 

  “지훈씨, 아버님, 어머님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아?”

 

  “응, 그래야지. 이번 주 쉬는 날에 말씀드리러 가자.”

 

  시부모님께 말씀드리니 부모님께서 너무 좋아하셨다. 축하한다며 맛있는 저녁도 사주시고 아버님께서 조신하라는 당부의 말씀도 해 주셨다.

 

  시부모님 집에 도착했을 때 시어머님은 윤단의 오른팔을 잡아끌었다.

 

  “얘야, 너 호텔 그만두는 거 아니지? 우리 너희들 도와줄 돈 없어. 혹시 힘들 것 같으면 이번은 지우는 게 낫지 않니?”

 

  악마 같았다. 자식이 사고를 쳐서 아이를 낳아 와도 부모님들은 좋아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절망의 상황도 아닌데, 지우라는 말씀부터 꺼내는 시어머니가 무서웠다. 그것도 지훈과 시아버님이 없는 곳에서 따로 말씀하셨다.

 

  윤단은 지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시어머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서였다.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면 아이가 들을 것 같아 두려웠다.

 

  결혼한 여자는 늘 힘들다.

 

 -

 

  지훈이 한국에 다시 들어와 아이들을 만난 이후 윤단의 삶은 달라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아빠로써 양육비는 당연히 보냈고, 아이들의 학원비나 학비는 말을 하지 않아도 윤단의 계좌로 입금이 되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학원비가 얼마나 드는지 물어보는 것 같았다.

 

  윤단은 지훈이 그리웠다. 전시어머니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이혼은 하지 않았겠지. 둘 사이의 골은 충분히 매우고 살 수 있는 성품이었다.

 

  얼마 뒤 지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윤단의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학이 있었다. 그 앞은 대학생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도 많이 오는 로데오 거리였다. 먹을 것도 많고 예쁜 카페들도 많았다. 그린벨트에 묶여 있는 곳에 작은 주택을 개조한 커피숍이 있었는데, 지훈에게 그쪽으로 오라고 했다. 조용히 얘기하기 좋은 장소였다.

 

  “단아, 잘 지내고 있지?”

 

  “그렇지 뭐. 엄마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서 그럭저럭 지낼 만 해. 아이들이 곁에 있는 게 행복이지 뭐. 지훈씨는 어때?”

 

  “나? 일본에서 한 여자를 만났어. 나이도 있고, 어렸을 때 너와 사귀는 느낌은 아니지만 남은 인생 같이 의지하며 살고 싶어서 결혼하자고 했어.”

 

  “그래? 잘 되었네. 결혼식은 하는 거야?”

 

  “아니, 그쪽도 재혼이라서 가족끼리 식사나 하기로 했어. 단아, 결혼 얘기하려는 게 아니고, 이 결혼으로 지금까지 했던 나의 아빠로써의 의무와 책임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얘기를 하러 왔어. 아이들에게 소홀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아이들에게 복잡한 관계는 만들지 않을게.”

 

  윤단은 남들이 하는 것처럼 잘 살라는 덕담만 하고 그냥 해어졌다. 어떤 기대를 하고 나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지는 몰라서 조금 당황했었다.

 

  남편도 아니고 그저 아이들의 아빠일 뿐이었다. 윤단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육아 휴직을 한 적이 있었다. 육아휴직이 쉽지 않을 때, 서울에 외국인 투자로 지어지는 호텔에서 직원을 뽑고 있었다. 헤드헌터에게 연락도 왔지만, 아이들을 위해 조금 쉬고 난 뒤 이직을 고려하고 있을 때였다.

 

  “엄마, 직장을 옮기려고 하는데, 몇 달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지훈씨도 도와 줄 수 있으니까 제가 휴직 할 동안은 애들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세요.”

 

  그때의 지훈은 본인이 바빠서 집안일은 전혀 신경을 쓸 수 없을 때였다. 그리고 친정 엄마가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훈에게 휴직 이야기를 했고, 동의를 하고 이직 전에 휴직을 했다.

 

  결혼 생활에서 여자는 늘 굴욕적이다. 타인을 위한 일을 하면서도 허락이 필요하고, 그 일을 했음에도 칭찬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휴직을 하고, 학교에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아이들과 방과 후 시간을 같이 지내고, 간식을 챙겨주고, 저녁도 같이 먹고, 윤단의 결혼 생활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보세요. 응, 나야.”

 

  “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너 회사 쉰다며? 그럼 시간이 많겠구나.”

 

  “그렇지는 않아요. 아이들 봐야 하고 집안일도 많고요. 재취업 준비도 해야 하고요.”

 

  “아이들이야 안사돈이 봐주면 되고, 집안일도 그렇고, 다름이 아니라. 너희 시누이가 좀 바쁘잖니. 몸도 안 좋은데 돈 번다고 그러니 내가 마음이 아파서 죽겠다. 네가 시누이 아이들 봐 주면 어떻겠니? 둘째가 아파서 병원도 자주 다니고 그러니까 힘든가 보더라. 부탁하마.”

 

  어의가 없었지만, 시어머니어서 최대한 예의바르게 이야기를 했다.

 

  “어머님, 저 이직 전에 우리 아이들 위해서 휴직 한 거예요. 형님이 너무 힘드시면 저희 어머니처럼 어머님께서 형님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저도 집안일에 아이들 챙기느라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 친정엄마도 이럴 때 쉬셔야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달라지기 시작했다.

 

  윤단의 전시어머니가 얄밉게 행동을 하고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동안은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그날 저녁 지훈이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은 후 윤단은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지훈은 알고 있었다는 듯 별 반응이 없었다.

 

  “단아, 그 이야기 엄마에게서 들었어. 엄마가 너무 서운해 하시더라. 장모님처럼 건강하지 않아서 자식들에게 도움을 못 주는 게 늘 미안했는데, 네가 그동안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염치없는 이야기를 며느리에게 할 수 있냐고 소리 질렀다며? 엄마가 눈치 없이 말 한 거는 내가 사과 할게. 그냥 딸 가진 엄마라서 그런 거야. 너도 엄마한테 전화해서 사과 하면 안 될까?”

 

  “지훈씨, 딸 가진 부모라면 며느리의 마음도 헤아려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나 어머니께 소리 지르지 않았고 잘못한 거 없어. 그럼 당신이 누나 아이들 보던지.”

 

  지훈에게 소리를 지르고 아이들 방애 들어오기는 했지만 윤단의 마음은 힘들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유교적 교육은 답습한다. 그것을 그대로 필터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남편이다. 그래서 연애할 때의 남자와 결혼한 후의 남자는 다른 사람이 된다.

 

  며느리는 남편 집의 노예다. 돈도 받지 않고 빠져 나갈 수도 없다. 이것이 21세기의 현실이다.

 

  -

 

  지훈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난 후, 윤단은 힘들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결혼한 전남편은 다르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도 못하고 자유롭게 만날 수도 없다. 그건 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휴식이 필요했다. 직장을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일과 육아에 전념하느라 잊고 있었던 즐거움을 찾고 싶었다.

 

  윤단은 고등학교 때 그림을 잘 그렸다. 교내 사생 대회에서 늘 장려상 이상은 탔고, 취미 동아리가 미술부여서 미술 선생님께서 윤단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선생님은 미대를 가라고 했지만, 미대를 가려면 돈이 많이 들어서 포기 했었다.

 

  윤단의 언니 친구는 홍대 미대를 나와서, 합정동 쪽에서 대입 학원을 하고 있었다. 취미로 하는 곳은 아니지만, 윤단이 문의 할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언니, 저 단이에요. 잘 지내시죠?”

 

  “와.....단아. 잘 지내지? 왠 일이니?”

 

  “좀 의논 드릴일이 있는데 그쪽으로 가도 되요?”

 

  “그럼, 당연하지. 언니가 밥 사줄게. 너희 언니랑 같이 나와.”

 

  약속시간과 장소를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또 다른 시작을 한다고 생각하니 행복했다. 그동안의 윤단에게 큰 선물을 주고 싶었다.

 

  “언니, 여기요.”

 

  “그냥 학원으로 오지 그랬어? 너 미술 다시 하고 싶다며? 언니한테 들었어.”

 

  “그것도 그렇고, 제 상황 언니한테 들었죠? 이혼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저 자신을 돌보지 않았더라구요.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나한테 투자하려고요.”

 

  “그래서 다시 그림 그리고 싶었어? 그럼 그냥 시작하지 말고 목표를 세워. 아마추어 미술대회도 많고, 같이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언니를 만난 후 삶의 활력소가 생기는 것 같았다. 언니와 같이 일하는 미대 학생을 소개해 주었다. 그 학생은 돈을 벌고 윤단은 시간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어서 좋았다.

 

  선 긋기부터 시작을 하였다. 수험생들이 없는 시간에 학원에 가서 배울 수 있어서 편안했다.

 

  미술용 연필 깎는 것부터 배웠는데 그게 쉽지는 않다. 연필을 길게 세워 심은 거의 깍지 않고 나무만 얇게 깎아야 끝이 뾰족하지 않아서 선의 굵기가 일정하다고 했다.

 

  대학교 때 동아리 활동으로 몇 번 배운 게 전부여서 아주 초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속도는 좀 빠른 편이어서 일주일을 걸려서 하는 선긋기의 완성을 하루에 끝냈다. 뭐든 결과가 눈에 보이니 힘이 생겼다.

 

  도형을 그리고 실화 데생을 시작했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의 시간은 정말로 빨리 간다. 처음으로 그린 도형은 삼각뿔이었다.

 

  “단이 언니, 혹시 다른 분하고 같이 수업하셔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선생님. 상관없어요. 저도 너무 좋아요.”

 

  그 다음 주부터 새로운 수강생과 수업을 하게 되었다. 유학을 다녀와서 외국인 회사에 다니다가 얼마 전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당분간 안식년을 가진다며 수강시간은 자유롭게 해도 된다고 했다.

 

  키는 작지만 긴 생머리를 하고 말투가 우아해서 사람들에게 호감일 것 같았다. 첫 날도 들어오면서 밝은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왼쪽 손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있었고, 오른쪽 손에는 작은 붕어빵 봉지가 들여져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한 것임을 직감했다. 사회생활 많이 한 티가 났다.

 

  혼자 배우는 것보다 수강생이 같이 있으니 더 좋았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에 수업을 듣는 중이어서 끝나고 셋이서 밥도 같이 먹고 커피숍에서 많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꼭 친구들 같았다. 그런 날이 윤단에게 올 줄이야. 그녀는 행복했다.

 

  그림을 그릴수록 마음은 안정이 되어갔다. 지난 일들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고,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잘 크고 있어서 다른 일들에 집중을 할 수 있었다.

 

  그림을 같이 배우고 있는 친구의 이름은 혜진이다. 김혜진. 나이는 윤단보다 2살이 작고 외국 제약회사 영업을 한다고 했다. 외국계 회사는 이직이 쉽고, 할 때마다 연봉을 올 릴 수 있어서 적당한 시기가 되면 스스로 헤드헌터에게 연락을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 직장을 가지면 이직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여러 가지로 윤단과 다른 인생을 살 고 있는 것 같았다.

 

  김혜진과 가까워질수록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윤단의 이혼 이야기도 하게 되었고, 전시어머니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도 하게 되었다.

 

  윤단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에게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것은 처음이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와, 이런 얘기는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어요. 글을 써 봐요, 언니.”

 

  성격이 얼마나 활달한지 같이 수업을 들은 후로 혜진은 계속 언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행동도 동생처럼 했다.

 

  “언니, 저 사실은 쌍둥이 동생이 하나 있어요. 어렸을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많이 친하지는 않지만, 얼마 전에 한국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핏줄이라서 그런지 금방 친해지더라고요. 몇 십년을 같은 방을 쓴 것 처럼요.”

 

  “그럼요. 자매가 얼마나 좋은 건데요.”

 

  윤단은 미술 수업을 끝내고 회사로 향했다. 내일 있을 한 회사의 행사 진행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있었던 호텔에서는 객실운영팀에 있었지만, 이직을 할 때는 홍보와 진행을 주로 하는 부서로 발령이 났다.

 

  이직을 할 때는 아이들을 위해서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윤단에게 너무 좋은 기회가 생겼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호텔은 아니라도 호텔운영만 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명품 호텔이어서 유명한 재단이나 국가기관에서 진행하는 행사 의뢰가 많은 곳이었다. 윤단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조금만 지나면 팀장급이 될 수 있었다.

 

  “엄마, 오늘 늦을 것 같은데, 애들은 뭐해요?”

 

  “뭐하긴? 숙제하고 공부하고 있지. 저녁 먹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 둘 다.”

 

  윤단은 자기 자리를 잘 지켜주고 있는 아이들이 대견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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