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
 1  2  3  4  5  6  >>
 
자유연재 > 기타
선천빌라 세입자들
작가 : r라
작품등록일 : 2022.2.9

선천빌라에 사는 4명의 세입자들의 평범하고 평범한 이야기.

 
7. 그들의 속사정
작성일 : 22-02-09 16:56     조회 : 167     추천 : 0     분량 : 8809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 똑, 똑! ]

 

 또 다시 방옥분씨의 현관문이 울렸다. 나대곤씨와는 달리 차분한 노크소리였다. 그 노크소리 하나로 그들의 관계엔 더욱 짙고 확실한 선이 그어졌다. 그렇게 그들은 자의적이고 타의적인, 아무도 협상하지 않은 동맹이 성사되었다.

 

 “모두 왔으니, 상황을 확인할 겸 나비 좀 보고 와야 겠군. 간식도 주고.”

 

 *

 

 그들이 집 안에 모인지 3시간이 지난 시간. 오후 2시. 그들은 어제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서로를 의심하는 숨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적막을 깬 것은 나대곤씨의 한 마디였다. ‘할 것도 없는데, 술이나 한 잔 하지.’ 그의 한 마디는 무거운 공기 속에 환기를 시키는 말이었고, 그들을 더욱 긴장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방옥분씨는 아무 말도 없이 부엌으로 가 안주거리를 챙겼다.

 

 나대곤씨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집 구석에 꽁꽁 숨겨 아껴두었던 매실주를 가지고 나와 그들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의 매실주를 건네 마신 그들은 그 시원하고 진한 술맛에 감탄했다.

 

 “이거 직접 담그신건가요?”

 

 한혜미씨의 질문에 왠일인지 나대곤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래. 보통 매실주랑은 다르지?”

 “네. 술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그럼. 술은 인생에 유일한 낙이지!”

 

 선천빌라 세입자들은 그의 낯선 모습에 술잔을 든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인상을 구기지 않은 나대곤씨의 얼굴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왠지 모를 분위기 속에 나대곤씨가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근데, 4층 아가씨는 무슨 일을 해요?”

 

 질문의 주인공은 방옥분씨였다. 질문의 의도는 나름의 사전 조사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항상 바쁘게 살고 있는 것 같았던 한혜미씨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다.

 

 “…. 그림 그려요. 학원 강사로도 일하고요. 어제 잘렸지만.”

 “으음. 애들 가르칠 정도면 그림을 잘 그리나봐?”

 

 방옥분씨의 질문은 한혜미씨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묻는 것인가, 비아냥을 거리는 것인가. 자신에게 재능이 있었더라면, 진작에 유명한 화가가 되지 않았을까. 아니, 미술학원에서 잘리는 일 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전에 학원에서 ‘입시반’이 아닌 ‘취미반’을 맡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작 학원에 잘린 것 뿐이었지만, 그녀의 자존감은 바닥보다 더 깊은 곳에 처박힌 상태였다.

 

 “그냥… 스펙이 좋아서요.”

 “그래? 어디 대학 나왔어요?”

 “저 S대요.”

 

 한혜미씨의 말에 이적도씨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어? 나, 나도 거기 경영학 나왔는데.”

 “네? 몇 학번....”

 “08 하, 학번이요.”

 “저는 14학번... 서양화과 나왔습니다.”

 

 한 치의 예상도 못했던 인연이었다. 악연처럼 느껴지던 인연이 같은 대학 선후배였다니. 이적도씨와 한혜미씨는 ‘저 사람이 S대를 나왔다고?’ 라며 같은 생각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흠! 근데 총각은 그런 명문대를 나와 놓고 뭐하느라 집에 있는거요? 컴퓨터 게임, 뭐 이런거 하는 거 같던데.”

 

 나대곤씨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이적도씨에게 집중되었다.

 

 “게임은 뭐…. 일 스, 스트레스 풀 겸 가끔 해, 해요.”

 

 이적도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의 24시간 중 12시간은 게임에 몰두하고 있으니, ‘가끔’ 이라는 단어는 모순적이었다.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이번엔 한혜미씨가 추궁하듯 물었다.

 

 “소설가… 입니다.”

 

 이번엔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단지 뒷 말에 ‘지망생.’ 이라는 단어를 빼먹었을 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을 ‘히키코모리’ 라며 비웃음을 보이던 한혜미씨의 태도는 달라졌다.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 문학가셨구나. 저도 책 엄청 좋아하는데! 어떤 책 쓰셨어요?”

 “아, 아직 출간한 책은 없고요…”

 “아…”

 

 그들 사이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적도씨는 ‘또 속으로 나를 비웃고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한혜미씨의 다음 말은 가슴 한 켠에 심한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괜찮아요.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문학가니까. 꼭 출간을 해야만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이적도씨를 위로하려는 의도이긴 했지만, 사실 그건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림쟁이, 글쟁이. 많이 다르지만 비슷하다. 비슷한 가시밭길을 걸어간다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 한혜미씨는 잔을 들어 그의 술잔에 부딪혔다.

 

 공용주택에 대한 매너는 없지만, 생각했던 거 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그렇게 문학에 대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책 취향도 비슷하고, 예술에 대한 동경심과 야망도 비슷했다. 오랜만에 마음이 맞는 대화를 한 것이 얼마만인지. 마치 이 자리에 둘만 남은 것 처럼 즐거운 대화를 나누자 나대곤씨와 방옥분씨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방옥분씨는 다시 나대곤씨에게 질문의 화살을 돌렸다.

 

 “그 쪽은 뭐하시던 분이예요? 안주인은 없으신 것 같던데.”

 

 아내에 대한 이야기라면 항상 고개를 휙 돌려버리던 나대곤씨였다. 그러나 그 날 따라 무언가에 홀린 건지.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평범한 중견기업에 다니다가 정년 퇴직했소. 이혼한지는 이제 한… 20년 정도 되었어. 마누라라는 것이 다른 놈이랑 바람나서 집을 나갔지.”

 “저랑 비슷하네요. 자식은 몇 명 있어요? 아들은 한 번 본 것 같은데.”

 “아들놈 하나 있는데, 양육권 가져와서 내가 키웠지. 우리 아들 말이야, 내 아들이지만 정말 잘 컸어. 키도 엄청 크고, 인물도 훤칠하고! 게다가 공부도 정말 잘했어서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대학 나왔다네. 지금은 누구나 알아주는 대기업에서 초고속 승진해서 과장 직함도 달고 있지. 내 생활비도 꼬박꼬박 보내주고!”

 “허이고야. 자식 농사를 아주 잘 지으셨네.”

 “그럼!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벌써 어여쁜 색시 얻어서 장가도 갔고, 떡두꺼비같은 손자도 한 명 낳았고…. 아들이랑 손주가 날 닮아서 인물이 아주 좋아.”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꼭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자식 자랑이다. 말동무가 없었던, 특히 아들 자랑을 할 상대가 없었던 나대곤씨는 물을 만난 생선같은 얼굴로 신나게 자식자랑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아들 쪽 인물이 훨씬 더 잘났더만. 근데 대기업이 바쁘긴 바쁜가보네.”

 “… 바쁘긴 뭘 바뻐. 주말마다 쉬던데. 아들 놈이 배은망덕한 놈이라 제 애비한테 잘 안오더라고.”

 

 나대곤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양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음성엔 씁쓸함이 숨겨져 있었다.

 

 “내가 지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말이야. 이젠 나랑 통화하는 것도 귀찮아 해. 나도 내 부모한테 그랬지만, 막상 내가 겪어보니 참….”

 

 나대곤씨는 어깨가 무거울 아들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본인도 그랬으니 말이다. 그 또한 살아생전 부모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이적도씨는 순간 나대곤씨의 축 처진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저절로 자신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적도씨 본인도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지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우리 부모님도 누군가 내 안부를 물으면 저런 어깨를 하고 계실까.’ 이적도씨는 자신의 턱에 자라난 까칠한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래도 살아는 있잖아요. 그거면 되는 거지. 살아만 있다면, 건강만 하다면…”

 

 방옥분씨가 혼잣말처럼 되뇌었다.가 없었던 나대곤씨는 물 만난 물고기 같은 얼굴로 쉴 틈 없이 아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댁도 이혼 했소?”

 “사별했어요. 폐암으로. 우리 철민이가 12살 때 그랬으니까… 30년 정도 되었네요.”

 

 그들은 들던 잔을 멈추었다.

 

 “지금이라면 살 수도 있었을텐데. 그 때 의술이 좋기를 했나, 뭐 했나. 그 당시 암은 집안을 풍비박산내고 죽을 날 받아 놓고 기다리는 병이였죠.”

 

 저 할머니의 인생사 또한 평탄해보이진 않았다. 남편은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하나뿐인 아들은 사고로 떠나고. 이제 완벽하게 혼자가 된 여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손바닥으로 애꿎은 방바닥만 훑고 있었다.

 

 그제야 그들은 그녀가 왜 이렇게 동물에 집착을 하는 건지.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고양이를 죽인 범인이 이 안에 있다.’ 라고 확신하던 그녀가 집 안에 부르고, 밥까지 먹였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댁의 아들은 왜 먼저 가버린거요?”

 

 그 누구도 쉽게 꺼내지 못했던, 혹여나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도록 조심 했던 주제를 나대곤씨는 심심한 안부처럼 물었다.

 

 “나랏일을 하다 간거니까… 흉악범 같은 걸 잡다가 사고가 난건가?”

 “할아버지!”

 

 한혜미씨가 나대곤씨의 질문을 저지했다. 그녀도 내심 궁금하긴 했지만, 저렇게 질문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집 안엔 무언의 압박이 방옥분씨에게 향했다.

 

 *

 

  이야기를 꺼내기 전, 방옥분씨는 물잔에 가득 담긴 매실주를 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매실주가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한 그 곳에서 명쾌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흉악범 잡다가는 무슨. 어처구니 없이 애미 곁을 떠난 놈이예요. 음주운전 단속을 하다가 새끼 강아지가 차도에 있었더랍니다. 우리 아들이 마음씨가 참 예뻤거든. 특히 동물에 대한 애정이 많았어. 그 작은 강아지, 그대로 냅두면 죽을 것 같아서 그거 구해준다고 다른 차선으로 가다가… 단속을 피하려던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버렸지 뭐예요?”

 “세상에.”

 “시키는 대로 음주 단속만 했으면…. 더 어이없는 건 뭔지 아세요? 그 피하려던 차는 시속이 40도 안되었다는거예요. 남들 다 살 수 있었을 일인데, 아들은 땅에 머리를 잘못부딪혀서 하반신에 마비가 왔고…”

 

 방옥분씨는 매실주를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킨 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1년 뒤에 결국 자살했죠.”

 

 그제야 그들은 방옥분씨의 이상한 행동에 이유를 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힘을 싣는 말을 이어갔다.

 

 “아가씨가 말한대로 나는 동물 수집가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책임에 대한 것을 100% 채우지 못하니까. 그런데… 떠돌아다니는 강아지나 고양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이 가고 마음이 가. 우리 아들이 저런 거 보면 참 슬퍼 했는데. 라는 생각이 들고, 아들한테 옮은 건지 쓸데없는 오지랖이나 부리게 되고. 지 아들도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으면서 말이지.”

 

 한혜미씨는 남의 속도 모르고 망언을 내뱉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한혜미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매실주를 들이켰다. 방옥분씨는 동물들을 동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 행위로 아들을 추억한 것이다.

 

 매실주가 너무 달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솔직함을 들었기 때문일까.

 

 그들을 서로에게 꽁꽁 쌓고 있던 무언가를 한꺼풀, 한꺼풀. 벗겨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은 서로를 의심하고 있단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저는 그런 거 질색이에요. 책임지지 못할거면서 함부로 동정하는거.”

 

 한혜미씨가 컵을 만지작 거리며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말했다.

 

 “이 아가씨!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꼬여 있어? 어떤 마음이든 어울려 사는 세상인데.”

 

 나대곤씨가 훈계를 하는 어조로 물었다. 한혜미씨는 속으로 ‘할아버지도 만만치 않은데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것도 절 이렇게 키운 부모님 때문이겠죠. 우리 부모님이 오지랖 대왕들이여서. 그래서 전 남 일에 오지랖 부리는 건 질색이에요. 그릇이 작은 건지, 하나만 해도 벅차더라고요. 그래서 제 동정은 한정적이에요. 전 오로지 제 부모만 동정하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가족이라는 혈연 이상의 악연으로 묶여 있고, 서로가 살아 숨쉬는 한. 아무리 거지같이 키웠다고 해도 키운 건 키운거니까. 부모가 제대로 된 역활을 못해줬어도 부모는 부모니까. 저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면서…”

 

 한혜미씨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대곤씨가 ‘이 아가씨도 배은망덕한 아가씨네.’ 라고 말했다. 그녀는 웃었다. 나대곤씨의 말이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그녀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효라는 걸. 대한민국은 태아일 적 부터 그것을 강요하곤 한다. 낳아준 정, 키워준 정, 혈연에 대한 희생을 말이다. 그 강요는 마치 신앙과도 같았다.

 

 “우리 아빠도… 저한테 그런 말씀 많이 하셨는데. 배은망덕한 년이라고. 낳아준 은혜도 모르고, 지 애비 죽어가는데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다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당연히 부친이 죽어가면 얼굴 한 번 정도는 비춰줘야지! 아가씨 너무한 거 아니야? 세상 참 말세야, 말세.”

 “전 아빠가 빨리 돌아가시길 기도했어요.”

 “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적도씨가 물었다. 세상 까칠해 보이는 여자가 저런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것이 의외였다.

 

 “뭐, 일이야 많았죠. 벌이도 시원찮은데 술에 찌들어 살았다던가, 엄마한테 욕하거나 때리는 일도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뿐인 딸에게도 손찌검을 하셨고, 가족도 못챙기시면서 남 일에 참견하는 건 좋아하셔서 다른 집에 돈이나 뜯기시고, 사기도 당하시고.”

 

 한혜미씨는 괴로운 듯 인상을 구겼다. 지난 10년도 더 된 일들이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와닿았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엄마를 때렸던 그 순간의 분노만큼은 아직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회를 잡아 호통을 치려 했던 나대곤씨는 한혜미씨의 표정을 보고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멍청한 엄마는 그런 아빠를 동정하더라고요. 불쌍한 사람이라고. 세상살이가 힘들어서 그런거라고. 그리고 저도 동정하시곤 했죠. 부모 잘못 만나서 고생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했어요. 웃기지 않나요? 누가 누굴 동정하지? 당신이 제일 불쌍한데. 하루에 12시간씩 앉지도 못하고 설거지하면서 벌어온 돈으로 세 식구 간신히 딱 굶어 죽지 않게만 해놓고선. 차라리 도망가서 속 편히 살지. 희망같은걸 안만들었다면 조금은 편했을텐데.”

 “아가씨, 아가씨가 아직 애를 안낳아봐서 모르겠지만 부모라는 건 자식을 쉽게 버리고 도망갈 수 없어. 눈에 넣어도 안아픈 자식인데.”

 

 방옥분씨가 타이르듯 말했다. 한혜미씨의 두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빨갛게 상기된 눈으로 방옥분씨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분노가 들어있었다.

 

 “그러니까요. 눈에 넣어도 안아프다는 자식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할까요? 우리 엄마는 아직도 아빠한테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리고 우리 가족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혜미씨는 말 끝을 흐렸다. ‘가난은 되물림이다.’,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 말은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온 한혜미씨는 이제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한 번 더 인식하니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그, 그래도 도, 도망치지 않으시려고 하네요. 저랑 달리.”

 

 그는 생각했다. 직면하는 것과 피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편한지에 대해.

 

 분명 어느 쪽도 불편할 것이다. 어차피 정답은 없는 것이니까.

 

 언제나 도망치는 쪽을 택했던 이적도씨는 지금 자신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창피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저, 저는 처음부터 말을 더듬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주, 중학교 때, 때까지만 해도.”

 

 이적도씨의 말에 그들은 숨을 죽였다. 이적도씨는 결심에 차오른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고등학교 1, 1학년 때 뭐, 뭘 잘못한건지 모르겠지만… 소위 노, 노는 애들한테 찍힌 적이 이, 있었어요… 보, 보복이 두려웠던 제 친구들은 하나 둘.. 다 떠나갔죠. 그렇게 지옥같은 3년을 보내고 나, 나니까 말버릇이 벼, 변해있었어요. 더 찌질하게. 다, 다행히 대학교 땐 괜찮은 동기들이 주, 주변에서 저, 저를 잘 챙겨 주었지만 하, 한 번 생긴 말버릇은 고치기가 힘들더라고요. 누군가랑”

 

 그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며 말했다. 더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온 신경을 쏟아 말을 이어갔지만 그의 말은 평소보다 더 긴장되어 말을 더듬고 있었다.

 

 “이, 이젠 친구도 다시 생겼고… 더 이상 고등학교 때 저를 괴, 괴롭힌 친구들이 워, 원망스럽진 않아요. 근데 제가 괴, 괴롭힘을 당할 때 그 시선들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아, 않아요. 맞았을 때 보다 그 눈빛들이 더 아팠거든요.”

 

 그 눈들은 언제나 그를 쫓아왔고, 괴롭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그에겐 어둠이 더 편해졌다. 시선이 보이지 않은 것이 평온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아무런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이적도씨의 말을 끝으로 그들 가운데에 있던 매실주가 동이 나버렸다. 달짝 지근한 매실수의 향이 그 공간 안에 맴돌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속에 나비의 존재가 희미해 졌을 때, 나대곤씨가 말했다.

 

 “여기 술 좀 남는 거 없나?”

 “아고. 장 보는 걸 깜빡했는데….. 어제 마신 게 다예요.”

 

 방옥분씨가 난감한 어투로 답했다. 그 때, 한혜미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저기 편의점에서 사올게요.”

 

 한혜미씨는 후다닥 신발장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됐어, 됐어!”

 

 나대곤씨가 말렸지만, 한혜미씨는 이미 신발을 다 신은 상태였다.

 

 “아뇨. 그냥 바람도 좀 쐴겸. 마른 안주도 같이 사올게요. 육포가 먹고 싶어서.”

 

 그녀는 그렇게 현관문을 나갔다. 적당히 입 안에서 맴도는 매실주의 향기가 하늘까지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굳이 심부름을 자처해 나온 이유는 휴대폰 확인을 위함이었다. 왠지 심상치 않아진 분위기 때문에 그 안에선 휴대폰을 마음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휴대폰의 시간을 보니 벌써 5시였다. 그렇게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것 같지 않았는데, 시간은 꽤 많이 지나가 있었다. 깨진 액정에 손이 베이지 않게 요령껏 터치하며 이 곳, 저 곳 이력서를 넣은 곳에 답장이 온 것들을 확인했다.

 

 지금 상황이 이렇기는 하지만 그녀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차피 범인이 아니라는 것만 증명하면 끝날 일이니 다음 직장을 미리 구해 놓는 것이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이 핑계로 잠시 일을 쉬며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겠지만, 그녀는 당장 돈이 필요했고, 돈이 필요하다. 엄마가 또 언제 울면서 전화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다른 세입자들의 경제 상태는 어떨지 몰라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으면 먹을 수 없고, 잠을 잘수도 없으며, 그림도 그릴 수 없다.

 

 휴대폰을 꺼내 메일함과 메시지를 살폈다. 빠르게 걷던 그녀의 발걸음은 메일을 확인하고 한 템포, 메시지를 확인하고 한 템포,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긴머리를 한 번 쓸어 내리며 편의점을 향해 달려갔다. 어딘가에서 폐지를 태우는 듯 타는 냄새가 그녀의 콧잔등을 스쳐갔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7 7. 그들의 속사정 2022 / 2 / 9 168 0 8809   
6 6. 범인은 너일 것이다. 2022 / 2 / 9 152 0 7293   
5 5. 진솔한 술 2022 / 2 / 9 172 0 5435   
4 4. 나비를 죽인 범인 2022 / 2 / 9 161 0 8218   
3 3. 그들의 만남 2022 / 2 / 9 165 0 8458   
2 2. 담배 냄새 2022 / 2 / 9 173 0 8347   
1 1. 고양이 울음소리 2022 / 2 / 9 278 0 674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하얀 달, 메아리
r라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