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녀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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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익숙한 알림음에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보니 백대빈의 투정이 담긴 문자가 정갈한 고딕체가 되어 시간과 함께 떴다.
벌써 6시가 넘었어? 그나저나, 분명 백대빈 개인 카톡 알림은 차단했던 것 같은데... 엊그제 만든 단톡방인가?
어찌 됐건 이 문자는 천사님에 대한, 그리고 나를 향한 하소연일게 분명해 나는 읽지 않고 다시 껐다만, 그 후로도 천사님과 백대빈은 한참을 내 머릿속에서 헤엄쳤다.
사실은 숫자가 바뀌고 시간이 지날 때마다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해가 지는데 잘 있으려나?
잘 있겠지?
그럼, 천사님이 애도 아니고, 그럼.
악마는 애지만 딱히 우리 천사님이 잘 돌봐주시겠지.
"야, 우리 몇 년 만에 만난 건데... 놀 때 멍 때리는 특기 같은 건 필요가 없다니까 왜 굳이 준비해왔어?"
"...?? 아 응 미안."
잠시 멍을 때렸나 보다. 나는 몰랐는데 천사님도 악마도, 그리고 얘도 나에게 말하는 걸 보면.
"아니 장난이니까 사과를 하지는 말고~!!! 근데 좀 궁금한 건 있다. 왜 그렇게 골똘해. 집에 가고 싶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집에 두고 온 사람이 좀 걱정돼서."
"? 너 누구랑 같이 살아? 너 자취한다며."
"아니. 그니까 그냥 사람 말고, 살아 움직이는... 그런 거."
"???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룸메이트?"
아 잠깐만, 망했다. 쓸데없고 비효율적인 멍 같은 거 때리지 말걸. 이걸 친구 앞에서 까발리게 될 줄이야.
"아, 아니? 아, 나 개 키우거든. 고양이도... 둘만 두면 걱정되는 게 맞잖아."
"?!?!?! 왜 진작 말 안 했어, 나 동물에 진심인 거 알잖아. 특히 강아지랑 고양이! 귀여워 아가들!"
"아..."
"... 그 반응은 뭔데?"
반려동물... 얼떨결에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런데 잠깐, 맞긴 맞지 않나?
노란 머리인 악마, 레트리버랑... 천사님은 조금 예의 바른 고양이...
"와, 상상하니까 웃기다."
"뭘?"
"아아, 우리 집 고양이, 되게 예의 바른데 귀여운 프레임을 씌우니까 조금 귀엽기도 하고 웃겨서, 강아지도 그렇고..."
"흐음, 그래? 뭔가 수상한데~?"
"? 갑자기 뭐가."
"예현아, 나 너네 집 가봐도 돼? 저번에 네가 캐나다에서 있을 때도 한 번 놀러 갔었잖아. 그때가 벌써 4년 전인데... 오랜만에 만났는데 귀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랑 고양이도 볼 겸 너네 집 구경시켜주라!"
"... 미쳤어? 절대 안 돼."
"아~ 왜, 오랜만에 같이 놀자~ 3시간?"
"단 한 줌도 오지 마."
"2시간?"
"내 곁에서 떨어져."
"1시간?"
"걔네 사람 별로 안 달가워할걸."
"제발."
"... 진짜, 진짜로 딱 30분 만이야."
친한 사람 한정으로, 쉽게 거절을 못 하는 나는... 결국 승낙을 해 버리고 말았다.
"아싸~! 그럼 곧 가는 거지~!? 우리 게임 딱 한 판만 하고 바로 가자!"
"... 어."
"아, 맞다! 또 물어볼 거 있어."
"뭔데?"
"너랑 같이 사는 룸메이트는 어때? 나처럼 잘해줘? 일단 강아지나 고양이 말고~ 걱정되는 별개의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서~."
"...... 야!"
아, 한번 궁금한 것을 끝까지 파고드는 친구의 성격은 썩 예쁘다가도 한없이 막막하고 텁텁하다.
그래서 이 사실은 절대 들키고 싶지가 않아.
음... 일단 제일 커다란 문제인 천사님이랑 악마한테는 이걸 어떻게 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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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현아, 한판 끝났어...! 이제 너희 집 가자~!"
결국 게임을 하는 동안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이 룸메이트들을 어떻게 대피 시켜야 할까.
나는 서둘러 단체 톡 방에 문자를 보냈다.
PM 6:47
김예현 > 피해요 빨ㄹ리
백대빈 > ?
천사님 > ?
김예현 > 두 분 빨리 피하라고요 지금 다낮ㅇ
천사님 > 예현아 나는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일단 어디로 피해야 할까?
백대빈 > 헐! 네가 먼저 연락한 거 두 번째네, 근데 피하라니? 혹시 잘못 보낸 거야? 해킹 당한 거야? 내가 거기 경찰서에 신고할까? ㅜㅜ
천사님 > 음... 혹시 전화 걸어도 될까?
아, 미치겠네. 피하려면 피할 것이지 얄미운 물음표만 다닥다닥 쏘아붙여대고 있어.
안되겠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화장실은 너희 집에도 있는데?"
"지금 좀 상당히 급해서 그래."
"아하... 기다릴게. 빨리 나와."
화장실을 가서 천사님 말대로 전화를 걸어야겠다.
뚜르르, 뚜르르,
덜컥.
"여보세요? 예현아,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저... 갑자기 제 친구가 저희 집으로 온다고 해서 그러는데요."
"응응. 근데?"
"제가 악마랑 천사랑 사는 걸 알면 놀랄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드리는 말씀이에요. 혹시 고양이랑 강아지로 변할 수 있으세요?"
"... 뭐?"
"갑자기 곤란한 거 아는데... 아 씁,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제 입을 탓해주세요, 이기적이라 죄송한데 계획도 다 있어요.
그냥 아주 잠깐 동안만 대빈이는 레트리버 강아지로 둔갑하면 되고 천사님은 고양이로 둔갑... 해주시면 되는데..."
"내 이름 들리니까 나 좀 바꿔줘. 예현이가 뭐래?"
"어, 대빈...... 아."
"헐, 김예현 지금 방금 내 말 들었나 봐!! 아 귀여운 것, 예현아 왜?"
"뜬금없는 부탁인데 레트리버 강아지로 변할 수 있어요?"
"엥??!! 갑자기?"
"자세한 건 천사님께 들으시고... 제가 너무 급한데 죄송하지만 어떻게, 좀 될까요?"
"음... 조건을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내 입장을 말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렸다가 가."
"? 네."
뭘 어쩌려고 그래, 예현이 말인데 안 듣게? 라고 하는 이럴 때마저 다정하신 천사님과,
가만히 나 믿고 있어봐 연재야, 내가 너까지 횡재하게 해준다. 하는 쾌활한 악마 목소리가 번갈아 겹쳐 들렸다.
"혹시 될까요?"
"물론 예현이를 위해서라면 가능하지만... 나는 손해 보는 거 그다지 안 좋아해."
"?"
"응?"
"우리가 모든 수치심을 내려놓고 가만히 네 소원 들어줄 테니까 다음에는 예현이도 우리 소원 들어주자, 어때."
나도 바로바로 갚는 게 편하니까, 딱히 상관은 없는데 얘는 왠지 백대빈이라서 불안하다.
"... 일단 알겠어요, 그러면 천사님도 괜찮은 게 맞으시죠?"
"야옹."
뭐야, 벌써 변신하신 거야?
"멍멍."
'변신한 거 맞겠지...?'
이제 가도 되겠다, 하고 나는 한시름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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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착했다!"
"얼굴이 엄청 폈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내 18년 지기 친구의 자취방을 내가 제일 먼저 가보는 거 아니냐~."
"하하 그 말 웃기다! 뭐, 그건 그러네."
띡, 띠딕, 띡.
철컥,
"어... 어어, 나 왔다! 고양이랑 강아지야~"
"얘네 이름이 그냥 고양이랑 강아지야?"
"아, 아니... 이름은 있지!"
"이름이 뭔데?"
"고양이는 엔제리...고 강아지는 데비리야..."
"이름이 천사랑 악마? 되게 귀엽다, 왜 그렇게 지었어?"
"음... 그러게, 글쎄? 그냥 요새 판타지에 관심이 많아서."
"와 씨, 현실 추구 김예현이 판타지? 너 진짜 한국 오고 많이 변했구나, 너도 얼굴이 활짝 폈어! 근데 얘네들은 왜 안 나와?"
"방에서 자고 있나 봐."
"오케이, 그럼 아기들 볼 겸 방에 가 봐야지~!"
"야, 안돼 잠깐."
"왜?"
"일단 화장실에서 손 씻고 와."
"역시 MBTI가 J 인간 아니랄까 봐... 알겠다야."
"뭐라는 거야, 그거 잘 안 맞던데, 과몰입 하지 마라."
덜컥,
"어디 갔어요 천사님... 어디 갔어 악마야..."
"미야-옹."
"헐! 천사님! 진짜 고양이로 변하셨네, 이렇게 보니까 너무 귀엽다."
"먕! 먕!"
"? 침대요? 여기가 왜,"
"월! 월!"
"아 진짜 깜짝아, 놀래라."
"야옹!"
"월! 월!"
"그래요. 고양이랑 강아지, 지금부터 두 분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지금 제 친구가 지금 화장실에 손 씻으러 갔는데 곧 나올 거예요. 그 친구가 워낙 고양이랑 강아지를 좋아해서 두 분한테 막 안겨댈 수도 있는데 당황하지 말고 연기는 잘 해주세요, 아까 제가 한 말은 잘 기억하시죠?"
"냥! 냥!"
"아, 그리고 소원은 제가 가능한 선에서 들어 드릴게요. 두 분 다 초인적인 존재이지만 저는 할 수 있는 게 호흡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저 혼자 말하니까 좀 많이 이상해 보여서... 저는 이제 밖에 나가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테니 잘해 주세요. 마음으로 응원할게요, 죄송합니다."
일이 커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내 앞에는 귀여운 생명체 두 마리가 있었고, 나는 그들의 본질을 절대 타인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숙명이라는 게 있다면 온전히 지금을 뜻한다.
일시적인 계획 유, 지속 가능한 목표 무로 살았던 나는, 이제 두 개를 다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