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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세벽(世壁) - 세상의 벽 -
작가 : 세느아
작품등록일 : 2022.1.16

세상에 벽이 있었다. 그 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 벽 너머에서, 다른 배후를 발견했다.
그들을 막고자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3부 그 너머 (1)
작성일 : 22-01-31 10:12     조회 : 206     추천 : 0     분량 : 1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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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바람이 휘부끼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후훅 하고 불어제끼는데 그 소리가 매우 불온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션은 창문에 바짝 붙어 밖을 쳐다보았다. 새벽이 어스름한 시각, 이미 문앞을 지키던 이들은 자리를 떠났다. 뭐지? 평소보다 빠르다고 생각하던 찰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깨달았다.

 바람이 세서인지 창문은 계속 덜컹거리고 있었다. 션은 충동적으로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베고 지나갔다. 얼굴에 충격 비슷하게 다가온 바람을 느끼며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눈이 내려 바닥이 하얘진, 올라다보면 기저를 모를 눈송이가 끊임없이 떨어지는 광경을 목도했다.

 예호제가 시작했다. 새해가 7일 남아있었고, 시작을 알리듯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문을 여니 그곳엔 재희가 있었다. 션은 마침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재희의 눈동자가 그를 향하자 저도 모르게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는 목도리에 거의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고 있었다. 우산을 쓰지 않은지라 머리에 눈이 맺혀 물방울이 되어있는게 보였다. 추워보였다. 얼굴을 드는 그녀의 귀끝과 코끝이 빨갰다. 언제부터 서있었는지 쉬 짐작되지 않았지만 그다지 짧은 시간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안녕."

 "..."

 션의 인사에 재희는 눈만 굴렸다. 말간 얼굴이 언젠가의 겨울과 겹쳐졌다.

 "그건?"

 재희의 손에 들린 털뭉치를 보고 션이 말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션과 거리를 좁혔다. 서늘하지만 곧 따듯해질 목도리가 션의 목에 둘러졌다. 막상 결정하고 나니 묵묵히 제 할일을 하듯 재희는 투박하게 움직였다. 그동안 션은 재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릴 적, 션이 한참 놀다 목도리를 질질 끌면 재희가 그의 목에 목도리를 다시 잡아주곤 했었다.

 '흐트러졌어.'

 '그러네요.'

 말을 하는건 션이었지만 행동은 언제나 재희가 빨랐다. 끝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 다시 감아주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그때마다 션은 괜스레 멋쩍어져 목도리가 잘 흐트러진다는 둥, 제대로 매어줘야하지 않냐는 둥 헛소리를 했다. 재희가 션보다 언제나 더 컸기 때문에 가까이 오면 그를 올려다봐야만 했다. 아래에서 시끄럽게 쫑알거리는 꼬마가 귀찮을만도 한데 재희는 군말 없이 매듭을 지어주고 나서야 한 발 물러섰다.

 서로가 친구처럼 지냈지만 그럴 때면 션은 재희가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하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다. 재희는 항시 션을 주시하고, 그의 자그마한 틈을 파고들어 잡아주었다. 션은 스스로가 대접받는 사람이라는 걸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션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는 이따금 재희를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을지언정, 그녀의 어떠한 흐트러짐을 잡아준다거나 케어해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어린 재희는 항상 얇은 홑겹 옷을 입고 있었다. 빨개진 손끝으로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어준 것도 재희 뿐이었다. 자신은 목도리까지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십수년의 세월이 지났다. 너무나 당연하게 배제되어있던 사고(思考)였다.

 그녀는 이제 션보다 한 뼘 아래에서 정수리를 보인채 움직인다. 틈새없이 목도리를 여며준 재희가 말했다.

 "갈 곳이 있어요."

 "지금?"

 "네."

 "너랑 나랑?"

 "...네."

 "그럼 가야지."

 "네?"

 그녀가 당황한 투로 되물었다. 아마 안간다고 한다거나 왜냐고 물어봤다면 대답해올 말까지 성실하게 준비했을 지도 모른다.

 션은 마음에 있는 말 그대로 털어놓았다.

 "너랑 가면 어디든 가야지."

 "말은 참.."

 핀잔들을걸 각오했는데 의외로 재희는 피식 웃었다. 잇사이로 바람빠지는 소리가 났다. 하얀 입김이 퍼지는 동안 션은 아침에 느낀 불온한 바람 따위는 머릿속에서 다 지워버리고 말았다.

 

 눈이 많이 와있고, 아직도 내리고 있는 탓에 두 사람은 없는 길을 만들어내며 걸었다. 가자고 한 건 재희고 션은 길을 몰랐으니 그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장화 하나 신지 않은 재희가 눈길을 치우는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초라했다. 거세지는 눈발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쉼없이 깜빡이는 재희를 보다가 션이 앞으로 나섰다.

 "알려줘. 내가 할게."

 "괜찮아요 도련님은 가만히,"

 "이렇게 하면 되지?"

 발로 눈을 밀고 손으로 가지를 홱 꺾으니 우지끈 소리가 나며 동그스름한 길이 생겼다. 힘조절을 못했단 생각이 들긴 했으나 션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재희는 잠시 멍해있다가 빨개진 코끝을 훌쩍였다. 그 모습이 천진한 아이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눈길을 헤쳐나갔다. 길다운 길은 아니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나아갈 곳은 한 군데 뿐이라서 길을 알려달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던 션이 가지로 손을 뻗던 찰나였다.

 "잠깐만요."

 뒤에서 쑥 튀어나온 손이 션의 팔을 제지했다. 어느새 상체를 앞으로 숙이듯 뻗은 재희가 그의 옆얼굴 바로 진척에 있었다. 션은 저도 모르게 자라목처럼 목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여전히 지나치게 가까웠다.

 "조용히.“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희는 손을 좀 더 뻗어 션이 건드리려던 가지를 살짝 잡아 바깥풍경을 들췄다. 하얀 세상이 그녀의 정수리 너머로 보일듯 말듯 했다. 목적지였다. 하지만 재희는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적막함이 사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숨 쉬는 것도 잊은 듯 자세를 멈추고 밖을 뚫어져라 보았다. 경직된 자세에서 불편한건 션도 매한가지였지만 재희가 내뿜는 기운이 심상치 않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주위가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방이 눈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자그마한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얼핏 집으로 보이기도 했는데, 지붕 위에 가녀린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교회? 이런 곳에?

 이상했다. 산골 구석진 곳, 사람의 발길조차 닿지 않아 눈만 쌓여있는 곳에 세워져 있기에는 더더욱.

 그렇게 의아해하고 있는데 교회의 문이 열렸다.

 재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이내 동공이 커졌다. 션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 몇은 그런가보다 싶었지만 사람이 빠져나오는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일시에 움직였다. 얼굴을 반 이상 가린터라 성별도 나이도 추정이 불가했다. 단지 재빠른 몸놀림으로 봐서는 젊은이들처럼 보였다.

 없는 길인데도 정해진 모양새로 일사불란하게 여러 사람이 빠져나간 후,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은 나이가 든 두 남자였다. 그들은 검은 옷을 입고 있지도, 얼굴을 가리고 있지도 않았다. 마치 동네 산책이라도 나온듯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올해도 시작이군요.”

 좀 더 나이가 들고 키가 큰 남자가 상대적으로 작은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예의 바랐다. 높은 위치의 사람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였다.

 “벌써 열.. 몇 번째지?”

 “열 두 번째입니다.”

 키가 작고 퉁퉁한, 옆에 있는 남자 때문에 더욱 대비되는 모습의 남자는 멋쩍은지 큼큼거리며 그래, 열두번 하며 말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좋은 인재들이 나와야 할 텐데 말이야."

 "네 회장님 날이 춥습니다. 가시죠."

 두 남자는 검은 무리가 가던 방향과 정반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인적이 모두 끊기고 나서야 션과 재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는.. 산 위쪽이잖아. 마을이 아닌데, 뭐가 있는 건가?"

 "모르겠어요. 이 근방은 항시 경계를 서고 있어서 가보지 못했어요."

 "경계?"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교회 문 앞으로 걸어갔다. 따라오라는 듯한 모양새에 션도 그를 따라갔다.

 "지금은 경계가 없거든요. 그리고,"

 재희가 무수한 사람들이 나왔던 교회의 문을 열었다. 어떠한 제약도 없이 스르르 문이 쉽게 열렸다.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요.“

 뭐라 물어보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교회당 안은 중후한데다 생각 외로 넓고 조용했다. 바깥의 바람소리조차 창을 통과하지 못했다. 겉에서 봐서는 약한 건물처럼 보였는데 안으로 들어와보니 그러지 않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중앙에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던 션을 재희가 잡아끌었다.

 예배당 바로 앞에까지 와 재희가 말했다.

 "약, 받은 거 있으시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불명의 약꾸러미. 영양제라고 했지만 당연히 믿지 않았다.

 "드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주머니 안에 있지만 이미 반절 이상 없었다. 다행이네요, 절대 드시지 마세요. 재희가 당부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약이 이것뿐이냐고 물어보면 말해야 했으나 나름 기밀사항인지라 그래도 되는가 고민하던 찰나였다.

 “지금 가야해요.”

 “뭐? 잠깐, 나 아직 네 말을 못 따라가겠는데..어딜 가라는거야?”

 예배당 단장을 재희가 밀기 시작했다. 둔탁한 나무가 밀리는 소리가 나자 션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거들었다. 밀린 자리에 카펫을 벗겨내자 그 아래 작은 손잡이가 있었다. 재희가 잡고 열자 어둠 아래 사다리가 보였다. 보라는 듯 그녀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션은 조심스레 그 자리로 다가섰다. 얼굴을 가까이대자 지하 특유의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고개를 늘이 빼고 보니 사다리 아래로 긴 통로가, 그 너머에는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길고 긴 계단이 보였다.

 “밖으로 연결되는 길이예요.”

 “밖..?”

 “아마, 바로 도시로 연결될 거예요. 이 산은 그런 용도로 쓰고 있어요.”

 그제야 션은 '가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차가운 바람보다 뒤에서 떠미는 말이 더 냉랭하게 느껴졌다. 재희는 션을 걱정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가까이 오려하지 않으면서도 시종일관 여기는 '위험'하다고, 당신은 '안전'한 곳으로 가라고 경고했다.

 재희가 출구를 알아낸 경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션은 그저 서운했다.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재희가 그의 시선을 피하기 전 션이 입을 열었다.

 "난 못 가. 아니, 안 가."

 재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션의 눈썹이 올라갔다.

 "도련님,"

 "내가 왜 네 도련님이지?"

 "...네?"

 "그리고 왜 내가 내 발로 여기를 떠나야하지? 재희 네가 뭔데."

 갑자기 다그치자 재희는 입을 다물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짧은 침묵 후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주제 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전.."

 막상 그녀가 자신을 한껏 낮추며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속이 쓰렸다. 그러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션이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젠장. 저도 모르게 목 끝까지 차오른 욕지기가 반쯤 새어나왔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재희가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션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그 옛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조금 거친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낯선 사람 보듯 놀란 얼굴이라니.

 "히."

 단지 옛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그녀의 모습은 아주 예전으로 돌아간다. 션은 그것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내게도 이유가 있어. 넌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션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누구에게 설명해본 적 없는 이야기라 간단히 말하려는데도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는 어떤 조직에 속해있어. 나름 범세계적이고 규모도 커. 날 치료하던 박사님 양자로 들아갔고 당연하게 그곳으로 갔어."

 "치료..?"

 "그러면 내가 그냥 아무렇지 않았을 줄 알았어?"

 말에 날이 섰다. 힘들었다고, 투정부리고 싶지 않았다.

 기억 속 히는 이상하게 션이 어른이 되어갈수록 그보다 더 큰 어른이 되었다. 그것이 싫었다. 다시 만난 재희는 여전했다. 위험으로부터 션을 지키는 게 의무라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고용인도 친구도 아니었다. 재희는, 재희는....

 "난 그 세상에서 강제로 끄집어내졌어. 이유도 몰랐다고."

 션이 말했다.

 "그 마을에서 나온 어른, 아이 대부분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어.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허다했어. 갑자기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주입시키고 세상이 자본주의기반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미 4차산업혁명이 끝나 기술이 인간 생활 속 깊이 박혀있는 상황을, 어떻게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그게 당연하니까? 나한텐 당연한게 아니었다고. 에녹이 아니라 션 필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 이름에 걸맞는 바깥사람이 되었어. 항상 어딘가 갇힌 기분이었어. 히 너도 그러지 않았어? 바깥이 힘들지 않았어?!"

 그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동조. 알아주길 바랐으면서도 션은 다시 울고 싶어졌다.

 “나도 이곳에 있어야해. 여긴 끔찍하리만치 예전과 비슷한 환경이야. 우스운 게 뭔지 알아? 난 그게 싫지 않아. 향수마저 느낀다고. 하지만 나는 이런 곳을 없애고 원래대로 돌려야해. 그게 내가 맡은 바야. 우리의 세상을 파괴한 조직이 있어. 내 아버지가 그저 이용당했다고만 말하지는 않을게. 하지만 그런 감정을 조종하는 배후가 있다는 건 옳지 않다는데 동의해. 아버지는 힘없는 광신도였어. 귀족이라는 어설픈 시도와 허무맹랑한 꿈의 장소를 만들 수 있게 해준 건 그들이야. 애시당초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우리는 좀 더 평범하게 살았을지도 몰라.”

 그런 걸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저 평화로운 시골이나 도시, 그 어디든 상관없었다. 현대에 머물러있고, 지위란 없으며 같은 입장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학교를 가고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일생을 공유할 수 있었더라면.

 가정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그만큼 달콤하다. 션은 눈에 어른거리는 상황을 애써 몰아냈다. 히와 보냈던 시간, 그 세상은 거짓이 아니었고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가끔, 미치도록 이상한 꿈을 꾼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나를 밀어내지마.”

 그녀는 잠시 소리를 죽인 채 서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션은 자신이 해야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 재희가 션을 밀어낸다면, 임무고 뭐고 그는 히에 의해 이 마을을 나서는 최초의 배신자, 에녹이 될 터였다.

 “미안해요.”

 이윽고 그녀가 숨을 골랐다. 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바란 것도 그거예요. 목적이 같다면 저희는 같이 있어야겠죠.”

 션이 눈을 떴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재희의 얼굴은 어딘지 부드러웠다. 그녀가 통로라던 바닥의 손잡이를 닫으며 처음으로 그를 불렀다.

 “..션”

 

 

 

 재희는 눈사람을 만든 적이 있었다.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눈사람 만들어줘."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며 아침부터 자랑을 하던 도련님이 말했다. 그는 자신이 대단한 발견을 한 것마냥 잔뜩 들뜬 채였다. 의기양양한 모습은 아이 특유의 허세가 가득했지만 재희는 왜인지 그런 모습이 고깝지 않았다.

 눈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다면서? 언제나처럼 보면 약해지는 푸르고 시린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 눈에는 이길 수 없었다.

 도련님은 눈으로 만든 사람이 정말 궁금한 모양이었다.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드는거라고, 누군가 말했겠지. 누구일까. 재희는 멍하니 생각해보다 다시 잔뜩 기대하는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난감해졌다. 하지만 자신도 눈사람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도련님의 얼굴이 방금보다 환해졌다. 재희는 일단 그것만 눈에 아로새겼다.

  그녀에겐 장갑이 없었다. 막상 눈을 만지려고 보니 그랬다. 도련님과 함께 나왔을 때 여전히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커다랗고 따뜻한 목도리와 장갑을 하고 두툼한 코트까지 입은채 재희 앞에 서 있었다. 재희도 코트 비슷한 외투를 걸치고 있었지만 길이는 짧은데다 두께는 얇은 솜을 저민 것뿐이라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목도리도, 장갑도 없었다. 단련돼서 춥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따뜻한 것도 아니었다. 재희는 잠시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재희가 만들어줄 눈사람을 기대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대기 위로 흩어졌다.

 재희는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손끝을 도련님 몰래 꼭꼭 눌렀다. 그녀가 쭈그려앉자 그도 따라 앉았다.

 일단 바닥에 소복이 쌓여있는 눈뭉치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묵직함없이 손 안에서 뭉그러졌다. 재희는 당황해서 제 손바닥을 보았다. 얼음처럼 굳어진 자그마한 뭉치는 이내 녹아내렸다.

 "뭐야?"

 도련님이 말했다. 뒷말이 나오기 전에 재희가 얼른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녀는 팔을 벌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눈을 커다랗게 잡아끌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나마 그럴듯한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처음엔 몸통보다 머리가 커서 굴러떨어졌고 두 번째는 모양이 생각보다 동그랗지 못해서 실패했다.

 재희는 도련님이 눈사람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겨우 모양새는 갖췄지만 빈말로도 잘 만들었다고 하긴 어려웠다. 숫자 8을 닮은 외관이나마 칭찬해줄만 했다. 게다가,

 "추워보이네요."

 "어? 그런거야?"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가 재희를 쳐다봤다. 아. 재희는 눈사람을 만드느라 감각이 사라져버린 손이 갑자기 지나치게 춥게 느껴졌다.

 도련님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일곱 살 때 그녀는 추위와 배고픔을 알고 있었다. 삶의 안락함보다 불편함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저와 도련님이 같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 눈사람은 목도리도 없고 장갑도 없는데. 심지어 눈코입도 없는데. 추워보이지 않는 걸까? 재희는 대답대신 질문을 바꿨다.

 "그냥 하얗기만 하니 심심해보이지 않나요?"

 "아 그러네."

 도련님은 새로운 난제에 빠졌다. 밋밋한 눈사람을 따라 빙글빙글 돌더니 저보다 별로 작지 않은 눈사람에 눈높이까지 맞추며 골몰했다. 재희는 제 발 아래 걸리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서 그의 곁으로 갔다.

 "이렇게요."

 큰 눈덩이 왼쪽에 돌을 꽂아넣었다. 도련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뭔데?"

 "심장이요."

 어쩐지 눈코입 팔다리 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었다. 사람의 심장은 가슴 왼쪽에 있고 끝없이 뛰고 있다고, 로자 아줌마가 말해줬다. 재희가 처음으로 알게 된 의학지식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녀는 그 사실이 신기해 몇 번이고 외워둔 터였다.

 "심장..?"

 도련님은 눈사람과 자신의 가슴을 번갈아 봤다. 물론 돌은 심장처럼 기능하지 않았다. 눈사람은 결국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심장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눈사람이 아닌 재희를 바라보는 도련님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저도 모르는 죄책감에 뭔가 변명을 하려던 찰나였다.

 "눈사람도 사람이구나."

 "...."

 "그러면 추울지도 모르겠어."

 씨익 웃는 그의 미소는 하얀 입김과 함께 퍼져나갔다. 재희는 순간 엉엉 울고 싶었으나 목 안쪽에서 그 마음을 숨기고 또 숨겼다.

  재희가 만든 첫 번째 눈사람은 결국 하얀 눈두덩이 두개에 자그마한 돌심장을 가진 채로 녹아 사라졌다. 도련님은 그걸 로도 충분하다고 했고, 이내 금세 눈사람 따위는 잊어버렸다. 재희는 가끔 그 눈사람을 생각했다. 바닥에 녹아내린 눈위로 돌덩이가 쿵쿵 맥박을 치며 뛰는 상상을 했다. 여전히 그녀에겐 장갑도 목도리도 없었지만 그 저택을 나오기까지 매년 혼자 자그마한 눈사람을 만들어두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만 기억되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차가운 눈도, 더운 바람도, 대지를 적시는 비도 있었다. 그 공간엔 모든 계절과 삶과 웃음이 있었다. 철저히 자신을 숨긴채로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그곳은 재희의 전부였다.

 전혀 다른 얼굴과 표정을 한 채, 힘들지 않았냐고 묻는 도련님이 있었다. 장갑을 끼워주고 목도리를 둘러주며 언제나 살피던 이였다. 그의 기분은 재희에게 중요했지만 그렇게 세밀히 타인의 감정을 살피는 자신이 싫었던 적은 없었다. 세월이 지났지만 오히려 익숙함마저 들었다.

 하지만 헤지고 마모된 그의 날카로움은 그녀를 놀라게 했다. 한편으로 항상 이렇게 제대로 마주하고 싶었다고 깨달았다.

  안락함보다 길었던 그의 꽁꽁 언 시간을 받아들여야 했다. 인정하기 싫었던 거친 시간과 힘듦을 인정해야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성장하고 깎여 여기까지 온 그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했다.

 션.

 입 안에 굴리는 발음은 부드럽게 이어지다 아쉬울 때 끝났다. 그 울림에 션이 그린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제 이게 그의 이름이구나. 내가 재희이듯. 그리고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있구나.

 재희는 아홉 살 그 겨울날 눈사람 앞에서처럼 엉엉 울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잘 참아냈다.

 

 

 열시까지 온다던 션이 오지 않았다. 벌써 열한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럴 때는 휴대전화 하나 없는 이 공간이 답답하기만 하다. 없을 땐 살아도 있다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법이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며칠을 집안에서 컴퓨터만 해야지... 주원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만큼 기계적으로 시계와 창밖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입원 후 질리도록 본 제한적 시야는 하품이 나오는 그 순간마저 지루할 정도였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걸까? 고민하던 그는 크게 하품을 하고 다시 누웠다. 괜찮겠지.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여 주원의 생각도 늘어졌다. 이러다 잠들지도 모르겠다.

 그때 병실문이 벌컥 열렸다. 션은 저렇게 불쑥 들어오지 않는다. 주원은 눈을 감은채로 가만히 있으려다 슬그머니 눈을 떴다. 어느새 제 앞까지 온 레시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몸은 좀 어때?”

 “...그냥. 너 보니까 좀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작가의 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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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3부 그 너머 (5) 2022 / 1 / 31 196 0 10914   
17 3부 그 너머 (4) 2022 / 1 / 31 188 0 10559   
16 3부 그 너머 (3) 2022 / 1 / 31 208 0 10125   
15 3부 그 너머 (2) 2022 / 1 / 31 196 0 10178   
14 3부 그 너머 (1) 2022 / 1 / 31 207 0 10175   
13 2부 벽 (10) 2022 / 1 / 31 195 0 10322   
12 2부 벽 (9) 2022 / 1 / 31 197 0 10317   
11 2부 벽 (8) 2022 / 1 / 31 186 0 10111   
10 2부 벽 (7) 2022 / 1 / 31 196 0 10458   
9 2부 벽 (6) 2022 / 1 / 31 193 0 10693   
8 2부 벽 (5) 2022 / 1 / 31 186 0 12268   
7 2부 벽 (4) 2022 / 1 / 31 204 0 10256   
6 2부 벽 (3) 2022 / 1 / 31 185 0 11424   
5 2부 벽 (2) 2022 / 1 / 31 202 0 12252   
4 2부 벽 (1) 2022 / 1 / 31 188 0 10516   
3 1부 세상 (3) 2022 / 1 / 16 192 0 14658   
2 1부 세상 (2) 2022 / 1 / 16 197 0 11896   
1 1부 세상 (1) 2022 / 1 / 16 333 0 1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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