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포로
그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에 잠기더니, 혼잣말을 하듯 말을 이었다.
“내가 동양에 가서 돈키호테의 모험을 계속해서 쓰게 된다면, 지금 쓰고 있는 [돈키호테] 속편의 마지막 부분에 돈키호테가 죽을 것인지, 아니면 살 것인지에 대해서 더욱 고민해야겠군.
아차, 나는 작가가 아니니까 내가 할 고민은 아니지. 그것은 돈키호테가 결정할 일이고, 그의 운명이기도 하겠군. 그의 미래에 대해선 이미 또 다른 자료가 나와 있을 수도 있으니, 나는 자료나 더 찾아봐야 할 일이겠군. 하하하. 미안하오, 나 혼자 하는 소리니까. 하하하.”
석희는 세르반테스의 얼굴이 가장 환하게 변했다고 생각했다.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살아있음을 강하게 느낀다는 그의 말이 실감났다.
“네, 저희들은 작년 말 마드리드에 도착했고, 금년 2월에야 우리를 파견한 마사무네가 보낸 편지를 펠리뻬 전하께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쓰네나가의 세례식까지 마무리 되었으니, 수도원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그리고 저희들의 방문에 대한 교황청의 승인이 나오는 즉시 로마를 향해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이스 신부와 쓰네나가가 수도원 측과 논의하는 말을 들었는데, 일정은 마드리드를 출발, 알깔라 데 에나레스, 사라고사, 레이다를 지나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후, 거기서는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할 것 같습니다.”
“알깔라 데 에나레스는 내 고향이고, 사라고사나 레이다 모두 내가 직접 다녀왔던 곳이오.
바르셀로나? 거긴 마드리드나 바야돌리드 사람들과는 기질이 다르지. 뭐라할까, 오래 전부터 이태리를 비롯해 프랑스 남부지역과 교역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좀 더 깨어있고, 세련되었다고나 할까?
지금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그 중심이 세비야로 바뀌었지만, 바르셀로나는 오랫동안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소.
서북쪽의 바스크지역이 그렇지만,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기 때문에, 스페인의 중부나 남부 사람들에 비해, 분명히 다른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오.
아울러, 나에게는 특별한 인연이 있소. 내가 1571년 10월 7일 역사적인 전투로 유명한 레판토 해전에서 이기고, 이어 1572년 아프리카 튀니지에서의 전투도 승리로 이끈 후, 스페인으로 돌아오고 있었지.
그런데, 그만 바르셀로나 해안에 당도하기 바로 전, 터키 해적들에게 붙잡혔소. 나는 동생 로드리고와 함께 북부아프리카의 알제리로 옮겨졌고, 낯선 곳에서 호되게 옥살이를 했지. 그러니까 1575년이었는데, 감옥살이라기보다는 사실 인질이었지.
사실 나는 그리스의 레판토에 진출하면서, 전설같은 트로이 전쟁의 현장과 콘스탄티노플에까지 가고 싶었지만, 그곳은 이미 이슬람 세계에 넘어간 상태였기에 발길을 레판토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소. 게다가 전투 중에 상해를 입게 되니, 모험보다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일이 더 급해졌소.
그런데 더 불운은, 내가 다친 몸으로 스페인에 가서도 직장을 얻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추천서를 받았다는 것이오. 목숨까지 건 전투에서 왼손까지 크게 다치다 보니, 이왕이면 가장 영향력이 센 분들의 추천서는 받아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말이오.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와 세스 공작 두 분께 부탁하여 추천서를 받고 큰 기대를 안고 스페인을 향했던 것이었는데, 결국 내 몸에서 추천서가 발견되는 바람에, 내 몸값이 너무 커졌소.
해적들은 나를 돈이 될 만한 대단한 사람이라고 오해했는데, 그들이 요구한 막대한 돈을 우리 집안에서는 도저히 해결하지 못할 것이었기에, 난 네 차례의 탈출을 시도했고, 모두 수포로 돌아갔소.
1575년 첫 번째 탈출에서는 동생 로드리고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해야 했소. 결국,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삼위일체 수도회의 도움으로 풀려났고, 1580년에야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소. 스페인을 떠난 지 십일 년 만에 구사인생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오.”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다 타고난 운명 아니겠소. 고생은 했지만, 그 덕분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웠소. 그리고 그것들은 내가 책을 쓰는 데 밑거름이 되고 있으니, 오히려 지금은 고마워하고 있소. 그대를 만난 것도, 다 그런 끈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소?
소설에도, 희곡에도 이렇게 불운으로 점철된 나의 경험들을 넣었으니, 나의 작품들은 나의 뼈와 살로 쓴 셈이지.”
“그렇게 위안하신다면 다행입니다. 많은 독서와 경험이, 작품의 내용을 더욱 다양하고, 흥미롭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한편, 내가 가장 최근에 다녀온 곳이 바르셀로나였소. [돈키호테] 속편의 맨 마지막 결투는 돈키호테가 바르셀로나의 해변에서 산손 까라스꼬와 벌인 것이오.
끊임없이 생명의 불을 지피며 모험을 해야했던 돈키호테는 결국, 기사 간의 결투에서 패배하고, 약속했던 대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소.
모르지, 그 전투에서 이겼다면, 바르셀로나에서 더 멀리 이태리로 건너가 더 많은 모험을 했을 지…. 그리고 거기서 다시 그리스로, 그리고 동쪽으로 계속 전진했을 지도….
하여튼, 기사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이제 마지막이라는 뜻이오. 모험이 끝나면 생명도 끝나는 거니까.
난 이 번 속편을 끝으로 돈키호테 이야기를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소. 그렇다면 돈키호테는 여기서 생을 마감해야하는 것이지.
그래야 이 작품을 모방하는 위작들도 더 이상 안 나올 것이란 생각 때문이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돈키호테가 모험을 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이오.
나는 나이가 들었고, 돈키호테도 나이가 들었소. 집으로 돌아온 돈키호테는 이제 침대 위에 누울 수밖에 없고, 그런 상태에서는 둘씨네아, 즉 기사들의 여인 앙헬리까도 잊혀져야 하는 것이오. 결국 세상의 여인을 잊고, 성모 마리아 곁으로 가는 것 말이오.
말 위의 젊은 기사들에게는 성모 마리아를 위해 싸우라는 말보다는 ‘그대의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 싸우라는 게 더 맞지만,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침대에까지 그 여인을 머리에 떠올릴 수는 없잖소?
그렇지만, 오늘 그대를 만나서 동양에 가겠다고 선언한 이상, 돈키호테의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을 쓸 때 정하겠소.”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의 말을 하는 세르반테스의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석희는 그가 말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고, 단지 작가의 문학적 회고 정도로 만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