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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귀향 (세르반테스를 만난 조선인)
작가 : 윤준식 YOON
작품등록일 : 2022.1.23

[연재를 시작하며] (연재는 1-44장까지 이어집니다.)

‘제 책이 빨리 출판되기를 원하는 사람 중에는 중국의 황제가 계십니다. 한 달 전쯤 일입니다. 황제께서는 친히 중국어로 편지를 쓴 후, 사신을 보내 저의 [돈키호테]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황제께서는 학교를 세워 스페인어를 가르치겠다고 하셨으며, [돈키호테]를 교과서로 쓰겠다는 것과 제가 그 학교의 학장이 되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돈키호테] II, ‘레모스 백작님께 올리는 헌사’ 중)

한 사람의 ​간절한 소망은 수 백년을 뛰어넘는 것일까?

세르반테스의 펜을 움직여 [돈키호테]에 남겨진 한 영혼의 흔적!

400년 넘게 기다려왔고,

너무나 애절했기에 또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한반도 남쪽의 한 마을로 이어진 무지개!

그 허구같은, 그러나 역사적 실체의 다리를 건너본다!

(본 이야기는 [돈키호테]라는 소설 속 한 귀절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작품 [돈키호테]는 물론, 당시 세계를 누볐던 스페인의 역사와 동시대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조선, 중국, 일본, 필리핀, 마카오) 등의 역사를 통합할 수 있는 문학과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내용을 구성하게 된다. 15년 간의 자료 수집을 통해 내놓는 역사 이야기이자 소설로, 몇 가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히며, 특히 임진왜란 이후 전개된 1600년대 초 스페인과 조선 간의 관계를 이어줄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다.)

 
12. 배 (Barco San Juan Bautista)
작성일 : 22-01-23 20:22     조회 : 192     추천 : 0     분량 : 7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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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배

 

  “일본으로 온 지 거의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제 나이도 서른 살에 가까워졌습니다. 예수회에 들어가자마자 저와 성빈 형은 매우 바빴습니다. 선교사들의 활동에는 늘 저희들이 동행했습니다.

 

 초기인 1596년 한 해 만 해도, 천삼백 여명의 동포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포교에 전념했습니다.

 

 저희들은 조선을 출발하기 전 세례를 받았고, 예수회 학교에서 모든 교육과정을 수료하면서, 정식 예수회 전도사, 여기서 말하는 까떼끼스따로 서임을 받았습니다.

 

 한편, 그 사이 일본의 정세도 크게 변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조선에 있던 일본군은 세력을 잃고 패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그 분이 고안한 거북선이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용의 머리에서 불을 뿜는 전투선 말입니다.”

 

 “아, 결국 거북선이 큰 역할을 했다는 말이군. 모양도, 작동하는 원리도, 참으로 내가 배우고 경험하고 싶은 그런 배임에 틀림없소. 전투 경험이 있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더 그렇소.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든다는 것은, 그 만큼의 절박함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석희는 말을 이어갔다.

 

 “일본 내 권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넘어갔는데,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일본은 불교를 믿지만, 모든 사물에는 신이 있다고 하는 전통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조상도 신이 되며, 나무도 신이고, 우물도 신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유일신을 수용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거기에 기독교가 조선인들 사이에 갑자기 퍼지게 되니, 그것이 세력화될 것이란 두려움도 탄압의 큰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일본에 끌려간 많은 사람들은 주로 교토와 오사카로 옮겨가기도 했고, 청소년들은 일본인들에게 팔리기도 했지만, 서양인들에게 팔려, 마카오, 필리핀, 그리고 인도로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여기 유럽까지 온 사람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편, 박해가 심해지자 서양선교사들도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서양인들에 대해 그래도 관대했었는데 말입니다. 그런 중에도 저희들은 예수회의 보호를 받으며 이십 년 동안 사제들로부터 기독교와 서양 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조선인 및 일본인 포교에도 열심히 임했습니다.

 

 저희들에게는 늘 스페인과 포르투갈 신부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포르투갈 출신 프란시스꼬 빠체꼬 신부와 스페인의 루이스 신부도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1611년에는 저희들을 일본으로 데려온 그레고리오 신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베 마리아!” 세르반테스는 갑자기 성호를 긋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레고리오 신부는 역시 대단한 분이군. 그 먼 타국에 가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그 땅에서 세상을 떠나셨다니, 나 같은 사람은 그분과 비할 게 아니군. 나도 멀리 모험은 떠났지만, 이렇게 스페인으로 돌아와 현실적 안락을 추구하고 있으니 말이오. 비록 이렇게 누추하게 살고 있지만….

 

 기독교인으로서도 내가 부끄럽고, 모험가로서도 내가 훨씬 못 미치는구려. 그건 그렇고, 루이스 신부라고 여러 번 말하는데, 그분이 바로 지난 번 왕궁에서 봤던 그분인가요? 그러니까 그대들을 이곳까지 안내한 스페인 사제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어느 날, 루이스 신부는 저에게 배를 만들 것이니, 조선인들을 모집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제작 장소는 도쿄에서도 북쪽으로 한참을 가야 있는 센다이라고 했습니다.

 

 배를 짓겠다고 하는 분은 기독교 신자인 다테 마사무네라고 그 지역의 다이묘, 즉 영주라고 했습니다. 그곳은 제가 있던 나가사키에서 거리가 상당히 멀었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자 중에서도 가장 신뢰할 수 있고, 거기에 재력까지 탄탄한 사람을 루이스 신부가 선택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사무네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진 상황에서도, 루이스 신부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를 구해줄 만큼, 세력도, 재력도, 그리고 신앙심도 검증된 사람이었습니다.

 

 루이스 신부는 배를 만드는 일에 이왕이면 기독교 신자를 쓰면 좋겠다는 조건을 달아 주었습니다. 저는 신부와 상의해서, 여러 가지 정황 상, 조선인을 쓰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고, 루이스 신부도 조선인이 기술도 좋고, 일본인들과의 접촉 가능성이 없어, 보안유지 등을 위해 좋을 것 같다고 승인해줬습니다.

 

 통역을 하는 과정에서 먼저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배를 만드는 목적은 그 휘하의 사람들을 먼 나라로 파견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대규모 사절단을 스페인과 이태리에 보내기 위한 것인데, 태평양을 횡단할 만한 배를 만드는 일이 일차적인 목표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기술로는 태평양을 건너는 배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만, 서양의 배들은 필리핀과 아메리카를 오가는 능력을 갖췄기에, 마사무네는 그 기술을 루이스 신부를 통해 입수했던 것입니다. 아니, 루이스 신부가 그 기술을 갖고, 마사무네를 찾아가 설득했다는 것이 맞을 겁니다.

 

 마사무네가 배를 만들어 사절단을 서양으로 보내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것이었고, 또 하나는 상업적인 것이었습니다.

 

 우선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금지되는 것을 넘어, 이제는 박해의 차원으로 긴박해지고 있어, 이 상황을 로마의 교황에게 알리고, 교황청으로부터의 특별한 지원, 즉 일본에 교황청의 사절단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아울러, 상업적으로는 멕시코와 필리핀 간의 은 교역 독점권을 완화해, 일본이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스페인 국왕에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명나라, 아니 귀하께서 알고 있는 중국에서 은에 대한 수요가 크다 보니, 중개무역으로도 막대한 수익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유럽의 상인들이 아메리카에서 생산된 은을 멕시코에서 모아 필리핀으로 가져오고, 그것을 마카오에서 거래하였습니다.

 

 이에, 기존에 명나라에 수출하던 일본은 가격 경쟁력을 잃고 말았으니,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은을 일본이 독점적으로 거래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금광이니 은광이니 하는 광산개발과 그것을 세공하는 데에 있어서, 스페인 사람들의 기술이 월등했기에,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데려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그 권리를 갖게 된다는 것은, 세력을 키우고자 했던 마나무네에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세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기독교 신자 중에서는 일본 내 가장 세력가였던 마사무네와 루이스 신부 간의 이해가 결합되어, 배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석희는 사제들과 선교사업을 하면서, 예수회를 창시한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라는 스페인 신부의 오른 팔로 알려진 프란시스꼬 하비에르 신부가 처음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신진 세력가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기득권자들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초기 기독교의 선교를 승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기독교 신자의 수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위협을 느껴, 자신들 사이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한다.

 

 즉, 자신들의 입지를 높이겠다는 뜻은 좋으나, 나라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세력이 커지자 나라가 종교적으로 나눠지는 것은 통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히데요시는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기독교인 26명을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프란시스꼬회 신부 5명과 예수회 일본인 3명 등을 포함해서 19명이 더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예수회 일본인은 교토의 오와리 출신 레온 카라수마루, 빠블로 이바라기, 그리고 루이스 이바라기라고 했다.

 

 빠블로와 레온은 형제였으며, 루이스는 이들의 조카로, 모두 조선인이라고 했다.

 

 오와리가 와리, 즉 기와를 만드는 마을이라는 뜻이라면, 더욱 더 이들의 출신이 어떤 곳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는 교토에서 체포한 기독교인들을 나가사키까지 이동시켜 조선인 4천명이 운집한 가운데 처형을 했고, 당시 일본 땅에 온 지 몇 년 만에, 석희도 그 자리에서 그 장면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스페인 출신으로 프란시스꼬회 소속 루이스 신부는 1612년 일본의 상황을 알리는 사절단을 구성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결국 마사무네를 찾아가 은밀히 사절단을 꾸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절단을 구성한다는 것은 일본 내 기독교인들의 생사를 담보하는 중요한 임무였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인들의 안위와도 크게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소.

 

 우선 나도 아메리카에서 은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특히, 포토시 지역에서 엄청 큰 광산이 개발되어 그 동안 수 많은 벼락부자가 나왔고, 지금도 그 꿈을 찾아, 스페인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소.

 

 나 역시, 그곳에 가고 싶었기에, 세비야에 있는 식민지관리 위원회에 편지를 써, 라 파스 지역의 시장으로 날 보내달라고도 요청했지만, 거절되고 말았소.

 

 내가 아메리카에 가고 싶었던 이유 중 우선은,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이렇게 혼란한 세상에, 그곳에 가서 내가 꿈꾸던 이상사회, 즉 유토피아를 세우고 싶었기 때문이오.

 

 결국 나는 이루지 못한 꿈을 작품 속에 그려놓기로 했고, 평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사회를 산초가 바라따리아 섬을 통치하는 모습에 담았기도 했소. 그것은 이 번에 낼 작품 안에 고스란히 들어갈 것이오.

 

 그리고, 프란시스꼬 신부가 멕시코를 넘어 동양, 말하자면 태평양 연안으로 선교의 영역을 넓혔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은 바 있소. 선교를 하게 되면, 그곳의 사제들이 보고서를 보내는데, 로마는 물론, 스페인, 포르투갈 등 자신을 파견한 종파의 본부에 그 보고서를 보내게 되어 있기 때문이오.

 

 말했듯이 나는 오랫동안 무명으로 지내다가, [돈키호테] 하나로, 말석이나마 왕궁에 초대되는 유명인사가 되었소. 따라서, 이곳 마드리드에서 만나는 귀족들과 고위 종교인들을 통해서, 그리고 내 고향 알깔라 대학이나 살라망까 대학을 통해, 이런 저런 소식은 접하고 있소.

 

 그런데, 기독교가 일본에서 그렇게 빨리 전파되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정치적 위협이 되어, 권력자들의 억압에 의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오.

 

 태평양은 그 말대로 아무리 평화로운 바다라고 해도, 센 풍랑이 없지 않을 텐데, 그 큰 대양을 건널 만한 큰 배가 계획했던 대로 무사히 건조되었소?”

 

 “모든 지휘는 루이스 신부가 했습니다. 신부께서는 선박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스페인 범선은 이미 멕시코의 아까뿔꼬에서 마닐라를 오가고 있었기에, 스페인의 갈레온 선의 성능은 익히 입증되었습니다.

 

 선박 건조라는 게 첨단의 기술이 필요했기에 그에 맞는 설계와 건조 기술자도 필요했습니다. 마침 영국 사람으로 이에야스의 지시로 이미 120톤 급 선박을 만들어 태평양을 건너게 한 적이 있는 영국인 윌리암 아담스가 제작에 참여하였습니다.

 

 한편,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중에는 조선 기술자들과 목수들도 꽤 많았기 때문에, 저는 배를 짓는 기술을 가진 조선인이면서 기독교 신자를 중심으로 사람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센다이에서 만드는 배가 태평양을 건너게 될 것임을 알았고, 유럽에 갈 계획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기에, 더욱 작업에 열중했습니다. 말하자면, 그 기회에 일본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기대감과 그로 인해 어쩌면 조선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자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첨단 기술이 가미된 거대한 배를 만들게 되었는데, 어려운 작업에도 불구하고, 단 45일 만에 마쳤습니다. 목수가 삼천 명, 건축 기술자가 팔백 명, 철가공 기술자가 칠백 명이나 동원된 큰 작업이었습니다. 배는 길이가 55미터, 무게는 500톤에 달했습니다.

 

 배의 이름은 루이스 신부의 제안에 따라 산 후안 바우띠스따로 명명했습니다. 물론 루이스 신부는 마사무네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마사무네 마루라는 이름을 동시에 부여했습니다.”

 

 “지금 유럽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기밀은 배 만드는 것이오. 내가 참전했던 레판토 전투에서 우리가 그 강대했던 투르크 함대를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전략과 전술도 중요했지만 바로 선박 기술의 차이였다고 보고 있소.

 

 말하자면, 우리의 선박건조 기술은 날로 발전한 반면에, 상대편은 과거의 기술에 그대로 의존했던 것이오. 상대는 과거의 기술로도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고 스스로 강대국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더 이상 기술 개발을 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약자였던 우리는 그들을 이기기 위해 지속적으로 변화를 꾀했던 결과였소.

 

 아, 그러고 보니, 거북선이라는 배가 서양에 도입된다면 어떤 모습이 될지 참으로 궁금하군. 대양을 넘나드는 거대한 군함은 아니더라도, 어쩌면 지역 전투에서 지금 스페인에 꼭 필요한 신형 전투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 미안하오. 내가 그대의 말을 막았군. 그래서 어떻게 됐소?”

 

 “네, 배가 만들어지면서 배를 탈 사람들에 대한 선발도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루이스 신부와 마사무네 간에 은밀히 맞춘 첫 번째 조건은, 역시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에 이러 저러한 이유로 오게 된 서양의 사제들 중에서 선교를 위해 아메리카로 돌아가야 했지만, 배가 없어 못 간 사람들이 우선 순위로 뽑혔습니다. 사십 여명의 스페인, 포르투갈 신부들은 루이스 신부가 선발했고, 스물 두 명의 사무라이는 마사무네가 선발했습니다.

 

 일행 중에는 귀족과 상인, 광산업자들도 있었는데, 선박을 건조하면서 이미 큰 자금을 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멕시코에서 채굴한 은을 일본에서도 취급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특히 발전한 멕시코의 은 채굴 기술을 일본으로 들여올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직접 자신들이 시종들을 데리고 타는 경우와 수하의 부하를 대신 보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선박 운영은 1609년 산 프란시스꼬 호가 일본에 난파했을 때, 배에 타고있던 기술자들이 했으며, 이미 태평양을 건너 본 스페인사람 세바스띠안 비스까이노가 선박 운항의 총책임을 맡았습니다.

 

 긴 여정에 음식을 준비하고, 선박 내의 잡일을 할 사람들도 필요했습니다. 일행의 잡일들을 담당할 사람들은 제가 루이스 신부와 상의하여, 조선인들 중에서 선발했습니다.

 

 저는 일부러 15살에서 20살 전후의 조선인 젊은이들을 모았습니다. 저보다는 10살에서 15살 차이가 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부모들이 일본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가정에서의 교육이나 외부의 교육을 받을 겨를도 없이, 오직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 삶 속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들고, 노동 착취도 당했습니다. 노예로 팔려나가는 경우도 여전했습니다. 특히, 고아의 신세에 있는 어린이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예수회 성당에 오는 조선인 고아들을 중심으로 동행할 사람들을 선발했습니다.

 

 특히, 선박을 짓는 일에 선발된 조선인 기술자들 중에 자신의 자식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일본에 정착하고 있지만, 자식들만은 일본을 벗어날 수 있고, 조선에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선인들이 만난 서양 사람들은 매우 합리적이었고, 그들이 말하는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 멕시코 등은 대단한 나라였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 특히 기독교 조선인으로 산다는 것은 아예 목숨을 내놓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인정하고 권장하는 나라에 대한 동경도 컸습니다.

 

 일본 땅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유였던 것입니다. 한편, 저도 나름대로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서양에 문을 닫는 사이, 일본은 그들에게 문을 열고, 특히 선진 과학과 무기 등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조선보다 위에 서는 기회를 잡았던 것이고, 조선은 그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을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저를 통해서라도 유럽을 방문하여 시야를 넓히고, 향후 조선으로 돌아가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힘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조선의 재건을 위해 뭔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조선에 가지 못하고,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부모 세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고, 이국에서도 자신 있게 활동하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갖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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